# 13화.
13화
김 이사가 자리를 가리킬 때부터 아니 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을 향해 인사를 해도, 반찬을 보며 고개를 숙여도 돌려도 오직 그 여자 하나만 보였다. 쑥잎으로 모양을 내어 노랗게 지져낸 어전과 가지런히 꼬치를 꿰어 구운 섭산적이 있는 접시를 쥐고 있는 흰 손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푸르게 질려 있었다.
“여기요. 이거 드세요.”
혜정 씨가 서훈의 앞접시에 버섯과 고기, 익힌 야채를 밀전병으로 얌전히 돌돌 말은 구절판을 올렸다.
“와, 나 이거 좋아하는데. 고마워요.”
“또 싸드릴게요.”
혜정이 뺨에 보조개가 패도록 웃는다. 접시를 들어 올리려던 흰 손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영의 얼굴은 표정을 만드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란 애초부터 없는 사람처럼 서훈이 문을 열었을 때도 그녀 맞은편에 앉아 늦은 식사를 시작할 때도 서훈의 앞으로 옮기려던 음식 접시가 간단히 무시당했을 때도 얼어붙은 투명한 호수처럼 고요하였다. 밀전병으로 얌전히 만 구절판 몇 개가 더 앞 접시에 놓였다. 소영은 구절판을 집는 젓가락과 길쭉한 손가락, 남자의 입술과 눈을, 망막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서훈은 이제 혜정에게 그만하라는 손짓을 하며 웃어 보인다. 변치 않은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지만 여전히 밑바닥까지 허물어뜨리는 웃음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불편했는지 서훈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소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소영이 먼저, 서훈이 이어 시선을 떨어뜨렸다. 혜정이 그제야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여기 정소영 씨 처음 보시죠 새로 들어온 어소시에이트예요.”
혜정의 말에 서훈이 고개를 들어 소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굳어버려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입술이 이윽고 열렸다.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에요.”
팔 년의 세월을 건너와 마주하였으니, 이보다 더 적절한 인사가 있을까. 쓴웃음을 짓는 소영의 얼굴을 감정 없는 눈동자가 담고 있다. 손목으로 얼굴 아래로 등줄기로 작은 맥이 파닥거리며 튀어 오른다. 팔 년 전 그날처럼 통각에 가까운 느낌, 아니 선명한 통각이다.
“어, 두 분 아는 사이세요 ”
“서클 선배였어요. 맞죠 ”
서훈은 혜정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건조하게 답하고는 시선을 낮추어 새로 가져온 공깃밥의 놋그릇 뚜껑을 열었다. 손이 데도록 뜨거울 뚜껑을 잡은 채로 서훈은 잠시 흰 쌀밥만 쳐다보는 듯했다. 더 이상 소영과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것처럼.
‘서클 선배였어요. 맞죠 ’
‘맞죠…….’
덧붙인 확인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그 정소영이 맞느냐는 확인이었을까. 서클 선배 그 이상은 아니었다는 확인이었을까.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두 글자가 소영의 마음을 짓누른다.
소영이 술잔을 두어 번 들었다가 놓을 동안, 서훈은 식은 갈비 몇 점과 나물을 김이 나는 밥에 올려가며 맛있게 먹었다. 반 그릇 이상 빠르게 비우더니 물컵을 들어 올리며 소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꼭 이 말을 해야겠다는 투로 서훈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제 입사한 지 두 달 좀 안 되었죠 어떠세요. 연수는 어떠셨어요 홍콩에서 트레이닝 할 때가 조금 귀찮은 과제가 있기는 해도 기분도 체력도 최고였는데.”
소영은 둔기로 한 대 맞은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제가 입사한 거, 알고 있었어요 ”
“그럼요. 유명 인사신데.”
단박에 떨어지는 가벼운 대답이다.
“그래요 영광이네.”
소영이 차가운 웃음을 보냈지만 서훈은 보기 좋도록 싱긋 웃었다.
“예쁘다구요. 미인이라 유명하시던데요. 저기 프로젝트 필드(field)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들리도록.”
농담을 던지는 그의 눈동자에 소영만 볼 수 있는 조롱이 섞여 있다. 톡톡 규칙적으로 관자놀이를 뛰어오르던 맥이 아프도록 크게 울렁였다. 그리웠는데. 뭐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한 질문인데 서훈에게 자신은 그런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어머, 그 말 나 들어왔을 때도 써먹은 말인데요. 윤서훈 씨.”
“그런가요 레퍼토리 바꿀 때가 되었네. 하하.”
혜정과 서훈의 목소리가 뿌옇게 울려 들렸다.
***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소영은 머리를 비스듬히 젖혔다. 길게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 속에 어른거리는 얼굴 하나. 서훈은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찰랑, 손가락에 끼워진 키홀더를 돌려 쥐어버렸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다.
으레 회식의 마무리가 그러하듯 한정식집 앞에서 2차를 간다는 사람들과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소영은 조용히 2차를 가지 않는 사람들에 묻혀들었다.
‘6985 차량이요.’
‘네.’
뒤쪽에서 남자가 성큼 걸어 나가 키를 받아들었다. 남자는 손가락에 작은 봉투 모양의 가죽 키홀더를 습관처럼 걸었다. 어, 그건…… 하고 묻는 소영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서훈은 소영과 눈을 맞춘 채 가벼운 동작으로 키홀더를 돌려 손바닥에 쥐었다.
‘물건은 물건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일까. 어느새 서훈은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셔다 드릴까요 ’
눈이 소영을 향하고 있으니 소영더러 하는 말은 맞는 듯했다.
‘아니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네, 그럼.’
서훈은 고개를 까닥하더니 다른 사람들을 향해 크게 말했다.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어디를 가.’
‘어, 서훈 씨. 빼는 거야 ’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에 두어 번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저 요기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주세요.’
서훈의 차 조수석 앞으로 다가서는 혜정 씨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곧이어 운전석 안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여졌던 등과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달리는 택시 차창 밖으로 너무 밝고 번잡하여 서글픈 도시의 밤이 무심하게 뒤로 뒤로 흘러간다.
***
“정소영 씨, 지금 무슨 일하고 있죠 ”
“싱가폴 오피스 요청 자료 만들고 있습니다.”
“투자 대상 회사건 ”
“네.”
김 이사는 소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만 배정되어 있다면 시간은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확인을 위한 질문을 형식적으로 덧붙인다.
“지금 하는 일은 언제 마무리되나요 ”
“1차 자료는 내일 중으로 넘길 예정이고 추후에 보완 요청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안서 작업 같이하죠. RFP(Request for Proposal, 제안요청서) 메일로 넣을게요. 우선 읽어보고 생각해봐요. 오후 늦게 같이 제안서 작업할 사람들 들어오라 했으니 그때 미팅합시다.”
김 이사는 용건을 마친 듯 랩탑으로 고개를 돌렸다. 군더더기 없는 말, 정확한 표현, 적절한 미소.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라 혹은 쿨해서 멋있다고 표현해야 마땅하겠지만 매끈하게 금속을 절단하는 것 같은 이 바닥 말투는 그리 정이 가지 않는다. 자신의 말투처럼.
소영은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김 이사 방을 나갔다.
조금 느릿느릿 발을 끌자 얇은 힐이 카펫에 스쳤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 소영은 더 느리게 걷는다. 어느 순간 미적거리던 걸음이 아예 멈춰버렸다.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비어 있는 방. 깨끗하게 정리된 서적이 한 칸, 두툼한 파일 홀더가 두 개. 의자 위에 걸쳐둔 얇은 베이지색 카디건. 소영은 멈춰버린 걸음을 이제야 인식하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정확하게 옮기는 걸음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카펫에 발끝이 스치지 않았다.
지난 삼 주 동안 소영이 서훈을 사무실에서 본 건 지난 주 그 방에 앉아 있는 뒷모습까지 포함하여 세 번이었다. 첫 주 목요일 오후, 코너에 자리 잡은 커다란 미팅룸으로 서훈이 서둘러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걸어가는 소영에게 격자무늬 창이 한 번 들여다보라는 듯 빙글거렸다.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들에 그의 음성이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주 화요일, 여럿과 함께 뚝 떨어진 자리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서훈은 오전 시간 잠시 사무실에 들러 회의를 한 후 TED로 가는 일정이었다. 붐비는 식당에서 소영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인사, 예민한 천칭에 달아도 그대로 수평을 유지할 만큼 같은 무게 같은 부피의 인사에 소영도 비슷한 답을 했다. 황태구이 정식은 너무 달고 매웠고, 그리고 조미료로 범벅되어 있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속이 제대로 불편했다. 공기를 불어넣은 듯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위장을 쓸어보다가, 소영은 손을 올려 가슴뼈 중앙을 살짝 문질렀다. 열심히 제 몫을 먹으며 간간이 위트 있는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조미료투성이 황태구이보다 더 지독하게 속을 아프게 했다.
소영이 제자리로 돌아오니 랩탑 윈도 하단에 주황색 동그란 아이콘이 반짝이고 있었다. 클릭하자 새로운 메일함으로 연결되는 신호가 떴다. 한 번 더 암호를 입력하고 김 이사가 보낸 메일을 클릭했다. ‘RFP.’ 세 번의 키보드를 누르는 것으로 제목 작성이 끝난 메일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다.
‘find the attached file. thanks.’(첨부된 파일을 확인하시오.)
기계적으로 첨부된 파일을 열던 소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제안요청서’ 네모 칸으로 둘러진 제목 아래로 날짜, 그리고 명확하게 박혀 있는 회사 이름,
(주)태성자동차
축축한 혀, 거친 손길이 허벅지를 따라 뱀처럼 움직인다. 소영은 힘주어 무릎을 단단히 붙이고 스크롤바를 내렸다. 목차라고 적힌 다음 장에 로마니안 숫자로 매겨진 소제목들을 읽기 시작했다.
I. 프로젝트 추진 배경, II. 제안요청사항, III. 향후 추진 일정.
조금 더 오른쪽으로 밀려나간 자리에 줄을 맞춰 늘어선 구체 소제목들…….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차가운 침대 시트에서 느껴지던 냉기가 등에서 가슴팍을 뚫는다. 소영은 의자를 끌어당겼다. 바퀴 달린 의자는 말을 잘 들어 의도대로 그녀의 등을 안락한 가죽 받침에 기대도록 하였다. 비식, 소영의 입에서 미소가 흘렀다. 그녀는 마치 절도 있게 검을 뽑아들 듯 마우스를 화면 상단으로 옮겨 프린트 버튼을 클릭했다.
이지석은 그날 이후 한 번 더 보았다. 지석이 소영을 찾아온 날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이었다. 소영의 방으로 전화가 왔고 두 번은 그대로 끊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고 두려웠다. 겨우 연결된 통화에서 지석은 당장이라도 집으로 들어올 듯 흥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들어갈까, 아님 나올래.]
“굳이 얼굴 보고 이야기할 것도 없는걸요.”
[좋아, 들어가. 어차피 정 회장님 내외께도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어.]
“잠시만요.”
소영은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아래쪽 큰길에 정원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로 나갈게요.”
카페에 들어서자, 지석은 소영이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이야 ”
“무슨 사실 ”
분노를 억누르는 지석의 얼굴을 마주하자, 소영은 실소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하, 너 정말이지…….”
실소는 지석이 먼저 터뜨렸다.
“왜요, 내기를 걸지 않아 실망이었어요 나머진 비슷했는…….”
순간, 소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지만 지석의 손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소영의 뺨도 어깨라도 갈기지 못한 손이 탁자 위로 내려갔다. 지석은 빈주먹을 꾹 쥔 채 하지만 너무나 말짱한 표정으로 말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게 굴었어. 내 여자로 찍혔으면 찍힌 대로 있어야지.”
지석의 차가운 시선이 소영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딴 우스꽝스런 짓으로 내가 상처받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면 얼굴에 먹칠 한번 해보자고 천만에, 정소영 너만 엉망인 꼴이 되었어. 웃기는 여자애라고 널 껌 씹듯 질겅질겅 한동안 씹다가 쓰레기통에 뱉어버리듯 퉤! 하고는 잊어버려. 그것뿐이라고.”
“그러시죠. 기꺼이 껌 돼드리죠.”
소영은 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똑바로 지석을 쳐다보았다. 수치심과 상처는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맘껏 빈정거렸다.
“어차피 그런 여자도 한둘은 아니겠죠. 그렇게 화려하게들 노시는데 어떻게 겹치는 여자가 없겠어요.”
“입 다물어.”
“하실 말씀 다하셨으면…….”
“입, 다물라고 했어.”
악물린 잇새로 나오는 소리는 너무 무서웠다. 탁자 위에는 여전히 힘을 다해 쥔 주먹을 올린 채로 지석은 숨도 쉬지 않는 듯했다.
“……갈게요.”
소영이 옆 좌석에 두었던 핸드백을 집어 드는 동시에 지석은 입을 열었다.
“앞으론 얌전하게 굴어, 정소영답게.”
“뭐라구요 ”
“상관없어. 결혼, 해. 그날도 그럴 생각이었어. 결혼식은 이번 학기 마치는 대로 올리고 약혼은 학기 시작 전이 좋겠어.”
소영은 깔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누구 맘대로 전 이제 어느 집 며느리 될 생각 없어요. 아, 더 정확하게 표현할게요. 아버지가 절 누구 집 며느리로 줄 생각이 없으세요. 대신 일하라고 하시더군요. YK, 태성만큼 키워봐야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지석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공주 잡아 눈멀게 하면 왕궁이 들어온다구요 미안한데 눈이 다시 떠졌어요. 덕분에 원래 한쪽, 멀어 있던 눈까지 다.”
지석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억지로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와들와들 떨리고 발목은 꺾어질 것만 같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였다. 단지 육체가 아프고 불편해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이후로 지석은 단 한 번도 소영을 찾지 않았다. 지난 팔 년 동안 네 번 정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 사람이 같이 참석할 기회는 있었지만 두 번은 소영이 피했고 도저히 소영이 피할 수 없었던 YK 행사 두 번은 지석이 피했다. 의도적인 회피는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두 번 다 해외 출장이었으니까.
소영은 프린트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성능 좋은 커다란 프린터기가 막 예열을 마치고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SYJ’라는 자신의 이니셜이 박힌 구분지 뒤로 이어나온 여덟 장의 종이들을 한 번에 집었다. 가로로 집어들고 데스크 위로 탁탁 두드리는 그녀의 손동작은 일정했다.
일이니까.
마음을 다잡았다. 네 귀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몇 번이고 맞추어 제일 작은 서류용 집게로 고정한 후에 소영은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의자에 단단히 등을 기대고 앉아 찬찬히 제안요청서의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어 번 커피를 마시러,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들락거리면서 겨우 읽기를 마쳤다.
‘꽤 큰 프로젝트겠어.’
소영은 제안요청서를 한 편에 밀쳐두고 싱가포르 오피스 요청건에 몰두했다.
두어 시간쯤 지난 후, 소영의 데스크 전화벨이 울렸다.
“정소영 씨, 다섯 시 삼십 분 1710 미팅룸에서 봅시다.”
김 이사였다. 수화기를 내리고 시계를 확인한다. 다섯 시 십 분. 소영은 프린트된 RFP와 제안서 내용에 관해 메모된 노트, 그리고 필기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1710 미팅룸은 대여섯 명 정도가 회의하기 적절한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덜컹 회의실 나무문을 끌어당겼다. 미팅룸에는 한발 먼저 도착한 남자가 코앞에서 열리는 문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십 분이나 이른 시각이라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리는 것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운 일이다.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하지만 평소의 소영 같으면 눈이 마주친 즉시 깔끔하게 미소 지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저 벌컥 문을 열고 문고리를 꼭 잡고서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남자는 소영을 한 번 보더니 한 팔을 뻗어 열린 문을 고정시켰다.
“왜 그러고 서 있죠 들어오세요.”
소영에게 삼 주 만에 처음, 제대로 걸어온 말이었다.
바보처럼 보였겠구나.
소영은 서훈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낮추고서 소영이 한 뼘도 안되는 거리로 서훈을 매끈하게 스치며 방으로 들어섰다. 매끄러운 머릿결이 살랑 움직일 때쯤 서훈의 코로 목련향이 흘러들어왔다. 착각일 테지만……. 불쑥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서훈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에서 제일 가까운 쪽에 소영이 손에 든 자료를 내려놓고 앉는 모습을 지켜본 후, 서훈은 재킷을 벗어 옆자리 의자에 걸쳤다. 랩탑을 열다 말고 소영이 들여다보는 RFP를 흘끗 넘겨보았다.
“프린트했네요.”
“네. RFP 아직 못 봤어요 ”
갑자기 쏟아지는 피로감에 서훈은 손을 들어 주름이 잡혀오는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 들어오면서 이야기 들었어요.”
“TED에서 오는 길 ”
서훈은 손을 떼어내며 소영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네, 아직도. 하지만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서훈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감추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제안서 작업이랑 같이하는 거야 ”
“그러라네요. 주말도 있으니 뭐. 아, 여기 있네요. 메일.”
자기 일이 아닌 듯 말하며 서훈은 랩탑으로 제안서 파일을 다운받아 열었다. MS 워드 프로그램이 열리고 하얀 화면에 제목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