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화
맥킨리 서울 오피스는 사십여 명 가량의 컨설턴트가 소속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컨설턴트가 클라이언트사로 가서 일하는 중이라 비어 있다시피 한 커다란 사무실은 적막할 만큼 조용했다. 고요함이 일깨우는 감상적인 마음 때문인지, 소영은 한국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손에 조금씩 배어나오는 축축한 기운이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소영은 입을 움직이지 않고 웃었다.
‘정소영, 드디어 한국으로 왔어. 이제 시작이야.’
찬물에 손을 깨끗이 씻었다. 손에 부딪히며 튕겨 오르는 물방울이 상큼하다.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고 세면대로 튀어나간 물까지 깨끗하게 닦은 후, 휴지통에 흠뻑 젖어버린 종이를 버리고는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오피스 전체를 조금 더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아이보리 벽면에 회색 카펫, 짙지도 옅지도 않은 원목 마감이 된 사무실은 인테리어조차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첨단을 지향한답시고 벽면 곳곳에 소형 모니터를 박아두는 식의 인테리어는 아무래도 보수적인 맥킨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소영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곳저곳을 일러주던 리셉셔니스트의 말을 떠올리며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원목 마감 격자무늬 유리창 너머로 여자 두 명이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인사했던 기억을 재빨리 더듬었다. 감색 투피스를 입은 사람은 자신을 헤더라 소개한 통역사, 한국 이름은 혜정이었던가. 베이지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은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직 최경희라는 사람이었다. 깔끔한 미소를 그리며 들어서려던 소영은 그들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그대로 문가에 멈춰 섰다.
“윤서훈 씨, 대단하죠 통역 때문에 며칠 동양엘 갔었는데 거기 프로젝트서도 날아다니더라구요. 다들 죽겠다던데. 그나저나 여자 또 그만두었던데요. 야멸치게 전화 무시하더라구요.”
“어 그 여자는 좀 오래간다더니. 심각한 줄 알았는데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 사람이 설마 심각한 연애를 하겠어요. 하긴, 굉장한 미인에 빵빵한 집안이었는데. 애니웨이, 어떻든간에 서훈 씨, 보기에는 너무 흐뭇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혜정의 얼굴을 보며 경희 씨가 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혜정 씨, 딱 거기까지. 그냥 보는 걸로, 가벼운 말이나 나누는 걸로 흐뭇하고 좋은 남자지. 남편이나 남자 친구 삼기에는 별로인 남자. 허긴, 그 나이에 그 인물에, 혈기로 즐기는 여자나 필요하지 한 여자에게 구속되고 싶겠어.”
“꼭 그럴까요 ”
혜정의 목소리에 부정하고픈 고집이 서렸다.
“나처럼 결혼해서 몇 년 지나보면 남자 보는 눈이 생겨.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 서훈 씨는 전혀.”
소영은 퉁탕거렸던 심장에 자조하며 문을 열었다. 윤서훈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봄기운을 담았던 그녀의 서훈이 떠올라 눈과 가슴을, 다리를 휘감았다. 혹시나 했던 마음은 뒤이어 들린 대화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동명이인. 대한민국 서울에, 정소영만큼이나 평범한 이름은 아니라 하더라도 윤서훈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이는 많을 것이다.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소영을 향해 눈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소영도 가볍게 목례하였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버튼을 누르자 위잉, 소리와 함께 짙은 커피향이 흘렀다. 잠시 코끝에 머물던 시원한 신록의 향이 사라졌다.
‘서훈아, 지금 어디서 뭐하니…….’
닫힌 입술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한숨 같은 말.
목련, 새순이 돋는 나무, 로댕, 놀이기구 사진만 봐도……. 지독한 우울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쿠키를 굽게 되는 날이면, 서훈이 맛있게 베어 물던 오렌지 필 쿠키, 오트밀 쿠키를 커피점에서 볼 때마다 반복되고 다시 반복되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누나를, 좋아했었어요. 많이.’
과거형의 고백, 소영을 안던 서훈의 상처 입은 눈이 커다랗게 일렁인다. 이제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야 하는 시간이다. 마음껏 추억할 수 있는 행복도 그녀에게 허락되는 사치는 아니었다.
그해 여름밤, 신림동 복개천 도로 위에서 소영이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삼키며 가버린 후에도 서훈은 연락을 했었다.
[누나……. 미안해요.]
서훈은 머뭇거리며 겨우 말했다. 착한 아이, 얼마나 자책하고 후회했을까. 소영은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서훈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빳빳한 말 단 두 마디만 돌려주었다.
‘연락하지 마. 불편해.’
핸드폰은 해지되었고 소영은 서둘러 한국을 떠났다.
여자들의 잡담 속에 언급된 윤서훈이라는 이름은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가 솟아오른 돌부리처럼, 다시 그녀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렇지만 소영은 언제나처럼 말끔하게 일어섰고 팔 년 동안 의지와 다르게 수없이 반복되던 서훈의 눈동자도 가슴속에서 서둘러 몰아내었다.
***
동양그룹 클라이언트사의 널찍한 사무실에 너덧 개씩 짝을 이뤄 붙은 책상들이 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대부분 프로젝트에 배속된 클라이언트사 직원들의 자리였고 머리를 책상에 박고 끈질기게 일하고 있는 몇 명은 맥킨리 컨설턴트들이었다. 서훈은 편하지 않은 의자에 긴 몸을 억지로 기대어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윤서훈 씨.”
경호의 부름에 머릿속으로 전개하던 로직을 결론 직전에서 뚝 멈춰버리고 눈을 떠야 했다.
“대충 덮고 나가자.”
경호는 재킷까지 입은 상태였다. 이건 어떻게 하고요, 서훈은 나 좀 봐줘요 말하듯 양손을 벌리며 웃었다. 경호는 서훈의 랩탑에 띄워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위협적으로 탁탁 두드리더니 말했다.
“너도 그냥 덮어. 오늘 손들고 대부분 다 나갔다.”
시계는 열한 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훈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놓았다.
“벌써요 저런, 능력 달리는 저는 중간보고서 만들려면 아직 까마득하거든요.”
“엄살떨면 죽는다. 천재 윤서훈. 범재들 놀리는 거냐 ”
“아이, 팀장님! 왜 이러세요.”
“안 좋은 머리 너무 굴렸더니 치직치직 타오른다. 머리를 적시거나 아예 태워버리거나 할 알코올이 필요하니까 따라오라구.”
“넵, 명령을 받잡습니다.”
경호는 여전히 인상을 험하게 구긴 상태였다. 하긴, 요즘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클라이언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서훈은 랩탑을 끄고 펼쳐둔 자료를 빠른 속도로 정리하여 서랍에 넣기 시작했다. 오늘 밤, 아마도 경호의 주정을 질리도록 들어야 할 것이다.
***
바 테이블에 구부정하게 수그려 있는 경호는 이미 혀가 제 말을 듣지 않는 상태였다. 양주를 반 병도 채 비우지 않았다. 아마 체력도 그만큼 바닥이 났지 싶다.
“야, 윤서훈이, 우리는 언제 ‘갑’이 되어보냐고. 계약에서 ‘을’ 이거 참 더, 럽고 어, 려워.”
경호는 전투적으로 잔을 비웠고 서훈은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경영 컨설턴트, 화려해 보이는 이면에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업무에 인간관계에 지쳐버린 넋두리는 다를 것이 없었다. 보통은 첫 반년 만에 회의를 느낀다지만 서훈은 첫 석 달 만에 회의가 아닌 파악을 했다는 편이 맞다. 지금, 업무와 스트레스의 강도와 비례하는 좌절감이 아마 경호의 정신과 육체에 한계상황임을 경고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컨설팅 프로젝트는 컨설턴트들이 일하는 시간 단위로 높은 컨설팅 비용(fee)가 청구되는 형태의 계약인지라 두세 달의 프로젝트에 웬만한 중소기업 연 순수익을 웃도는 프로젝트 비용이 매겨진다. 엄청난 비용때문이라도 아웃풋에 대한 엄격하고 까다로운 요구는 당연시 되었다. 더군다나 프로젝트에 투입된 클라이언트사 직원들은 결과에 따라 자신의 고과 평가가 결정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더해져 컨설턴트와는 좋으려면 한없이 좋을 수도 개와 고양이처럼 한없이 으르렁거릴 수도 있는 사이였다.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서 기업 내부에 얽힌 거미줄 같은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적당히 잘라가며 오너의 의중을 고려하여 끌고 가는 프로젝트는 체력을 갉아먹는 육체적 고통에 더해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인지라 심약한 사람은 도무지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고된 일이다.
“아, 진짜 때려치워야지. 내가 MBA 마치고 여기 들어올 때, 참 세상이 아래로 보였다.”
경호는 이제 불분명한 발음으로 몇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다.
“지금은, 제기랄. 잠이나 편하게 자고 싶어. 나도 대기업 들어가서 프로젝트팀 배속받은 클라이언트사 직원 할 거라니까. ‘이게 무슨 말이죠. 그렇게 막무가내로 정해진 툴만 밀어 넣는 건 안 됩니다. 우리 회사 상황을 제대로 분석은 하셨는지.’ 저도 모르는 해결책을 뽑아내라 강요하는 이런 소리 막 하는.”
“어디서, 또 오퍼 받으셨어요 ”
서훈의 말에 경호가 풋 웃었다.
“그래,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서훈이 끄덕이며 제 잔을 비웠다.
“대부분 다 개미같이 사는 거지. 기막힌 타이밍에 들어가서 채권 브로커 해서 수십억 번 놈, 카아! ‘을’이라도 그런 거 해야 되지 않냐. 하, 그딴 일. 하면서 코웃음 쳤는데 말야. 아니면 IB(Investment Bank, 투자은행)서 트레이드 잘해서 인센티브 연간 십몇 억씩 챙긴 놈. 그 돈 받는 족족 수년 동안 잠실 재건축만 사모아서 조세제도 바뀌기 전에 다 팔고 골프 치고 애 데려다 주고 다니는 그놈이 내 꿈이다.”
“팀장님처럼 그렇게 능력 있는 분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하. 저는 어쩌라구요. 제 우상인데요.”
“허, 제일 부러운 거 뺐다. 재벌 자식 중 울 회사 들어오는 녀석들. 턱 하니 화려한 학벌까지 무장하고 경영 몇 년 열불나게 배워 그거 제 기업 운영하며 써먹을 기대에 부푼 선택받은 존재들. 게다가 쉽게 안 가고 이 고생을 자처하는 정신까지 그럴싸한 사람들 가끔 있지.”
“몇 명이나 된다구요. 재벌 패밀리가 있긴 하지만 직계는 그런 경우 없죠. 팀장님 같은 인재 모셔 가면 되지 본인이 이 노가다 일을 왜 한답니까.”
서훈도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다. 슬슬 자리를 마무리 짓고 싶어 시계를 확인하였다. 지금 들어가 눈을 붙인다 해도 내일 아침 운동 시간을 확보하려면 두세 시간이 고작이었다. 경호는 팔에 머리를 괴고는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있더라. 희귀한 재벌 직계. 심지어 여자던데. YK 딸. 스탠퍼드 졸업하고 이번에 입사했다. 여기 처박혀 죽을 지경이라 나도 얼굴은 아직 못 봤고, 들어온 지 이삼 주쯤 되었지 아마 ”
“누구……라구요 ”
“YK. 정현태 회장 첫째 딸. 이름이 뭐더라 뭐 흔한 이름이었는데, 수영 소영 둘 중 하나다. 제길. 머리가 포화 상태라 취사선택하거든. 이름은 모르겠지만, YK 장녀 엄청나게 예쁘다고 난리더군.”
서훈은 대답 없이 앞에 놓인 양주잔만 바라보았다. 알코올 기운으로 조금씩 더워지던 피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는다. YK는 그 딸한테 경영을 맡길 채비를 단단히 한다는 경호의 말도 더 이상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하지 마. 불편해.]
그날, 신림동에서 품에 안은 어깨가 떨린다고 생각했다. 변명하지 않고 차가운 작별을 말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눈에 물안개 같은 서러움이 맺혔다고 믿었다. 완벽한 자기 연민에 의한 착각이었다. 죄책감으로 떨던 그에게, 그녀는 끝까지 잔인하고 비정하였다. 그를 가차없이 끊어내고 다음 날로 핸드폰도 끊어버렸다. 그래도 서훈은 소영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소영의 집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서성였는지 몰랐다. 그 여름의 햇살과 목 뒤로 흘러내려 등을 적시던 땀, 내내 신었던 운동화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수위나 경호원들이 경계하는 눈길을 피해 서훈은 짐짓 태연한 척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내렸다. 긴장으로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나 땀에 젖은 이마를 스치고 지나던 바람의 눅눅한 촉감까지 서훈은 기억하고 있다. 개강하고 처음 가진 선우회 모임에 소영은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다. 흰 얼굴과 나긋한 목소리 대신, 정소영이 학교도 마치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만 들렸다. 떠난 줄도 모르고 그 집 높다란 회색 담벼락을 목이 아프도록 올려보고 또 올려다봤던 제 자신의 남루한 꼴이 그제야 환하게 들어왔다.
칠공자와 즐겼다는 정소영, YK 영양 정소영, 재벌가 며느릿감 일 순위 정소영…….
서훈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목련처럼 깨끗하고 우아한 소영, 단정한 입매, 차분하고 신중한 태도,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가끔 아이처럼 웃던 소영. 입을 맞추는 상상조차 불경하게 느껴져 죄스럽게 만들던 소영.
대체, 누구를 봤던 것일까. 무엇을 봤던 것일까.
지석과의 일까지는, 아니 그 칠공자에 지석이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던 서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 옆에서는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이 비참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을 명백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소영에게 자신은, 변명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남자였다는 잔인한 현실이 흉터처럼 각인되었다.
2학년을 마친 서훈은 다음 해 봄 무렵 군대에 들어갔다. 짧게 자른 머리가 적당히 길어 복학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시 돌아온 캠퍼스에서 서훈은 여전히 밝고 건강한 남자였다. 자주 웃었고 위트 있는 농담도, 선들선들 시니컬한 말을 매력적인 웃음에 버무려 내보내는 것도 능숙했다. 캠퍼스 어디에서나 주목을 끄는 그의 외모는 아름다운 얼굴이 전부는 아니었다. 각이 잡힌 어깨와 길고 탄탄한 다리. 농구대 아래서 가끔 윗옷을 훌렁 벗어던지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잘 만들어진 근육에 흐르는 땀방울까지 빛나 보였다. 그를 향한 수줍은 시선도 노골적인 시선에도 담담한 윤서훈에게서는 더 이상 이십 대 중반의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설레는 감정, 그것 하나만 완전하게 사라진 듯이 보였다.
정소영, 정소영……. 정, 소영.
싸늘하게 식은 피가 묻는다.
목련을 다시 보면 설렐까.
서훈은 쓸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결코.
***
“정소영 씨.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제가 부탁드려야죠. 반갑습니다.”
소영은 회사 명단에서 이름으로만 익힌 사람과 악수를 한다. 전체에게 인사를 한 후, 몇 명씩 몰아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기를 대략 여덟 번쯤, 이제 인사 절차는 거진 끝났다. 소영이 입사하고 처음 참석하는 저녁 회식 자리였다. 회사에 들어간 후 삼 주쯤 지나 한 달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첫 주 금요일이었다. 소영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신입사원 네 명이 처음 정식으로 인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소영은 한정식집 커다란 룸에 빼곡하게 들어차도록 앉은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클라이언트사에 외근 나가 있던 컨설턴트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무실 직원 리스트에 있었던 이름과 얼굴을 빠르게 연결지으며 살펴보았다. 맞은편 통역사 혜정의 얼굴로 한 번의 순회는 끝이 났다.
대부분이 참석했지만 개인적인 사정과 프로젝트 일로 참여하지 못하는 대여섯 명 중 윤서훈이라는 컨설턴트도 있었다. 같은 이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윤서훈 컨설턴트의 불참을 몹시 아쉬워하다니, 소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대화는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소영은 주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쪽이었다. 문득 앞쪽에서 김 이사가 룸 전체를 향해 물었다.
“TED는 뭐하느라 안 와요 다 죽었나. 힘들어서 ”
TED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는 동양 프로젝트에 윤서훈이라는 사람도 배정되어있다.
“이사님, 저희 왔거든요.”
김 이사의 말이 떨어져 식기도 전에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환 씨 모듈은 왔네요.”
“저희만이 아니구요, TED서 안 온 사람 최경호 팀장님이랑 윤서훈 씨밖에 없는데 이거 너무 하십니다. 그 사람들만 기다리시는 거죠 ”
“허허. 딱 들켰다. 사실, 최 팀장은 볼 거 없고 우리 오피스 최고 미남이 왜 안 오나 기다리는 중이야.”
농담하는 김 이사를 보며 지환은 악의 없는 소리를 높였다.
“너무 편애하시면 저희 상처받습니다. 윤서훈 씨 오기만 하면…….”
지환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정식집 여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 왔는데요.”
열린 문 안으로 남자가 들어왔다. 자신에게 동시에 꽂히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조금은 무안한 듯 입가에 환한 미소를 만든다. 편안한 스웨트 셔츠 대신, 흐트러짐이 없는 블랙 슈트를 입었어도 그 목 끝에 낯선 넥타이가 매여 있어도, 머리칼이 딱딱하게 젤로 고정되어 있어도 남자는 신림동 카페 룸에 들어서던 바로 그 윤서훈이다. 소영의 눈이 남자를 담는 순간 뇌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심장이 멈추었다. 뻐근한 통증이 척추를 관통할 때까지 그녀의 심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윤서훈 씨, 어서 와.”
이미 가득 들어찬 방안을 빠르게 훑어보던 김 이사가 한 자리를 찾은 듯 손짓을 했다.
“저기 앉으면 되겠네요. 거 지환 씨 옆에 가지 마. 잔뜩 벼르더라고. 내가 서훈 씨만 예뻐한다나.”
“죄송합니다. 늦었어요. 나가려다가 TED 부장님한테 딱 잡혀서 한 시간 동안 말씀 듣고 왔습니다.”
서훈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명랑하게 답하고는 김 이사가 가리킨 자리로 움직였다. 몇 걸음 걷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서훈에게 인사를 하고 농을 걸었다. 그 모두에게 서훈은 시원시원한 웃음과 위트 있는 답을 건넸다. 자리에 앉으며 서훈은 손으로 배를 한 번 쓸어내렸다.
“아, 배고파요. 그런데 코스 다 끝났네요.”
옆자리에 앉게 된 통역사 혜정 씨는 제 배가 고픈 것보다 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서둘러 수저를 챙겨 가지런히 서훈 앞에 두며 호들갑스레 말했다.
“서훈 씨, 어떡해요 배 많이 고프죠 뭐 더 시킬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남은 거 먹죠. 뭐.”
정말 배가 고프다는 듯이 식탁에 남아 있는 반찬을 빠르게 훑어보던 서훈의 시선이 어느 순간 천천히 움직였다. 도자 접시를 잡고 있는 흰 손, 앞자리의 숟가락, 놋 밥그릇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 얼굴을, 여자의 눈을 그제야 똑바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