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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11화 (11/54)

# 11화.

11화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며 YK 정소영 자신만을 지켜보자고, 바위에 부딪치듯 온몸에 상처를 내면서도 그만은 몰랐으면 했다. 지금 상처 입은 눈을 마주하며 소영은 이대로 서훈의 품에 무너져 끝없이 울고만 싶었다. 그의 말대로 투정부리고 싶었다.

서훈아, 너는 그런 비난의 눈을 보이지 말라고.

제발, 그렇게 날을 세워 이미 온전한 곳 없는 나를 할퀴지 말라고.

하지만 소영은 다시 한 번 어설픈 가면을 쓰는 쪽을 택했다. 서훈의 품에서 떨어져, 그의 팔을 풀고 따스함도 뿌리치고 한 발 물러섰다. 나무처럼 굳은 듯이 서 있는 서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슬픈 눈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싱그러운 나무 같은 서훈이었다.

그래, 넌 그런 애였지. 잘 살아, 착한 서훈이.

가슴과는 다른 말, 다른 얼굴,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목련이 생각난다고 했었니 ”

소영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다른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목련은 한 장 두 장 찢어지며 떨어져. 하얗던 꽃잎은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군데군데 갈변하고 말아.”

서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거짓말이라도 아니 변명 한마디라도 해달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소영은 그의 바람을 가차 없이 잘랐다. 소영에게 서훈은 변명을 해야만 하는 대상조차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굳고 차가운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만들었다. 차가운 가면 속의 아픈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서훈은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었다. 제 상처가 버거운 여린 가슴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 착하고 잘생긴 서훈이. 너처럼 밝고 예쁜 여자를 만나. 그래서 놀이동산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영화관에도, 손잡고 가.”

흐린 웃음이 소영의 입가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받기만 하고 해준 게 없어 너무 미안하다.”

소영은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밭 같은 사랑, 붉은 장미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잔인한 핏자국이었다. 장미를 닮은 붉은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에서 멀어지는 걸음에 그녀의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것이 푸른 서훈을 보는 마지막이었다.

그것이 목련 같은 소영을 보는 마지막이었다.

***

맥킨리 서울 오피스는 평소 고객사에 배치되어 외부에서 근무하는 컨설턴트들이 대부분이라 비교적 한산하다. 오피스에 있는 컨설턴트 대부분도 프로젝트 사이에 잠시 들어와 회의를 하거나, 제안서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의실에서 열띤 토론을 하는 프로젝트팀이나, 자그마하게 분리된 공간에서 슬라이드 작업에 몰두하는 대여섯 명의 컨설턴트와 달리 서훈은 다소 한가로이 자료 정리를 하고 있다. 데스크 위 전화가 울렸다.

[윤서훈 씨, 잠깐 봐요. 지금 방으로 올래요 ]

“네, 이사님.”

시원하게 답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아무래도 새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이야기이지 싶다. 일주일쯤 쉬었으니 충분히 쉰 것이다. 서훈은 김 이사 방을 향해 활기찬 걸음을 옮긴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얼굴들에 웃음으로 인사하는 모습이 여유롭다.

서훈이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 최고의 전략 컨설팅 펌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지도 3년째에 접어든다. 맥킨리 생활은 윤서훈에게도 맥킨리 측에서도 만족스러웠다.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니어 레벨 컨설턴트이긴 하지만 맥킨리에서 윤서훈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반듯하고 흠잡을 데 없는 외모에 놀라게 되고, 천재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도 한 번이라도 같이 일해본 사람은 외모가 무색하리만큼 뛰어난 그의 두뇌에 놀라게 되었다. 갑갑하게 보이는 난제도 숨을 막을 지경의 과중한 업무도 그의 머리와 손에 맡겨지면 어이없이 수월해졌다. 게다가 남성적인 건강함과 여유로움이 배여 있어, 그가 속한 팀에 늘 효율적인 아웃풋 외에 활기를 더했다. 냉소가 가끔 입 끝에 맴돌기는 했지만 이내 눈이 마주치면 탄산수 같은 미소로 바꾸어버리는 건 아무래도 윤서훈의 최대 무기 중 하나였고 그가 그 무기에 제대로 장전을 하기도 전, 회사 사람들이든 클라이언트든 누구나 매력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엄지손가락이 두 개라는 것이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매니저들이 프로젝트에 데려가고 싶은 일 순위 컨설턴트 윤서훈은 다음 주면 투입되는 단기 프로젝트의 스콥(scope)*을 훑어보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제안서 작업할 때 일부 관여했던지라 대략적 프로젝트 내용은 알고 있었다. 타임테이블에 의하면 6월 셋째 주부터 동양그룹 전사 전략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문제는 시기나 기간이 아니었다.

“와, 이사님, 저는 십오 주 동안 기절해 있어야겠는데요.”

그에게 배정된 모듈(module)**이 누가 보아도 가장 힘들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만한 것임을 인정하는지 PM(Project Manager)이 머쓱하게 받았다.

“서훈 씨, 미안해. 번번이 어렵네.”

서훈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아니요, 무척 재미있을 거 같은데요.”

김 이사가 서훈의 팔을 다정하게 두드리며 어설픈 응원까지 날렸다.

“그럼, 재미 붙이고 잘해봐. 자료 날릴게.”

아니, 결국 응원이 아니라 자료를 날리는 것이었다.

“넵.”

서훈은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이번에 시작하는 동양 프로젝트가 전반적으로 무척 까다로워 보이지만, 솔직히 이런 모듈이라면 제안서 쓸 때부터 다들 쑥덕거렸을 테다. ‘pain in your ass!’라고. 소위 말하는 죽을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 번듯한 결과물이나 가시적 성과는 제대로 잡기 힘든, 그래서 클라이언트사 직원과 어쩌면 신경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모듈이었다. 서훈은 제안서를 훑어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랩탑으로 눈을 돌렸다. 김 이사가 보낸 것이 틀림없는 이메일을 확인하려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핸드폰을 받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에 슬쩍 미간이 좁혀진다.

“응, 여기 앞에 세이에서 봐. 차 한 잔 정도 시간 되는데 ”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자가 차 한 잔 정도 시간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더 이상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지는 않다. 오늘쯤 끝을 내야지. 서훈은 벗어 둔 양복 재킷을 입었다.

***

세이에서의 만남에서 그다지 거슬리는 것은 없었다. 자존심 강하고 세련된 여자는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자리를 떠났다. 단지,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의 한마디가 서훈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환유의 덫. 지겹고 지긋지긋한 환유다. 서훈은 이를 악문다.

‘지루하니 ’

그녀의 물음은 순식간에 서훈을 팔 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고, 무방비 상태의 가슴에 파도를 일으켰다. 팔 년 전, 소영의 학교, 고고하게 피어올랐던 목련 송이, 후문, 후문 너머 좁은 인도가 들어오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이, 그리고 홍차 잔을 앞에 두고 말라버린 낙엽처럼 앉아있던 소영이 떠올랐다.

‘지루해요 ’

‘아니, 사는 게 지루해요 ’

‘대답해줘요. 뭐가, 도대체 누나가 왜 그런지.’

호기롭게 말하는 스물하나 서훈이 있다.

이제 파도는 언제나처럼 가라앉았다. 그리고 잊으리라는 기대 대신 접어버리면 된다. 불쑥 튀어 오르지 않도록 단단하게.

서훈은 아직 손가락에 걸려 있던 키홀더를 테이블에 내리고 손에 기다란 담배 하나를 대신 끼웠다. 희뿌연 연기가 착잡한 얼굴을 가리며 뿜어 올랐다.

‘윤서훈, 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니 ’

사랑……. 스물아홉이 되는 동안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부를 여자는 없다. 목련 같던 그 여자조차도. 서훈의 눈에 테이블 위 키홀더만 들어왔다. 다시 파도가 크게 일렁인다. 가라앉다가 솟다가 격랑이 되다가, 어쩌면 평생을 파도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파도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다. 서훈은 봉투 모양 키홀더를 들었다. 소영이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파도가 치든 가라앉든 한시도 몸에서 떼어본 적은 없었다. 비록 그 물건이 누군가의 선물을 사다가 탈락된 후보일 뿐이라 해도, 소영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파도를 잠재울 수 없는 것처럼.

***

똑, 똑.

네, 경쾌한 노크 소리에 소영이 답을 한다. 소영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재킷 깃을 바로 잡아보는 중이었다. 문이 열리고 민영이 방으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몸집이라 더 길어 보이는 생머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중간쯤에서 찰랑거린다. 민영은 사랑스런 눈웃음을 지으며 소영에게 다가섰다. 양손을 등 뒤로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응  묻듯이 소영이 쳐다보자 짜잔, 등 뒤에서 리본 달린 상자를 내밀었다.

“언니이. 첫 출근 축하해! 오늘 맞지  7월 첫째 주부터 나간다고 했잖아.”

“응, 맞아. 첫 출근이야.”

“축하해.”

민영이 소영의 목을 껴안고 동그랗고 작은 얼굴을 뺨에 붙인다. 고마워. 소영은 민영의 등을 두드린다.

“선물 열어봐. 응 ”

민영의 재촉에 리본을 푸르고 상자를 열어보니, 반짝거리는 브로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 눈에 에메랄드가 박힌 깜찍한 고양이다. 황금빛 몸에 다이아몬드가 섬세하게 세공되어 온통 화려하게 빛났다. 소영은 빙그레 웃었다.

“꼭 너같이 생긴 고양이구나. 귀여워.”

“어머  난 호랑이 아냐 ”

민영이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다. 소영은 웃으며 민영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귀여운 고양이 속엔 호랑이도 있겠지.”

“브로치 맘에 안 들어  설마  설마  그럴린 없을 텐데! 엄마랑 나랑 되게 고민 많이 했는데.”

민영이 금세 뾰로통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본다.

“아냐, 맘에 들어. 그런데 너무 화려해서.”

“뭐야, 언니 만날 검정, 회색 그런 옷만 입잖아. 브로치라도 화려하게 하라고 내가 신경 써서 골랐어.”

“언제 어울리는 옷 입으면 할게. 고마워.”

소영이 상자에 도로 넣어두자 민영은 다이닝룸으로 내려가는 동안 투덜거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 보통 브로치가 아니야, 거기서 C브랜드 80주년 기념으로 만든 거라구, 전 세계에서 딱 80피스뿐인 물건이야. 나중에 봐, 숫자도 있단 말야.”

다이닝룸에 들어가서 혜숙을 보자마자 민영이 아이처럼 달려가 이르듯 말하였다.

“엄마, 슬퍼요. 언니한테 그 브로치 화려하다고 거부당했어요.”

“아니, 왜  예쁘던데  소영아, 싫어 ”

“이런 차림에 어울리지 않아요. 회사에도 그렇고.”

혜숙이 검은색 바지 슈트 차림의 소영을 한 번 훑어본다.

“좀 예쁘게 입지.”

“원래 검은색 좋아하는 회사에요.”

“정말  뭐 그런 회사가 다 있다니  일도 무지하게 많이 시킨다며. 그럼 몽땅 검정 옷 입고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는 거야  아우, 상상만 해도 우울해.”

혜숙이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을 때, 다이닝룸으로 정 회장이 들어섰다. 소영과 민영이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혜숙이 결국 한마디를 더했다.

“몸도 약한 애가 뭐 하러 그런 힘든 회사를 들어가니. 차라리 우리 회사에서 일하든가. 안 그래요, 회장님 ”

“밖에서 경영 더 배워오겠다잖아. 그만합시다.”

“회장님 밑에서 배우면 되지 않아  응 ”

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혜숙에게 답하지 않았다. 팔 년 전, 그러니까 혜숙에게는 너무나 어이없게도 불쑥, 회장의 일방적인 통보 형식으로 소영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소영의 모든 행보는 혜숙에게는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혜숙을 배제한 결정에 여느 집 엄마라면 화를 내고 따져 물었겠지만, 혜숙은 소영이 떠나는 날, 밤새 울어 빨개진 눈을 하고는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인사만 다정하게 건넸을 뿐이다. 야윈 손을 잡고서, 어깨를 쓰다듬으며 혼자 어떻게 지낼 거야. 작은 목소리로 울먹였지만, 웃으며 소영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소영의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소영이 한국에 들르는 기간이 턱없이 짧아지면서, 혜숙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소영아, 힘들게 살지 마.

제 몸 깎으며 살지 마.

너무 애쓰지 마.

네 아버지 만족시키려고 그렇게 아등바등거릴 필요 없어.

네가 아무리 죽으라고 한다 해도 회장님 만족 못 시켜.

너는 몰라, 네 아버지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인데. 아빠랑 딸일 때나 좋은 사람이지, 너 아버지를 회장으로 모시고 일하는 순간 힘들어. 정말 힘들어.

혜숙이 안타까워하는 연장선에 맥킨리로의 첫 출근도 포함된 것이었다.

“소영아, 기어이 우리 회사일 하겠다니 말리지 못하겠지만, 난 힘든 곳은 싫어. 그 회사 꼭 가야 하니  거기 가면 뭐가 좋은데  야근도 계속한다며.”

민영이 생글거리며 대신 답을 하였다.

“엄마, 그 회사 남자들이 되게 멋있어요.”

“정말 ”

혜숙의 눈이 반짝인다.

“그렇다면 뭐, 소영아, 야근해도 회사 다니는 재미는 있겠다. 그치 ”

소영은 작게 미소만 지었다.

“가서 좋은 남자 있음 좀 사귀어봐, 그럼.”

소영이 굳은 얼굴로 커피 잔을 든다. 혜숙은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매섭게 잘라버리는 소영이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는, 나이가 몇인데 결혼도 싫다, 연애도…….”

혜숙이 정 회장을 흘끗 살펴보고는 한숨을 억지로 삼킨다.

“어머, 맛있네. 이거 늘 먹던 거랑 다른 건가 ”

민영이 빵을 뜯어 한입 먹으면서 꽤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르긴, 같은 데서 주문하는데 다를 게 뭐 있니.”

“그래요  왜 난 더 맛있지  봐요, 모양도. 요기 호두 반개가 통째로 박혔네.”

“어디 ”

혜숙이 민영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민영이 소영과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정확하게 아침 아홉 시, 맥킨리 서울 오피스 유리문 앞에 선 소영이 리셉셔니스트와 눈인사를 나눈다. 이내 열린 문으로 소영이 들어섰다. ‘정소영입니다.’ 한 번 더 인사를 건네고 소영은 리셉셔니스트의 안내에 따라 좁은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소영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몸에 꽂혔다. 각오는 했지만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불편하다. 시선들은 소영의 검은 단발머리에서 발끝까지 빠르게 움직였다. 소영은 그들의 눈에 비칠 제 모습을 상상해본다. 갸름한 턱선, 어쩌면 갸름하다기보다는 뾰족해졌을지도 모르는 턱선을 지나 목덜미를 가리는 길이의 단발머리, 그리고 여름이지만 긴팔 정장 차림. 얇은 폴리에스테르 검은색 테일러드 칼라 바지 정장 속의 가느다란 몸의 곡선은 크게 움직일 때나 겨우 드러나도록 직선의 실루엣에 가두었다. 핏기 없을 만큼 하얗게 보이는 얼굴에는 거리감을 유지시키는 부드럽고도 차가운 미소가 가면처럼 씌여 있다. 그런 모습이라……. 재미없군, 재수도 없고.

“반갑습니다. 정소영입니다.”

호기심 어린 눈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컨설턴트는 프로젝트 때문에 클라이언트사에서 외근하는 중이었다. 사내에 있는 사람들과의 인사는 짧은 시간만을 필요로 했다. 흠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예의를 갖추고 확실한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인사를 차례로 마치고 소영은 자신의 방이라 배정된 작은 공간의 유리문을 열었다.

꽤 많은 자료를 꽂을 수 있는 책꽂이가 달린 빈 회색 책상 앞에 검은 가죽 사무용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를 바싹 끌어다 앉고서 소영은 행정실에서 받은 새 랩탑의 파워 버튼을 작동시킨 후 사내 네트워크로 접근하기 위하여 익숙하지 않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곧이어 윈도 화면이 떠올랐다.

후…….

랩탑 옆에 둔 플라스틱 상자에 무심코 눈길을 둔다.

정소영, Soyoung Jeong, Associate, Mckinley & Company 하얀 종이 위의 인쇄체 글자.

팔 년이 지나 완전히 귀국한 서른한 살 정소영의 소속을 나타내주는 직사각형의 종이……. 소영은 투명 플라스틱 갑 속에 꽉 채워진 종이 중 한 장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스탠퍼드 MBA를 마칠 무렵, YK 본사로 들어오라는 아버지에게 조금 더 외부에서 경영에 대해 냉정한 시각을 키우고 싶다며 선택한 직장은 세계 최고의 전략 컨설팅회사였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전 여름, 소영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반년 동안 어학연수를 하고 국내에서 진행시킨 수속 절차에 따라 교환학생으로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했다. 하지만 소영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루슨트 전자통신회사를 거쳐 스탠퍼드 MBA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지난 세월 침대 옆에 항상 놓여 있었던 잭 웰치의 저서, 그것을 전해주는 정현태 회장. 오로지 그것만이 소영이 버티고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차례의 봄볕도 봄바람도 스치지 못했던 마음은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단단한 얼음으로 한 겹 한 겹 채워져갔다. 얼음여왕이라 불렸지만 한없이 여리고 보드랍던 마음은 이제 두꺼운 얼음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버렸다. 피투성이 영혼도 긴 세월 동안 조금씩 아물어간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소영은 알고 있었다. 단단한 얼음이 찢겨진 영혼을 덮어버렸을 따름이라는 것을. 두꺼운 얼음 속에 숨어든 상처 입은 영혼은, 박제된 신록의 향기도 놓지 못한다. 붉은 핏자국 같은, 피지 못한 사랑은 얼음 속에 갇혀 화석이 되어버렸다.

* 스콥(scope) 컨설팅 프로젝트 중 수행해야 할 과제로 계약된 범위.

** 모듈(module) 프로젝트 수행 시 과제의 종류에 따라 나눈 것. 팀의 개념이 되기도 하고 간혹 타임라인에 따라 정해지기도 함. 회사마다 조금씩 다른 개념으로 쓰이기도 함. 여기에서는 팀 베이스에 가까운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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