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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10화 (10/54)

# 10화.

10화

계절학기 수업이 마치자마자 서훈은 급히 강의실을 빠져나와 건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강의가 늦게까지 이어진지라, 규진이 벌써 식당에 도착하였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경영대 건물을 빠져나가 옆 식당 건물로 향했다. 조금 낡은 듯한 붉은색 계열의 경영대 건물과 대비되는 깨끗한 그린 색조의 창이 시원한 동원관 앞에, 아니나 다를까 규진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서 있었다.

“형,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서훈은 꾸벅 인사를 했다.

“아냐, 방금 왔어. 들어가자.”

동원관 식당은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늘어선 줄도 없고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흰색 플라스틱 쟁반에 오늘의 메뉴인 육개장과 몇 가지 밑반찬, 따뜻한 밥 한 그릇씩을 받아들었다.

“저쪽으로 갈까.”

규진이 앞장서 걸었다. 규진이 선택한 자리는 대각선으로 한 테이블, 막 식사를 마치려는 사람들 외에는 주변이 한산한 곳이었다.

“계절학기는 왜 들어  더운데 힘들잖아.”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미리 좀 들어두려구요.”

“너도 고시 공부하려고 ”

“아뇨.”

서훈은 밥 한 숟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

“해본다면 CPA정도  실은 그것도 별로 관심 없어요. 그냥 어학연수나 가능하면 교환학생 다녀오고 싶어서요.”

“응.”

규진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육개장은 그다지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톡톡한 빨간 국물에 듬뿍 넣은 고사리와 잘게 찢은 고기, 드문드문 계란이 풀어져 있는 것이 한창나이인 학생들의 입맛을 당기기엔 충분했다. 맛있게 육개장을 푹푹 떠먹는 서훈을 바라보며, 규진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서훈아.”

“네 ”

“한 달 전쯤  극장에서 너 봤어.”

서훈이 숟가락을 놓고 규진을 쳐다보았다. 기억을 재빨리 더듬어보았지만 최근 소영과 한 번 간 것 외에는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네.”

서훈은 어색하게 육개장 그릇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동동 떠오른 계란을 일없이 들었다 내려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망설이는데 더 망설이는 목소리로 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영이랑 있더라.”

“네.”

“그땐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인사 안 했어.”

“……네.”

규진이 머뭇거리며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는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아무래도 소영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두라는 말이 틀림없었다. 서훈은 소영과 그런 사이도 감정도 아니라 초라하지 않을 변명을 준비하고서 겨우 입을 벌렸다.

“저, 형. 소영 선배랑은 그런 거…….”

“소영이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좀 안 좋은 소리가 있어. 그러니…….”

“네 ”

툭, 심장이 단전까지 떨어진다. 규진의 입에서 나온 안 좋은 소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서훈은 못 견디게 불안해졌다. 규진은 서글서글하고 편안한 듯해도 경솔하거나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싱거운 소리에 비해 지나치게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생각 없이 말을 뱉을 리는 없다는 확신이 서훈의 심장을 더욱 죄어왔다. 혹시 자신 때문에 소영이 곤란한 말을 듣는 것은 아닌지 규진의 자세한 설명을 기다리느라 목이 바짝바짝 탔지만, 규진은 더 이상 말하기 불편한 듯이 밥을 육개장 그릇에 퍼 넣고 있었다. 서훈이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물었다.

“규진 형, 무슨 말이에요 ”

규진은 숟가락으로 육개장에 덩어리째 들어간 밥을 푹푹 거칠게 갈랐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서훈의 눈을 보니 마음이 잔뜩 불편했다. 상처받을 게 분명한데 저 녀석에게 말을 해야 하는 건지……. 규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문에 혹시 소영 누나가 뭐 안 좋은 소리라도 들어요 ”

착한 눈을 하고 있는 녀석은 이제 목소리까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규진은 서훈을 무척 좋아했다. 그저 아끼는 후배 정도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다. 천재라 불리는 똑똑한 머리나 잘생긴 얼굴보다 더 맘에 들었던 건 서훈의 자존감과 균형감이었다. 그날 소영을 데리고 나갈 때의 서훈의 표정도 그랬지만 극장에서 소영을 보는 서훈의 눈과 들뜬 표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자신에게도 투명하게 비춰 보이도록 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는 것이 나을지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것이 더 나을지 아니면 그녀에게 제대로 상처를 받아버리는 편이 나을지 며칠을 두고서 고민하였다.

“형!”

서훈의 눈을 한 번 더 쳐다보고 규진은 숟가락질을 멈췄다.

“들은 이야기 옮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 워낙 좀 그런 이야기에 당사자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니까 크게 돌지는 않을 테지만.”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커지는 눈동자를 향해 규진은 칠공자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칠공자 중 한 명과 막역하게 친했던지라 흘러가는 소리로 들은 이야기에 자신도 많이 놀랐었다. 상대가 YK인 데다가 더럽게 창피하다는 그들의 말에 그도 서훈에게 처음 입에 담는 것이었다. 최대한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아무리 돌려 말했다 하더라도 소용없는 듯했다. 서훈은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고개를 숙였다. 한참 동안 식어버린 육개장을 젓고 있을 뿐이었다. 규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도 조심하라구요 ”

잠깐이지만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침묵을 깨면서 서훈이 고개를 들었다. 맞닥뜨린 눈은 서훈의 것이라기엔 너무 차가웠다. 규진은 선한 눈을 가려버린 분노와 배신감을 읽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미안하다. 말 안 할 걸 그랬나 보다.”

“형, 안 하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서훈은 틈을 주지 않고 답했다.

“걱정해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소영 누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그랬다 해도 저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겁니까.”

스물한 살, 푸른 나이라 해도 자신의 여자 앞에서는 온전한 남자가 되기에 충분한 나이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서훈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물쭈물하던 규진이 변명을 할 기회도 없었다. 휘적휘적 식당을 걸어 나가는 서훈의 뒷모습을 보며 규진은 서훈에게 말한 자신의 판단을 의심했다. 그를 아끼는 마음 그것이 전부였는지 남자로서 그에 대한 질투였는지 혹은 남의 말을 즐기는 싸구려 감상이었는지 되짚어보았다. 흔들림 없던 서훈의 눈과 음성을 떠올리다가 민망한 기분으로 풀썩 혼자 웃었다.

***

“소영이, 서재로 좀 들어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퇴근한 정현태 회장은 소영을 싸늘하게 일별하며 말하였다. 회장님, 무슨 일이에요  소영의 어머니 혜숙이 회장을 좇았지만 정 회장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들으셨구나. 소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끝까지 모르시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곧 제 입으로 말할 작정이었다. 이지석이 출장에서 돌아와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모든 일을 스스로 정리하고 싶었다.

정 회장을 따라 서재에 들어갔던 혜숙이 잔뜩 걱정스런 얼굴로 나왔다. 혜숙의 손짓을 따라 소영은 주방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을 물리고 혜숙이 직접 다기에 차를 우리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혜숙이 꺼낸 것은 정 회장이 특별히 좋아하는 차였다.

“제가 할게요.”

“아냐, 내가 할게.”

정 회장이 중국에서 직접 구해온 재스민차 향이 코끝을 찔렀다.

미안해요, 아버지.

소영은 혜숙이 눈치채지 못하게 속 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어냈다.

“아니 네가 무슨 일이야  회장님 무슨 일로 저리 화가 나셨어 ”

못내 불안해하는 혜숙에게 소영은 조용히 웃었다. 아마 혜숙이 그 사실을 안다면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아시게 된 건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상처와 충격은 소영 혼자만으로 족하다. 엄마가 사실을 듣고 슬퍼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자상한 외할아버지 아래 막내딸로 귀하게 큰 엄마는 나이 차가 나는 아버지와 결혼하여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결혼생활을 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나 걱정 없고 밝고, 세상 모든 일이 간단한 혜숙에게 그런 충격을 안길 이유는 없었다. 아마, 아버지도 입을 다물 것이 분명했다.

“주세요, 걱정 들을 일 있으면 잘 듣고 나올게요.”

소영은 혜숙에게서 다기를 건네받았다.

좁은 복도를 지나 좌측으로 나 있는 정 회장의 서재까지 이르는 동안 소영은 몇 번이고 준비한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들어와.”

짧은 대답에 심장이 빠르게 뛴다. 무섭지만 떨지는 않을 것이다. 소영은 서재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앉아라.”

정 회장은 좀 누그러진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죄도록 차가운 태도였다. 소영은 정 회장이 말을 꺼내기 전, 먼저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날 저녁, 부녀간의 사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라 하기에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울음이 터질 것 같았고 내장이 꼿꼿하게 서도록 힘들었지만 소영은 제 말을 다하였다. 회장은 밖으로 새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질타를 했을 뿐 대체로 소영의 말을 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소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생각하고 기대했었던 딸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걸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절대 YK든 제 이름이든 더럽혀지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눈만 바라보는 회장을 향해 소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YK 정현태 회장의 딸이 아닌 아들이 되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될 겁니다.”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눈에 맑은 눈물이 맺혔지만 끝내 흘리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마주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솟도록 비틀어 잡은 채로 소영은 참고 있었다. 뼈가 솟은 손가락과 가느다란 팔목까지, 그리고 창백한 얼굴도……. 몇 주 사이 부쩍 야윈 딸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정 회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만든 건 절반 이상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정 회장은 시려오는 가슴을 누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했다.

“부끄러운 자식이라니.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

소영은 입을 다물고 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부름이 입가에 떠돌다 사라졌다.

“소영이 네가 한 말, 지킬 수 있는 거냐 ”

자신의 외모도 성격도 영민한 눈과 머리까지 쏙 빼닮은 소영이 딸인 것이 못내 아쉬웠었다. 아들이라면 마음 편히 회사 일을 가르치고 제 옆에 세울 수 있으리라 몇 번이나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소영을 그저 그런 자리로 묶어두었던 것은 소영이든 민영이든 내보내기엔 재계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았던 자신도 몇 번이고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마음을 눌러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늘 가슴과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맹수들의 아귀다툼 같은 그곳에서 가끔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가슴과 다른 말을 언제나 달고 있어야 하는 그곳에 더군다나 딸아이를, 소영이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도무지 몸도 유달리 약한 아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둘밖에 없는 딸들을 곱게 키워 좋은 자리로 보내고 그런 자리로 얻어지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회사에 도움이 될 거라 아쉬운 마음을 접고 접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믿음, 기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한 번도 거역을 해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던 장녀였다. 소영이 하는 말에 그녀에 대한 실망으로 무너졌던 가슴에 새로운 욕심과 기대가 솟아올랐다. 그날은 정소영이 재벌가 며느릿감 일 순위의 자리에서 YK 후계자 정소영의 자리로 옮겨지는 첫날이었다.

소영은 책상에 올려둔 책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버지 정현태 회장이 이야기를 마치고 건네준 책이었다. GE의 혁신을 수십 년간 주도하며 경영사에 한 획을 그은 전 GE 회장 잭 웰치의 저서.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제대로 경영을 해보겠다는 욕심을 냈을 때 처음 읽었다는 그 책을 쥐고 소영은 차마 첫 장을 넘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현태 회장의 손때가 묻은 책, 군데군데 그가 마크해둔 표시가 붙어 있는 책은 소영에게 단순한 책 한 권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겉표지를 넘기려 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열 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다. 소영은 불안한 기분으로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

[누나……, 서훈이에요.]

저도 모르게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올 만큼 그리운 목소리였지만 그리워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응, 이 시간에 웬일이니 ”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그 뒤로 서훈은 말이 없었다. 소영은 굳어버린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겨우 입을 벌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목소리 들려줘요. 아무 말이나…….]

평소와 다르게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가르며 깊숙이 들어왔다.

“어디야 ”

[그건 왜 물으세요 ]

“너 술 마셨어 ”

[……네, 많이 먹었어요.]

소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훈이 술을 마시고 전화할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의 머리가 찾아내는 대답은 모두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결코 정답이 아니었으면 하는 형편없는 것들.

“어디 있어  혼자야 ”

[네.]

“어디…… 내가 갈게.”

서훈은 길게 숨만 내쉴 뿐 답이 없었다.

“서훈아, 어디야  응 ”

절망적으로 매달리듯 묻자 서훈이 겨우 입을 떼었다.

[누나 처음 만났던 곳.]

“기다려. 갈게.”

[오지 말아요. 지금 나갈 거니까.]

너무 단호하게 자르는 말이라,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소영이 멈칫했다.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끊어요.]

“잠깐만.”

소영은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없더라도 나는 거기 갈 거야. 서훈아, 기다려줘.”

서훈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소영은 급히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윗도리를 벗으려다가 도로 입고는 옷장 아래에서 집히는 대로 바지 하나를 꺼냈다. 집에서 입었던 티셔츠에 청바지만 껴입은 소영이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아무 생각도 판단도 서지 않았다. 가슴을 꼭꼭 묶었던 매듭이 거칠게 출발하는 차 소리에 투두둑 끊어져 나갔다.

‘서훈아, 가지 마. 있어줘. 있어줘.’

왜, 왜 봐야 하는지 봐서 무엇을 할지는 아직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오로지 서훈을 봐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신림동 카페 문을 열고 소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 테이블마다 급히 둘러보았다. 서훈이 보이지 않았다. 뻑뻑해져오는 눈을 깜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기둥을 지나치다 말고 소영은 멈춰 섰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가 보인다. 칸막이와 기둥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없이 늘어선 맥주병을 앞에 두고 이마에 손을 괴고 있는 사람은 서훈이다. 가슴이 이렇게 부서지듯이 뛰는 것을 보면, 카페의 소음도 불쾌한 알코올 냄새도 급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을 보면, 눈에 오로지 그만 보이는 것을 보면, 그는 서훈이다. 소영은 천천히 다가섰다. 아직 소영을 알아채지 못한 듯 움직임이 없는 서훈 곁에 앉았다. 가만히 손을 들어 등을 쓰다듬었다. 한 번 가까이도 못 했던 등, 그리고 언젠가 쓰다듬어봤던 어깨, 팔……. 서훈이 그제야 눈을 들어 소영을 쳐다보았다. 초점 흐린 눈이었지만 아픔을 가릴 만큼은 아니었다.

“오지 말라 했는데.”

“온다고 했잖아.”

“왜, 왜 왔어요 ”

소영은 대답 없이 서훈의 등만 쓸어내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아프게 해서 미안해.

네 생각 안 했어, 아니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수없이 소리 되지 못하는 사과를 하면서, 기울어진 등만, 부드러운 머리칼만 쓸어내렸다.

서훈이 가누기가 힘든 듯, 한 손에 이마를 기댄 채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포기, 절망, 원망, 모든 것이 뒤섞여 어둡게 젖은 눈이었다. 항상 시원하고 밝았던 눈에 드리운 그림자가 소영의 가슴까지 길게 드리웠다.

“가자, 데려다 줄게.”

고개를 끄덕인 서훈이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섰다. 부축하려 다가서는 소영을, 손을 들어 거부한 서훈이 꽤 바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여름밤, 시원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누나…….”

“응 ”

서훈이 우뚝 멈춰 서고는 소영을 내려다보았다.

“누나를, 좋아했었어요. 많이.”

마디마디 괴롭게 게워내는, 좋아했었다는 과거형의 말이 가슴에 예리한 칼날이 되어 박힌다. 고개를 숙인 소영에게 서훈이 한 발 다가섰다. 신록을 닮은 시원한 체향이 코끝을 매캐하게 했다. 떨어뜨린 시선으로 작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이 들어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안아봐도 돼요 ”

고개를 든 소영의 눈에 서훈의 얼굴이 흐릿하게 잡혔다. 또렷하게 그를 담고 싶은데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서훈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차마 더 보지 못해 아래로 떨어뜨린 얼굴에 포근한 가슴이 느껴졌다. 가녀린 몸이 그의 몸에 묻히듯 마주 닿고 서훈의 단단하고 긴 팔이 안온하게 소영을 감쌌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혼자 아프지 말고 투정부리라고.”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킨 소영이 얼굴을 들었다.

“왜 그랬어요. 왜! 누나, 왜 그랬어…….”

상처 입은 눈은 그녀가 그렇게 아니기를 바랐던 일이 사실이었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만은, 서훈만은 몰랐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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