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9화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책에서 눈을 들어보니 서진이었다.
“동생아, 좀 나와 봐.”
웬일이야, 묻기도 전에 서진은 귓속말을 한 후 먼저 돌아섰다. 서진의 뒷모습이 빠르게 통로 쪽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서훈은 보던 책을 덮어 가지런히 한쪽에 두고 일어섰다.
“작은누나, 웬일로 경영대 도서관에 오고.”
“쳇, 역시 사회대 도서관보다 좋다. 에어컨도 더 빵빵해.”
서진은 서훈을 향해 입을 비죽해 보였다. 같은 누나지만 한 살 차이라 그런지 서연과는 판이한 성격 탓인지 서진은 누나라기보다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계절학기 수업은 괜찮아 ”
“뭐, 그냥.”
서훈은 씩 웃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난 무슨 일이야 단어가 잘 안 외워져 ”
“으으, 지알이가 달리 알 앞에 ‘ㄹ’이 하나 더 들어가겠어 ”
“뭘 얌전하게 그렇게 말하나, 지, 랄, 이 ”
서진이 곁눈을 뜨자 서훈은 시원하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누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무슨 지알이를 벌써 들고파 ”
“좀 빨리 가고 싶어. 석사 마치기 전에.”
“우와, 대단한 결심.”
“어, 꿈이 야무져. 계획대로면 4학년 초까지 지알이 받고 다음부턴 논문들 몇 개 파보려구. 제대로 분석해보면 아마 좀 부족해도 어드미션 올지도 몰라.”
“역시 대단하십니다.”
서훈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보이자 서진은 지친 표정을 금세 거두며 웃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누나, 공부가 안돼 어디 놀러 가 ”
“아냐, 더워서 그래. 그래서 팥빙수나 먹을까 해서 왔어.”
“아버지 차 있는데, 어디 갈까 기다려. 다 챙겨 나올게.”
“아니, 그냥 요기 아래로 가자. 학교 다시 오려구.”
서훈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생긴 팥빙수 전문점이 아니라 학교 아래 그래도 가장 깨끗하고 분위기도 좋은 카페로 서진은 앞장섰다. 서진의 것으로 팥빙수를 시키고 서훈은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팥과 우유얼음이 소복하게 올려진 팥빙수를 서진은 무척 좋아했다.
“팥빙수가 그렇게 좋아 누나 고 3 여름방학 때 팥빙수 한 그릇으로 점심 때운 거 알지 ”
서진이 마지막 남은 한 스푼을 싹싹 긁어 떠올리며 말하였다.
“응, 엄마가 팥빙수 사먹으라고 용돈 따로 주셨어.”
“요즘은 좀 덜 먹더니, 배앓이도 자주 하면서 웬 팥빙수야.”
“그냥.”
서진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출입구 쪽을 흘끔거렸다. 벌써 세 번째다. 왜 그래, 누구 오기로 했어 라고 물어보려는 참에 누군가를 발견한 듯 서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진이 손을 흔든다. 여기, 여기.
“어머, 서진 언니, 여기 계셨어요 ”
슬리브리스 상의에 몸매가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는 여자가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어, 넌 웬일이야 ”
“그냥 시원한 거나 먹을까 해서요.”
자세히 보니, 서진 후배라는 여자는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경영학 수업을 듣는다고 그랬지 꽤 화려한 생김새라 유명하다면 유명한 정도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별 관심 없이 들으며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동글동글 컵에 서린 이슬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던 서훈은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인식하고 고개를 들었다.
“윤서훈, 응 ”
“아, 미안. 뭐라고 그랬지 ”
“얘는, 애리 알지 의류학과 강애리. 내 고등학교 후배야. 경영학 수업 듣는다고 인사도 했었다는데 ”
그랬었나, 서훈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포기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 쪽을 택했다.
“안녕하세요 ”
“무슨, 높임말 같은 학번인데 말 놓죠. 우리.”
“어, 그래.”
“이번에 회계원리 들을 건데 워낙 유명해서 그쪽 노트 좀 빌릴까 해서. 서진 언니 꼬셨어.”
서진 옆에 자리를 잡은 애리는 살짝 눈을 치켜뜨며 서훈을 쳐다보았다.
“노트 ”
“복사하고 줄게.”
“그러고 싶은데 곤란하네.”
두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훈은 활짝 웃었다. 거절당한 여자와 서진이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누구 줬어. 대신에 다른 친구 거 구해볼게.”
“줬어 빌려준 게 아니고 ”
놀란 눈을 하는 서진에게 서훈이 자르듯 말했다.
“어, 완전히 줬어.”
서훈은 이만 일어선다는 의사 표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하였다.
“누나, 다 먹었지 ”
애리의 눈을 보니 좀 너무하는 건가 미안했지만, 서훈은 서진이 둘만 남기고 나가기 전에 먼저 일어서버렸다.
“도서관에 책을 두고 와서 이제 일어나야겠네. 다음에 봐.”
계산서를 들고 돌아서 나가버리는 서훈을 서진이 급한 걸음으로 쫓았다.
“야, 윤서훈!”
카페 문을 나서자마자 서진은 팩 소리를 질렀다.
“작은누나, 귀 아퍼.”
장난스럽게 찌푸리는 서훈에게 한 소리 더했다.
“너 애가 왜 그래 민망하게.”
“그거 내가 할 소린 거 알지 ”
“뭐어, 내가 뭐!”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얼굴로 웬 어설픈 우연이야.”
“너어!”
원망스럽게 흘겨보고 서진은 휙휙 걸어갔다.
정말이지, 애리한테 이제 한 달은 시달릴 거야. 내가 저놈 소개팅시키라는 서연 언니 말을 들은 게 잘못이야.
서진은 귀찮은 일을 해버렸다는 후회에 애먼 성질을 서훈에게 있는 대로 부리는 중이었다.
“누나아.”
팔을 붙잡아 돌아보니 서훈이 최대한 귀여운 표정으로 웃는 중이다. 팩하고 토라지면, 다른 남자들은 입도 못 벌리는데 도무지 저 녀석은 누나를 우습게 알아서, 그것도 서진 자신에게만. 서연 누나한테는 꼼짝도 못하면서 말이다. 더 쌩한 얼굴로 노려보자 서훈이 다정하게 묻는다.
“화났어 응 ”
그래, 넘어가줄게, 서진은 벌써 반분은 풀렸지만 여전히 차가운 소리로 남은 분을 풀었다.
“그래, 나쁜 놈.”
“나 소개팅 안 하는 거 알잖아.”
“누가 소개팅하래 그리고 거짓말은 왜 해 ”
“거짓말 ”
“노트!”
서진이 팔을 뿌리치자 서훈이 빙글거렸다.
“거짓말 아냐. 누구 줬어.”
“정말 ”
“응, 경영학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줬어.”
“여자지 ”
농담 반 진담 반 넘어가는 서훈을 막아섰다.
“설마, 그럼 내가 남자한테 주겠어 ”
“너 연애하지 누구야, 누구. 불어.”
서훈은 허허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설핏 어두워지는 표정을 서진은 놓치지 않았다.
뭐야, 윤서훈, 짝사랑
서진과 헤어져 도서관에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지만, 공부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서훈은 미련 없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소영은 벌써 몇 주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로 만날 때 다음번 약속 시간을 잡았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까 하다가도 참았기 때문에 소영과 전화를 할 일은 많이 없었다. 몇 주 동안 서훈이 두어 번 전화했었지만 매번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차가운 안내음이 알려주는 것 같다.
이제 그만 연락해.
눈을 감으면 태성 이지석의 전화를 받는 소영이 떠올랐다. 발그레해진 뺨, 당황하고 설레는 목소리. 처음부터 결코 욕심낼 상대는 아니었다. 감히 욕심부리기엔 너무 높이 달려 있는 깨끗한 목련이었다. 서훈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부지런히 경영대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오전에 쏟아진 소낙비 덕분인지 공기가 맑다. 소영은 뭘 하고 있을까, 재미있게 지내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쳐다본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너무 강하여 서훈은 눈을 찡그리며 걸어갔다.
***
소영은 티테이블 의자에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고개를 돌려 창을 응시한다. 멀리서 한강이 여름 햇살에 조각조각 부서지듯 흔들리고 있었다. 칠공자 중 세 번째라는 말에, 남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서둘러 옷가지를 껴입는 소리도 부서져라 닫히는 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높고 낮은 건물들, 오른편 멀리 길게 늘어진 초록빛 능선, 파란 하늘, 그리고 흰 강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만화경처럼 빙그르르 섞여버렸다.
‘이지석. 내가 이겼어. 나도, YK도 네 계획대로 되지 않아.’
울음 대신 입술에 희푸른 미소가 걸렸다.
그날 밤, 믿으려 하였다. 사랑이었다고. 지석도 자신도 사랑이었다고. 순도 백퍼센트의 사랑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이 가장 컸다고 믿었다. 비록 서훈이 가슴에 들어와 슬프게 했더라도, 지석이 거칠게 굴었더라도. 그리고 지석이 ‘나가라’는 소영의 한마디에 용무는 모두 마쳤다는 듯 그대로 호텔 방 밖을 나가버렸다 하더라도. 이틀 후, 지석이 급히 해외 출장을 가야 한다며 전화를 했다.
‘소영아,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 다녀와서 이야기해.’
그 목소리가 다정하여 꼬리를 무는 여러 생각을 잘라냈다. 윤정을 만나기 전까지는 필사적으로 지석을 믿으려 애썼다. 야비한 미소를 짓던 윤정의 얼굴이 떠오르자 소영은 제 몸을 감싸듯 팔을 둘렀다.
지석의 생일 파티가 있었던 다음 주 수요일 오후, 옥수동에 들러 요리 강습을 마치고 나서는 소영의 눈에 막 차에서 내리는 윤정이 들어왔다. 우연한 만남이 달갑지 않은 고등학교 선배였다. 강남 일대 최고 빌딩 부자라 불리는 그녀 아버지를 등에 업고서, 경박스럽고 요란한 행동이 맘에 맞지 않아 그저 여럿이 모이는 곳에서 보게 되면 보는 정도였다. 거리감 있는 목례를 하고 지나려는데 등 뒤로 칼칼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정소영. 제대로 인사하고 가.”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윤정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너, 잘 지냈어 ”
지석의 생일날 봤으니 별로 긴 시간이 아닌데 무슨 소린가 싶었다. 소영이 불길한 예감으로 살피자 윤정은 빙글거리며 한 번 더 물었다.
“잘 지냈냐구.”
“네.”
더 이상 대꾸 없이 지나려는 소영을 확실한 비웃음이 붙잡았다.
“좋았어 정소영 ”
순간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지만 소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애써 아닐 거라 어리석게 믿으면서.
“급했나 봐. 허긴, 지석 오빠 정도면 YK 정소영도 그렇게 몸달아 잡고 싶을 만하지.”
“무슨 소리예요 ”
“항상 새치름히 눈을 깔고 다니더니 너의 그 내숭에 도형 오빠 차만 뺏기게 생겼다.”
“네 ”
당황스러움으로 목이 뻑뻑해져왔다.
“지석 오빠, 너 따먹는다고 내기 걸고 갔다던데. 뭐라더라 눈먼 공준지 여왕인지 왕궁까지 바친다고.”
소영은 바들바들 떨려오는 다리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발끝에 힘을 주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레시피가 담긴 샛노란 플라스틱 파일을 꼭 쥐었다.
“YK 바치고, 몸 바치고 그렇게까지 해보고 싶었니 하긴, 지석 오빠가 좀 잘났지 ”
윤정은 통쾌하게 온몸을 흔들며 웃어댔다. 옥수동 상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흘끗거리든 말든 목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어머, 새파랗게 쏘아보긴. 틀린 말이야 틀렸음 내가 정정해줄게. 뭐라더라, 또 들었는데……. 그날 밤에 도형 오빠가 확인하니까 지석 오빠가 그랬대더라. 정소영 별거 없더라고 하더래. 어디 너처럼 몸 갖다 바치는 여자가 한둘이어야 그게 먹히지. YK도 정소영도 대 태성그룹 앞에서는 그리되나 봐. 그렇게라도 태성과 엮이고 싶었대 ”
소영은 그대로 서서 윤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신이 나 어쩔 줄 몰라 실룩이는 뺨과 번들번들한 립스틱이 발린 비틀린 입을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야아, 진짜 웃겨. 잘해봐. 그렇게 결혼하고 싶으면.”
일그러진 입술에서 비아냥이 반복되었을 때, 소영도 곱게 웃었다.
“선배는 그렇게 비참하게 노력해야 되나 봐요.”
“뭐 ”
“이지석 그 사람이 뭔데 내가 뭘 바쳐요. 난 박윤정이 아니라 YK 정소영인데.”
붉으락푸르락하며 발을 굴리는 윤정에게 마지막으로 느긋한 웃음을 보이고 매끈하게 돌아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대기된 자신의 차 쪽으로 또박또박 몇 걸음 걸어갔다. 검은 세단에 들어가는 소영의 뒷모습에 대고 윤정이 악을 쓰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레시피 파일을 가슴에 끌어안고 소영은 창밖만 보았다.
내기라, 왕궁을 바치는 여왕이라.
훗, 소영은 힘없이 웃었다. 모든 것이 비참하게도 명확했다. 사랑은 아니었다는 것. 가장 좋은 쪽으로 해석해도 이지석은 YK가 탐이 났고, 정소영에게 도장을 찍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정소영은 왕궁을 바치고 몸을 바치는 어리석은 여왕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만들 수 없었다.
온몸을 비틀어가며 통쾌하게 웃던 윤정이 떠오르자 소영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온몸에서 온기란 모두 다 빠져나간 듯, 차가운 돌처럼 굳어버린 육체와 달리 상처받은 영혼은 더욱더 예민하게 몸부림치며 상처를 짓이겼다.
‘YK든 정소영이든 이지석 너 따위가 능멸할 순 없어.’
이지석이 속한 칠공자들이었다. 여자를 하나같이 우습게 생각하는 남자들, 그중 지석은 다르리라 믿었던 것도 어리석은 자가당착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지석에게는 작은 생채기 정도 났을까
좀 창피할 테고, 그리고 YK를 탐내던 계획은 틀어졌을 테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 최고 태성그룹의 가장 똑똑한 아들일 텐데.
후후,
소영은 작게 웃었다. 자신에게 끓는 기름을 들어붓듯이 미련한 짓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고 소영은 믿었다.
윤정의 말을 들은 후, 소영은 아버지가 계신 서재 문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소영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될 미래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지석은 아버지를 찾아갈 테다.
‘회장님, 소영이와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이미 깊은 사이입니다.’
수차례 지석의 형을 내비치며 소영을 탐내던 이 회장도 더없이 기꺼워할 테고, 아버지는 오히려 이지석처럼 똑똑하고 유능한 사위가 YK 일을 수족처럼 해준다면 몹시 든든해하시겠지. 게다가 태성은 부동의 한국 1위, YK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그룹이다. 지석이 적극적으로 들쑤셔댄다면, 아버지가 이강식 회장을 무슨 핑계로 거부할 수 있을까. 지석에 대한 소영의 오랜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엄마는 아무 의심 없이 기뻐하실까.
‘아버지, 이지석과 잤습니다. 저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는 YK가 탐났다고 합니다. 내기를 걸고 잠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저는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다. 말을 꺼낸다고 하여도, 소영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사실이 소영의 목구멍에 꾸역꾸역 쑤셔 박힌다.
소영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당황하시고, 이어 화를 내시겠지. 실망하시겠지. 길게 침묵하시겠지. 그리고 이지석 정도면 괜찮다 판단하시겠지. 지석을 만나 확인하고, 뻔뻔한 거짓말에 속고 소영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으며 오히려 더 결혼을 서두르실 테다. 사위를 두어 YK 일을 하려 했던 만큼, 지석은 아버지에게 최상의 선택에 가까우니까. 지석과의 깊은 관계가 소문까지 났다는 딸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을 할 만큼 유연한 분은 결코 아니니까.
결혼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소영은 천천히 손을 꼽아본다. 졸업까지 반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면, 정소영은 이제 이지석의 아내, 태성의 셋째 며느리가 된다. 이지석과 매일 한침대에 눕고 한침대에서 일어나겠지. 내키는 대로 싫증 날 만큼만 취해지고 곧 버려지겠지. 그날처럼……. 감옥 같은 집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종일 이지석의 아내, 태성의 며느리로 종종거리며 살아갈 하루가 그려진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하루 치씩 겨우 견뎌내며 야금야금 마음이 죽어가고, 영혼이 움푹 패어가겠지. 독약 같은 증오를 품고서 매일매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면처럼 웃으며 살겠지. 젊은 날엔 이지석에게 YK를 뺏기지 않기 위해 부질없는 애를 쓰다 지쳐갈 테고, 결국에는 이지석이 YK를 장악하는 것을 맥없이 지켜봐야 할 것이다. 결국, 정소영은 이지석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노력하고 버티면서 늙어가겠지.
마치 한 번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눈먼 이가 시력을 찾은 것처럼, 소영은 갑자기 저를 둘러싼 모든 현실이 또렷하게 직시되었다. 닫힌 서재 문 앞에서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소영의 결혼식이, 한침대에서 지석과 나란히 누운 제 모습이, 태성의 며느리로 종종거릴 고달픔이 그림처럼 보였다. 감옥 같은 집, 목이 졸릴 것만 같은 구속감이 생생하다. 인형처럼, 껍데기처럼 살아가며 늙어갈 초라한 여인이 바로 제 자신이라는 참혹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영은 이를 악물고 서재 문밖에서 돌아섰다. 제 앞에 놓여진 가혹한 미래를 누구의 도움 없이 제 손으로 끊어버릴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그 칼에 사지가 끊겨나간 다해도. 아니, 스무 해 넘게 위선으로 살아온 정소영을, 남은 수십 년을 껍질처럼 살아야 할 정소영을 죽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제대로 한 번만이라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없었다.
다정한 얼굴 하나가 떠오르자 아무렇지도 않던 눈가가 못 견디게 화끈거린다. 소영은 티테이블에 이마를 괴어 얼굴을 숨긴다. 서훈아, 저도 모르게 달싹거리던 입술을 힘주어 다문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버린 것이었다. 지석에게 안겼을 때부터, 신록의 향기는 버렸다.
네가, 정소영 네가 선택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