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8화
“여왕이라니. 너, 무슨 소리야.”
정색을 하는 도형을 보며 지석은 불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도형의 얼굴에서 늘 뒤집어쓰고 있던 눈꼬리가 살짝 처지는 웃음이 벗겨진다. 조금 속이 시원하다. 더 이상 말 섞을 일이 없다. 돌아서 한 발 떼었을 때 도형이 제법 분명하게 말했다.
“이지석! 웃기지 마. 꺾일 꽃은 따로 있어.”
“훗.”
돌아보자 도형은 한마디를 더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내가 너 형님이라 불러줄게. 아, 차도 주마. 너 바짝 기느라 태성 중형차 아니고는 못 타봤지 ”
“좋을 대로.”
지석은 천천히 돌아섰다.
어쩌면, 정소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묶을 수 있는 방법이로군.
정소영이 아직 룸에 있다면 오늘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우연이든 하늘이든 자신에게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
“후, 정말이지…….”
소영은 룸 가운데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지갑을 찾지 못했다. 스위트룸 전체를 꼼꼼하게 둘러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탁자, 데스크, 미니바 위에도 화장실 선반에도 지갑은 없었다.
‘룸에서 흘린 게 아닌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방 이외의 장소에서 지갑을 꺼낸 일은 없었다. 핸드백을 열었던 것도 지갑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케이크를 가져온 직원에게 팁을 준다며 재킷을 찾는 지석을 보고는 ‘제가 할게요’ 말하고 서둘러 지갑을 꺼냈었다. 그리고 바로 샴페인이 터졌던가……
‘어떡하지 ’
포기하고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지갑 속의 신분증이 맘에 걸렸다. 혹시 호텔 방에서 발견되면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험한 소리가 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한 번 더 방을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릎으로 걸으며 소파 아래까지 들여다보던 중, 소영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아!’
삼인용 소파 아래쪽, 몇 개의 스탠드 불빛으로는 컴컴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가 분명 있었다. 떨어뜨린 지갑이 누군가의 발에 부딪혀 미끄러져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갈색 납작한 장지갑이길, 소영은 상체를 숙여 낮은 틈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으로는 매끈한 양가죽이 분명했다.
‘와, 찾았다.’
소영은 기뻐하며 손을 조금 더 밀어 넣으려다가 순간, 뜻밖의 소리에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뭐 해 ”
곁에 서 있는 사람은 지석이었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소영은 잔뜩 구부렸던 상체를 황급히 펴며 앞섶을 매만졌다. 여전히 무릎은 꿇은 채로 일어서지 못하자 지석이 몸을 낮췄다.
“지갑이 여기 있어 ”
“네, 그런 거 같아요.”
“그게 왜 거기 들어갔나.”
지석은 소영 옆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더니 소파 아래에 눈을 가져댔다. 손을 넣어보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소파를 뒤로 밀었다. 처음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소파가 힘을 주어 한 번 더 밀자, 조금 뒤로 움직였다. 다시 지석이 몸을 굽히자 소영은 급한 마음에 손을 먼저 뻗었다. 더 깊이 상체를 기울이고.
“제가, 할게요.”
호텔 스위트룸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겨우 찾았다는 안도감에 소영은 다른 건 느낄 수도 없었다. 부드러운 질감의 블라우스 네크라인이 아래로 처지고 뽀얀 속살이 드러난 것도 지석이 숨을 멈추고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 찾았어요. 고마워요.”
소영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갈색 지갑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 하자 먼저 서 있던 지석이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는 눈으로 내민 손을 보고만 있자, 낮은 웃음이 떨어졌다.
“안 일어나 ”
“네.”
소영은 손을 살며시 얹었다. 지석이 굳게 잡고 힘을 주자 편하게 일어서긴 했지만 그 사이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다리에 찌르르 급작스런 통증을 느끼며 휘청했다. 얼굴이 지석 가슴에 부딪히듯 닿았다.
“미, 미안해요.”
순식간에 피가 얼굴로 쏠려드는 것 같았다. 지석이 낮게, 한 번 더 웃었다.
“앉자. 다리 저리나 봐.”
지갑을 숨기고서 애를 먹였던 소파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어색한 기분을 누르며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넣는데 지석이 팔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영은 손길을 털어내듯 머리를 옆으로 틀어버렸다.
“싫어 ”
자세를 고치고 허리를 펴는 소영에게 짧은 물음이 떨어졌다. 소영은 지석을 한 번 올려보다가 이내 반대편 옆으로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이렇게 머리 만지는 거 싫어요.”
“불쾌해 ”
“아니요.”
“그럼, 왜 싫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지석이 뒷머리를 감싸듯 쥐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얼굴이 돌려졌다. 눈에 어른거리는 열 기운에 가슴이 죄어들었다. 화가 난 듯 지석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대답해 봐, 왜 싫어 ”
잡힌 뒷머리를 빼어내려 했지만 지석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포기한 채로 소영은 답했다.
“무시하는 거 같아.”
“하하.”
지석이 놀랄 만큼 부드러운 표정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기를 다 거두지 않고 물었다.
“내가 그래 ”
“이거 놓으세요. 불편해요.”
소영은 지석의 팔을 잡았다. 이제 풀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체가 불안하게 기울어지고 얼굴이 더 젖혀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석의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오빠 ”
저도 모르게 입술에 손을 가져대는데 그 손마저 잡혔다.
“이건……, 싫지 않을 거야.”
두렵도록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말했다.
“아니…….”
미칠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누르면서 겨우 벌린 입이 막혀버렸다. 이번에는 스치듯 떨어지지 않았다. 거칠게 빨아들이는 입술이 벌어진 이 사이로 성큼 들어오는 매끈한 혀가 입맞춤이란 입술만의 접촉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보려 해도 뒤로 젖혀진 채로 꼼짝할 수 없었다. 잡힌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지석은 멈추지 않았다.
입술이 겨우 떨어지나 싶더니 지석이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무시하지 않아.”
“나는, 오빠, 나는…….”
팔을 쓸어내려온 손이 허벅지 위에 가볍게 올려졌다.
“오빠.”
소영이 지석의 손을 가로막듯 쥐었을 때 지석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누구 다른 사람 있어 ”
소영은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며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이마 위로 입술을 가볍게 비비며 지석이 말하였다.
“사랑해.”
꿈같은 고백이 들리자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석을 쳐다보았다. 소영의 손을 간단하게 뿌리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구속한 후 지석은 이제 스커트 허리선을 문질렀다. 소영이 움찔거리며 몸을 뒤트는 순간 빠르게 블라우스를 빼내고 속살을 더듬었다.
“오빠, 싫어요.”
멈추지 않으며 그가 물었다.
“내가 싫어 ”
“아니, 오빠 좋아해요. 많이.”
“나도.”
블라우스 속의 손은 차가웠다. 차가운 손이 얇은 상의를 손쉽게 걷어올렸다.
“지석 오빠!”
울 것 같은 소리를 냈지만 어깨를 틀어쥔 그의 힘은 너무 강했다. 가슴으로 뻗어오는 손을 부자유스런 팔을 들어 밀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파,
오히려 소파에 등을 대고 반쯤 누워버린 자세로 소영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오……빠.”
움켜쥐었던 가슴을 놓아주었지만 이제 지석은 거치적거리는 블라우스를 완전히 벗겨내려는 듯 아래서부터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막아내는 손을 거세게 쥐면서 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해.”
드러난 배꼽에 입을 맞추며 몇 개 되지 않는 단추를 다 풀어버렸다.
“이건…….”
타고 올라오는 축축한 혀에 몸서리를 쳤지만 눌려진 어깨 때문에 방향을 틀 수도 없었다. 지석이 속옷을 걷어올렸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호텔 에어컨의 차가운 냉기가 순식간에 가슴으로 몰려들었고 정수리까지 선득했다. 그리고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번뜩 정신이 들어 소영은 크게 몸을 뒤틀었다.
“쉿.”
입술에 삼켜지는 순간,
“아…… 아…….”
무력하게 입을 벌려 소리 냈다. 지분거리는 손길을 거두지 않으며 지석이 입을 맞췄다.
“늘 너를 가지고 싶었어.”
헐떡이며 다시 말했다.
“사랑해.”
힘을 다하면 밀어낼 수도, 호텔 방 밖으로 도망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랑해, 그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소영은 정지했다. 모든 것을.
지석은 아슬아슬 걸려 있는 상의를 모두 벗겨내버렸다.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을 한 번 더 맛본 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오빠!”
버둥거리는 몸짓도 목소리도 이제 느낄 수가 없었다. 시작은 YK 정소영을 묶어두는 것이었지만 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느낀 순간, 들끓어오르는 피가 심장을 태울 것만 같았다. 미치게 가지고 싶다,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도록 길게 느껴진 침실까지 몇 미터의 거리를 지나 침대에 소영을 조금 거칠게 눕히고 말았다. 벌어진 입술을 급하게 빨아들이며 그제야 걸치고 있던 양복 재킷이 몹시 거추장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열기가 잔뜩 오른 몸을 겨우 일으켜 재킷과 셔츠를 벗었다.
헝클어진 머리, 발갛게 달아오른 뺨, 벌어진 입술…….
항상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여자였다. 이런 모습으로 앞에 있는 정소영은 만족스러웠다. 단 하나, 노출된 가슴을 가리고 있는 팔이 맘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소영이 벗은 지석의 상체를 흘끗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등을 보였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셔츠를 털어내듯 급히 바닥에 떨어뜨렸다. 가느다란 팔목을 잡아 얼굴 옆쪽으로 붙여 고정시킨 채 천천히 시작했다. 뺨에서 목덜미로 쇄골을 지나는 동안 소영은 움찔거리면서도 팔목을 놓아줄 때마다 끝없이 밀어냈다. 얕게 흘리는 숨소리조차 싫은 듯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본능적으로 어깨라도 한 번 움켜쥘 법한데……. 도무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미치겠어. 이러지 마.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형체 모를 감정을 누르며 몇 번이나 반항하는 동작을 무시하고 스커트까지 끌어내려 던져버렸다.
소영은 가슴을 작게 들썩이면서도 고개를 비틀어 지석을 외면하고 있었다. 감았다가 뜨는 까만 눈동자에 열기도 사랑도 없었다. 슬픔에 가까운 표정을 읽은 순간 지석은 터지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적어도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하는 여자를 안은 적은 없었다. 아니, 제 아래에서 제 손길을 받으며 다른 표정인 여자는 없었다.
정소영……! 언제까지 그런 표정으로 식어 있을 수 있을지 봐.
지석은 뻣뻣한 몸을 짓누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깨물어 침묵하는 입술 대신 몸은 다른 말을 했다. 파들파들 전신이 떨리고 하얀 팔에는 소소하게 소름이 돋았다. 혀로 핥아 올리며 낮게 웃었다.
“그렇게 떨 거 없어.”
발끈하듯 빼내는 허리를 거세게 잡았다. 어느 한 군데 부드럽지 않고 약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몸이었지만 처음 닿는 것이 분명한 곳곳까지 집요하게 굴었다.
후…….
열기를 뿜어내며 정신없이 협탁을 더듬었다. 이대로 폭주하다가는 실수하게 될지도 몰랐다. 정현태 딸을 임신까지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순간, 소영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석은 팔을 휘어잡는다.
“왜 이래!”
소영은 울듯이 소리쳤다.
“놔요.”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잖아,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바르작거리던 몸이 고요하게 가라앉고 멍하니 지석을 바라보았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그는 서둘러 뭔가를 더듬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무지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지석이 협탁으로 손을 뻗어 언제 두었는지도 모르는 작은 정사각형 봉지를 들고 익숙한 동작으로 찢고 그 속에 든 것을 꺼내었을 때, 가슴이 쩍 소리가 나며 쪼개졌다. 조각조각난 틈으로 튀어나와 소영을 덮친 것은 지독한 절망감이었다. 누구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오늘의 상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양동이째 퍼부어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흘러내렸다.
“왜 그래.”
지석을 똑바로 쳐다보는 소영의 눈에 경멸과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놔줘요.”
소영은 격하게 숨을 쉬며 팔을 뿌리쳤다. 연약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믿을 수 없도록 세차게 밀어내며 빠져나갔다. 소영의 발이 채 바닥에 닿기 전 지석은 소영을 강한 힘으로 속박했다.
“놔, 싫어.”
칼날 같은 목소리였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이미 닫혀버린 소영의 마음은 읽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지석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못 들어주겠어.”
하얗게 질린 얼굴, 파랗게 정맥이 솟은 목덜미, 들썩이는 가슴까지 천천히 담았다.
“그러기엔”
힘들이지 않고 침대에 다시 쓰러뜨렸다.
“너무 많이 왔어.”
필사적인 반항도 이제 소용없다. 버둥거리는 다리를, 일으키려는 어깨를 누르는 건 턱없이 간단했다. 단지, 너무 많이 와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절망에 가득 찬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었다. 자유로운 한 부분, 왼팔을 들어 소영은 지칠 때까지 밀어내고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가슴에 목에 얼굴에 닿는 곳마다 힘없는 그 주먹질에 무척 아팠다.
“오빠, 왜 그래……. 나한테 왜 이래요.”
흐느끼는 말을 끝으로 손은 침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분노와 절망에 가득한 눈도 거둬버린 채 소영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뭉클, 심장에서 욕정만은 아닌 뜨거운 샘이 터지는 것 같아 지석은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영아.”
“싫어.”
소영은 가슴을 밀어내며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얼음보다 차가운 절망이 지석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고 욕정 따위나 야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화염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 정소영. 새겨줄게. 고통이든 뭐든 이지석 여자로 평생을 살도록 새겨줄게.
나쁘지 않아. 어떻든 널 얻는다면.
작은 움직임도 없이 굳어버린 몸이 고통과 수치감에 뒤틀릴 때까지 지석은 소영을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터지는 신음 소리를 참는 것만이 유일하게 무너지는 자신을 지키는 길인 것만 같았다. 지석은 유린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행위로 좀 전까지의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머리끝까지 찔러대는 느낌에 감은 눈을 떴다. 노란 스탠드 불이 비쳐드는 하얀 천장이 아래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은 순간, 소영은 제 입에서 터지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온몸을 관통하여 양쪽 귀를 뚫고 나오는 상상하지 못했던 통각이었다. 시트가 잔뜩 구겨지도록 양손으로 움켜쥐는데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지석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눈물이 흐르나 보다.
귓바퀴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고통 때문에, 그리고 고통 때문에 터지는 신음을 막으려. 지석은 그것조차 허용하기 싫었던지 입술을 깨물어왔다. 입술이 벌어지는 동시에 지석이 틈을 주지 않고 움직였다. 끝없이 터지는 비명이 그의 입술 속으로 삼켜졌다가 제 입속으로 돌아왔다.
아파, 아파.
절망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는 뜨거운 몸의 온도와 다른 말을 했다.
“처음에는 다 그래.”
지독하게 차가웠다.
지석과의 사랑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언젠가 상상해봤었다. 그와의 사랑은 혀에 닿으면 사르르 녹아드는 달콤한 솜사탕 같을 거라 생각했다. 가볍고 따뜻한 새털 이불을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차갑고, 무거운 고통일 거라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
가슴에서 시린 바람이 끝없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찢어진 목련 꽃잎이 하나씩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나를 보면 목련이 생각났어요.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지석에게 안겨 있는 동안 뻔뻔스럽게도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 서훈의 수줍은 고백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기억에, 생생한 목소리에 왜 가슴이 에어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나, 투정하는 법도 몰라요 이게 무슨 투정이야.’
그 말이 언 가슴을 녹여, 눈물이 나도록 포근하게 적셔들었다. 어쩌다 손이 살짝 스쳐도 긴장하던, 싱그런 신록을 닮은 얼굴이 가슴 가득히 채워졌다. 가슴이 말하는 사랑은 서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