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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7화 (7/54)

# 7화.

7화

곁에 서서, 청바지 아래로 서훈의 운동화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무렇지도 않게 서훈이 물었다.

“샀어요 ”

“응.”

서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서훈아.”

돌아보는 서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서훈아, 이건 네 거.”

“네 ”

“아까 키홀더.”

“아…….”

여전히 내려져 있는 손에 바짝 가까이 대며 봉투를 작게 흔들었다.

“받아.”

“제 차도 없는데요.”

“집 열쇠 달면 되잖아. 다음에 돈 벌어 네 차 생기면 여기다가 끼워줘.”

서훈이 쓴웃음을 띠며 봉투를 받았다.

“고마워요.”

마음이 쿡, 쿡 아려와 소영은 서훈을 외면하였다.

***

“네, 회장님. 월요일 오전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강식 태성 회장과 통화를 마친 후 지석은 흐릿해지는 눈을 깜박였다. 차 에어컨 온도를 낮추고 고개를 흔들어본다. 피곤에 지친 까닭인지, 지나친 더위 때문인지 아스팔트 위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지독한 영감.

오랜만에 지석을 대동하지 않은 출장길에서도 틈도 없이 전화를 해댄다.

말대로 딸랑이 신세다.

‘딸랑이’

얼마 전, 술에 취한 지형이 지석에게 가시 돋친 비웃음을 흘렸다.

‘딸랑이 자식.’

‘네 ’

‘야, 자식아, 그렇게 딸랑거리면 태성이 니 거 된대  왜, 태성자동차가 탐나냐.’

‘형님들이 계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같은 놈이……. 꿈도 안 꿉니다.’

‘아하  기억해둘게.’

지형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석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비겁한 놈. 네가 회장님한테 붙어 속살거리는 짓을 모를 줄 알아  열심히 해봐. 너 따위는 닳을 때까지 딸랑거려도 태성자동차는 안 돼.’

그래, 지금은 내가 기어주마. 지석은 이를 악물었다.

닳을 때까지 딸랑거려도…….

모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한 밤에도, 심지어 여자를 데리고 호텔에 들어서다가도 회장의 호출이 떨어지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딸랑이, 맞았다.

훅한 여름이다. 잠시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더위는 성가셨다. 에어컨으로 서늘하게 식혀진 방에 들어서며 지석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주말이라고 집에 들어와 빈둥거려본 날이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하다. 침대에 드러누워 매끈한 천장을 바라보자니 베이지색 가느다란 세로줄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천장 벽지가 저런 모양이었던가. 그저 깨끗한 솔리드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자연광 아래 침대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천장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늘 침대라는 것에 몸을 파묻기가 무섭게 고개 한 번 못 돌리고 늪 같은 잠에 빠져들었으니. 허용된 수면이란 세 시간이 고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조간신문 여섯 개를 훑어보고 조식 전, 회장에게 브리핑하는 것으로 지석의 일과는 시작되었고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그는 기관차처럼 일했다. 후진은 없었다. 휴식을 위한 정차도 없었다. 그저 떨어진 연료를 주입하며 일정한 빠르기로 달렸다. 가속조차 필요 없는 최대의 빠르기로. 가끔 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지만 기관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달려도 도달할 목적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지철은 일곱 해 위, 지형은 네 해 위였다. 그들이 만든 위치는 앞으로 사 년, 칠 년을 쉼 없이 달린다 해도 넘지 못할 벽일지도 모른다. 지석은 늦둥이 막내라 사랑을 독차지하는 지준도 외동딸이라 모든 것이 용납되는 지선도 아니었다. 태성 이강식 회장의 삼남, 그의 위치는 그것이 전부였다.

‘고작해야 강철 떼다가 파는 태성 스틸이나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지.’

지석은 손을 들어 욱신욱신 경련이 시작되는 미간을 짚었다.

십 년을 달린다면 가능할 것인가. 십 년을 달리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불쾌한 회색빛 상념의 꼬리는 시끄럽게 울리는 벨 소리로 싹둑 끊어졌다.

“네, 이지석입니다.”

[과장님, 신경진입니다.]

“신 비서님, 무슨 일로 ”

[오늘 저녁 예약 확인드리려구요. H호텔 스위트로 예약했습니다.]

“아, 네.”

까마득히 잊었다는 반응에 신 비서는 조용히 웃었다.

[잊으셨죠  오늘 저녁, 파티하기로 하셨잖아요. 생신 축하 인사는 화요일 당일 날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두 주 전부터 준비하라 일러놓고 정작 당일에서는 잊어버리다니, 지석은 협탁 위로 핸드폰을 내리려다가 도로 들어 올렸다. 얼굴 하나를 떠올리며 다시 폴더를 연다. YK 정소영, 분명 빠뜨리지 않고 리스트에 넣었다.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열일곱 명, 다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케이크에 불붙이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비틀거리고, 뭐 하나 내키는 건 없다. 하지만 YK 정소영은 와야 했다.

[아, 지석 오빠 ]

당황하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만족스럽다.

[네, H호텔이죠 ]

차분해지기 시작, 언제나처럼.

[지금 선물 고르고 있어요. 늦지 않게 갈게요]

냉정한 표정이겠지.

[아니에요, 도형 오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제기랄, 지석은 쓴맛을 다시며 전화를 끊었다.

도형이라, 지금부터 같이 있는 건가  분명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생각을 털어냈다. 도형이 같은 찌질한 놈 따위야 상대가 아니다.

하긴 정소영이 조심스럽지 않은 적은 없었지. 처음부터.

처음 본 건 소영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YK 정현태 회장 집으로의 초대에 이강식 회장이 처음부터 지석을 대동할 마음은 없었다. 지철이 급성 장염으로 앓아누웠고 군대 가 있는 지형을 부를 수는 없으니, 데려가겠다고 한 지철 대신 지석이라도 가는 편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가는 동안 차 안에서 YK 정 회장의 두 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거긴 딸뿐이야. 늦게 하나 더 봤는데 둘째도 딸이었지. 돌아가신 회장님이 그 딸들을 그렇게 귀애했는데. 하긴, 그리 아끼는 정현태 딸들인데 오죽 예뻐했을라고.’

‘아유, 그 부부 닮았으면 둘 다 예쁘겠습니다.’

‘당신은 안 봤었나  오늘 보시게. 예뻐. 하나 데려오면 좋겠어. 허허.’

‘몇 살이죠 ’

‘어려. 지철이 짝으론 너무 어려.’

이 회장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전 YK 회장은 장남에게 그룹 대부분을 넘겼고 그가 정현태였다. 회장이 건재하던 시절부터 정현태의 입지는 굳건했고 그가 온전하게 맡은 지금, 오히려 창업주의 공백을 넘어서는 성과를 낸다는 평이었다.

그런 그에게 딸만 둘이라.

아쉬운 눈을 끔벅거리는 이 회장의 속이 잡힐 듯 보였다. 태성에 비하자면 규모가 아래이긴 해도 알짜배기 그룹 YK에 침 흘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

성북동 골목으로 차량이 진입하는 동안 YK 딸들을 상상해 봤다.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딸, 그리고 장녀, 정소영. 또래인 지선을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굉장한 응석받이임이 틀림없으리라 믿었다.

피곤하겠어, 노친네들 비위 맞추는 것에서 정현태 회장 부부에게 흠 잡히지 않기, 그리고 귀공녀 대접까지 오늘의 할 일인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상상보다 더 화사하고 상냥한 정현태의 부인에게 인사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둘이 뒤따라 걸어 나왔다. 작은 아이는 꼬박 머리를 숙이더니 금세 지석이 엄마에게 준 꽃다발에만 관심이 온통 쏠렸다. 기어이 제 손으로 꽃다발을 건네받고는 장미 송이를 만지작거렸다.

저 아이가 둘째일 테고 그럼 이쪽이…….

호리호리한 몸에 키가 큰 편인 소녀가 이 회장 내외에게 단정하게 인사하고 지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귀한 딸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는 하얀 레이스 원피스 위로 흰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처음 보네요. 이지석이라고 합니다.’

‘네, 정소영입니다.’

그날도 정소영은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도무지 틈이라고는 없었다. 처음 봤을 때 약간 붉어진 얼굴을 제외하면, 지선과 비슷한 또래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고 매끄럽게 손님 접대를 해냈다. 초등학생이라 하지만, 철없이 웃고 떠드는 동생 민영과는 너무 다른 정소영. 아마 민영이 나이부터,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우아한 자세를 익히고 나왔을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자연스러웠다. 소영에 대해 이 회장 내외가 칭찬할 때마다 정현태 회장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지석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이미 많은 것을 알았다. 그중 하나는 지철이 급성장염에 걸린 것이 지석에게 일생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YK 정소영…….

예상대로 잘 성장했고 대학 입학을 하기 전부터 이미 재계에서 며느리 일 순위였다. 일 순위도 모자란 영 순위. 그리고 명성에 걸맞도록 정현태 회장도 정소영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이미, 지형에 대해 이 회장이 은근슬쩍 떠보았지만 정 회장 선에서 정리되었다. 물론 표면적 이유는 ‘아직 학교 다니는지라. 너무 어립니다’였지만 그 거절을 두고 이 회장이 씁쓸하게 덧붙인 말 때문에 어머니가 파르르 분노했었다.

‘지형이랑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 녀석 학벌이 너무 달려. 정 회장 눈에 안 차지. 병신 같은 자식, 학교가 그게 뭐야!’

‘아니, 회장님, 걔가 머리는 제일 좋지 않습니까. 학벌이 달리다니요, 서운합니다.’

하긴, 어머니의 외모를 쏙 빼닮은 자식은 지형뿐이다. 게다가 못난 자식 더 낀다는 옛말을 입증이나 하듯 어머니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아들이 지형이니까. 아무튼 지석으로 봐선 나쁠 것이 하나 없었다. 도형이 따위, 흘끗거리는 놈들쯤이야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시시한 놈들의 눈길이 닿는 것을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최고라 꼽히는 성진의 장남 쪽도 소영에게 관심이 있다는 정보가 몇 달째 신경을 긁고 있다. 이제 4학년,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 해 넘게 공을 들였다. 정소영이 겁을 먹고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관심을 거두지도 않을 만큼, 적정선을 유지하며 팽팽하게 당겼다가, 때로는 무시해주고 때로는 다정하게 굴며 긴장감을 유지해왔다. 지금까지는 성공 아니던가.

지석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지그시 쳐다볼 때면 얼굴을 붉히지만 이내 깨끗하게 표정을 지우며 냉정한 눈빛을 보이는 소영을 붙잡을 계기가 필요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지석은 거품 낸 퍼프로 천천히 몸을 문질렀다.

‘그럼, 쉽진 않지. YK가 아니던가.’

떨어지는 물 아래 서며 피식 웃었다.

‘쉬운 건 재미도 없어. 안 그래  정소영.’

***

로비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과 같이 소영은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지석은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소영이 왔네. 오랜만이야.”

“네.”

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소영도 작게 웃었다. 반팔 아래 드러나는 지석의 매끄러운 피부는 건장한 구릿빛을 띠고 있다. 지석은 늘 처음 봤을 때와 그다지 변함없는 이미지였다. 몸이든 마음이든 지나치리만큼 단련이 된 사람, 강건한 남자였다.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은 보는 누구든 주눅이 들게 할 만큼 강했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단단한 입매는 한국 최고 기업이라는 태성그룹의 후광에 더해 그를 누구도, 소영 자신도 쉽게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위압감을 완성시켰다.

생일 당사자인 지석은 입을 다물고 창가에 서 있는 채로 사람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물론 지석의 옆에는 소영이 다가갈 틈도 없이 여자들이 번갈아 붙어 있었다. 조금 서러운 기분이 들어 그랬는지 모르겠다. 소영은 평소와 다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웃었다.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어 조금 더 편했던 도형 오빠와는 농담도 했던 거 같다. 무슨 대화 말미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과장스런 답에 스스로 놀랐다.

“너무하세요, 저 얼음여왕 아니에요. 따뜻해요.”

창가에서 와인 잔을 들고 있던 지석이 흘끗 소영을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차가워 입을 꼭 다물었다.

창밖의 하늘이 어스름해진다.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 흰색 테이블클로스를 덮은 트레이에 화려한 장식의 삼단 케이크가 들어왔다. 환호 속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둥글게 자리 잡고 케이크에 꽂힌 스물일곱 살을 나타내는 초에 촛불이 붙여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소란스런 생일 축하 노래 속에 지석은 단숨에 촛불을 껐다.

순서대로 샴페인이 흰 거품을 바닥에 흩뿌리며 터트려지자 사람들은 손에 샴페인 잔 하나씩을 들고 지석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기분 좋게 잔들이 부딪혔다. 지석은 시원하게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에 크게 웃었다.

자연스레 선물 개봉 순서로 이어졌다. 커다란 상자 앞에 지석이 서서 미리 상자 속에 집어넣었던 사람들의 선물을 하나씩 꺼냈다. ‘우, 우……’ 하는 환호 소리, 박수 소리 속에 선물은 차례로 상자에서 나왔다. 여덟 번째쯤, 지석의 손에 소영이 집어넣은 선물 상자가 잡혔다. 신경 써서 다시 곱게 포장한 하얀 리본 장식이 단번에 풀어지고 거침없는 손길에 얇은 핑크색 포장지가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지석이 지갑을 들고 앞뒤를 한 번 건성으로 살폈다. 이내 지갑 속에 끼워둔 카드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소영이 거네. 고마워.”

지석이 활짝 웃어 보이며 지갑을 옆에 두고 꽤 부피가 커 보이는 포장 상자 하나를 집어 올려 풀기 시작했다. 두 번 들여다보지 않은 지갑이 다른 개봉된 선물들 사이에 아슬아슬 놓여 있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룸에 준비한 샴페인 두 병과 양주가 다 비워질 때쯤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클럽으로 내려갔다. 음악은 귓속이 먹먹해질 만큼 시끄러웠다. 소영은 혼자 테이블에 남아 왼쪽 머리를 콕콕 찔러대는 두통에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혼자 뭐해 ”

지석이 소영 옆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영은 갑작스런 손길을 피해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석은 피식 웃으며 잔을 채웠다.

“한잔할까 ”

소영은 그의 앞에 놓인 온더락 잔에 얌전히 얼음을 떨어뜨려 넣고 양주를 조심스레 부었다.

“생일 축하해요.”

잔을 살짝 부딪쳤다. 어두운 조명에서도 붉게 물드는 뺨을 알아차린 건지 지석은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어디 불편해 ”

“아, 아니에요.”

뺨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 시선이 무척 불편하였다. 목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저도 모르게 반 이상 잔을 비우고 소영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왕님 가실 시간인가 ”

지석이 비딱하게 시선을 내리자 소영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지석의 눈길을 언제나처럼 외면하고 소영은 단정한 자세로 나갈 준비를 했다. 자그마한 핸드백을 들어보다가 뭔가 이상한 듯 속을 열어 확인해보더니 소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

“저……, 지갑이 없어요. 분명 있었는데.”

“지갑  아까 케이크 가져왔을 때 니가 팁을 주지 않았나 ”

“아, 네.”

소영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지석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웃을 때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표정을 지우고 딱딱하게 굴 때마다, 얼마나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지 정소영은 모를 것이다.

“그러고선 방에 빠뜨렸나 봐요. 왜 이러지, 오빠. 저 키 좀 잠깐 주실래요. 찾아봐야겠어요.”

“응.”

지석은 지갑을 뒤져 카드키를 건넸다.

“프런트에 맡기고 갈게요.”

소영이 꼬박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소영의 뒷모습을 보며 지석은 양주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언제나 틈을 보이지 않던 소영은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무언가 더 불안하고 찝찝해진 기분을 삭일 길이 없다. 소영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과민한 반응일 뿐일까.

뭘까,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다니는 이 기분의 실체는. 남자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양주 한 잔을 더 비웠다. 생일이라고 와인부터 샴페인에 양주까지 알코올이 상당량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려주듯 다리부터 저릿해진 것은 한참 전이었다.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한 잔을 더 채웠을 때 누군가가 양주병을 잡았다.

“뭐 하냐, 자작하는 거야 ”

도형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술잔을 마저 채웠다.

잘난 것도 없는 자식, 저 웃음에 여자들이 넘어가는 건가  언제나 친구란 이름으로 옆에 붙어 신경을 긁어대는 열등감덩어리 도형을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외면하고 술병을 건네받았다.

“한잔해라.”

지석이 빈 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도형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냐, 그만하려고. 그런데 소영이가 안 보이네 ”

“왜 ”

지석은 도형을 비딱하게 쳐다봤다.

“뭐, 그냥. 혼자 가버린 건가  데려다 주려 했는데.”

“데려다 주긴, 잔뜩 취해가지고는.”

도형에게 부드럽게 웃어주던 소영이 떠올랐다.

‘얼음여왕 아니에요, 따뜻해요.’

어울리지 않는 농담까지……. 잔뜩 달아오른 저 녀석 뻔히 보이는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갑자기 도형이 소영을 훑어 내리던 시선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지석은 이제 달게 느껴지는 양주를 한 잔 더 했다.

“주인공, 혼자 술만 먹네.”

지석은 도형에게 더 이상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초점이 자꾸 흐려지는 것이 많이 취했다.

“니네끼리 더 놀아. 갈게.”

“어  왜 이러셔. 뭐 어디서 눈먼 여자라도 잡았나 ”

“신소리 그만하고.”

거칠게 양복 재킷을 입는데 도형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어이, 생일인데 시시한 여자 오늘은 버려두고 같이 조금 더 놀아.”

“됐어.”

한 번 더 뿌리치는데 도형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자식, 왜 이래  왕궁 못 들어간 공주라도 납치했대 ”

“공주라……. 좋은데  왕궁까지 손에 쥐겠군.”

“너한테 잡힐 눈먼 공주가 어딨어.”

다시 붙잡는 도형이 짜증을 머리끝까지 올라오게 했다.

“그래  공주든 여왕이든 잡아 눈멀게 하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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