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화
눈에 보이는 카페 아무 곳이나 들어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한 칸짜리 허술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겨우 입을 헹구고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서훈은 ‘왜 그래요.’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 얇은 문밖으로 흉한 소리까지 들렸겠다 싶어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입술을 한 번 더 닦아보는데 서훈이 물었다.
‘많이 아파요 ’
고개를 들어보니 더 아픈 눈을 하고, 묻고 있었다.
‘괜찮아, 미안해.’
‘먹은 게 안 좋았나 봐요. 그 집 피자가 이상했나 ’
‘아니, 내가 원래 기름진 걸 잘 못 먹어. 특히 피자에 약해.’
농담처럼 말하고 웃었는데, 서훈은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당장 일요일에도 문을 연 병원을 찾겠다고 하는 걸 겨우 말리자, 그날 헤어질 때까지 내내, 안타까운 얼굴로 소영을 살폈다. 약국에 데려가 심각한 표정으로 증세를 설명하더니 소화제와 두통약을 받아 내밀었다. ‘괜찮아요 ’ 걱정스레 묻고 좀 걸으면 좋겠다는 말에 커다란 가로수 그늘 아래를 걷다가 말했다.
‘더워서…… 속이 더 안 좋지 않아요 어디 실내에 들어가요.’
바람이 불어 천천히 걷는 걸음에는 땀도 나지 않도록 시원했는데 말이다.
몇 번이나 괜찮으냐는 물음에 이제 정말 좋아졌다고 ‘다시 묻지 마’ 했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미안해요, 누나. 정말 미안해요. 지금까지 계속…….’
‘아니야, 다 맛있고 좋았어. 오늘도 무척 좋았어. 내가 어제 시험 벼락치기 하느라 잠을 못 자 그래. 피곤하면 가끔 그러거든. 오늘 피자 정말 맛있었어. 그래서 너무 많이 먹어 그렇다니까.’
서훈이 겨우 눈을 맞췄을 때, 소영은 손을 들어 서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제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아니야. 소영은 서훈의 팔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손등에서 멈추고는 꼭 잡아주는 대신 가볍게 두드렸다. 다만, 지나치게 무안해하는 서훈을 위로하고 싶었던 건지, 다 알면서 서훈의 감정을 계속 잘라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흰색 반팔 티셔츠 위로 단단한 팔 근육과 매끄러운 피부가 전하는 찌릿하고 생소한 감각이 소영의 손바닥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기막혀하면서도 그 순간에도 어이없는 생각을 계속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서훈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고.
샐러드바를 고집하는 마음이 고맙고 미안하여 소영은 다시 서훈에게 물었다.
“서훈아, 저번 피자 때문에 그래 ”
“이제 그런 데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지 마. 맛있는 거 먹어.”
서훈은 차창 너머로 샐러드바 위치를 확인하며 우회전 깜빡이를 켰다.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눈치도 없는 멍청한 놈으로 만들어요. 아무튼 오늘은 샐러드바에요.”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서훈이 결연하게 말하였다.
“그럼, 다음엔 고기 먹자. 내가 사줄게. 나 고기는 되게 잘 먹어.”
서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야, 응 ’ 소영이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서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장난스런 웃음이 눈에 고여 있다. 서훈이 눈을 마주하고 활짝 웃는다. 그제야 소영도 활짝 웃었다.
샐러드바에서 음식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은 끝없이 이야기하고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의 포인트가 없는 대화조차, 저절로 입이 벙싯거리며 벌어지고, 서훈이 어떤 주제를 꺼내어도 흥미롭기만 하였다. 그래서 소영은, 오랫동안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서연이 처음부터 멀리 떨어진 테이블을 흘끗거리지는 않았다.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동창들과 이른 브런치를 하고 샐러드바를 나서는 길이었다.
“쟤, YK 정소영이지 서연이 너랑은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혜진이 턱으로 가리키는 테이블에 정소영이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동생도. 서연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훈만 쳐다보고 있는데 혜진이 가볍게 덧붙였다.
“같이 온 남자는 누구지 되게 친해 보이는데. 뭐, 비슷한 부류겠지. 쟤야 재학 중 금혼학칙이 있는 이대만 아니면 학교 다니는 중에 결혼할 애 아니겠어 ”
서연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한 달쯤 전부터 서진이 말하길, 아무래도 우리 남동생, 서훈이가 연애를 하는가 보다 그랬다. 안 하던 짓 한다고.
‘CC는 아닌 거 같던데 누구지 ’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진에게 말은 못 하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던 생각이 두 사람의 마주 앉은 모습 한 장면으로 깔끔하게 확인되었다. 그만큼 서훈은 정신없이 푹 빠져 있었다.
“나, 화장실 갔다가 갈게. 지수가 네 차까지 불렀을래나.”
“어, 우리는 차 빼고 있을게.”
혜진이 먼저 걸어 나갔다.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서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을 담아 오려는 모양이었다. 서연은 서훈이 사라지자 빠르게 소영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이야.”
소영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연아.”
그래도 목소리는 차분했다.
“앉을래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서훈이, 네 동생……. 서클 후배야. 같이 왔는데.”
조금 당황한 듯하지만 이내 표정도 차분해졌다.
“들었어, 서훈이가 선우회 후배라고.”
서연도 소영도 앉지 않았다.
“응.”
서연은 방긋 웃음을 띠고 말했다.
“서훈이 싹싹하고 착한 후배지 ”
대답 없이 물끄러미 보는 소영을 향해 다시 말했다. ‘너, 내 동생 상처 주면 가만히 안 둬’라는 경고 대신이었다.
“덩치만 크고 아직 애 같아. 막내라 그런가 쟤, 아직 여자 친구 그 비슷한 거도 한 번도 없었어. 후배 있음 소개 시켜줘. 평범하고 착한 애로.”
조금 독하게 말하긴 했지만 끄떡도 없을 줄 알았던 소영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소영은 인물화 액자 속 여자처럼 미소 지었다.
“알았어. 윤서연.”
“그래, 밥 맛있게 먹어.”
불편한 마음으로 인사하는데 소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런데, 후배 소개는 못 시켜. 네 동생 원래 소개팅 안 한대. 알지 ”
‘알았어.’ 앞에는 ‘서연이 네 말 무슨 뜻인지’가 생략된 것임을 말해주는 냉정한 눈을 더 이상 보지 않고 서연은 돌아섰다.
서훈과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후, 소영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서훈이 싹싹하고 착한 후배지 ’
‘덩치만 크고 아직 애 같아. 막내라 그런가 쟤, 아직 여자 친구 그 비슷한 거도 한 번도 없었어.’
서연이 한 말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착한 서훈이, 순한 웃음, 다정한 말,
피자를 먹고 체한 소영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누나, 미안해요.
고개를 떨어뜨린 서훈이. 정말 착한 아이. 포근하고 따스한 사람.
여자 친구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는 서훈이…….
소영은 손을 들어 이마를 괸다.
나란히 걷다가 손끝이 스치기만 하여도 서훈은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더 이상은 안 돼. 서훈이 감정을 이용하는 건 이제 더 이상은 할 수 없다. 팔을 뻗어 책꽂이에 꽂아둔 노트 두 권, 책 하나를 뽑았다. 회계원리, 경영학원론 시원한 필체로 제목이 적힌 노트의 오른편 아래에 적힌 세 글자, 윤, 서, 훈. 성격만큼 단정하고 깨끗하다. 이름 자에 검지를 올려보았다. 윤, 서, 움직이던 손가락은 조금 기울어진 히읗에서 멈춘다.
서훈을 세 번째 만난 날이었다. 소영은 서훈이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유심히 보았다. ‘What is Strategy’ 영문 볼드체 제목을 읽다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훔쳐보다가 들켜버린 것만 같아, 짐짓 모르는 척 물을 들어 마시는데 서훈이 조용히 설명했다.
“전공시간에 경영전략 부분이 나와요. 그냥 한 번 보려고 도서관에서 참고 아티클을 찾아서 프린트했어요.”
“응.”
“재밌어요. 경영전략은 쉽게 말하면 기업들이 장기적인 이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에요. 원래 경제학이론으로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기업의 장기적 이윤추구가 가능하지 않고 모든 기업의 이윤이 제로로 수렴하거든요. 하지만 실제는 다르죠. 그 이유를 competitive strategy, 번역하면 기업의 경쟁전략이라는 개념으로 완성시킨 사람이 마이클 포터예요.”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영은 서훈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서훈이 천천히 설명을 덧붙였다.
“마이클 포터에 따르면 경영전략이란 operational effectiveness, 즉 운영의 효율이 아니라는 거죠. 경쟁자와 다른 활동을, 혹은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행해서 경쟁적 우위를 획득하고 전략적 위치를 점하는 거예요.”
소영이 눈을 살포시 찡그리며 물었다.
“경쟁적 우위 그리고…… 전략적 위치 ”
“Competitive advantage, Strategic positioning. 아, 번역구가 더 이상할지도 몰라요. 영문으로 보면 더 쉬울 거예요.”
서훈은 프린트물을 소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요.”
“내가 이거 봐서 뭐해.”
소영이 손끝에 힘을 주며 프린트물을 서훈 쪽으로 밀어버리자 서훈이 싱긋이 웃었다.
“영어가 어려워 그래요. 읽고 나 좀 가르쳐줘요.”
마이클 포터, 경영전략,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우위.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멋진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염치없게 프린트물을 받아왔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 서훈이 아닌 소영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물었다.
“Sustainable position이 trade-off를 요구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Sustainable position이 지속가능한 우위인 거지 트레이드오프는 잘 모르겠어. 개념도 그렇고 그게 왜 필요한지.”
“포터의 설명에 따르면 전략의 본질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죠. 쉽게 말하자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하나를 포기하는 거예요.”
끄덕였지만 여전히 모호했다. 서훈은 자상하게 설명을 더한 후, 책 몇 권의 제목을 알려주었다. 소영은 서훈이 추천한 책들을 탐독한 뒤, 그 중 한 권을 들고 서훈을 만나러 나갔다. 밑줄 친 부분을 서로 물어보고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러 도서관을 같이 가기도 하였다. 소영이 유달리 흥미를 보인 까닭인지, 서훈은 경영학 책을 추천해줄 뿐 아니라 지난 학기 노트를 빌려주기도 하였다.
‘경영학원론’
시원한 제목 아래 **572-112, 경영학과 윤서훈, 이름이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이거, 별로 잘 쓰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유명한 교수님 강의였으니까. 한 번 볼래요 ”
머뭇거리며 펼쳐 보았다. 잘 쓰지 않았다니, 거짓말이었다. 남자치고 너무 깨끗하고 정확한 필기, 한눈에 들어오기 쉽게 형광펜이 입혀져 있고 얼핏 훑어봐도 조그맣게 연필로 표시한 부분과 포스트잇으로 덧붙인 설명까지 완벽한 필기였다.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서훈은 ‘회계원리’라고 적힌 노트 한 권을 더 내밀었다.
“재무제표는 읽을 줄 알아야 다른 개념들이 이해가 돼요. 회계 싫다고 버둥거리는 애들한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회계 없이 기업 분석은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회계원리 노트를 펴 보았다. T자 모양 양쪽으로 자산 그리고 부채, 자본이 적혀 있었다. 아래의 등식, 자산=부채+자본, 생소한 개념이지만 역시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책도 빌려줄게요. 같이 봐요.”
“너 이거 봐야지. 이번 학기도 필요할 거 같은데 ”
“별로, 필요하면 달라고 할게요. 중요한 부분은 따로 복사했으니까 괜찮아요. 잃어버려도.”
서훈이 편하게 웃어 보였다.
소영은 노트 두 권과 책 한 권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서훈이 데려간 곳뿐 아니라 가르쳐준 경영학까지 재밌었구나…….
다음에 만나면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슴이 못 견디게 시큰거렸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일 뿐이야.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힘없이 고개를 비틀자, 눈길이 닿는 곳은 탁상 달력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 날짜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 있다. 지석 오빠 생일이다. 달력과 경영학원론 노트를 천천히 오가던 눈을 감아버리자 붉은 동그라미가 크게 번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사람은 지석 오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누웠다.
‘그래, 그 아이가 아니라…….’
엎드린 채로 주먹을 쥐어 왼 가슴 아래에 두었다. 뭔가가 깊이 가슴을 찔러 오는 것 같아 주먹을 심장에 대고 문질렀다.
그만둬, 어울리지 않는 통증 따위.
***
토요일, 서훈과 점심을 먹은 후, 소영은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주문하였다. 기다란 사각 유리컵 안에 얼음 섞인 연노랑 액체가 햇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소영은 노트와 책을 테이블 위로 쑥 내밀었다.
“잘 봤어, 고마워.”
“안 줘도 돼요.”
“아냐, 다 봤어.”
“회계도 ”
소영이 슬쩍 눈을 떨어뜨리자 서훈은 회계 노트만 앞으로 다시 내밀었다.
“그건 가지고 있어요.”
스트로로 레모네이드를 휘휘 저으면서 서훈이 말했다.
“내 거, 우리 과 애들 거의 다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 노트예요. 중급회계나 원가회계 들어가도 가끔 회계원리 노트는 필요해서 요즘도 보더라구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급히 들이키더니 잘못 삼킨 건지 작은 기침까지 두어 번 했다. 뭐가 그리 무안할 게 있을까. 그대로 책으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멋진 노트였다. 분명 서훈이 따로 정리했음이 분명한 간략한 설명과 예제뿐 아니라, 일본식 한자 계정 이름은 괄호 안에 영문으로 작게 표기되어 있었다. 옅은 보라색 색연필로 깔끔한 화살표가 정확하게 오가는 T계정 간의 연계, 박스로 둘러진 중요한 원칙들, 예외들. 흑백 복사본이 아니라, 색을 알아볼 수 있고 연필 표기까지 읽을 수 있는 원본은 회계 공부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무척 탐나는 것이 분명했다.
“넌, 안 필요해 ”
“중요한 건 복사했다고 했잖아요. 누나 해요.”
소영은 서훈을 길게 쳐다봤다.
“그럼 이건 할게, 고마워.”
가방 속에 넣었다. 욕심부리고 싶은 노트였다. 회계 공부야 인생에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그 다정함은 평생을 살게 해줄 것 같았다.
이것까지만 네 감정 이용할게, 미안해. 서훈아.
소영은 표정을 지우며, 급히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나, 뭐 살 게 있어. 같이 가줄래 ”
경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와 천천히 백화점으로 향하는 동안 소영은 예감했다. 아마 오늘이 즐거운 만남의 마지막이 될 것을. 굳이 이제 만나지 말자,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시는 안 보겠다는 냉정한 결심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는 더 이상 즐겁지 않을 테고 그러면 자연스레 만나는 횟수가 줄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서훈이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조금 설렜다. 지석 오빠 생일이었다. 저녁에 생일 축하 파티에 간다는 사실이 서훈이 때문에 아리는 마음과는 별개로 몹시 설레었다.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 소영은 오랫동안 지석의 선물을 골랐다. 실은 지석의 선물을 고르며 서훈의 선물도 골랐다. 설레고 아리고 두 개의 감정은 부딪히며 한 편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건, 설렘이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설레니까 미안하고 그러니까 아프고 더 아프고. 그 사실을 깨달으며 소영은 결심했다.
오지 마, 더 이상…….
아니, 서훈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사람은 소영 자신이었다.
더 이상 가지 마. 상처주면 안 되잖아. 착한 아인데.
“누구 선물 골라요 ”
무참한 눈을 무시했다.
“응, 아는 오빠 생일.”
소영은 웃으며 덧붙였다.
“지석 오빠 생일이야.”
“아, 태성 ”
서훈은 반사적으로 묻고는 대리석 바닥으로 시선을 꽂았다.
“오늘 생일이야. 생일 파티한대.”
소영은 꺼내놓은 물건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서훈에게 이건 어때, 자꾸만 물었다. 넌 뭐가 좋아, 묻고 싶어서.
검은색 심플한 가죽 지갑 하나를 골랐다. 지석의 것으로. 하지만 정말 맘에 들었던 건 키홀더였다. H브랜드 특유의 가죽으로 초록색과 카멜색이 번갈아 들어간 봉투 모양이었다. 금빛 고리를 손가락에 반지처럼 걸어보았다. 지갑과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뭐가 좋아, 서훈에게 물었지만 서훈은 역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둘 다 좋은데요.”
서훈의 시선은 키홀더에 있었다.
소영이 두 개 다 달라고 말하기 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잠시만.”
소영은 서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져 섰다. 지석이었다. 설레는 감정이 이제는 더 많이 커져버렸다.
“아, 지석 오빠 ”
[오늘 참석하는지 확인하려고.]
“저녁 일곱 시, H호텔이죠 ”
[오는 거니 ]
“네, 지금 선물 고르고 있어요. 늦지 않게 갈게요.”
[그래 내가 데리러 갈까 ]
소영은 서훈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혼자 오려고 ]
“아니에요, 도형 오빠가 같이 가자고 그랬어요.”
[도형이 ]
“네.”
[그래, 그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이 뺨에 따끔따끔 꽂혔다. 이제 커진 설렘보다 더 크게 아프기 시작한다. 서훈이 시선을 거두고는 돌아서서 매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좀 이따 봐요. 생일 축하해요.”
[어, 그래.]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든 채로 멍하니 서훈의 뒷모습을 보는데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묻는다.
“생일선물인가 봐요 ”
“네.”
“어느 것을 드릴까요 ”
“지갑이랑 키홀더 두 개 다, 따로 포장해주세요.”
“네.”
매장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포장된 지갑은 핸드백에 넣고 오렌지빛 상자에 넣은 키홀더를 담은 봉투는 손가락에 건 채, 소영은 바닥만 보며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