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
서훈은 대책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돌솥에 화풀이라도 하듯 숟가락으로 푹푹 밥을 거칠게 뒤섞어버렸다.
“잠깐만.”
서훈의 돌솥을 살짝 당긴 소영은 제 것으로 버무린 것을 대신 앞에 두었다.
“네 ”
“너무 못 섞는다. 뜨거운 밥을 그렇게 뭉개면 맛이 없잖아.”
“주세요. 제가 먹을게요.”
서훈이 돌솥으로 손을 뻗자, 소영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옆으로 밀쳐낸다. 조금 질척해진 밥에 뭉크러진 청포묵까지 소복하게 떠서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먹어버렸다. 못 바꾸겠는데.”
소영이 놀리듯이 웃었지만 서훈은 그만 아찔해져 버렸다. 짧게 스쳤던 촉촉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닿았던 손등에 화르르 불이 붙는 것만 같다. 한입 가득 비빔밥을 넣고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귀 끝까지 아프도록 화끈대는 건 뜨거운 돌솥의 열기 때문이다. 서훈은 제 몫으로 정해진 그녀가 보슬보슬 잘 섞어놓은 밥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맛 어때 더 좋은 데 갈걸 그랬지.”
순식간에 반이 비워진 돌솥에서 눈을 드니 소영이 표정을 살피고 있다.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역시나 소영은 다정한 사람이다.
“아니요, 맛있어요.”
“네가 배고팠나 봐.”
“아, 아니요. 점심 많이 먹었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어야겠는데. 한창이잖아.”
마치 열 살은 위처럼, 그녀는 말했다.
“자랄 나이는 아니에요.”
소영이 부루퉁한 서훈의 말에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어버린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몸 유지하려면……. 너 키 크잖아.”
“……네.”
무안한 기분에 숟가락이 더 빨리 움직인다. 서훈의 돌솥은 금세 눌어붙은 바닥을 보였다.
“여대 앞이라 여기 양이 적어, 뭐 더 시켜. 뭐 먹을래 ”
“아뇨. 괜찮아요.”
서훈이 비빔밥과 같이 나온 맑은 국물을 들어 마시는데, 소영은 숟가락을 놓았다.
“그만 먹어요 ”
“응.”
소영은 냅킨으로 입 가장자리를 가볍게 누르며 답했다.
“더 먹어요. 괜히 내가 빨리 먹어서.”
“아냐, 웬만큼 먹었어.”
비빔밥은 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몇 숟가락 안 떠올린 것 같았다. 솔직히 제 몫을 다 먹었지만 한 그릇은 더 들어갈 수 있도록 적은 양이다 싶은데 말이다.
“더 먹어요. 기다릴게요.”
“혼자 먹기 민망해.”
“그런 게 왜 민망해요 돈 내고 사먹는 자기 밥 먹는 건데.”
똑바로 쳐다보자 소영이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맞는 말이네, 그래도 좀 그래. 누구 앞에서 혼자 먹는 거, 별로 해본 기억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설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영은 밥 한 숟가락을 떠올렸다.
“나 원래 다 못 먹어.”
억울한 듯이 조금 불퉁해진 얼굴을 하며 말도 밥도 우물거렸다. 서훈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웃고 말았다. 눈을 높이 떠올려 보는 소영에게 빈 돌솥을 내밀었다.
“도와줄게요. 줘요.”
“봐, 양이 적었지 더 시킬게.”
“아뇨, 도와준다니까요.”
“먹던 건데…… ”
“상관없는데요.”
소영은 머뭇거리더니 테이블 옆에 있는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 하나를 꺼냈다.
“여기, 이쪽은 숟가락 안 댔어.”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가장자리 부분을 퍼서 서훈의 돌솥으로 옮겼다. 다 식어 맛없을 텐데……. 한 번 더 작게 말하면서.
서훈은 건너온 ‘식어버린’ 비빔밥을 천천히 씹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더 따뜻하고 더 맛있었다. 서훈이 도와준 덕에 돌솥 두 개 다 깨끗하게 비워졌다. 소영은 아무래도 남긴 음식을 준 것이 못내 걸렸는지 입도 크게 벌리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네, 맛있는 거 사준다 하고선 내가 실수했어. 여기까지 오게 하고는…….”
“왜 별명이 얼음여왕이죠 ”
무슨 소리야, 묻지도 않고 소영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내가 많이 재수가 없나 봐.”
“이해를 못 하겠어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네가 특이한 거야.”
소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 워낙 센 척하는 작은누나를 보다 보니. 작은누나, 다른 남자들은 무서워하는 눈친데 저는 보면 귀엽거든요.”
“경제학과 다니는 수재라는 누나 너네 집은 다 천재라며. 서연이도, 잘하지 ”
소영이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계산대에 내밀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먹었어요.
“뭐 누나들은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뛰어난 거 같기도 한데. 난 아니고.”
서연에 대한 말을 슬쩍 피해버리며 서훈은 분식집 문을 열었다.
분식집 앞으로 난 좁다란 인도를 걸어가며 소영이 물었다.
“넌, 왜 아버지 뒤를 이어 경제학과로 안 갔어 ”
“작은누나 있는데요 뭐. 아버지 소원대로 어릴 때부터 하버드 경제학 박사가 목표인 누나한테는 게임도 안돼요.”
정문에 비해 한적하다 싶을 만큼 지나는 사람이 없어 서훈은 좀 편안한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저희 아버지가 국내에서 박사를 하셨어요. 당시에 도저히 유학 가실 형편이 아니셨대요. 누나가 아버지 소원풀이할 거예요. 공부도 지독하게 잘하고 아버지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있거든요. 나는 턱도 없어요.”
“……멋있다. 아버지 꿈을 이루는 딸.”
문득 목소리가 젖은 듯하였지만 들여다본 얼굴은 덤덤했다. 서훈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네, 멋있죠. 아버지와 상관없는 나랑은 달랐죠. 저는 경제학, 박사, 교수 다 전혀 관심 없어요. 처음부터 다른 애들이 장래희망 칸에 검사, 의사 그런 거 적어낼 때도 나는 항상 경영인, 석 자만 썼어요.”
“왜, 경영인 ”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하하.”
서훈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직 많이 안 배웠지만 경영학 되게 재밌어요. 누나는 영문학 좋아하죠 ”
바보처럼 말갛게 순진한 질문이었다. 소영은 길가에 늘어선 나무를 한 번 올려다 보더니 담담하게 답하였다.
“전혀. 2학년, 본격적인 영문학 전공 첫 과목인 16세기 이전 영문학 첫 시간. 교수님이 들어와 그러시더라. ‘누구의 발자국도 없이 눈이 부시게 흰 눈이 쌓여 있는 곳,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떨어져 있어. 그 화려하고 선명한 대조에 가슴을 설레며 조심스레 다가가죠. 그런데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뚜렷하게 들어오는 붉은 장미, 아! 그건 새빨간 핏자국이었어요. 그런 게 16세기 이전 영문학이에요’* 후우, 멋있었지.”
소영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바로잡으며 저 멀리, 노을이 깔리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시간, 베오울프를 시작하면서 바로 좌절했어. 얼마나 어렵던지. 난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더라. 고압적인 영문학 분위기도 숨이 막히고 서양 문화와 낯설기만 한 기독교 사상이 짙게 깔려 있는 문학의 정서를 가슴으로 이해하기 벅찼어.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 고어 섞인 깨알 같은 영자. 숨어 있는 사상과 메타포로 빽빽하게 메워진 글들을 하루에 수십 페이지 아니 백 페이지도 넘게 머리로만 소화하는 것을 강요받는 건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는데…….”
이제 그녀는 거리의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가라앉는 목소리가 해 떨어진 어스름한 길 위로 깔린다.
“영문학이 생각과 달랐나 봐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어설프게 대꾸하자 소영이 피식 웃으며 서훈을 보았다. 아, 이 순진한 아이야, 라는 눈으로.
“처음부터 영문학은 관심도 없었어. 경영, 정치외교.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그런 거.”
“왜…….”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런데 네 누나랑은 참 다르다 그치 ”
깨끗한 미소를 보였지만 서훈은 걸음을 멈추고 소영을 응시할 뿐이었다. 문득 필요 없는 말을 지껄였다는 후회로 소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여전히 고집스레 머무르는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서훈이 무언가 말하려 다가섰을 때, 차 마시자. 소영이 깨물었던 입술을 열고 나지막이 말하였다.
정교한 그림이었다. 푸른색 무늬는 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이파리 같기도 했다. 동글동글 곡선은 앙증맞은 반원을 차례로 그리다가 우아한 커브를 그리며 뻗어나가 이파리가 되고 꽃잎이 되었다. 언젠가 같이 차를 마셨을 때, 서연이 말했다.
‘이거 굉장한 거야. 장인정신과 예술 그리고 브랜드의 환상적인 결합이야.’
브랜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회사 제품인 듯하다. 푸른빛 그림이 그려진 얇은 도자기 잔에 소영의 입술이 머물고 있었다. 둘 다 커피를 주문한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훈은 말없이 소영을 바라보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매끈한 도자기 인형처럼 희고 투명한 피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유리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가 세상을 구경하는 일은 꿈조차 꾸지 못하는 인형처럼……, 살고 있는 걸까.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향해 조소를 보내던 소영은 봄기운이란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잎도, 꽃도 버리고 숨죽여 생명만 이어가는 겨울나무처럼 껍질 속에서 바싹 말라 있었다.
“지루해요 ”
서훈은 도자기 인형을 가둔 유리상자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듯 말했다.
“응 아니, 내 표정이 원래 그래. 이렇게 보기만 해도 흐뭇한 후배를 앞에 두고 지루하겠니, 설마.”
과장된 웃음으로 얼버무리지만, 서훈은 다시 제대로 물었다.
“아니, 사는 게 지루해요 ”
순간 소영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치나 싶더니 곧 깊이 가라앉았다. 소영은 짤막하게 답했다.
“응, 인생이 지루해. 됐니 ”
소영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너를 포함한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하니, 들어오지 말라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표정이었다. 서훈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진 미간을 펴며 끈질기게 물었다.
“왜 지루해요 ”
“대답이 필요해 ”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였지만 서훈은 멈추지 않았다.
“대답해줘요. 뭐가, 도대체 누나가 왜 그런지.”
소영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찻잔을 내렸다. 쏘아보는 기세로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 같았지만 소영은 조금 높고 빠르게 말했을 뿐이었다.
“무슨 답을 해줘 내가 사는 게 재미없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 할까. 난 그런 미움 사고 싶지 않아.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설명을 해야 해. 너도, 나 호강에 받친 한심한 애로 보잖아, 지금.”
“아니요, 전혀.”
뭔가 더 쏟아낼 것 같던 소영이 입을 다물었다.
“재미없을 거 같아요. 그렇게 사는 거.”
눈동자가 흔들리고 다문 입술도 조금 떨렸다.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살아봐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말하고 싶은 거 다 말하고.”
서훈은 더 할 수 없는 말들을 커피 한 모금에 담아 삼켜버렸다. 정말 그런 얼굴로 살지 말라구요, 얼음여왕이라는 빈정거림 같은 거 듣지 말라고……. 커피 잔만 노려보며 감정을 삭이려 애를 쓰는데, 한참 말이 없던 소영이 겨우 입을 열었나 보다. 머리 위로 가라앉은 음성이 떨어졌다.
“내가 오늘 이상하네. 너한테 터무니없는 투정을 부렸나 봐. 미안해.”
소영이 익숙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유리처럼 매끈하고 차가운 웃음, 좀 전까지의 온기도 사람 같은 분노도 벗고 얼음을 파고들어 갈 준비를 하는 중이겠지, 생각하며 서훈은 피식 웃었다.
“바보 같아.”
“뭐 ”
“투정부리는 법도 몰라요 이게 무슨 투정이야.”
서훈은 동그래지는 까만 눈을 보며 웃어버렸다.
“힘들어 죽겠다. 너무 아프다. 싫다. 이렇게 해달라, 왜 안 해주니, 그렇게 말하다니 너 정말 못됐다. 적어도 그래야 투정 아니에요 ”
소영은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래로 향한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한 용기로 서훈은 호기롭게 말하였다.
“다른 건 못 하겠고 재미있는 곳 데리고 가줄게요. 다 집어치우고 재미있게 살아요. 누구도 뭐라 안 해.”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고는 얼굴이 좀 화끈거리기는 했다. 이만 일어서야겠다고 테이블을 짚으며 의자를 뒤로 빼었을 때 소영은 도자기 잔, 파란 무늬만 보며 말했다.
……그래 줄래
***
……그래 줄래
라고 물었을 때, 서훈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정말
이라고 염치없게도 확인하자,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서훈은 약속을 지켰다. ‘재미있는 곳 데리고 가줄게요’라는 약속을. 서훈은 재미있는 곳을 데리고 가주었다, 아니 그와 함께 있는 곳은 모두 재미있었다. 두 사람은 벚꽃이 온통 흰 눈처럼 날리고 길가를 노랗게 물들이던 개나리가 떨어지고 진홍색 철쭉도 서서히 태양의 열기에 자리를 내어주도록, 화창한 봄이 지나고 햇살이 뜨겁게 살갗을 자극하는 초여름 길목까지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가 없는 만남을 매주 가졌다.
장미축제가 한창인 놀이동산에서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함성이 가득한 야구장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을 하였다. 박물관을 다니고, 특별 기획 전시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로댕 조각전을 관람하고 삼청동 길을 걷다 내키는 대로 크고 작은 미술관을 들어가기도 하였다. 신촌 길거리에 늘어선 포장마차에 나란히 앉아 떡볶이를 먹고 종이컵에 담은 어묵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서훈과 눈을 맞추고 웃고 나란히 걸으며, 소영은 가끔 낯선 제 모습을 불안해하였다. 정소영은 말랑거렸다. 서훈을 보면 자꾸만 말랑말랑해졌다. 아무리 벽을 세워봐도 그 눈을 보면, 그 목소리를 들으면 더럭 겁이 나도록 다른 정소영이 되었다. 하지만 서훈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큼 정말이지…… 좋았다.
유달리 소화 기능이 약해 기름진 음식을 못 먹는 소영이었지만 서훈이 좋아하는 덴푸라바에 앉아 튀김을 넘치도록 먹어도 좋았다. 정독도서관 산책로 벤치에 앉아서 포르르 날아오르는 참새만 봐도 재밌었다.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고
[여보세요, 저 서훈이에요.]
그 말만 들어도, 소영의 가슴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았다.
“공룡이 콩콩 뛰어다니는 영화가 개봉됐어요. 무섭지는 않아요. 귀여운 애들이래요.”
그의 말에 소영은 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이 콩콩 뛰어 극장 앞까지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와, 누나는 쿠키집 차려야 해요. 나 거기서 아르바이트할게.’
소영이 구운 쿠키 한 박스를 받아들고 서훈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문득 아주 어렸을 때 상상했던 쿠키로 만든 집을 다시 만났다.
‘무슨, 이거 그냥 혼자 놀이하는 거 중 하나. 아주 우울한 날이면 집에 박혀 하루 종일 쿠키만 구워. 단순 작업을 팔이 뻐근하게 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거든. 처치 곤란스럽게 많았는데 좋아하니 다행이네.’
상상의 쿠키집이 의도대로 바스러졌다.
‘누나, 우울했어요 왜 그러지 마. 우울할 때면 만들지 말고 누구한테 쿠키 구워달라 해요. 난 쿠키 굽는 냄새만 맡으면 행복해지던데.’
다정한 눈으로 소영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혼자 우울해지지 말아요. 같이 우울하면 좋겠다. 누나 쿠키 만들고 나는 그 굽는 냄새 맡고. 누나 팔 아프면 내가 반죽할까 ’
서훈의 웃음소리에 바스러졌던 쿠키집이 다시 단단하게 초콜릿 장식까지 입혀져 세워졌다. 그 쿠키집 안에서 소영은 판판하게 밀은 연노랑 쿠키 반죽 위에 공룡 모양 커터를 찍고 있었고 서훈은 오븐에서 막 구워진 쿠키를 꺼내고 있었다.
***
“오늘은 샐러드바로 가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어 말 그대로 햇볕이 쨍쨍한 날이었다.
“채소 먹고 되겠어 다른 데로 가.”
소영이 말했지만 서훈은 슬쩍 쳐다보더니 말없이 운전했다. 아마도 열흘 전쯤, 피자집에서의 일 때문이었으리라.
기말고사가 끝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났는데, 서훈이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았다며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큰소리쳤다. 너 먹고 싶은 데로 가자는 말에 서훈이 향한 곳은 미국식 피자집이었다.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었지만 들어가는 입구부터 발걸음은 마음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서훈이 상당히 좋아하는지 제일 비싼, 커다란 피자를 시켰다. 튀긴 것처럼 딱딱하고, 두툼한 도우에 넉넉하게 뿌린 토핑과 치즈가 메뉴판 설명대로 ‘Deep’한 피자를 앞에 놓고 서훈은 무척 즐거워했다. 하지만, 소영은 아무래도 피자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엄청난 분량의 전공과목 기말고사를 치르느라 사흘 정도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그리 좋지 못한 컨디션에 평소에도 입에 대지 못하는 기름진 피자를 먹는다면 분명 무섭도록 체할 테지만, 서훈이 잔뜩 들떠 사주는 거였다. 괜찮겠지 믿어보며 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느냐는 기대에 찬 눈에 웃으며 한 쪽을 더 먹었다.
튀김집에서처럼 어떻게든 집에 갈 때까지 견디겠지 하던 기대는 틀렸다. 피자집을 나와 동물원으로 향하던 길에 소영은 결국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 16세기 이전 영문학에 대한 표현은 이화여대 정덕애 교수님 강의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