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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4화 (4/54)

# 4화.

4화

“그래, 여자문제 상담 아니야 ”

“그런 거 아냐.”

“그럼, 이 시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온 이유는 ”

서연이 금세 진지한 얼굴로 서훈을 빤히 쳐다봤다. 제일 애기같이 군다는 말은 취소다. 서연은 언제나 대장이었으니까. 인형같이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말이다.

인형이라…….

너네 누나, 요정처럼, 인형같이 예뻤어. 소영의 말이 떠올랐다. 서연은 인내심을 가지고 서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서훈은 입을 열었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도무지 잠을 이룰 수도 없을 테다.

“누구 좀 물어보려 그랬어. 누나 아는 거 같아서.”

“그래  누구 ”

“정소영.”

“정소영  그런 애 우리 과에 없는데.”

“아니, 경기초등학교.”

“하, 그 정소영  YK던가. 뭔 재벌 집 딸인데. 걜 알아 ”

“선우회 갔다가 봤어.”

서연이 입술을 살짝 비죽이더니 가볍게 말했다.

“초등학교 동창, 초등학교 때 두세 번쯤 한반을 했고 나랑 좀 친한 편이었나  그래도 그걸로 끝. 걔는 동창 모임도 거의 안 나와. 친하게 지내는 몇 명 애들하고만 연락해. 가끔 소식만 들리는데 이화 영문과 다니지 않아 ”

“어.”

서연은 고개를 까닥했다.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던 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서훈을 다시 보았다.

“뭐야. 걔한테 설마 관심 있어 ”

“아니.”

속을 다 들킬 것만 같아 눈을 피해 바닥만 응시하는데 서연이 차가운 소리로 덧붙였다.

“걔, 좀 그렇지 않아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새침데기 과였어.”

그러고 보니 선우회에서 소영의 별명도 얼음여왕이다. 그래도 차 안에서 소리 내어 웃던 소영은 새침데기는 아니었다.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쳐다보자 서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집안에 비해 되게 착하기는 했어. 애들한테 잘하기도 했고 암튼 어린 나이에도 누구 눈에도 거슬리는 행동은 철저하게 안 하는 애. 고등학교까지 쭉 그래왔대. 걔 도시락 별명이 육해공군이었단다. 육지, 바다, 하늘을 섭렵하는 화려한 도시락 이따만큼 잔뜩 싸 와서 반 애들이랑 나눠 먹었대. 그 성적에 여대 간 것도 그렇고 철저하게 조신한 행동거지하며 재벌가 며느리 일 순위. 암튼 나랑 교감대가 없는 답답한 애야. 뭔 낙으로 사나 몰라. 머리가 모자라는 애도 아닌데, 결혼을 목표로 그러고 사는 거 우습지 않아 ”

듣기 싫다. 서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전까지 주체하지 못하게 들떠 올랐던 높이보다 더 깊이, 빠르게 기분은 추락했다. 서연에게 화를 내버릴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말없이 방문을 열었다.

“윤서훈.”

돌아보는 서훈에게 서연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내 동생, 나는 니 또래 남자는 다 애기로 보인다.”

소영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는 못 박는 경고였다. 서훈은 문고리를 잡고 그대로 잠시 섰다가 맥없는 소리로 물었다.

“불, 끄고 나갈까 ”

“응. 잘래.”

“큰누나, 잘 자.”

“그래, 너도.”

문이 조용히 닫혔다.

문밖으로 사라지는 서훈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서연은 침대에 팔을 괴어 누우며 눈을 감았다. 정소영은 일 년 전쯤인가 우연히 카페에서 보았다.

‘서연이  오랜만이야.’

칼로 자른 듯한 말투로 예의 바른 미소를 그리며 인사했었다.

‘어, 잘 지내지 ’

소영은 조용히 웃으며 덧붙였다.

‘서연아, 언제 같이 밥이나 한 번 먹자.’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온몸을 무장하듯 겹겹이 두르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 말투라니. 어림도 없다. 칼끝같이 완벽한 정소영.

괜찮아, 원래 어린애들은 저러다 말더라.

남자들의 어이없는 일방적 감정이란 익숙한 것이지만……. 서연은 자신에게 늘 벌어졌던 일을 막상 서훈이 들고 나서니 초저녁쯤에 먹은 밥이 불뚝 솟아오르는 것 같다.

“윤서훈, 꿈 깨, 정소영이라니…….”

서연은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

열 시부터 두 시간 연강으로 진행된 전공 수업을 마친 후였다. 서훈은 강의실을 빠르게 빠져나와 경영대 엘리베이터 옆 공중전화기 앞에 섰다. 최대 한계치까지 치닫는 심장박동이 더 빨라지기 전에 마음먹은 대로 해버릴 것이라는 의지를, 무척이나 창피하게도 전화 한 통에 인생 최대의 의지를 세웠다. 이미 외워버린 번호,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걸어봤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울리자 제기랄, 심장은 더 빠르게 뛸 수 있었다. 심장박동이 어깨까지 저려오게 하는 동안, ‘제발’과 ‘차라리’를 반복했다. 이번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다시는 누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차라리 받지 않는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시도 한 번으로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내음이 나오리라 예상하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데,

[여보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서 딱 숨이 멎은 것만 같아,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

“서훈이에요.”

[누구 ]

‘누구 ’라고 소영은 묻는다. 서훈은 이를 한 번 힘주어 다물고 다시 답했다.

“윤서훈이요. 선우회.”

[아, 그래. 잘 지냈니 ]

말끔하게 잊었다는 말끔한 목소리였다. 겨우 두 주 남짓 지났을 뿐인데, 17일간의 시간은 소영에게는 서훈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서훈에게는 이성이 감정을 도저히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찬 감정과 이성이 전쟁하는 소리가 벼락과도 같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쿡쿡 가슴이 찔리는 듯한 통증이 선명하지만 서훈도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맛있는 거 사주신다면서요.”

[아…….]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물러설 마음은 없다.

“내일 사주세요.”

[내일 ]

“네.”

지나는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왕왕 귓속을 울렸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정적만 흐른다. 서훈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다. 사준다고 했다.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써주고는…….

피하고 싶은 건가요  나 같은 사람은, 한 번 만나줄 수도 없나요

서훈은 뒤쪽으로 긴 줄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돌아다보았다.

[……내일, 수업이 늦게까지 있어.]

“거기 학교 앞으로 갈게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는지, 소영이 짤막하게 웃었다.

[여기 앞으로 네가 온다고 ]

“네, 몇 시까지 가요 ”

[다섯 시.]

포기한 듯 간략한 답이 돌아왔다.

“알았어요. 정문 앞으로 갑니다.”

서훈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거절을 자르듯, 수화기를 달칵 내려버렸다.

‘니 또래 남자는 다 애기로 보여.’

‘재벌가 며느리 일 순위, 답답한 애야. 결혼을 목표로 그러고 사는 거 우습지 않아 ’

서훈은 길게 한숨을 쉬며 건물 정문으로 향했다. 위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아래 공간, 촘촘하게 들어찬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이 웅성웅성 자유롭게 떠드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벽면 전체에 시원하게 뚫린 유리창으로 봄기운이 우우 몰려들고 있었다.

***

서훈은 이십 분째 소영을 기다리고 있다. 손목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초조함이 성큼성큼 자란다. 십 분정도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소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학교 정문 건너편, 여자들만 무리지어 다니는 길에 버성기게 서 있자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정문에서 쏟아져 나오던 여학생들은 당당한 시선으로 서훈을 훑어보고는 지나쳤다. 키득거리는 웃음, 알 수 없는 속삭임, 뻔뻔스러울 정도로 품평하는 말소리까지 여과 없이 귀에 들어왔다. 소영이 사람들 틈에 묻어나오나 싶어 끝도 없이 열을 이루며 빠져나가는 여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둘라치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거침없는 시선들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정문 왼편, 작은 골목길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삐주름히 보이는 문구 전문 체인점의 병아리색 간판이나, 주차장 입구 간판을 마치 처음 보는 양 지켜보고 있는 것이 우스워 보일 테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덜 우스울 테니까.

“서훈아.”

포근한 향이 바람에 실려 코끝을 스친다고 느꼈을 때, 눈앞에 소영이 서 있었다. 오늘은 단발머리를 하나로 묶지 않았다. 풀어 내린 머리는 어깨를 차분히 덮고 있다. 소영은 옅은 베이지색 트윈 카디건과 스커트 차림이었다. 가로로 길게 파진 네크라인 위로 가느다란 쇄골이 언뜻 보였다.

“미안해, 서둘러 왔는데도 조금 늦었네. 수업이 늦게 마쳤어.”

정말 종종거리면서 왔는지 가쁜 숨을 쉬는 소영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니에요. 급히 오실 필요 없었는데…….”

서훈은 들먹이는 소영의 가슴께에 머무르던 시선을 급히 발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단정한 주름 스커트 아래로 매끈한 종아리가 심장을 놓아주지 않는다.

“뭐 먹고 싶어 ”

“별로 가리는 것 없어요.”

무뚝뚝하게 나온 답이어서 그랬는지 소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서훈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생긋 웃었다.

“어디, 강남 쪽으로 갈까 ”

“아니요. 여기도 먹을 데 많은데요.”

“자주 와봤니 ”

“처음이에요.”

“정말 ”

소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크게 벌어져서 서훈을 바라보았다.

“미팅, 과팅하러도 안 왔어 ”

“그런 거 안 해요.”

“한 번도  왜 ”

“귀찮아서.”

성의 없는 답이지만 사실이긴 했다. 소영이 상큼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 이제 보니 왕자병이구나.”

“네 ”

“여자 귀찮아 미팅도 안 한다며.”

아니에요, 그런 건. 서훈이 중얼거리며 배낭을 고쳐 멘다. 서훈의 머리 위로 황금빛 오후 햇살이 떨어진다. 눈이 부신 듯 가늘게 찌푸리는 서훈을 바라보며, 소영은 왕자병이 아니라 왕자라 불려도 충분할 만큼 반듯하고 귀티 나게 생겼음을 인정했다. 웃음만 싱그러운 남자가 아니라, 몹시 잘생겼다. 외모 때문에 두 주가 넘도록 핸드폰 벨이 울릴 때마다 쿵쿵 심장이 뛰다가 이내 풀이 죽고 했던 건 아니지만. 지나는 여학생마다 한 번 더 확인하듯 쳐다보는 눈길에 소영도 조금은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서훈이 서 있는 자리는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남자들이 종종 서 있곤 하여, 여대생들 사이에 ‘바보스테이션’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정말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는 건가, 남자 혼자 서서 기다리는 동안 꽤 곤혹스러웠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서너 명 무리지어 지나는 여학생들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서훈에게 있었다. 소영이 흘깃 살펴보니, 태연한 척하지만 서훈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몹시 난감한 기색이었다. 순한 눈동자가 깔깔 웃어대는 여학생들에서 슬쩍 소영을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저편 길 너머로 바쁘게 움직였다.

아, 윤서훈, 너무 귀엽잖아…….

소영은 문득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가자. 후문 쪽에서 맛있는 거 사줄게.”

서훈의 답을 듣기 전에 소영은 앞장서서 학교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 선배.”

“학교 통과 안 하면 무지하게 돌아가야 해. 나 다리 아파.”

어정쩡하게 따라오는 서훈을 돌아다보며, 소영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웃음보도 허파도 장난주머니도, 아니 정소영이 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서훈은 소영의 얼굴에 설핏 지나가는 장난스런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가느다란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작고 아담한 캠퍼스였다. 조그만 정문을 들어서서 좌측으로 작은 수위실을 지나 현대식 건물을 지나치자, 정면으로 수십 개는 넘을 돌계단 위로 고풍스런 채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동안 소영은 별말이 없었다. 서훈도 소영의 기대와 달리 여학교에 들어서는 긴장감 없이 걸음을 옮긴다. 좀 전에 소영을 혼자 기다리던 동안 쏟아지던 시선과 수군거림을 견뎠던 것에 비한다면 이 정도쯤이야.

채플 뒤쪽으로 낮은 경사 길을 돌아 내려가자, 커다란 목련나무들이 늘어선 뒤로 낡은 기역자 모양의 건물이 드러났다. 소영이 기역자 건물로 향하는 십자 모양으로 난 길에 멈춰 섰다.

“여기가 우리 과가 있는 학관. 천재 소설가 이상이 설계했다는 이상한 건물. 많이 낡았지 ”

소영은 답이 없는 서훈을 돌아보았지만 서훈의 시선은 건물에 있지 않았다. 소영의 머리 위, 이제 막 활짝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목련꽃에 머무르는 시선을 따라 소영도 눈길을 옮겼다.

“목련이네요.”

“응.”

파란 봄 하늘을 배경으로 잎도 없는 가느다란 갈색 나뭇가지에 홀로 피어 있는 목련의 고아한 자태를 서훈은 오랫동안 담았다. 그 아래 서 있는 소영도.

“여기 분위기가 좋아요. 목련도 좋고.”

“학교 예뻐. 나도 이제 정이 많이 들었는지, 들어가는 문마다 층이 달라지고 화장실을 통과하면 또 층이 달라지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덜덜 떨리도록 추운, 이 이상한 학관 건물조차도 좋아지는 중이야.”

“……누나.”

“응 ”

소영은 목련나무 아래에서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서훈을 바라보았다. 소영의 머리칼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가느다란 흰 손이 이마로 드리우는 머리칼을 걷어 올린다. 서훈은 목련만큼 흰 목덜미와 단정하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핑크빛 입술을 본다.

“누나 처음 봤을 때 목련이 생각났는데.”

순간 소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고 매끈한 시선으로 서훈을 응시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치나 싶더니 목련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그 시선을 서훈에게 향했을 때, 소영은 시니컬한 미소를 분명하도록 씹고 있었다.

“목련, 닮았는지도 모르지. 잎이 나기 전에 혼자 영양분을 독차지하느라 서둘러 피어버리는 이기적인 목련.”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마, 라고 경고하는 얼굴, 저런 날을 세우는 표정이란 정말이지 싫었다. 서훈은 한 발, 두 발 소영에게로 다가섰다. 코앞까지 다가가 소영이 움칫 물러서려 할 때, 못을 박듯 내뱉었다.

“아니, 목련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소영은 움직일 수도 입을 벙긋거릴 수도 없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니, 핀잔을 줄 수도 웃어넘길 수도 없다. 촌스러울 만큼 정직한 말은 제대로 조준된 화살이 되어 소영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단숨에 가슴 깊은 곳까지 정확하게 날아와 박혀들었다. 화살이 박힌 곳, 심장, 아니 심장보다 더 깊이. 화살은 소영을 깨끗하게 관통한다. 소영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한 발짝 걸음을 뗐다. 막아서듯 앞을 가린 서훈을 비켜 지나치자, 신록의 향을 가득 담은 봄바람이 뚫려버린 가슴으로 몰려든다. 멈추지 않는 바람을 따라, 속에 꽉 들어차 있던 것들이 급하게 자리를 잃었다. 얼음여왕 정소영, 단단하게 정리된 모든 것들이 흔들흔들 무너지기 전에 정확한 속도로 걸어갔다.

후문을 통과하자마자 보도와 연결된 육교 위로 소영은 말없이 올라섰다. 계단을 밟는 그녀의 움직임은 일정했다. 메트로놈 박자라도 맞추듯 정확한 속도의 걸음걸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움직임과 닮은 표정일 것이다. 한 발 뒤처져 걷던 서훈이 옆으로 다가섰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서자, 소영이 서훈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무표정보다 더 느낌 없는 미소다. 서훈은 숨을 들이켰다.

“여기만 건너면 식당이 많아. 주로 점심을 해결하는 분식집도 있지만 좀 조용한 한정식집도 있고, 중식이나 파스타집도 있어.”

“그냥 누나 자주 가는 식당으로 가요.”

서훈은 손을 뻗어 소영이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들었다.

“어…… ”

소영이 움찔 물러섰지만 서훈은 가방을 제 어깨에 걸치며 최대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보니까 가방이 누나 어깨에 비해 너무 무거워 보여요. 꼭 부러질 거 같아 불안해.”

“후훗. 서연이는 좋겠다. 이렇게 다정한 남동생이 있어서. 아, 부러워. 난 아직 고등학교 다니는 귀여운 여동생만 하나거든.”

소영은 누나처럼 웃었다. 동생임을 확인하는 말에 서훈은 그의 어깨로 옮겨온 소영의 가방끈만 더 세게 움켜쥐었다.

육교를 지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꾸밈없는 간판이 붙은 식당으로 소영이 들어갔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의외로 굉장히 넓게 툭 트인 공간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장식 없는 네모진 식탁은 마치 어느 회사 구내식당에나 어울릴 것만 같은 것들인 데다가 반 이상 개수의 식탁을 채운 여학생들이 그 넓은 공간이 흔들리도록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소란스런 분위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수십 가지 줄지어진 메뉴는 난감하게도 한 번에 읽기도 벅찼다. 멍하니 메뉴판만 바라보는데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발 다가선 소영이 손으로 제 입과 서훈의 귀 사이에 길을 만들었다.

“여기 점심 먹으러 자주 오는 식당이야. 그래도 메뉴 많은 데로 골랐는데.”

“……네.”

귓가에 숨결이 닿은 것은 착각일까.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고 이야기하던 소영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빈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영이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말했다.

“나는 돌솥비빔밥 먹을래.”

“저도 그걸로 할게요.”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박하게 생긴 돌솥 두 개가 소영과 서훈 앞으로 내려졌다. 지글지글 돌솥에 밥이 눌어붙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많이 먹어.”

“네.”

소영은 소복하게 올려진 청포묵과 서너 가지 나물, 고명 김을 고추장 양념과 잘 어우러지도록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뒤섞었다. 살포시 아래를 향한 눈이, 젓가락을 쥔 가는 팔목과 손이, 차분한 동작이 이렇게 정신없는 분식집에서 흔해 빠진 돌솥밥을 앞에 두고도 소영을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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