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사랑하세요-3화 (3/54)

원호가 비딱하게 소영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아니에요’라고 부정하려다가 소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늘도 안 나왔어야 했어. 이런 무의미한 모임 따위, 네 잘못이야, 정소영. 도대체 왜, 쳐다봤어…….

소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당황하는 여대생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YK그룹 장녀, 얼음여왕 정소영은 똑바로 원호와 규진 쪽을 쳐다보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그렸다. 원호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자 규진이 수습하려는 듯 원하지도 않는 자상한 설명을 붙였다.

“우리 과 후배야. 아버지는 우리 학교 경제과 윤철수 교수님인데 교수님도 유명하시지만 그 집 자제들이 학교에서 별명이 천재 삼 남매잖아. 둘째도 미인이기는 한데 환상적인 학점으로 더 유명하고 첫째가 지금 서양화과 4학년인데 윤서연하면 모르는 사람 없게 예뻐. 그 동생답게 무지하게 잘 생겼지 ”

“무지하게라, 글쎄요.”

소영은 맥주잔 손잡이를 힘을 주어 쥐었다가 풀었다.

“거리가 떨어져서 그런지 잘 모르겠던데요.”

불편한 기분을 최대한 감추느라 느리게 답하자, 규진은 피식 웃었다.

‘너, 대단하신 얼음여왕 아니랄까 봐.’

규진의 눈빛과 살짝 틀어진 입매가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자 소영은 생긋 웃었다.

“네, 맞아요. 잘생겼던데요. 후배라 많이 아쉽네요.”

소영은 털어내듯 말하고 맥주잔을 들어 규진의 것에 가볍게 부딪혔다. 한 모금 삼키며 규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윤서훈이라 했던가,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었다. 선우회에 이제 나올 일도 없을 것이다.

두 해나 아래인 남자애잖아.

소영은 규진에게 경고하려던 시선조차 거두었다.

“윤서훈, 대단하긴 대단하네. 얼음여왕 눈에 다 들고.”

원호가 테이블을 떠나면서 쐐기를 박는 소리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선우회에 다시 나오지 않으면 문제 될 일이 없었다.

호프집 대여 시간인 9시를 지나 진행된 2차는 근처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노래방기계가 갖추어진 단체석 전용 룸으로 들어가 기다란 테이블에 여분의 의자까지 채워서 사람들이 빼곡하게 둘러앉기 시작했다. 호프집 앞에서 진희와 실랑이를 벌이다 끌려오다시피 한 소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20분 안에 일어서야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테이블 끝으로 자리를 잡았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 맥주와 양주잔이 돌아가고 곧바로 신입생 위주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나갔다 들어오면서 소영은 기다란 소파 중간쯤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진희랑도 두어 자리쯤 떨어졌다. 살펴보니, 진희는 벌써 여러 잔째였다. 아무래도 냉정한 규진이 대단히 속상한 눈치였다. 소영은 겨우 사람들 등 뒤로 목을 빼어 진희와 눈을 맞추고 걱정스런 목소리를 물었다.

“너, 차는 어떡하려고 그래  동생도 마시는 것 같은데.”

“몰라 몰라. 그냥 버려두고 갈 거야.”

어눌해지는 발음을 들으며 소영은 포기해버렸다. 언제쯤 눈치를 봐서 나가야 하는데 들어차게 앉은 자리 중간쯤이라 조용히 빠져나가기에 여의치 않았다.

이제 다음 차례로 누군가가 노래하러 나가면 움직여야지.

누군가가 의미 없이 걸어오는 말에 반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답한 후, 소영은 어떤 대화에도 끼지 못하고 입도 대지 않은 맥주잔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역시나 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되씹을 때, 갑자기 ‘워어. 워’ 몇몇 남자들이 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들었다. 열린 문으로 반쯤 들어서던 남자는 느닷없는 환호에 당황한 듯 머쓱하게 웃었다.

“야, 윤서훈! 이 자식, 너 이리로 빨리 뛰어와.”

“네, 선배님.”

원호가 취한 목소리로 크게 부르자, 서훈이 싹싹하게 다가섰다. 몸을 굽혀 원호보다 눈높이를 낮추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

“너 나보다 얼마 아래야 ”

“네 개 아랩니다.”

“그렇지  까마득한 후배.”

서훈이 싱긋이 웃었다.

“네, 까마득하죠. 선배님,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

“너, 저기로 가서 앉아. 어이, 옆에 있는 넌 비키고.”

원호가 검지를 들어 소영을 가리켰다. 동시에 시선들은 서훈에게서 소영으로 일제히 옮겨와 꽂힌다. 대체 무슨 일인지, 동그랗게 뜬 눈들보다 소영의 눈은 더 크게 벌어졌다.

“너한테는 두 기수 선배다. 너 맘에 든대. 옆에 가 앉아.”

“워, 워……. 소영 선배 눈에 들었대요 ”

갑자기 룸 안은 누군가의 주도로 ‘우, 우……’ 하는 함성과 ‘옆에 가, 옆에 가’ 구호에 박자를 맞추는 박수 소리로 가득 메워진다. 당황하여 벌어진 입도 채 다물지 못하는 소영에게 별로 당황스런 기색 없이 서훈이 다가왔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윤서훈이라 합니다.”

소영은 인사를 하는 그를 잠시 외면했다. 입을 꼭 다물고 맥주잔만 바라보자 우우, 함성이 한 번 더 파도를 친다. 더 이상 원숭이 꼴은 될 수 없었다. 소영은 할 수 없이 서훈과 눈을 맞추었다.

“정소영이에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소영이 이름을 말하였다. 서훈과 눈을 잠시 맞추더니, 이내 시선을 낮춰버리자 짙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투명할 만큼 하얀 얼굴, 더 흰 목덜미, 가느다란 손가락이 발개진 귓가를 스치며 떨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어오르고 서훈은 바보처럼,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덥석 앉지도 그렇다고 돌아서 갈 수도 없어 멍청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더 불편하게 하는지 소영은 눈을 들어 서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앉아요.”

목소리만큼이나 깊고 차가운 눈이었지만 불빛 때문이었을까, 예쁘게 반짝였다.

“네.”

머리를 한 번 숙이고는 서훈이 좁은 자리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붙이는데, 허벅다리가 그녀의 다리쯤에 닿아버렸다. 움찔 놀라며 자세를 고쳐 잡던 소영이 서훈과 한 뼘 거리로 부딪힌 시선을 급히 거두었다. 주먹을 가볍게 쥔 손을 들어 얇고 또렷한 입술을 한 번 지그시 눌렀다 떼어냈다. 상황이 몹시 불편하고 당황스러운지, 가느다란 목덜미가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저……. 서훈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한다. 흰 손가락과 핑크빛 목덜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입속이 화끈거릴 만큼 순식간에 더워진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서훈을 향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소영은 냉정을 찾은 듯 입술을 꼭 다문 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꼭, 목련 같아요. 순간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을 뻔하여 서훈은 혀를 깨물었다. 태연을 가장하며 가장 적당한 말을 골랐다.

“선배님 얘기는 들었는데,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작년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말 놓으세요.”

“그럴까. 두 기수 아래라 했나 ”

“네.”

소영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여 불편한 자세로 걸터앉은 서훈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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