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2화
지석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소영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고백하는 날 짝사랑은 끝, 화려한 연애 시작 아냐 아니, 바로 결혼이 되려나 ”
진희는 제 고민은 그새 다 잊어버린 듯 신이 난 참이었다. 소영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벌써 차갑게 식어버렸다. 감각이 무뎌진 손가락이 종이컵을 놓칠 것만 같아 불안하고, 코트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린 발을 톡톡 움직이자, 소복이 쌓여 있던 말라버린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네가 왜, 혼자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
“……지석 오빠는 아직 내가 첨 봤을 때처럼 중학생인 줄 알아.”
정말……. 그래. 내겐 관심도 없어. 만나는 여자들도 많아. 지금도 나 보면 애한테 하듯이 머릴 쓰다듬어. 실은 나도 뭔지 모르겠어. 관심을 안 보이니 더 깊은 마음이 된 건지……. 소영은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마디로 줄였다.
‘중학생인 줄 알아.’
“뭐야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재벌가 며느리 일 순위 정소영, 너 싫다 할 남자가 어딨어. 아, 정말 갑자기 화나려 해. 너에 비하면 난 말야…….”
이어지는 진희의 한탄을 들으며 소영은 그래 졌다, 빙그레 웃었다. 까만 구두 아래로 바스락, 죽어버린 낙엽이 조각조각 힘없이 바스러졌다.
소영이 짙은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진희는 바 쪽으로 다가가 생맥주 두 잔을 양손에 들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언제 맘이 상했냐는 듯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터뜨리는 경쾌한 웃음소리는 소영의 자리까지 크게 들려왔다. 진희는 핑크빛 말랑말랑한 고무공 같은 친구였다. 쾌활한 말투와 통통 튀는 성격을 가진 진희 주변은 늘 남자든 여자든 북적거렸다. 진달래꽃잎 같은 핑크와 선득하게 희푸른 빙하 색처럼, 진희와 소영은 친하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다른 성격이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지만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만한 얼굴은 찾을 수 없다. 소영은 다시 시선을 반질거리는 나무 테이블로 단단하게 고정해버렸다.
신입생 때는 소영도 선우회 활동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일일 카페도 하고 타임지 스터디도 했었다. 마음 놓고 수다를 떤다거나 깔깔대고 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클 사람들과 살가운 정이 쌓이면서 약간 들뜨기도 했다. 1학년 가을이 지날 무렵, 선우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늦은 저녁 시간에 귀가한 소영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그의 뜻을 전했다. 아버지 서재 책상 맞은편에 똑바로 앉은 소영은 저도 모르게 이가 악물려졌지만 ‘네, 아버지’라고 단정하게 답하였다. 아버지의 선우회에 대한 입장은 지독히 실리적인 논리였다. 아들인 경우 인맥에 도움이 되겠지만, 딸의 경우 남자들과의 친구나 선후배로서의 인맥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서클내에서 혹여 누군가와 교제를 했다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것 역시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아버지에게 그런 존재, 그런 역할인 자식이었다. 대학 진학 때부터 서울대가 아닌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선택한 아버지는 이미 소영의 길을 결정한 듯 보였고 그 뜻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전국 상위 0.1% 이내로 나오던 석차도 무색하게 선택한 학교, 학과. 그녀에게 대학 수석은 별로 달갑지 않은 훈장이었다. 재벌가 일 순위 며느릿감으로 꼽힌다는 대단한 듯한 명성도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길을 다행으로 여긴 점은 이지석, 단 하나였다. 그가 없는 선우회에 별다른 미련도 두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소영은 그날 이후, 선우회 모임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두 불참했다.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참석한다 해도 소영의 말수는 더 적어졌다. 진희 말에 따르면 소영의 별명은 어느샌가 선우회 얼음여왕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얼음여왕이라,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소영은 제 별명을 되씹으며 씁쓸한 미소도 씹어 삼켰다.
툭,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올려진 생맥주잔을 보고서 소영은 시선을 들었다.
“자아, 네 거야.”
진희가 다른 손에 든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미안, 내가 안줏거리 가지고 올게.”
“됐네. 같이 가. 너처럼 입 짧은 애가 가져오는 거 내 취향 아닐세.”
진희가 경쾌하게 답하고 먼저 걸어 나갔다. 음식을 집는 동안에도 진희는 주변으로 몰리는 사람들에게 명랑하게 조잘거리는 반면, ‘어, 소영이도 왔네’ 혹은 ‘소영 선배 오셨어요’라고 던져지는 인사에 소영은 일정한 표정, 똑같은 미소, 거의 비슷한 말로 답하였다. 떠나온 구석 자리 테이블을 흘끗 뒤돌아보며, 경직되는 목을 움직여본다.
물 위의 기름이라면 물이 적은 곳이 그나마 편하구나…….
소영은 슬며시 감자튀김 접시만 들고 테이블로 방향을 틀었다. 이십 분은 넘도록 수다를 떤 후, 진희는 남자 후배 손까지 빌려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오징어구이와 마른안주, 소시지 야채볶음에 감자칩과 새우깡까지. 냉큼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올리는 진희에게 소영이 조용히 물었다.
“동생은 아직 안 왔어 ”
“그러게.”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휘휘 둘러보던 진희가 동생을 발견했는지 큰소리로 말했다.
“저기 오네. 역시 우리 집안은 양반이 아니야. 야아!”
진희가 팔을 높이 들어 손을 저었다.
여드름이 맺힌 얼굴로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던 진성은 아무래도 누나보다 더 활달한 듯, 금세 선배들 사이를 오가며 넉살 좋게 인사하고는 몇 번이나 새로운 얼굴들로 바꿔가며 진희와 소영의 테이블로 와서 소개했다.
“자아, 여기 우리 누나, 그리고 무지하게 예쁘신 소영 선배.”
“우리 누나 앞에도 예쁜, 좀 붙여!”
“어어. 집에서는 연습했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져. 예쁘기에는 누나 볼 살의 압박이 내 양심을 짓눌러!”
“니 여드름은!”
커다란 음악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투탁거리는 대화에 소영은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프집 오디오 볼륨은 여전히 성가실 만큼 높았지만 그래도 느릿한 록발라드 팝송으로 바뀌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세상의 빛은 모두 그대에게 있었죠. 다른 건 모두 암흑이었어요. 당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건 나는 볼 수가 없었죠.’
‘모든 빛이라……. 과장은!’
소영은 비식 웃다가 뒷목 쪽으로 문득 피로감을 느끼며 고개를 길게 비틀었다. 순간이었다. 낯선 남자 얼굴이 급작스레 시야를 덮어버린 것은.
소영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시끄러울 정도로 울리는 팝송도, 웅성대는 소음도 일시에 사라졌다. 청각이 기능을 잃었다. 아니, 후각과 촉각까지도.
세상의 모든 빛을 모아둔 건 아니었겠지만, 비스듬한 방향으로 벽 쪽 테이블, 싱그런 웃음을 띤 얼굴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눈이 부시고 그래서 흐려 보였다. 남자가 박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관찰의 시간은 찰나처럼 지나가버렸다. 남자가 대화에 열중한 듯 이내 맞은편 상대 쪽으로 몸을 기울여버리자 누군가의 뒤통수에 그의 웃음이 가려졌다. 망막의 잔상은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사라졌다.
새로 생맥주를 채웠을 때 신입생들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한 명씩 차례로 일어서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소영은 세 번쯤 뒤쪽으로 흘끔거렸다. 처음 흘끗거렸을 때, 그 남자는 물을 마시고 있었고 두 번째는 옆자리 사람과 대화 중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세 번째는 누군가의 익살스런 소개에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하지만 그는 일어서서 인사하지는 않았다. 누구지 무슨 과 생맥주가 반쯤 비워졌을 즘, 신입생 자기소개는 이만 마친다는 사회자의 말이 들린다.
어, 신입생이 아닌가 소영은 빠르게 그리고 완전히, 그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이제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 중이었다. 가볍게 주위와 인사를 나누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출구를 향했다. 소영은 열어젖힌 문으로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줄곧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였다.
“뭐 봐 ”
“아, 아니. 그냥.”
움찔 놀라는 기색을 최대한 숨겼지만 진희는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긴, 한참을 보던데.”
“그냥, 신입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던데 인사도 안 하고 가네.”
진희 눈이 반짝 빛이 났다. 진희야, 제발 모르는 척해, 라고 무시될 가능성이 99%가 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 학교 후드티, 옅은 회색 후드티 ”
역시 1%는 일어나지 않았다. 진희는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소영의 대답은 필요 없었던 모양이었다.
“윤서훈! 눈에 확 띄지 겁나게 잘생긴 애. 맞지 ”
“뭐, 그건 모르겠어.”
이름이 윤, 서, 훈, 이구나. 속으로 한 번 중얼거리면서 소영은 정말 눈에 확 띄도록, 겁나게 잘생겼다는 건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소가 싱그러웠다가 더 맞는 묘사였는데, 미소가 싱그러워 쳐다봤어,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런 변명이 되어버릴까.
“하긴, 너야 카리스마 넘치는 그분 수준이니 아직 어린애 같은 남자가 눈에 차겠어 ”
소영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리자 진희는 헤헤거리며 말을 돌렸다.
“걔 신입생 아냐. 경영학과 2학년! 작년에 한 번도 안 온 거 티를 내고 있어, 정말.”
“으응, 신입생 아니구나.”
이제 그만…….
소영은 옆 테이블로 다가서는 경영학과 원호와 규진을 불안한 눈으로 살폈다.
“서훈이 선우 모임 열심히 나오는 편인데, 근데 무슨 집이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교수라던데. 아아, 누구지 뱅뱅 도는데 잊어버렸나 봐. 어, 원호 오빠!”
진희는 원호를 크게 부르며 손짓했다. 정말이지, 진희는! 소영은 진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손으로 짐짓 태연하게 감자칩 하나를 집어 올렸다. 곤란할수록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 방식은 대부분의 경우 정소영에게는 최선이었고 효과적이었다.
“어, 강진희, 무슨 일로 애타게 불러 ”
“윤서훈이 과 후배죠 친해요 ”
“어, 왜 ”
“걔 아버지가 교수라면서요, 어디 교수님이죠 ”
“울 학교 경제과, 근데 왜, 뭐 진희 너도 관심 있어 ”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진희가 흘끗 소영을 쳐다보는데 규진이 툭 끼어든다.
“아니긴, 그러지 마라. 너네 기수까지 그럼 진짜 곤란해. 서훈이네 기수 여자들 한동안 분위기 묘했던 거 몰라 장난이라도 그러지 마.”
말투는 가벼웠지만 확실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걱정이 되어 진희를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확 붉어진 얼굴로 진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아니에요. 소영이가 관심 있다고 해서. 저는 아무리 멋져도 연하는 트럭으로 줘도 싫어요.”
“아…….”
소영은 입을 작게 벌렸지만 ‘야아!’라는 호들갑이나 ‘무슨 소리야’라는 반응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굳어졌을 뿐이었다.
“와아, 진짜 의외다. 소영이가 관심 있다니. 윤서훈이 잘나긴 잘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