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Prologue
“올해도 반이나 지났어. 이제 유월도 끝나가네.”
“그러네.”
남자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달각, 찻잔을 들었다가 찻잔 받침에 두는 소리만 두어 번 반복되었다. 여자의 시선이 닿은 곳은 그의 손, 정확히는 그의 손가락이었다. 길쭉한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반지처럼 걸려 있는 키홀더의 금빛 링이 반짝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남자는 차 키가 달려 있는 키홀더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린다.
서훈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어이없게도 손가락이었다. 섬세하고 길고 곧은 손가락. 남자의 손가락들이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졌다. 그래서 다가갔다. 밀어내지도, 다가오지도 않는 사람에게로 빠르게, 조급하게, 깊게 들어가려 했다. 키홀더가 끼워진 손가락만 보면서 여자는 체념 섞인 말투로 내뱉었다.
“지루하니 ”
남자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가더니 의미를 묻듯 눈썹 끝이 조금 올라갔다가 이내 떨어졌다. 잠시 이어진 침묵 동안 여자는 서훈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
반듯한 이마, 단정한 머리, 언제나처럼 깔끔한 블랙 슈트, 은은한 광택이 도는 한색 계열의 넥타이는 역삼각의 매듭을 단단히 짓고 있었다. 여자는 그 누구도 담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지루하냐 글쎄…….”
서훈은 이내 말끔하게 표정을 지우며 답했다. 역시나 별 의미 없는 대꾸였을 뿐이지만…….
키홀더가 서훈의 손가락에 걸린 채로 빙글 반원을 그렸다. 꽤 오래 들고 다닌 듯 윤기 나게 태닝이 된 봉투모양의 가죽 장식은 네 귀가 조금씩 낡았다.
“좀 바빠. 프로젝트 새로 들어가. 로드가 많을 거야.”
식어 있는 찻잔을 들려던 여자의 손이 멈추었다. 서훈은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고 있다. 언제나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미소였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깨문다.
“그만 만나자고 ”
“그래.”
기울어진 얼굴에 보기 좋은 웃음이 떠올랐다.
“일어날까 이제 회사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남자가 계산서를 들고서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여자는 자조하듯 말했다.
“졌다. 윤서훈.”
서훈은 부드러운 웃음을 거두지 않은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조금 착각했었어.”
가슴이 말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만들어냈음이 틀림없는 부드러운 기운이 일순 그의 얼굴에서 남자답게 잘 뻗은 몸 전체에서 빠르게 날아갔다.
“네가 안아줄 때면 따뜻하고 좋았거든.”
“그랬어 ”
시선을 비킨 채 서훈은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손가락에 걸린 키홀더가 조명 빛을 반사하여 여자의 눈동자를 자극한다.
“너한테 나는 다른 줄 알았지.”
여자는 자조 섞인 말을 끝으로 깨끗하게 일어섰다. 여전히 앉은 채로 지그시 올려다보는 서훈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윤서훈, 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은 있니 ”
대답은 없었다.
“갈게.”
서훈의 서늘한 눈동자를 뒤로하고 여자는 걸어 나갔다.
‘지루하니 ’
의미 없는 물음에 서훈은 순식간에 팔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슴에 지겨운 파도가 밀려온다. 팔 년 전, 소영의 학교, 올려다보았던 흰 목련 송이, 후문 너머 좁은 인도가 들어오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이, 그리고 홍차 잔을 앞에 두고 말라버린 낙엽처럼 앉아 있던 소영이 어른거린다.
지루해요
아니, 사는 게 지루해요
대답해줘요. 뭐가, 도대체 누나가 왜 그런지.
호기롭게 말하는 스물하나 서훈이 있다.
이제 파도는 언제나처럼 약하게 가라앉았다. 잊으리라는 각오나 기대 대신, 접으면 그만이다. 불쑥 튀어 오르지 않도록 단단하게.
서훈은 아직 손가락에 걸려 있던 키홀더를 테이블에 내리고 기다란 담배 하나를 손에 대신 끼웠다. 입에서 뿜어진 희뿌연 연기가 착잡한 얼굴을 가린다.
‘윤서훈, 너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은 있니 ’
사랑……. 스물아홉이 되는 동안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부를 여자는 없었다고 다짐하듯 마음을 다잡는 서훈의 눈에는 테이블 위의 키홀더만 들어왔다. 파도가 다시 크게 일렁인다.
1화
멈춰선 채로 직진 신호를 두 번째로 놓친다. 차 앞으로 택시와 승합차 두 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신림사거리는 2차선으로 좁아지는 고질적인 병목현상이 있는 곳이라, 사거리 건너편 직진 차량들도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다.
“아, 진짜 되게 밀려. 신입생 환영회 가기 힘들다 힘들어.”
진희가 운전대를 퉁퉁 두드리며 목을 빼어 길 건너 앞을 너머다 본다.
“천천히 가자, 늦지도 않았는데.”
소영은 오디오 버튼을 누르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왜 신림동이야! 우리 학교 앞 신촌으로 하든가 차라리 강남역이 낫지.”
“신입생 환영회는 해마다 신림동에서 했잖아.”
“그러게, 정말 싫어.”
“왜, 난 그 동네 좋던데.”
진희는 소영을 곁눈으로 보더니 CD 체인저 버튼을 급하게 바꾸었다. 곧이어 클래식 대신 강한 비트의 가요가 중형차 속을 가득 메웠다.
“음악이나 빵빵하게 틀어야지, 숨이 다 막힌다. 저 봐, 직진 신호 곧 바뀌는데도 건너편 앞이 아직도 꽉 막혔어.”
진희가 공들여 세팅한 긴 머리칼을 손으로 휙 넘겨버리자, 골이 나서 더 부어오른 통통한 뺨이 드러났다. 소영은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잖아, 라는 말을 삼켰다. 차창 밖으로 하늘에 노을이 깔려오기 시작했다. 푸름과 붉음의 경계가 흐려지는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이다.
진희의 성화로 따라나선 길이었다. 미문학 수업이 마치자마자,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진희가 강의실 앞문으로 들어왔다. 가슴부터 허리선까지 잘 드러나도록 꼭 맞는 재킷 차림으로 팔짱까지 끼고 버티고 선 채, 진희가 말했다.
“소영이, 너 어디로 가버릴까 봐 내가 지키고 있었어. 오늘도 선우회 모임 안 가면 넌 진짜 친구도 아냐.”
“알았어, 간다고 했잖아.”
소영은 두꺼운 전공 책을 가방에 넣으며 조용히 웃었다.
“너 저번에도 그랬어. 간다 그래놓고 집으로 가는 차 속에서 내게 전화했잖아. 급한 일이 있어 집에 가야 한다구.”
“그땐, 정말 급한 일이 있었어.”
소영이 바라보자 진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암튼 오늘은 꼭 가야 해. 오늘 내 동생한테 너 보여준다 그랬어.”
“그래, 진성이라 했지 학교서 바로 거기로 오니 ”
“어, 만나는 장소가 신림동 호프집이라.”
“그렇겠네.”
소영은 부드럽게 대꾸하며 필기구를 마저 챙기고는 일어섰다. 가방을 메고 약간 비뚤어진 책상의 위치를 바로잡는 동안 진희는 투덜거렸다.
“차라리 강남역으로 가지, 신림동 차 밀리는데…….”
진희 말대로 교통정체가 있긴 했지만, 소영은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다. 선우회 모임에 일찍 가고 싶지 않다. 선우회 신입생 환영회라……. 선우 모임은 2학년 가을이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일 년 반 만에 참석하는 셈이다.
선우회(善友會)는 서울대와 이화여대 두 학교의 조인트 서클이다. 귀족 서클이라는 외부의 따가운 시선이 있지만, 모임의 형태나 모이는 장소도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 회원의 추천과 회장의 동의로 가입이 이루어지고 특이하다면 재수생을 받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 정도였다. 하지만 주로 정재계 굵직한 인사의 자식들이 회원으로 있다 보니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비교적 평범한 집안의 회원들도 많아, 라고 선우회 사람들은 그런 편견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카오디오에서 가요 CD가 차례차례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는 동안, 차량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복개천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길에 접어들었다. 목적지인 녹두거리에 도착했을 때, 하늘엔 검푸른 밤의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녹두거리 골목으로 꺾어지자마자 우측으로 좁게 터진 유료 주차장 입구에 차를 대고서야 진희는 쀼루퉁하던 뺨을 펴며 환하게 웃었다.
“좀 늦었다, 그치 ”
“응.”
진희는 맘이 급한 듯 서둘러 키를 맡기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자.”
진희가 급한 걸음으로 걷는 반면 소영의 속도는 그다지 변함없었다. 코너에 자리 잡은 빵집과 줄지어진 포장마차 세 개를 지나쳐 서점 앞 횡단보도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복개천 다리로 이어지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붉은색이었다. 뒤에 자리 잡은 서점 입구 옆 커다란 메모판에는 모모과 몇 학번 모임은 **주점, 모모 동아리, 2차는 **철판구이와 같은 글자들을 휘갈겨 적은 종이 예닐곱 개가 핀으로 꽂혀 있다. 진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메모판을 살펴보더니 말하였다.
“이제 핸드폰이 많아져서 그런가, 여기 개수가 많이 줄었어. 그치 ”
“우리 신입 때만 해도 아주 빼곡했지 처음 보고 되게 신기했는데. 벌써, 3년 전이야.”
소영이 메모판에 붙은 종이를 쓱 훑어보고 신호등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진희가 손을 잡았다.
“신호 바뀌었어!”
대답할 사이도 없이 진희는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손을 잡은 채로 짧은 횡단보도 하나를 순식간에 건너고 기다란 다리 위를 내달렸다. 다리를 가로지르는 동안 야트막한 개천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지나치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같이 뒤섞여 들어왔다. 개천에서 올라오는 조금 역한 물 냄새까지 소영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상하게도 교통정체도, 탁한 복개천의 물까지도 별로 싫지 않은 저녁이었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건너편 인도로 이어지는 긴 횡단보도에 파란불 신호가 찌르륵 찌르륵 소리를 내며 깜박거렸지만 둘은 주저 없이 뛰었다. 신호가 붉은색으로 바뀌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건너편에 닿았다. 내달리는 두 사람의 옷섶을 파고드는 이른 봄바람이 매서웠다. 찬바람을 급히 들이켠 폐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소영은 왠지 모를 안도감으로 웃음이 났다.
“후아, 여기 말야. 신호가 바뀌자마자 뛰어가면 딱 맞아, 저기 건너에서 여기까지.”
진희는 그제야 소영의 손을 놓고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지만 여전히 급한 걸음이었다.
“장소가 에덴호프랬지 저기 있네.”
호프집으로 이어지는 지하 계단 입구에서 소영은 급히 서두르는 진희의 소매 끝을 겨우 잡았다.
“진희야, 잠시만.”
소영은 몇 번 호흡을 고르고는, 뛰느라 흐트러진 실크 스카프를 다시 고쳐 잡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검은색 헤어핀으로 고정했다. 끈으로 여며 매는 형식의 모직 재킷 매무새를 고쳐보다가 진희와 눈이 마주치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진희는 분명 신경 써서 차려입었음이 틀림없는 옷차림새가 흐트러지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는 듯 아예 팔짱을 척 끼고 서 있었다. 또 저런다, 혹은 못 말리겠다, 라는 표정이지만 진희는 눈에 웃음을 담고 있다.
“이제 됐어 여왕마마.”
“미안, 습관이 되어서.”
소영은 스카프를 한 번 더 만지작거리며 작게 말했다.
진희가 ‘선우회 모임 ~9:00’라고 적힌 분홍색 포스트잇이 붙은 짙은 고동색 나무문을 열었다. 작은 호프집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열렬하게 맞이한 것은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조금 시큰둥하게 맞이한 건 규진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소영이네. 웬일이야. 행차를 다하시고.”
행차라, 달갑지 않은 표현이지만 소영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예의 바르지만 깨끗하게 자르는 말투는 친근한 대화를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하긴, 고작 한마디라 해도 소영에게 그런 투로 말을 거는 남자는 선우회에서 규진이 유일했다.
“어머, 규진 선배, 저는 안 보이세요 인사도 안 하네.”
진희가 입을 비죽거렸다.
“보이지. 너는 자주 보잖아. 그래, 동생 이번에 들어왔다며.”
“네, 동생이 이번에 들어왔죠. 근데요, 나도 이제 안 나올래요. 그래야 반겨주지 않겠어요 ”
진희는 소영의 손을 잡고는 규진을 쌩하게 지나쳤다. 진희가 분이 난 걸음으로 호프집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소영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며 진희는 결국 감정을 터뜨렸다.
“오늘부로 취소야. 내가 정말 눈이 어떻게 됐었나 봐. 저렇게 매너도 없는 인간을……! 너한테도 말하는 투하며. 행차가 뭐니, 행차가!”
“괜찮아. 규진 선배 말투가 그렇잖아. 그래도 악의는 없어.”
소영은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진희를 달래듯 말했다.
“에이 정말,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잖아. 누구처럼 말야.”
“왜, 멋있는데.”
“쳇, 이지석 씨나 되면 몰라. 잘난 척하는 거 어울리지도 않아.”
이지석. 이름을 듣는 순간,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지만 진희는 알아채지 못한다. 진희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테이블 위 사이다 캔 하나를 거칠게 땄다. 음악은 여전히 시끄럽고 주변 테이블에 사람들은 각자 제 이야기에 바빠 진희의 중얼거림 따위야 듣지 못할 테니, 무슨 걱정이야. 곤란한 표정을 이내 거두고 소영도 생수 한 병을 집었다.
몇 달 전, 3학년 가을 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진희는 추운 겨울 날씨에도 굳이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계단 옆, 나무들이 들어선 외부 휴식 공간을 고집했다. 선득하도록 차가운 나무 등걸에 앉아 소영은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추위를 달래야 했다. 후우, 한숨과 같이 진희 입에서 하얀 김이 퍼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진희는 커피 잔만 뱅뱅 돌려보더니 소영을 보지 않고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짝사랑하는 거 같아.”
“응 정말이야 ”
“어, 정말. 기말고산데 공부도 안돼. 진짜 한심하지 짝사랑이라니.”
“누구…….”
소영은 반사적으로 대상을 묻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모르는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진희가 물끄러미 보더니 될 대로 되라는 투로 비밀을 털어놨다.
“규진 선배.”
진희가 문득 시작한 가슴앓이 상대가 만날 투탁거리는 규진 선배라고 의외라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불편했는지, 진희는 제 고백을 도로 삼키려 하였다.
“아냐, 심각하거나 오래되지 않았어, 그냥 잠시 기분이…….”
진희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후회가 가득한 얼굴을 보며 소영은 진희조차 일 년에 한 번 볼까 싶은 장난스런 웃음을 흘렸다. 소영이 다정하게 몸을 기울여 진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한심하다니, 난 더해. 오래됐어. 오래된 짝사랑.”
“뭐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
빙그레 웃을 뿐 좀처럼 실토하지 않는 소영을 진희는 조르고 졸랐다. 자기 비밀은 듣고서 말하지 않는 건 배신이라며 휙 토라지려 할 때, 소영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응, 누구 안 들려.”
머뭇거리던 소영은, 진희가 귀를 입 쪽으로 들이밀자 조금 더 또렷하게 발음했다.
“어 ”
진희의 눈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벌어졌다. 소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까르륵 웃어댔다.
“우리 동병상련 동지구나. 우하하.”
“그런데 진희 니가 왜 짝사랑 네 성격에 어울리지 않아.”
“하, 사돈 남 말 하시네. YK 딸, 얼음여왕 정소영. 너야말로 기절할 노릇이거든. 태성 이지석 씨라니.”
소영은 진희의 입에 오른 그의 이름에 얼굴을 붉혔다.
“그 사람, 참 대단하지. 나야 그 사람 멀찍이서 봐도 무섭기만 하지만, 너랑은 어울리겠어.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태성에서 제일 똑똑한 아들이라고 다들 그런대. 학교 다닐 때부터 태성 일했잖아. 지금 회장님 수행비서 역할 한 지 꽤 되었지 와아, 멋지다. 완벽한 그림이다. 두 사람!”
“아니야, 그렇지 않아.”
언제나 어떤 자리든 어떤 모임이든 주목받는, 더불어 여자들의 시선과 마음도 넘칠 만큼 받는 지석을 떠올리며 소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영이 이지석을 마음에 담은 것은 처음 본 날부터였다. 나이로는 넷, 학년으로 다섯이 차이 났던 남자는 소영이 중학생이었을 때, 이미 성인이었다. 태성 회장님 내외를 모시고 소영의 집 대문으로 들어서던 지석이 생생하다. 핑크색 장미 꽃다발을 들고 감색 슈트를 입은 남자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을 가로질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에게 장미 꽃다발을 드린 후, 동그란 칼라가 있는 흰색 원피스 차림의 소영에게는 눈을 맞추며 인사하였다.
‘처음 보네요. 이지석이라고 합니다.’
‘네, 정소영입니다.’
‘몇 학년 ’
소영은 헤어밴드를 넘어와 뺨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하며 답했다.
‘3학년이에요.’
‘아직 중학생 ’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추자 지석은 싱긋 웃었다. 단발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음에 올 때는 소영이 꽃다발도 가져올게.’
소영은 붉어지는 뺨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소영이 마주 보기에 지석은 이미 너무 어른이었다. 나이보다 훨씬 더…… 완벽한 어른 남자. 고집을 부려서라도 짙은 색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있을걸. 동그란 칼라, 동그란 반팔 소매, 어린애처럼 보이는 원피스가 무척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