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그 후, 100년 (2)
2018.08.31.
아수라는 자신이 들여다본 것을 모두 알려주었다.
“달 마마의 생부?”
“그렇더군.”
“아니 그런데 그자가 왜…….”
“염휘께서는 본디 상냥하시지 않으신가.”
나약하고, 어린것에.
약하고 보드라운 것에 한없는 애정을 베푸시지.
낳자마자 어미를 여의고, 일주일 뒤에 거둬질 아비의 명이었건만.
기연에 인연이 더해진 듯 하이.
아수라의 이야기에 풍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어렸다.
제주인의 칭찬에 싫어할 권속이 있을 리가 있던가.
풍천은 제가 자비를 베풀기라도 한 양 의기양양해져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이지. 인연이야.”
“그도, 그렇군. 염휘께서 발걸음을 끊자마자 달 마마의 생부의 영이 올라오다니.”
기꺼워하던 기색도 잠시,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저이가 맹약을 깨트릴 이유가 무어 있나? 더할 나위 없는 광영인 것을.”
“애매하네.”
아수라는 풍천에게 그가 명을 달리한 순간을 설명했다.
“일찍이 염휘께서 약조한 것은 십 년. 허나 저자는 아직 십 년을 채우지 못했어. 온전한 제 명이 아니라 불안정한 탓에 툭 끊어진 것 같으이.”
“귀왕께서 내려주신 명이?”
“상천의 기가 어렴풋이 느껴지네. 지나가던 선인이 스친 것인지. 아니면 죽은 자의 명이라 멋모르는 이가 끊은 것인지.”
풍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죄가 아니라 하니, 지옥에 둘 수 없다 생각했다.
애초에 지옥은 풍천의 관할.
더욱이 귀왕께서 자비를 베푼 인간 아니었는가,
심지어 그는 달 마마의 생부.
인간이라고는 하나 달 마마의 육신을 지어준 아비를 차마 지옥불에 담그지는 못할 것이었다.
“저이의 잘못이 아니라 하시니.”
귀왕의 자비를 헛되이 날릴 순 없지.
풍천은 턱을 쓸며 고민에 잠겼다.
지옥에 담글 수도 없고 저대로 환생의 좌에 올릴 수도 없다.
어쨌거나 저이는 영혼의 맹약을 깨뜨려 영체에 죄인의 낙인이 새겨졌다.
그것은 염휘께서 손수 지워주지 않는 한 영체가 소멸이 되는 그날까지 따라다니는 것이라 그가 함부로 손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 삼천외의 땅에 머물게 하면 되겠어.”
“무슨……?”
“아니 아니, 내가 삼천외의 땅에 영을 보낼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 그곳에 가장 가까운 곳에 보내주면 될 것이지.”
“설마…….”
“북쪽의 샘.”
풍천은 말 끝나기 무섭게 찻잔을 건네준 이만 남기고 모두를 감재사자 편에 보냈다.
“아, 저는 이대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
남자는 영도를 따라 멀어지는 다른 영을 보며 멋쩍은 목소리를 냈다.
“아시는군요?”
“네, 무거운 약속을 했습니다.”
“압니다.”
“고의는 아니었는데 이 비루한 몸이 그만.”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벌은 달게 받을 것입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남자는 선량하게 미소지었다.
제 입으로 스스로를 지옥불에 담그겠다 말하면서도 겁먹거나 움츠러들지 않아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역시 달 마마의 생부란 말인가.’
풍천은 그런 남자를 보며, 제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설핏 미소가 새어 나왔다.
“작정한 것이 아니니 선처할 것입니다.”
염휘께서 맹약을 걸고, 독대했던 이니 풍천 역시 함부로 굴지 않았다.
그의 점잖은 선언에 남자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그럼……?”
“하지만 환생의 좌는 무리입니다. 맹약, 그것은 귀왕께서 새기신 것이니 권속인 제가 지울 수는 없는바. 그대를 북쪽의 샘에 기거하라 명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달 마마께서 오시는 날 귀왕께 오늘 일의 사정을 가려 말씀 올릴 것입니다.”
“……달 마……마……!”
남자는 풍천에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귀문의 별!”
남자는 작게 부르짖었다.
지옥으로 가겠다고 말할 때도 담담하던 이가 순식간에 제 딸 생각에 두 눈이 벌겋게 젖어들어 소매로 연신 훔쳐내기 바빴다.
“지금은 말씀드려보아야 진노하실 것이니, 별을 맞이하시면 찬찬히 사정을 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겠습니까.”
남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해서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인간의 시간개념으로는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풍천은 선량한 남자의 말에, 저 역시 더없이 상냥하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리 되셨습니까?”
기억을 엿본다지만 그것은 대략적인 것이라 남자가 생전에 가진 큰 의미를 가진 것만 읽혀, 세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아수라는 눈앞의 초로의 사내가 귀왕께 얼마나 지극한 태도로 맹약을 청했는지를 알고 있어서, 더욱이 그가 이렇게 된 사정이 궁금했다.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약속받은 날이 반년 정도 남았던 터라 딸아이에게 말하려고 가던 참이었습니다.”
아이가 잔병을 달고 사는 터라 도라지 달인 물을 챙겨서요.
남자는 제가 들고 있던 찻상 위의 찻주전자와 다기잔을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기침병이 심해지길래, 놀라지 말아라 미리미리 말을 해둘 작정이었습니다.”
아무리 영특하다 한들 어쨌거나 어린아이이니.
아비의 죽음도, 제 혼처도 한번 일러준다고 잘 알겠습니까.
그런데 막 찻상을 내서 나오는 차에 문밖에 웬 사내가 기웃거리기에 이대로 가보았지요.
“뉘시오?”하고 물었더니 그이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부채로 날 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는 이 꼴이 되어 여기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좀 서둘러서 아이에게 말을 해둘 것을요.”
“아…….”
역시 흔치 않은 우연 끝에 일이 어그러진 모양이었다.
아수라는 그의 말에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자가 하는 말은 다른 의미였다.
“딸아이가 많이 놀랐을 텐데, 전 꼭 십 년을 채울 줄 알아서. 미적거렸지 뭡니까. 귀왕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지옥에 떨어질 뻔한 것보다 놀랐을 제 어린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와중에도 귀왕께 면목이 없다며 눈썹을 늘어뜨리는 말에는 한숨이 나왔다.
미련할 정도로 선량하다 해야 하나.
저이가 키워낸 별의 성품이 가히 짐작이 갔다.
이번 대의 달 마마께선 유례없이 상냥하실 테였다.
이 하계를 단단히 다지려면, 상냥하시기만 하셔선 부족한데 곤란하다 싶기도 하고, 늘 다부진 마마들만 계셨다니 잘됐다 싶기도 하고.
풍천과 아수라는 묘한 기분이었다.
“아시다시피 귀왕께서는 모질거나 함부로 벌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정을 아시면 환생의 좌에 올려주실 것이니. 기다려보세요.”
“그렇지, 그렇지.”
“압니다. 허나 제가 좀 서둘러 딸아이에게 미리 언질 주었더라면 그 아이 기껍게 반겨드릴 것이라. 그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도…… 그렇지.”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기약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니. 북쪽 샘에서 기거할 자리를 봐 드리라 하겠습니다.”
아수라는 품에서 식신을 꺼내 들어 남자에게 딸려주었다.
“무료할 것이니, 달이라도 낚아보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걸음을 옮기는 남자에게 아수라의 다정한 당부가 남겨지는 사이, 풍천은 그 자리에서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음?”
“시왕들을 단속해야 하지 않겠나.”
“아아…….”
“미래가 결정된 영이 하나 비는 것이라 다녀와야 할 테지.”
“수고하시겠군.”
“본궁서 보자구.”
“그럼, 어째서 소희가 하계에 온 날 말하지 않았느냐?”
“별이 아니라 영체였으니까요.”
아수라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날 염휘께서 너무 흔쾌하셔서. 말씀 올렸다가는 당장 지옥불에 던지셨을 텐데 소장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라는데요?”
심지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낮의 아수라’의 말을 전하기까지 했다.
이럴 수 있나 싶게 꼬였던 운명.
“그럼 그 달을 낚는 이가…….”
염휘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나직이 묻자 아수라가 지체 없이 긍정했다.
“네, 맞습니다.”
“다행이다 하여야 하는 것이냐, 큰일났다 해야 하는 것이냐.”
골치 아파하는 군왕의 표정에 아수라가 붉은 입술을 늘여 해사하게 미소지었다.
“글쎄요, 제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으쓱. 추켜올리는 마른 어깨가 얄밉다.
염휘는 눈을 늘어뜨리며 그대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당장 어쩔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함께 벌어진 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고한 이가 지옥불에 던져지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기사, 그이는 오히려 잘되었다 해야 하나.’
그 와중에도 십 년의 수명을 더 받아 즐거운 한때를 누리지 않았는가 말이야.
염휘는 창밖으로 늘어지는 달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 의해 끊어진 수명이라.
“태자나, 아니 상제이거나 그의 삼관대제이겠군.”
어린 소희의 곁을 지켜온 상천의 인연은 그들이 유일하니 필시 그럴 것이다.
소희를 보러 기웃거리다가, 명이 끊어진 영이 있으니 영도로 보냈을 것이다.
별 뜻 없이.
그 손짓이 어떤 파란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그것이 운명이었단 말이야.
돌이켜 보면 볼수록 참, 엉망으로 얽히기도 했지.
흐트러진 채 남겨진 운명을 바로 잡으리라 생각하며 다음 날 염휘는 직접 북쪽의 샘으로 발걸음을 청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에게 환생의 좌를 내릴 생각이었다.
마고께서 이런 일에까지 나설 필요는 없으시니, 귀왕인 자신이 해결을 할 것이었다.
“그때, 그이가 어땠더라…….”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고 선 염휘는 눈을 가늘게 늘어뜨리며 생각에 잠겼다.
눈앞에 이십여 년 전의 그날이 생생히 떠올랐다.
검게 죽은 안색을 해서는, 거죽만 남긴 채 바짝 말라 쉴 새 없이 거친 숨을 삼키던 이.
그이, 가슴 병을 얻어 명을 달리할 운명이었다.
소희에게 한번 만나보라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 이대로 흐르게 두어야 할지 밤새 생각했지만,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흐음…….”
차마 보기 힘들다 싶을 정도로 그 꼴이 험하다 싶으면 그만두지 무얼.
염휘는 고민 끝에 상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이가 하계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염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영들은 여러 이유로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한 채로 하계에 머물기도 했고, 더러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모습으로 머물기도 했다.
그것은 오로지 영의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것이라 소희와의 만남을 결정하는 것은 염휘가 아닌 오로지 소희의 생부의 상태에 달린 것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했건만, 염휘는 북쪽의 샘에서 정말로 그를 만났을 땐 너무 놀라고 말았다.
이십 년 전, 그날 밤 모습 그대로 건져낸 달빛을 손질하고 있는 모습에 당황하고 만 것은 염휘뿐이었다.
“이십 년 만인가요?”
“아……!”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염휘의 방문을 눈치챈 초로의 노인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냐 물어야 할지…….”
어색한 인사였다.
“잘 지냈답니다. 고즈넉하고 좋은 곳에 자리를 내어주신 덕에 하루하루가 너무도 평화롭습니다, 귀왕이시여.”
점잖게 인사를 건넨 노인이 흘끗 그의 뒤를 살폈다.
아주 작은 눈길이었으나 염휘는 누군가가 심장을 비틀어 짠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소희!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
바래지 않은 다정한 마음.
그의 선량함과 상냥함을 믿지 못하고 혼자 와서 상태를 보고 결정하려했던 자신의 결정이 민망해져 염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직, 아직 달 마마가 안 되었나 봅니다.”
혼자 온 그에게 원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사를 건네며 아쉬운 마음을 접는 것까지.
염휘는 점점 더 혼자 온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달 마마가 될 수 없었습니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초로의 사내에게 염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청했다.
“짧은 이야기가 아니니 차 한 잔 주시렵니까?”
“그러지요, 매일 같이 낚는 것이 달뿐이라 차가 넘치고 넘친답니다.”
염휘는 찻주전자가 두 번이 비도록, 길고 긴 이야기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운명이 비틀렸다라고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려 했던 결심은 잊은 지 오래였다.
소희도, 그녀의 생부도 모두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부응해, 곱게 별로 키우겠다던 소희의 부친에게 염휘는 해야 할 말이 더 있었다.
“미안합니다. 죄송하였어요. 달 마마로 곁에 서실 이가 다른 이와 혼약하였다는 말에는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셨군요.”
제 딸아이를 목을 잡아 뜯었다는 말에는 노인에게서도 차마 괜찮다는 말이 나올 수 없었다.
운명으로 지워진 짐이 참 지독했다 싶다 하고 넘기려 해도.
딸아이가 험한 꼴로 명을 달리했다니 주름진 두 눈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혼약을 말하자면, 제 죽음도 말해야 했어요. 그럼 딸아이가 상심할 것이라…… 그 아이 울 것이라 생각해…… 미적거렸던 못난 애비 때문에…….”
손등으로 쓱 눈가를 훔치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과거지사이며, 지금은 더없이 사랑받으며 행복하다는 말에도 치미느니 후회며 눈물이라 노인은 자꾸 울었다.
“이제는 더 없이 귀하게 모시고 있답니다. 그날의 죄를 귀왕의 좌를 물리는 그날까지 갚을 것이에요.”
“고맙습니다. 운명이라 그런 것인데, 이렇게 마음 써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노인은 울면서도 고개를 조아렸다.
“해서…… 소희를 한번 만나게 해드리고 환생의 좌에 올려드릴까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네?”
노인은 반색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환생에 오르면 저 아이를 기억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저는 이대로 평생 있어도 됩니다. 그저 이 못난 사람의 욕심이라면…… 가끔 아이 소식이나마, 아니, 마마님 소식이나마 들을 수 있으면…….”
툭툭-.
또 운다.
이제 보니 소희의 눈물과 상냥함은 생부에게서 내림한 것이로군?
염휘는 울며 딸아이를 기억하겠다 버티는 노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삶과 죽음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 노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왕 염휘.
노인의 소원을 일부는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환생의 좌는 그 누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허니, 이렇게 합시다. 금번 대의 귀왕이 좌를 물리기 전까지 북쪽의 샘에 기거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네?”
“어차피 소희도 저와 함께 좌를 물리는 고로, 짐이 천신이 되면 그녀도 함께할 것이니 노인께선 그때 환생하십시오.”
물리지는 못하니, 유예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다정하고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제안.
노인은 그제야 염휘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울며 웃었다.
주름이 깊게 패도록 활짝 웃어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맞아요. 맞아요. 고맙습니다, 귀왕이시여. 이렇게 자애로우신 귀왕이시니 소희는 일평생 행복할 것입니다. 허고, 저도 딸아이 천신이 되고 나면 제 어미 찾아 나서야 맞지요. 그이 혼자 외로울 것입니다.”
“음…….”
염휘는 이십 년 전 두 부부의 연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부부로 맞닿았단 것을 기억해냈다.
이것이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 부부의 인연이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이어진 채라는 것이다.
부부가 아니라는 것뿐.
아마 이 하계에서 스치듯 지나가며 연을 맺고 있는 것이리라.
잘되었다 해야 할지.
“외롭진 않을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곁에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비틀린 운명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면 과했으니 염휘는 말을 아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염휘의 말에 노인은 몹시 만족한 듯 즐거운 소리를 냈다.
역시, 욕심도 없고 선량한 이였다.
캐묻지 않았다.
“곧, 달이 뜨지 않는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이 혼롓날입니다.”
염휘는 노인이 내어준 서녘의 달빛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진 참이라 염라궁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서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야 했다.
“혼례 후 사흘 잔치를 하며 객을 대접하는데, 다음날이나 해서 들를까 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아니에요. 소희와 꼭 오기로 약속을 했지요. 매일 같이 귀한 차를 나눠주시는 고마운 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댔어요. 이러니 인연인가 봅니다.”
“아닙니다. 귀왕이시여.”
갑작스러운 계획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약속된 것임을 알려주어도 노인은 손을 저으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 아이 정이 많아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눈물바람일 것입니다.”
“……하기사…….”
“홀로 어찌 살 것이냐 같이 가자 할 것이 뻔하고, 가지 않는다 하면 괴로워 매일을 눈물로 살 테지요. 제가 그럼 어찌 여기에 남겠습니까?”
노인의 걱정은 타당했다.
“오시는 날 자리를 비우고 있을 것입니다.”
“멀리서라도…….”
“보면 만지고 싶고, 목소리 듣고 싶어질 것입니다.”
상냥하던 이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보고 싶고, 그리움에 사무친 눈은 그새 눈물이 그득했건만, 목소리엔 떨림 하나 없이 단단했다.
“소희가 서녘의 달빛을 좋아합니다.”
“이 아비 남는 것이 시간이니 매일을 낚아 줄 것이니 많이 드시라 전해주세요.”
노인의 가난한 소원이었다.
“이미 진작에 끊어진 인연, 귀왕의 안배에 이리 이어가니 욕심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백년해로하시옵고, 항시 다정하고 다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는 얼굴로 그는 염휘에게 사배를 올렸다.
바닥이 흠뻑 젖도록 노인은 울고 울었다.
염휘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노인은 정말로 찾아온 소희를 보지 않았다.
그리운 얼굴을 피해 꼭꼭 숨은 대신 서녘의 달빛만을 넘치도록 낚아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혼례를 올리고 샘을 찾은 귀왕이 돌아간 후, 노인의 손목에는 황금빛이 은근한 팔찌가 매달려 있었고.
그것은 노인의 오랜 친구인 청조와 함께, 노인이 샘을 비우던 날까지 한 몸처럼 붙어 늘 빛을 발했다.
* * *
노인이 소희를 만난 건, 태자에게 첫 힘이 내려진 날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생각한 염휘가 처음으로 귀왕의 힘이 태자에게 내려지며 어리기만 하던 아이가 성장을 시작한 첫날.
모두와 함께 북쪽의 샘으로 달려갔더랬다.
“무슨 일이세요?”
궁금해하는 소희와
“샘은 나흘 전에 다녀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태자의 말에도
“서녘의 달빛이 다 떨어졌지 않느냐.”
시답잖은 핑계를 대며 빙긋 웃던 그가 북쪽의 샘, 단출한 전각으로 모두를 끌고 들이닥치다시피 했을 때,
대나무 낚싯대를 정리하던 노인이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바람에 머리에 쓰고 있던 삿갓이 벗겨지며 그를 알아본 소희가 소리를 지른 건.
모두 서녘의 달빛이 똑 떨어져 생긴 일이었다.
“아버지!!”
그래서 태자가 좌를 물려받기까지의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다들 북쪽의 샘으로 매일 들르다시피 한 것도, 그저 그래서였다.
“서녘의 달빛이 똑 떨어져서요.”
“또? 어제 받아갔잖니?”
“진짜예요, 할아버지!”
훌쩍 자라 소년이 되어버린 손자와 애교 있게 핑계를 대는 손녀를 보며 노인이 또다시 웃었다.
“서녘의 달빛이 똑 떨어지지 않으면 안 올 것이야?”
“그럼 제가 천도를 가지고 올게요. 핑계는 많은걸요.”
노인의 팔에 매달리며 웃는 손녀는 서왕모에게 좌를 물려받을 것이라 했다.
물큰, 달큰하고 달큰한 향기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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