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그 후, 100년 (1)
2018.08.27.
끝도 없이 이어진 물은 하늘과 경계도 짓지 못한 채 차가운 바람 아래 잘게 일렁였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부는 호숫가에 인기척이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잔뜩 질린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세상에, 이건 호수가 아니라…….”
광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북쪽의 샘.
샘이라는 말에 작고 아담한 것을 기대했던 소희는 북쪽의 샘의 위용에 너무 놀라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세상에.”
놀란 입술이 연신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하하하핫, 놀래주시니 뿌듯하다 해야 할지.”
염휘는 북쪽의 샘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소희를 보며 기쁘게 웃었다.
“이건 샘이 아닙니다.”
소희는 어린 소녀일 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럼 샘이 무엇입니까?”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뒤편에 서 있던 교아였다.
나고 자라 처음 눈에 담은 것이 바로 북쪽의 샘이었으니, 교아에게 샘은 이토록 광활하고 웅장한 것이었다.
붉은 감재사자복을 입고 선 교아는 늘씬하게 뻗은 자태만큼이나 쥐고 있는 검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사자’였으나 소희에겐 언제나 홍안이 사랑스러운 그녀의 첫 아이일 뿐이었다.
“으음…….”
아이가 물었으니 답을 해주어야 할 텐데.
소희는 막상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몹시 난감해졌다.
자신의 기억에 있던 샘을 설명하자니, 곁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물이 솟아나 만든 작은 웅덩이를 보통 샘이라고 부른다.”
난감해하는 소희 대신 아수라가 교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작은?”
풍천이 아수라의 설명에 웃음꼬릴 달아 키들거렸다.
작다는 말이 민망해야 마땅했다.
북쪽의 샘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 풍천이 웃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특정 단어에 힘을 주는 아수라.
표정은 덤덤했으나, 새카만 눈동자 아래 붉은 불꽃이 살랑여 절대로 점잖은 표정은 아니었다.
“보통……은 요만한가.”
소희는 교아 앞에서 염라의 불이 투덕거리기라도 할까봐 얼른 나서서 말을 잘랐다.
두 손을 벌려 크기를 가늠하는 모습에 교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수라가 사나운 눈짓을 풍천에게 쏘아 보내며 ‘샘’에 대한 정의를 대충 합의하는 것으로 작은 소동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장관은 장관이었다.
소희는 뒷짐을 지고서 자신을 기다리는 염휘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겨두고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다가오는 소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게 두 손이 따스히 얽히고, 서로의 옆을 내주며 함께 서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염휘는 소희를 옆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팔을 둘러 뒤에서 껴안다시피 했다.
“아이참……!”
또다시 달큰한 희롱인가 싶어 소희는 저도 모르게 뒤쪽을 흘끔거리며 새된 소리를 냈다.
살짝 뒤를 훔쳐보는 두 볼이 어김없이 발그레하다.
그러나 염휘는 소희를 껴안는 대신 크게 두른 팔로 그녀의 양손을 가볍게 거머쥐고 크기를 가늠하듯 살짝 벌렸다.
“원래는 이만큼.”
박 바가지보다는 좀 크고, 은쟁반보다는 한참 작다.
“무슨…….”
소희는 그제야 염휘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크기 말입니다. 정말로 물이 솟는 작은 웅덩이였습니다.”
“네? 여기가요?”
“네.”
그리고 아쉬우시다면.
염휘는 조금 전까지 단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것과는 달리 단번에 잡고 있는 양손에 힘을 더해 품 안에 소희를 담아버렸다.
“……읏!”
아차 할 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염휘의 날숨이 목덜미를 따끈하게 스쳤다.
“이러면 되겠지요?”
때마침 바람도 차가우니.
단정한 듯, 점잖지 못한 목소리가 그의 날숨만큼이나 열이 올라있었다.
아니, 열이 오른 것은 소희의 두 볼인지도 모른다.
절로 부끄럽고,
무척 설레어서.
자꾸만 새침한 대꾸가 새어나가고 만다.
“핑계가…….”
“짐이 핑계를 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목소리에 가득 찬 여유와 그보다 더한 웃음기에 새침하게 굴던 소희마저 웃고 말았다.
“없으시지요.”
“그리고, 그분도 안 계시는군요?”
소희의 머리에 뺨을 가져다 대고 염휘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사이 호수를 모두 찾아본 듯,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해있었다.
마고께 하루를 태운 태양을 받아들인 염휘는 영력을 돋우지 않아도 언제나 그의 홍안에 금빛을 물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모습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염휘가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안 계십니까?”
아쉬움이 절로 묻어나는 소희의 대꾸에 염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선물은 두고 가면 전해질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는 소희가 서녘의 달빛을 나눠주는 이에게 정성으로 선물을 마련한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에…….”
염휘의 손가락이 멀지 않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곳에 머무는가 봅니다.”
과연,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집중해서 바라보자 정말로 소희에게도 가물가물하게 작은 전각이 보였다.
“안 계십니까?”
“……네.”
항시 귀한 것을 나눠주시는 분이라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건만.
소희는 못내 아쉬워했다.
“별처럼 많은 날, 다음에 또 들러봅시다.”
염휘가 다독이며 소희를 잡아끌고, 등 뒤에 서 있던 아수라와 풍천. 그리고 교아까지 모두 염휘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겁니까?”
“달을 낚는 이에게 달 마마의 선물을 남겨드리고 오시려는 것 같구나.”
“다음에는 우리 아이도 데려와야지, 이거야 원 눈꼴시어서.”
풍천이 흥흥거리며 콧방귀를 끼는 다소 왁자지껄한 길이었다.
차갑고 무거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은 건 그래서였는지, 다정하고 다시 없을 만큼 행복한 날을 맛보고 있어서였는지.
소희는 반 시진을 걸었어도 피곤한 줄 몰랐고, 그저 걷는 내내 즐거웠다.
그래서 다다른 전각 앞에서 조금 더 들뜬 마음에 과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바람이 차고 눅눅한 것이 비가 언제 올지 몰라요. 이곳에 두면 안 될 거예요.”
실례합니다.
텅 빈 전각을 향해, 예의를 갖춰 주인을 한번 부르고 지붕이 있는 전각 안으로 소희가 손을 쑥 넣어 지어온 망토를 넣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넘쳐, 고마운 분께 조금 더 상냥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망토를 집어넣으려 들이민 팔에 기둥 옆에 세워둔 광주리가 넘어진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대나무로 엮은 광주리가 넘어지는 가벼운 소리에 소희가 화들짝 놀라 광주를 집어 든 것도.
집어 든 광주리에서 삐져나온 나무 가시에 소매가 걸린 것도.
모두 예상 밖이었고.
“어머나!”
별것 아닌 광주리에 소희가 바들거리며 두 눈 가득 눈물을 가득 채운 것 역시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이런! 다치셨습니까?”
귀여운 마음씀씀이를 지켜봐 주던 염휘가 소희의 자지러지는 목소리에 놀라 한걸음에 달려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작고 고운 두 손엔 그 어디에도 상처가 없었다.
어디가 다친 것이냐 물어볼 새도 없었다.
“이건, 이건.”
소희는 광주리를 염휘에게 보이며 눈물이 찰랑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께서 광주리를 엮으실 때 매듭짓던 것과 똑같아요.”
반가워서 그만.
고운 뺨 위로 눈물 자국을 길게 내며 소희가 속삭였다.
“이런…….”
염휘는 소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묘하게 굳어버린 염휘의 표정은 무척 난처해 보였다.
“그…….”
“달 마마! 다치셨습니까?”
만월의 가루를 드릴까요?
소희가 전각 앞에 서서 손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다쳐서라고 생각한 교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머뭇거리던 염휘의 말은 교아의 말에 묻혔다.
그리고 교아의 목소리에, 소희가 감았던 눈을 뜨며 옅게 웃었다.
“만월의 가루가 남아있긴 한 거야?”
조금 전까지 울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네놈의 실력을 의심하신다는 뜻이지.”
소희의 농에, 아수라가 쐐기를 박자 교아의 얼굴이 단숨에 빨개졌다.
“이익! 절 못 믿으십니까?”
“에고 무서워라.”
풍천까지 한마디 더하자, 정말로 교아가 저러다 얼굴에 불이 붙겠다 싶을 정도로 새빨개져 소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전각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 울겠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울던 것은 모두 잊고. 제 아이 눈에서 눈물이 날까봐 나지도 않은 눈물에 동동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휘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 * *
“꼭 가셔야 합니까?”
상천에서 돌아온 날, 곧 날이 저물 것이라 들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새빨개 아수라의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희에게 들러 혼롓날 객들의 거처를 배정받아 돌아가는 길이라던 그가 염휘를 찾았다.
“어디를 말이냐?”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답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이었다.
“염휘께선, 태자에게 쏟아부은 것 말고도 남은 자애로움이 아직 있습니까?”
“무어라?”
괴상할뿐더러 고약하기까지 했다.
염휘는 다소 무례하게 구는 아수라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전을 봉해주십시오.”
“……그럴 가치가 있는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여태 그런 적 없던 아수라가 더할 나위 없이 이상하게 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으나 염휘는 경고하듯 말을 눌러주었다.
새로운 생명을 받아, 혈기가 날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기를 받은 터라 변해버린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정말 중차대한 일이 또다시 터진 것인지.
아수라가 이상하게 구는 이유를 확인해볼 필요는 있었다.
염휘는 뜻 모를 불안감에 술렁이는 가슴을 누르며, 손끝을 들어 대전에 진을 펼쳤다.
하지만 정확히 이 각 후 염휘는 대전을 봉한 진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조차 놀랄 이야기에 누군가 들어버린 건 아닌지 놀란 마음이 시킨 일이었다.
“확실한 이야기냐.”
“소장, 삼생을 걸어 맹세하오니 참입니다.”
아수라의 목숨을 건 확답에 염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송곳처럼 돋아 그의 가슴을 찔렀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
채 빛을 바랄 시간도 없었던 기억이 아수라의 말에 떠올라 버렸다.
눈물에 젖은 여윈 뺨.
생을 다해 검게 죽어버린 낯.
“이 아이 나자마자 어미를 잃었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용모를 한 자신을 향해 두 무릎 꿇기를 주저하지 않던 상냥하던 이.
그이가 갑자기 기억 속에서 살아나왔다.
“영혼의 맹약을 깨트리고 어떻게 지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냐?”
염휘의 의문은 몹시 타당했다.
심지어 귀왕인 자신과 맺은 영혼의 맹약이었다.
황금빛 진이 거미줄처럼 그를 동여매 묶는 것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맹약은 깨졌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소희였다.
혼인을 약조한 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유훈이라며 태자와 혼인을 올리려 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염휘는 두툼한 두루마리를 안고 서 있는 아수라를 바라보았다.
아수라는 염휘의 시선에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가 깁니다만, 그 역시 휩쓸렸다고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아수라가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새카만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르고, 그보다 짙은 홍조가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이런. 밤이 되었군요.”
아수라는 난처한 듯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염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이 녀석이 겪은 거라 본대로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허락한다.”
밤의 아수라는 염휘의 말에 낮의 아수라가 ‘우연히’ 보았던 그 날의 기억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날은 아수라와 풍천이 모두 귀문으로 향하던, 조금은 특별한 날이었다.
이미 달 마마께서 십여 년을 자리 비우신 탓에 요괴가 들끓어 애를 먹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아니, 시왕들이 영이 없다고 난리라니 말이 되냔 말이지.”
“영도에 묶여있으니 잘 되었지 무얼.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 투덜거리는군.
아수라는 풍천을 다독이듯 구박하며 감재사자를 앞세워 영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실 영도라 함은 이 귀문에서 더없이 안전한 곳.
온갖 진이 도탑게 올려져 삿된 것을 단단히 방비하니 영들이 위험할 리는 없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상시의 일이었다.
달 마마의 부재는 하계의 많은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다.
사념의 일부가 요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념이 모두 요괴가 되었고, 요괴는 모두 무섭게 성장했다.
텅-
텅-
저렇게 감히 영도를 두드릴 정도로 말이다.
길게 뽑아낸 손톱에 독을 잔뜩 올려 영도를 두드리는 거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요괴 무리.
“기가 차는군?”
아수라는 무섭게 흔들리는 영도를 바라보며 혀를 차더니 순식간에 접선을 털어 검을 만들어 쥐고 달려나갔다.
그 뒤를 감재사자 넷이 따랐다.
진에 갇히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영과 분리되어야 할 요괴뿐,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염라의 불과 사자들은 예외였다.
아수라의 묵빛 검이 그대로 진을 가르고 영도를 두드리는 요괴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뭐, 나까지 나설 필요도 없잖아.”
풍천은 아수라가 나서자마자 단번에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아수라.
이번 대는 밤의 아수라가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 하더라도, 아수라는 아수라였다.
아수라가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죽은 요괴가 터지며 검은 먼지가 세차게 일었다.
마치 검은 살이 쏘아진 듯 호쾌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으나 영도에서 느긋하게 바라보던 풍천 역시 오래지 않아 영력을 돋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가 내려앉은 영도의 반대편, 그러니까 영도의 왼편에서 한 무리의 요괴가 날을 세워 덤비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길. 노는 꼴을 못 보는구먼.”
감재사자 넷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요괴 떼였다.
이러니 영들이 영도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에 쓸어내 주마.”
풍천이 손바닥에서 도를 꺼내 올리며 목 안쪽에서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영도 좌우로 검은 폭풍이 일기를 반 시진.
염라의 불들이 직접 나선 덕에 영도 주변은 요괴 한 마리 남지 않고 정화되었다.
“허억.”
풍천이 땀이 흥건한 이마를 훔치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일대 다수의 접근전은 가능한 빠르게 종결되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특히나 다 자란 요괴는 손톱 끝에 독이 있어 긁히면 여러모로 성가셔 과하게 힘을 퍼부은 탓도 있었다.
“저…….”
그때였다.
허덕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풍천에게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누군가의 손이 내밀어졌다.
“음?”
하얀 다기잔.
죽은 지 채 하루가 안 된 영이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바짝 마른 몸은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라 누가 보아도 병사한 자임을 알 수 있었다.
“드시우. 고맙소이다 사자님.”
죽은 줄은 아나, 죽은 것을 실감하지 못한 듯 풍천을 영을 인도하는 ‘사자’라고 부르면서도 살아있을 적에 쥐고 있던 찻잔을 건네는 것이 우스웠다.
애초에 영도에 오르는 것은 영뿐이라, 지금 영체가 내미는 것은 그의 사념일 뿐이건만.
하지만 순한 표정에 담긴 것은 담백한 감사함이라 풍천은 ‘허상’을 깨트리는 대신 그가 내민 찻잔을 받아 쥐었다.
“고맙소.”
그러나 풍천은 영이 찻잔을 쥐여주고 돌아서자마자 인상을 와그락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찻잔을 건네며 스친 손끝에서 영이 갈 곳을 봐버렸던 것이다.
‘지옥.’
그는 영원히 지옥에 갇힐 운명이었다.
저렇게 순박해 보이는 이가?
영원히 지옥에 갇힌 이는 풍천이 알기로 열 손 안에 꼽혔다.
모두 영혼의 맹약을 깨뜨린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영혼을 맹약을 걸었다고? 누가 그런 짓을.
믿기지 않는 사실에 풍천은 그대로 아수라를 불렀다.
요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아수라. 어이 아수라.”
풍천의 딱딱한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마디 하려던 아수라가 대번에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아수라 역시 호흡 끝이 가늘게 떨릴 정도로 힘든 상태였으나 굳이 그런 상태의 자신을 부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
“저자의 기억을 들여다봐 줘.”
그리고 아수라의 짐작대로 풍천은 아수라의 권능 중 하나인 기억 엿보기를 부탁해왔다.
어차피 시왕 앞에 서면 낱낱이 드러날 ‘과거’이니, 시왕을 부리며 지옥을 관장하는 풍천이 청하면 상세히 알려줄 것이었다.
그러나 굳이 풍천이 ‘지금’ 원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라 아수라는 그대로 풍천이 가리킨 남자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백 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생의 기억은 그다지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이 문제였다.
아수라는 일각도 채 되기 전 얼굴이 푸르게 질려 그대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이, 이것은……!”
“영혼의 맹약이지.”
그리고 풍천은 아수라가 놀란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수라의 말에는 풍천 역시 얼굴이 희게 질리고 말았다.
“염휘께서 직접 시전한 것이라니!”
뜻밖의 소식은 생각보다 놀라운 것이라, 두 염라의 불은 얼굴이 하얘져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