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별비 내리는 날 (7)
2018.08.24.
가시기 전에 한 번 더 식사를 하자는 말은 지켜지지 못했다.
혼례를 올린 귀왕과 비는 만나야 할 객이 무척 많았고, 잔치의 마지막 날인 셋째 날엔 하계 각지에서 올라온 염라의 불들에게 인사를 받느라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기도 힘들었다.
결국 둘째 날의 식사를 마지막으로 따로 보지도 못하고 상제와 휘가 상천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즐겁게 준비하세요.”
부쩍 다정해진 사이만큼이나 살가운 인사를 하며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은 이상했다.
환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염라궁이 쓸쓸하지도 않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아니, 상제가 돌아가 버려 기쁜 것인가.
소희는 바삐 걷는 환의 팔에 제 팔을 끼운 채 뛰듯이 종종거리며 그의 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어디 급한 일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따라갈 수 없어 호흡이 절로 가빠졌다.
“좀 늦어서요. 이런.”
힘드셨습니까?
환은 미안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앗!”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린 환은 대번에 소희를 안아 들었다.
겨드랑이 밑과 두 무릎 아래서 느껴지는 탄탄한 팔은 소희쯤은 가볍다는 듯 안정적으로 받쳐 들었다.
“급한 일입니까?”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안아 들고는 걸음을 재촉하는 환에게 소희가 조심스럽게 목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음. 나보단 그대가?”
날카로운 콧대 아랫입술이 매력적인 곡선을 그려냈다.
“……음.”
이유를 물어야 했으나 그것보다 아찔한 미소에 돋은 홍조를 가리는 것이 더 급했다.
소희는 발그레해진 얼굴을 환의 어깨에 묻으며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어느새 염라궁 가장 외벽에 다다른 환이 귀왕의 목소리로 물으며 소희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염라궁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수라가 산책을 청하며 진종일 그녀를 끌고 다닌 적이 있었으나 본궁과 내궁 근처만이었다.
소희는 이 염라궁의 전부를 알지 못했고, 궁 밖으로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성문 밖으로의 첫 발.
환이 내려준 그대로 소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넓은 강과, 강바람을 타고 흐르는 상쾌한 바람.
소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잡으며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했다.
염라궁은 성곽 밖이 바로 강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제 배에 오르시면 됩니다.”
처음 보는 풍경을 천천히 각인시키듯 돌아보는 소희를 향해, 환의 손이 뻗어졌다.
“가십시다.”
“어딜요?”
설마 뱃놀이를 하자고 이렇게 급히 나온 것은 아닐 테고.
“가보시면 알 테지요.”
빙글거리는 환의 표정에서 꿍꿍이가 느껴졌지만, 즐거워하는 그 모습에 모르는 척 따라가 주리라 생각했다.
단단히 붙잡은 이 손이 자신을 얼마나 상냥히 이끄는지 익히 알기 때문에, 소희는 기꺼이 뱃전에 작은 발을 딛고 올라섰다.
“여기로 앉으세요. 배가 뜨면, 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춥답니다.”
환은 배의 가장 안쪽에 보료가 깔린 곳으로 소희를 끌었다.
푹신한 그것은 아마도 소희를 위해 옮겨진 것인 듯 새것이었고, 색이 무척이나 고와 그녀를 생각하는 환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마웠다.
“제 것은 없습니까?”
“저도 추위는 꽤 탄답니다, 염휘시여.”
소희가 막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 앞으로 익숙한 인물들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뿐하게 뱃전으로 내려선 그들은 마치 솜털인 양 배를 흔들지도 않고 원래 있던 이들처럼 맵시 나게 자리를 잡고 섰다.
“풍천과 아수라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희가 묻자 아수라가 쥘부채 뒤에서 눈을 장난스럽게 휘었다.
“으흥, 모르시는군요?”
시선은 소희를 향해있었지만, 질문은 뱃머리에 서 있는 염휘에게 닿아있었다.
“여흥이니라.”
“과연 그럴까요?”
염휘의 말에 아수라가 눈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되물었지만, 염휘는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뻔히 들리는 대화였으나 소희는 궁금하지도 않은 듯 그들을 향해 자리로 오라 청했다.
“아닙니다, 잠시 바람을 쐬다 가겠습니다.”
풍천도 아수라도 소희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염휘의 곁에 가서 나란히 섰다.
두 손을 늘어뜨리고, 온화하게 풀린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소희는 문득 그들이 염라의 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상제와, 상천의 선인들을 보았을 때 느껴지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세였다.
이것이 바로 하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인가.
문득 몸이 뒤로 밀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배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득 받아 쏘아지는 살처럼 빠르게 강물을 가르고 나가는 배는 정말이지 아찔할 정도로 빨랐다.
“우…… 우와……아.”
소희는 숨을 훅 들이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배가 이렇게 빠른 것인 줄은 몰랐지만, 이것이 하계의 배이기 때문이란 것 정도는 이제는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이것이 무슨 강입니까!”
강을 가르며 쏘아지는 배 위를 스치는 광포한 바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소희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환에게 물었다.
나부끼는 머리를 양손으로 쥐고는 외치는 모습이 고울 리는 없었으나 돌아보는 환의 홍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아름답게 일렁였다.
“이름 없는 강입니다.”
“이름 없는 강.”
영력이 담긴 그의 목소리는 소희처럼 소리치지 않아도 몹시 또렷하게 잘 들렸다.
이름 없는 강.
한나절을 타고 가면, 교아가 있는 귀문에 닿을 수도, 이 너른 강을 건너가면, 직인이 계시는 삼천외의 땅에 닿을 수도 있는 모든 곳으로 통하는 그 강이 바로 이것인가.
소희는 강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뱃전으로 향했다.
마치, 밤하늘을 닮은 강이었다.
색을 짙게 머금은 것과는 달리, 투명해 바닥을 스치고 가는 물고기까지 모조리 선명하게 보였다.
“대단하다.”
“볼만하지요?”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바람을 막아서며 근사한 저음이 그녀를 불렀다.
당연한 듯 너른 품을 내주며, 찬기를 가려주는 것까지 몹시 익숙했다.
“종종 함께 염라궁을 떠나 다니는 건 어떠십니까.”
“언제든 좋으니 귀찮다 마시고 데리고 다녀주세요.”
환의 말에 앞날을 약속해달라 조르던 소희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반색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럼, 저희는…… 지금 설마?”
“강 이름도 들으셨으니 짐작하셨을 테지요. 짐의 비는 영명하신지라.”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언젠가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짐은 신의를 아는 사내입니다.
환은 소희를 품에 안고서는 애틋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지킬 것이라 하는 것이 약조입니다.
서두른다 하였으나, 이제야 한숨 돌릴 것이라 오늘서 청합니다.
“그날 우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짐은 몹시 괴로웠답니다.”
“아아…… 그날 제가 좀 과했지요?”
소희는 민망한 듯 말을 흐렸으나 환은 소희의 머리에 턱을 괴고선 느릿한 목소리를 냈다.
“아닙니다. 저 역시 몹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잘 있겠지요?”
“그럼요. 교아는 짐의 영력을 받은 아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감재사자가 될 것입니다.”
“교아에게 가는 줄 몰라서 만월의 가루를 제대로 못 챙겼습니다.”
“이미 배에 실어 놓았답니다.”
“어머나 어떻게 그런.”
“짐의 아이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애틋하기는 마찬가지란 걸 몰라주시는 것입니까.”
짐의 부정을 몰라주시다니, 으흥.
짐짓 서운한 듯 눈꼬리를 느슨하게 내려놓은 환은 소희를 안고 있던 팔을 내려 작은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럼, 태자 때는 조금 더 티를 내 볼 것입니다.”
“네?”
갑작스럽게 아직 나지도 않은 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되묻는 소희에게 환은 말 대신 쥐고 있던 소희의 두 손을 맞댔다가 떨어뜨렸다.
그러자 소희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황금빛이 길게 늘어져 하늘거렸다.
“이건!”
“황후사입니다.”
방금 능력을 넘겨드린 고로, 틈틈이 연습하세요.
환은 지긋한 목소리로 소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게으름 부리지 않고 매일같이 황후사를 뽑아내야 강보를 만들 것입니다.”
“강보요?”
아직 아기씨도 없는데?
“태자는 이미 와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무슨!”
“아, 잘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물리도록 사랑하여드릴 테니.
환은 등 뒤에서 껴안은 그대로 귓가에 대고 은근한 말을 속삭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 밤서 다시 한번 내어드릴까요?”
“정말!”
엉큼한 남자란 말이야!
귀까지 새빨개진 소희가 주먹을 야무지게 쥐고 환을 아프게 때렸다.
손끝에 매달린 황후사가 소희의 손짓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다 이내 환에게 거둬들여졌다.
“소중히. 황후사는 비의 영력을 한껏 머금은 것으로 함부로 흘리고 다니면 요괴의 먹이가 되어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환은 조금 전까지 능글거리던 것과는 달리 말쑥한 표정을 해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제가 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조금 더 내어주세요.”
“뭐하시게요?”
소희는 망설이는 듯 되물은 것과는 달리 환에게 배운 그대로 손끝에서 황후사를 뽑아냈다.
손끝을 타고 늘어지는 황후사는 무척이나 아름다워 아수라도 풍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소희의 손끝에서 시작된 황후사는 환의 손가락을 타고 몇 번인가 합쳐지고 꽈지며 실타래가 되었다.
한 뼘이 채 되지 않을 도톰한 그것은 환의 영력으로 이어져 반지처럼 둥그런 환이 되었다.
“팔찌?”
“선물이지.”
소희의 말에 환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붉은 입술을 늘여 싱긋 웃으며 그대로 팔찌를 소매 안에 갈무리하는 것으로 보아 소희의 몫이 아닌 것 같았다.
“아? 교아?”
“안될 소리. 달 마마의 온정은 만월의 가루로 족합니다.”
환은 소희의 말에 정색하며 단칼에 부정했다.
염라의 불들에게 모두 만들어 줄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편애’는 드러내 보이지 마세요.
달 마마는 모든 달 아이의 어미.
어미의 사랑을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이야 다 같은 것입니다.
환은 교아에게 마음을 듬뿍 쏟는 소희가 염려된다는 듯 당부를 했다.
“태자도 마찬가지예요, 태로 낳아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러우시겠지만. 달 어미인 이상 모두를 품을 수 있게…….”
“모두에게 나눠주기는 무리입니까?”
“큭.”
“하하핫.”
다정도 하시지.
바람에 흩날리는 까만 머리채를 돌려 묶으며, 아수라가 눈을 활처럼 휘며 웃었다.
“당장 전장에 내보낼 수 있는 사자가 십만입니다. 마마.”
“아……아?”
“어림되지도 않으시지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인파입니다. 아마 만월의 가루는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평생 황후사만 뽑아내셔도 글쎄…….”
“만월의 가루를 만들게요.”
소희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기가 질려,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열심히.”
“안됩니다.”
이번에 대꾸한 것은 뒷짐 지고 바람을 한껏 즐기던 풍천이었다.
“열심히 내주셔야 할 건 달 아이입니다. 시왕 녀석들이 얼마나 저를 다그치는지 못 보셨습니까?”
풍천은 질렸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보였다.
“삼일을 밤낮없이 달 아이를 내어달라 ‘제게’ 조르는 거 못 보…… 못 보셨겠, 흠. 네. 뭐.”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던 풍천은 문득 뭐가 생각난 듯 말을 어색하게 흐리며 헛기침을 했다.
어찌나 어색하고 티가 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상한 태도에 또다시 아수라의 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손에 들린 묵빛 접선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날아들어, 찰진 소리와 함께 풍천의 이마에 빨간 자국을 남겨주었다.
“아읏!”
대번에 이마를 잡으며 눈을 흘기는 풍천을 향해, 아수라가 요염한 눈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대놓고 그러시면 무안하시잖는가.”
빙글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염휘를 담고선 한껏 얄밉게 빛을 뿌렸다.
“많이 떠들거라. 내세를 지켜볼 것이니라. 내세에 짐과 비는 천신이 되어 있을 테니, 네 녀석들 신방도 훔쳐봐 주마.”
못지않게 즐거운 기색으로 염휘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바람에 날리는 은발을 아무렇게나 날리게 두고서 팔짱을 낀 그는 비웃음을 머금고 있어도 찬연하게 빛을 뿌리는 남자였다.
문득 소희는 이 잘나고 잘난 사내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서 공대 받는 이 현실이 까마득하다 생각했다.
가엽고 가여운 고아였던 자신에게 이런 행복하고 귀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정말 웃기게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벅차고 행복했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열아홉, 스무 해의 고생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예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기다릴 것입니다.”
“금방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귀에 익은 친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환?”
소희의 부름은 혼잣말이었고, 환은 아수라와 풍천에게 둘러싸여 열없은 항의를 받는 터라 작은 목소리는 바람과 함께 선미로 흩어졌다.
“저런, 내가 물놀이를 망친 것이냐?”
미안함을 담은 근사한 미성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좋았다.
잊고 있던 기억은 목소리와 함께 그날의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점잖은 차림새를 한 고귀한 느낌이 물씬 풍기던 선비님.
균열 간 기억의 아래엔 숨겨졌던 또 다른 기억이 있었고, 언젠가 아수라의 전을 찾아가며 머리가 아프게 무너져 내리던 기억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많이 아팠느냐? 물놀이도 나오지 않고.”
“예에?”
“그날 고뿔이 든 게지?”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내가 널 기다린 것이냐?”
갓끈이 풀어진 줄도 모르고 웃던 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와 사납게 물었다.
“널 기다린 나를!”
절망에 물든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에 차갑게 빛을 뿜었다.
울지 않는 남자의 홍안이 슬픔으로 가득 차 일렁였다.
숨이 막히도록 밀려드는 기억에 소희는 눈앞에 깜빡이는 이 아름다운 불꽃이 기억 속의 남자의 것인지 자신의 ‘환’의 것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
뺨을 두드리는 서늘한 손이 주는 위안이 소희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우리…….”
“그대 왜 그러시는 거야?”
달콤한 숨이 단번에 영혼을 잠식하듯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우리, 만난 적 있던가요?”
“아…….”
붉은 보석이 얼어붙은 듯하다 이내 황금으로 녹아들며 세차게 빛을 뿜었다.
“기억이 나셨습니까.”
멋쩍은 듯 기쁜 듯 웃는 환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그날같이 싱그러웠다.
“예서 기다리거라 하시던 음성이 이제야…….”
홍조가 오른 뺨을 숨기지 않고 소희가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너럭바위 위에 앉아 버선을 숨기셨더랬죠.”
길고 곧은 손가락이 그날과는 달리 점잖게 내밀어지는 대신 욕심껏 두 뺨을 감싸 쥐어 코가 스칠 만큼 얼굴을 끌어당겼다.
“귀여운 하얀 발을 숨기시고는, 까만 눈으로 짐의 마음을 맘껏 움켜쥐었지요.”
“아아 선비님이!”
별처럼 반짝이는 소희의 홍안에도 기쁨과 반가움이 넘실거렸다.
등 뒤의 염라의 불들의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고, 오로지 두 사람만의 시간만이 흐르는 것 같았다.
“복숭아, 먹거라.”
그 언젠가의 선비님의 표정을 한 채 염휘가 두 눈을 내리깔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귀한 것을 함부로 입에 댈 수는 없습니다. 저보다 더 곤한 이에게 나눠주십시오.”
“맹랑한 아이가 짐의 천도를 그렇게 거절했었습니다.”
마주친 두 시선에 따끈한 불이 지펴지고, 어쩌지 못한 충동에 두 입술이 바람결에 스쳤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한껏 애틋한 그때.
아수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 두 분의 사랑을 바라는 아이가 나와 있는데 어쩌시렵니까.”
다분히 짓궂은 눈빛이 저무는 석양을 받아 그대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날리는 흑발을 잡고 있던 단단한 손이 뼈마디 없이 나긋한 것으로 바뀌고 웃음을 머금은 눈매가 요염한 곡선을 그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의 아수라의 손이 공기를 가르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붉은 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의 모습이 그린 듯 눈앞에 나타났다.
쏘아지는 살 같던 배의 속력은 어느새 잦아들어 모래톱에 닿았다.
“마마!”
붉은 관복만큼이나 발그레한 뺨을 한 감재사자 ‘교아’가 사자 ‘소’와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후욱 끼쳐드는 뜨거운 바람이 한껏 달궈진 소희 마음처럼 따사로웠다.
귀문이었다.
그리고 우연처럼 소희가 배에서 내려 발을 딛는 순간 구름이 걷히고 달이 그대로 빛을 뿜었다.
“어서 오십시오, 달 마마. 귀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교아야.”
약속한 대로 만나러 왔단다.
소희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을 내는 표정 그대로 두 감재사자의 손을 잡았다.
“귀왕께 인사드리옵니다.”
무릎을 꿇어 왕에게 예를 올리는 것은 교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재사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먼 길에 지치셨을 텐데 차라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점잖은 인사가 단정히 울리길 기다렸다는 듯 어리광이 한껏 오른 목소리가 뒤따랐다.
“마마-. 제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십니까아-.”
“이 녀석이 어디서 어리광이냐!”
“아이고, 아수라님 이제 괜찮아지신 것입니까?”
“흥. 그까짓 거.”
“죽다 살아나셨네.”
“이 지긋지긋한 자!”
“아, 싸울 거면 들어가셔서 마저 하시지요.”
어느새 능구렁이가 된 교아가 아수라와 풍천을 자연스레 감재사자의 처소로 청했다.
“귀왕이시여, 누추한 곳입니다만 달 마마와 함께 들러주신다면 영광일 것이옵니다.”
“그래, 가자꾸나.”
앞선 교아 일행을 보며 미소를 짓던 염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팔에 살짝 팔짱을 낀 소희 역시 웃는 낯이다.
“가십시다.”
염휘가 앞서 길안내를 하는 소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소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네, 가요.”
감재사자들의 처소로 안내하는 소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염휘의 발자국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소희의 작은 발자국이 모래언덕 위로 또렷하게 새겨졌다.
사박
사박
뜨거운 귀문의 모래 위로 또렷하게 찍히는 발자국이 끊어지지 않고 점점이 이어졌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