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별비 내리는 날 (6)
2018.08.20.
가만히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한없이 애틋하고 다정해 잠결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감은 눈두덩으로 환한 빛내림이 느껴졌지만,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간밤 얼마나……
“!”
소희는 이어지는 생각에 그만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훤하게 드러난 맨살도 그렇거니와 아릿한 통증이 간밤을 생생하게 되살려놓은 덕에 자신을 바라보는 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잘 잤어요?”
환은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몸을 모로 뉘고는 나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짐은 아직 곤해서 벌써 일어나긴 귀찮은데 비께선 일어나실 작정이십니까?”
“저, 저는 저도 아직.”
소희는 몸이 무척이나 무겁고 피곤해 좀 더 쉬고 싶기도 했고, 맨정신에 벌거벗고 환을 볼 정신도 없어 잔뜩 얼굴을 붉히며 말을 골랐다.
아니, 말을 골랐다고 한 것은 착각이었고 사실은 그저 말을 더듬었을 뿐이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부족해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소희는 무척이나 아름다워 환을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최대한 몸을 숨기려 웅크렸으나, 미처 가리지 못한 등의 보드라운 살결이 햇살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은발이 등을 따라 물결치듯 맨살을 감고 흐트러져있는 모습은 꽤나 뇌쇄적이어서 고의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야릇했다.
간밤 자신을 받아주던 소희가 얼마나 고단해 했는지를 뻔히 아는 처지라 또 욕심을 낼 수는 없는 노릇.
환은 자꾸만 집요해지는 시선을 손을 들어 가렸다.
“짐은 침의를 입었답니다. 비께서는…….”
하다 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어 환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창밖에서 아직도 흥겨운 목소리들이 여전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바깥에서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염휘는 다급하게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멎길 기다려 침상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입은 티가 여실히 드러나는 소희의 옷차림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소희가 새빨개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불붙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귀여운 분.
환은 자꾸만 비식 새나가려는 미소를 단단히 붙들고 단정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이리 와보세요.”
허리띠가 꼬였는데.
쭉 뻗은 그의 손이 별 뜻 없이 소희의 허리띠를 잡아당기자 소희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리질을 쳤다.
“나, 낮부터 이러지 마세요!”
“네?”
“그…… 그러니까.”
“허리띠가 꼬였으니 봐 드릴…… 아…… 지금 짐을…….”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희를 보고 말을 잇던 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비께선 짐을 뭐로 보셨던 겁니까?”
“뭐…… 뭐로 보긴요. 오해이십니다.”
“뭐가요?”
“저도 그저 허리띠를 매만져 주시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봐야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환은 소희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예고도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말캉한 여린 살이 그대로 손가락 아래서 뭉개지는 모습마저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었다.
“잘도…….”
그런 표정으로.
무심하게 읊조리는 남자의 표정은 한없이 여유로워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소희는 말릴 새도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번에도 시선을 피하면 정말 환을 호색한 취급하는 꼴이라 꾹 참고는 그의 시선을 견뎠다.
“사실은 이런 걸 생각하신 게 아니고요?”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환의 입술이 소희를 스쳤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놀라 도리질 치는 소희에게 환이 나른한 목소리 가득 웃음을 담고 중얼거렸다.
부리로 쪼듯 가볍게 입술을 부딪친 것 같던 입맞춤이 다음 순간 몹시 진득하게 변했다.
단숨에 호흡을 앗고, 사지가 저릿할 정도로 사정없이 몰아세우는 격한 몸짓에 다리가 풀렸다.
의지할 곳을 찾아 다급하게 매달린 것까진 좋았으나 허리를 받쳐 든 환의 눈빛이 탁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방금 벗어난 이불 속에 다시 파묻히고,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솔직히 그녀를 바라는 시선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희는 옷섶 사이로 파고드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의 목 뒤로 손을 둘러 기껍게 맞이했다.
그들이 침방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인 것은 점심이 한참 지난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잔뜩 지친 목소리가 점심상 받기 전에 급하게 요기할 것을 달라는 것이 달 마마의 첫 마디였다.
“금실이 좋으신가 보지?”
도무지 신방 문이 열리질 않네.
금방 상 올릴 것입니다. 단정하게 대답한 것과 달리, 침방 문이 닫히기 전에 조양에게 종알거린 반요의 목소리.
그리고 뒤이어 조양이 반요를 쥐어박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요의 신음이 작게 울렸지만 소희에겐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친절한 목소리로 물어본들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놀리는 듯하니 소희는 앓느니 죽지 싶어 그저 한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단장하고 오시렵니까? 상제와 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래도 식사를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다시 손목 잡아끌면 야무지게 한마디 하려 했건만, 환은 단정한 얼굴로 어느새 ‘귀왕’의 목소리를 냈다.
사랑놀음에 흠뻑 빠져 정신 못 차린 것은 오히려 소희였던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끔한 얼굴이었다.
소희는 환의 말에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침전을 빠져나갔다.
“조양아.”
다급한 목소리가 닫히는 문 사이로 작게 울리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환이 매끈한 표정을 와그락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도 헛말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품에서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 상제의 이야기도 일부러 꺼낸 것이었다.
자신이 또다시 눌러앉을까봐 소희에게 일러준 것이다.
제가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그녀라도 그가 제구실 하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달라고.
“아, 미친놈이구나.”
제대로 미쳤음이다.
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파득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침전 가득 채워진 소희의 체향이 달큰하게 코끝에 달라붙어, 자꾸만 마음이 동하고 만다.
이럴 때 그는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풍천, 상제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침전을 빠져나가며 염휘가 제 마음처럼 붕 떠서 흩날리는 머리채를 잡아 누르며 허공에 대고 말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등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묵빛 갑주를 드러냈다.
“지금 성천전에 묵고 계십니다.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간밤을 여쭙기엔 너무 늦었구나.”
“저도 이렇게 늦게 나오실 줄은…… 윽!”
뭔가 깨지듯 빡- 하는 소리와 함께 풍천이 명치를 붙잡고 웅크려 앉아 끙끙거렸다.
“쯧, 그 입이 방정이구나.”
서늘한 눈빛을 해서는 풍천을 내려다보는 염휘의 시선을 앗아간 것은 또 다른 목소리였다.
“풍천만 단속한다고 될 일입니까? 하례를 올리려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뻔히 아는 사실을요.”
적당히 하시잖구선.
쫘악-
부러 소리를 크게 내가며 접선을 펼쳐 든 것은 아수라.
한들거리는 접선을 따라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하아-.”
아수라의 말은 옳았다. 아수라와 풍천만을 단속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집무실로 은밀히 드시지요?”
접선 뒤의 까만 눈동자가 얄밉게 휘었지만 그 말이 옳아 염휘는 그길로 몸을 돌려 본궁 대전으로 향했다.
소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전언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정도 하셔라.”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염휘의 홍안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장난스럽게 솟은 눈꼬리 덕에 순식간에 여우처럼 요염해진 표정을 한 채, 염휘는 자신의 등 뒤를 따르던 두 염라의 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음 생에 연을 약조한 사이셨던가?”
더러 부럽고 안달이 날만 하겠어.
분명 마고께서 점지해주신다고 하셨겠다.
혼잣말인 듯 혼잣말이 아닌 말에 다시 한번 염휘의 뒤에선 뭔가 깨져나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빠악-.
이번에는 조금 더 컸고.
이번에도 풍천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끙끙거리며 앓았다.
그리고 아수라가 몹시 화가 난 듯 부채를 팔락거리는 손마디가 하얗게 돋아 있었다.
“너무하셨습니다.”
“내말이…… 읏. 같이 가자. 좀.”
“이런 날까지 일을 하시다니, 너무 냉정하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희 들으란 듯 염휘에게 대신 투덜거렸다.
그렇지요?
맞잡은 손에 힘을 줘 살짝 흔드는 것이 동의를 바람임을 모르지 않지만 소희는 휘께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까지 일을 하시긴 누가.
뻔히 눈 가리고 아웅 하심을 모르는 것인가.
소희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휘가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귀여워 살짝 미소지어주었다.
“휘께서도 돌아가시면 이제 정신없이 바쁘실 테지요?”
소희는 또 다른 자신인 휘께 말을 건넸다.
“아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것이 있어 여태 기다렸습니다.”
태자, 아니 젊은 상제는 소희의 말에 반색했다.
“무슨……?”
“한 달 뒤가 마고께서 말씀하신 길일이라 혼례를 올리기로 했으니 그날 와주십사 함이지요.”
“아……!”
기대하는 표정을 보며 소희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곁에 앉은 환을 바라보았다.
간밤, 상제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며 자신의 어깨를 힘줘 잡아당기며 은근한 집착을 내비쳤던 그를 떠올리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가고 싶긴 하지만, 환이 원치 않는다면 그녀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
쉽게 가자 청할 수도, 그렇다고 답을 기다리는 상제에게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지라 소희는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애매한 분위기 속에 휘가 방긋 웃으며 직접 귀왕을 청했다.
“많이 바쁘시지 않으면 와주셔서 축하해주세요.”
“……네.”
애매한 답에 모두의 촉각이 곤두섰다.
확실하지 않은 말이었다.
휘가 다시 한번 입을 떼기 전 이번에는 염휘가 단호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비와 함께 갈 테니 그날 뵙겠습니다.”
상제의 얼굴에 스친 안도감과 휘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좋은 날이었다.
이런 것을 행복하다 하는 것인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 올리니 상큼해 보이는 나물 무침이 올라왔다.
“드세요. 좋아하시는 것이지요?”
“어머나.”
평생에 처음인 것이 무척 많았고, 그 많은 것을 환과 함께한다는 것이 또한 무척이나 기뻤다.
소희는 모두의 시선을 느꼈지만, 부끄러운 내색 없이 맛있게 받아먹었다.
이제 외로웠던 날들이나 힘들었던 기억은 어디까지나 추억이 되었다 하니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설레이는지.
아마, 다들 말하진 않아도 다 같은 심산이겠지.
“어서들 드세요.”
본궁 숙수 솜씨가 아주 그만하답니다.
소희는 안주인답게 상제와 휘를 챙겼다.
“어서 드세요. 허기지지 않으세요?”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환에게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아니, 배부른걸.”
“네? 입맛 없으세요?”
은근히 주고받는 귓속말에 가득 담긴 염려가 서로 다정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니, 별께서는 어서 식사하세요.”
“어머나.”
이번에도 휘에게서 귀여운 감탄이 새어 나왔다.
번번이 환이 하는 말에 감탄을 하며, 보이지 않게 상제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은 역시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인가.
부인할 수 없이 똑 닮은 버릇을 보며, 소희는 보이지 않은 한숨을 옅게 쉬었다.
저렇게나 천진하고, 말괄량이 같은 기질이 자신에게도 있었다니.
저건 꼭.
“…….”
누굴 닮았는데.
소희는 살집 있고 씩씩한 목소리를 내던 그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저, 혹시 상제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뭘 좀 여쭙고 싶은데.”
유모의 딸이 이름이 뭐였는지 왜 생각이 나지 않을까.
소희는 한참을 골몰하다가 인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상제에게 얌전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기쁠 것입니다.”
상제는 시원하게 대답하며,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제가 인계에 있을 적에 유모의 딸. 말입니다.”
이것이 환의 심사를 흐트러뜨리진 않을까 조심하며 소희는 가능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아, 덕실이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는 왜?”
상제의 질문에 담긴 것 역시 조심스러움이었으나,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호기심까진 숨기진 못했다.
“그것이.”
소희는 말을 한참이나 골랐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민망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가볍게 넘기기엔 되짚어 본 기억의 많은 부분이 텅 비어버린 것같이 암흑이었다.
처음엔 떠오르던 유모의 얼굴마저 지금은 희뿌옇기만 하다.
그리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던 표가공자의 얼굴마저 희미하다.
당사자를 앞에 둔 지금에마저.
그저 잊었다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 아이 수명도, 유모의 수명도 인간의 시간으로 한참 남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다정하신 분이십니다.
상제는 그저 남겨진 자에 대한 미련이라 생각한 듯 가볍게 웃었지만, 소희는 그런 게 아니었다.
미안하게도 남은 자에게 대한 미련도 닿지 못할 아련함도 사신의 문을 건너며 모두 날려버린 참이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환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소희는 그저 혼자만 알고 넘기려던 것을 털어놓았다.
“덕실이가 잊혀졌다고요?”
그리고 의외의 소리가 ‘휘’에게서 흘러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운 호칭과 애정이 담긴 목소리에 소희 시선이 절로 휘에게 닿았다.
“휘께서…… 덕실이를 아십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별과 저는 한 몸이었던 처지. 별께서 가진 기억을 저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아…….”
“알만하군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휘와 소희뿐인 듯, 상제와 환에게선 뭔가를 짐작한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고께서 안배하신 일이니, 당연한 것을.”
환은 어리둥절해하는 소희를 돌아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늘어뜨린 풍성한 속눈썹 아래 홍안이 따스하고 화사하게 빛을 뿜었다.
“별에겐 덕실이의 기억이 필요하지 않은가 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인세에서 저와 혼인을 했던 건 소희님이 아니라 휘여야 하니까요.”
“흠…… 혹시 그러면 잊혀진 기억도 떠오르려나?”
이어지는 환의 말은 무척 낮게 읊조려져 아무도 못 알아들었으나, 상제는 용케 들은 듯 눈을 짓궂게 흘기며 웃었다.
“이런, 공들인 건 저뿐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공이라니요. 그저 비가 되실 분께 신경 써드리는 것이지.”
아직 오래전, 그들의 기억처럼 살갑진 못하지만, 귀왕과 상제는 분명, 그들의 직분보다 살가웠고, 불과 한 달 전보다 친근해져 있었다.
그들이 오래전 추억처럼 형과 아우로 돌아올 것이 머지않았음을 소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한껏 몽실거리는 그때.
휘가 소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생긋 웃었다.
벽안에 금발.
언제고 소희가 홧김에 소원을 빌던 그 모습 그대로 화사하게 빛을 뿜으며, 자신의 머리꽂이를 가리킨 그녀는 무척 예뻤다.
“이것 보셔요. 저도 샘이 나서 상제께 하나 해달라 조르지 않았겠어요?”
“아. 그것은!”
마치 소희의 것을 고대로 본뜬 듯 푸른 구슬이 조랑조랑 매달린 그것은 빗방울같이 맑고 고왔다.
“어여쁘지요?”
“곱습니다.”
“혹시 기분 나쁘십니까?”
“그럴 리가요.”
눈치를 보는듯한 휘의 말에 소희가 도리질을 쳤다.
따라 했다고 기분 상하시진 않을까 내내 걱정했다는 휘의 말에 소희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우리는 남이지만, 또 다른 나이기도 한 것을요. 아마 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저도 좋아할 테고, 제가 기뻐하는 일은 휘께서도 기꺼우실 것입니다.”
한 몸에서 갈라져 나왔잖습니까.
저도 이 머리꽂이가 너무 좋아 요것만 찌른답니다.
소희는 휘에게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염휘가 준 머리꽂이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요것만큼 예쁜 것이 없더라고요.”
휘 역시 제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랑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둘의 머리꽂이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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