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별비 내리는 날 (3)
2018.08.10.
어째 숨 끝이 이렇게 다디단 것이냐.
소희는 자고 일어나 깊게 들이켠 숨이 몹시 달다 생각했다.
들창으로 번지는 아침 햇살도, 싱그러운 풀내음까지 모조리 그대로인데 어째서 이렇게 사방이 달큰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이지요.”
소희의 머리를 윤나게 몇 번이고 참빗으로 빗어 내리며 반요가 노래 부르듯 대꾸했다.
“무어?”
망측하게.
반요의 말에 소희가 대번에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지만 머리 장식을 가지고 오던 조양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휴.
아주 너희들이 나를 놀리는 재미에 사는구나.
과한 반가움이 아이들을 짓궂게 굴라 부추기기라도 하는 것인지, 연이은 상천행에 아이들의 불안감이 소희를 귀왕께 단단히 묶고자 함인지.
내외하는 것도, 어려운 것도 없이 아주 노골적으로 군다.
그러나 그 아래 깔린 것은 무례함이라기보다 애틋함이라 차마 꾸짖을 수도 없다.
들리지 않을 한숨을 내쉬며 시시덕거리는 내궁 아이들을 보던 소희는 면경 속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환과 함께 돌아온 후 알 수 없는 미약한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긴 했다지만 옅게 홍조가 오른 두 뺨에 그보다 붉은 눈이 무척이나 반짝거렸다.
“……!”
아이들만 마냥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표정이었다.
휘가 상제를 바라보며 웃을 때 짓던 표정이었고, 유모가 행랑채 아범을 보며 한 번씩 짓던 표정이었다.
“세상에나…….”
소희는 제 얼굴에 깜짝 놀란 듯 그대로 면경을 엎어버렸다.
두근거리는 심박이 자꾸만 속도를 올려, 정신이 어질할 정도였다.
소희는 가볍게 핑 도는 머리를 짚고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사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잠시 침상에 누워 몸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어제 돌아갈 때만 하더라도 말 없던 아수라와 풍천이 새벽부터 아이들 편에 전언을 보내왔다.
사신대에 보내야 하니 각대를 좀 내주십사.
급한 것이니 빠를수록 좋겠다.
한 번도 이렇게 ‘요구’한 적 없던 아수라가 전언을 남길 정도였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 소희는 흐물거리는 몸을 바로잡았다.
각대를 보내주고 나서는 저녁서 풍천이 뵙길 청한다 하였으니 오늘은 계속 종종거릴 것이었다.
사신의 문을 건너고 나서는 예전보다 체력이 현저하게 좋아졌다지만, 상천에서 내려오자마자 이렇게 몰아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루는 쉬고 싶다.
작은 소망이 저도 모르게 피어올랐지만, 소희는 고개를 가볍게 터는 것으로 미련을 잘라냈다.
혼례를 빨리 올리고 싶은 것은 환뿐만이 아니었고, 자신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고단함은 급한 일 뒤로 미루어야 했다.
“조반 올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먹고 움직여야 하니 간단하게 다오.”
소희는 조양에게 당부하듯 말을 남겼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에 빠졌다고 하나, 그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건만.
온 사방이 달큰한 것이, 이상했다.
달아진 것은 숨만이 아니었다.
아침상에 올라온 음식들이 뭐라 말하기 어려운 단맛을 뿜고 있었고, 심지어 이 맑은 물마저 혀끝에 단맛이 돌았다.
소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을 벗어난 몸은 이런 것인가.
달라진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 짐작키도 어려웠다.
그리고 꼭 이럴 때면, 다들 자리를 비워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지니 소희는 하루 내내 달큰함 아래 푸욱 절여져 버렸다.
마지막 각대를 야무지게 끈에 꿰어 묶는 것으로 아수라가 부탁한 일이 다 끝났다.
찌이익-
힘줘 잡아당긴 끈이 비명을 지르듯 야물게 각대를 물고 매달렸다.
“끝.”
소희는 뻣뻣해진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십에 달하는 사자에게 쓰일 것이라 그 수가 적지 않았던 탓에 오늘 내궁 아이들도 해가 저물도록 모두 매달렸다.
하나둘 손에 들고 있던 각대를 마무리해 놓는 것을 시작으로 앓는 소리가 사방에서 새어 나왔다.
“아이고, 차마 이것 들어 나르지는 못하겠습니다.”
반요가 새빨개진 손끝을 들어 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온통 힘줘 끈을 꿰고 뻣뻣한 천을 솔기로 둘러 억지로 바늘을 쑤셔 넣고 뽑아내는 통에 손가락이 엉망이었다.
소희는 반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낼 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단내가 난다 했더니,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내궁 아이들과 늘어져 겨우 각대를 정리해 한데 모아놓으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라전 나인이 내궁엘 찾아들었다.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야무진 솜씨에 정성이 더해지니 그 각대가 참 훌륭했다.
저희 눈에만 그런 것인가 했더니 수라전 아이들도 각대를 옮기며 그저 흥얼흥얼이다.
“오늘 내내 애쓰셨겠습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죄다 진이 빠진걸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하루아침에 각대를 오십구나 맞춰달라시니 그게 말이 된답니까.”
“그렇죠. 말이 안 되지요.”
수라전 나인은 내궁 아이들의 비위라도 맞출 셈인지 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저도 생각키에 미안하다 싶었는지 계속 곤하시냐, 많이 지친 것이 아니냐 걱정을 하니 내궁 아이들 푸념도 이내 잦아들었다.
“어유, 그래도 소희님 손이 좀 빠르십니까?”
“그렇지요. 저희도 오십구를 받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해지기 전에 맞추느라 애먹었답니다.”
“그러게요. 밤늦도록 하실 줄 알았건만.”
“네? 아 그렇지요. 그래도 다행이지 뭡니까.”
“그렇습니……다.”
애매하게 말을 흐리긴 했으나 그것이 미안해서라고 생각한 내궁 아이들이 오히려 수라전 나인들을 다독였다.
“저희 힘든 것이 대숩니까. 사자들께 보내드릴 것인데. 소희님께서 얼마나 정성으로 지으셨게요.”
“그, 그렇지요.”
“그런데 어디 사신대서 받아가신답니까? 저도 생전 아수라님이 각대를 부탁드리는 것은 첨 보아놔서.”
각대를 넘기며 종알거리는 사이로 조양이 슬쩍 끼어들어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수라전 아이는 조양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말을 몹시 더듬어댔다.
“그, 그, 그것이 제가 뭐, 뭘 알겠습니까. 각대 받아오렴 하시니…….”
“아. 하긴 그렇지요.”
조양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어린 나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척 봐도 어리고, 어려운 일은 감당키 부족했으니 그저 각대 받아오련 하는 소리에 팔랑거리고 왔을 것이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새에 절로 딱한 마음이 들어, 주변을 살피고는 소매춤에 넣어 다니던 작은 가죽 주머니를 슬쩍 넘겨주었다.
“어서 넣으세요.”
“예, 예?”
“어서 빨리.”
조양은 이 어린 나인이 어서 야무지고 단단해지길 바라며 만월의 가루가 든 주머니를 선물이라며 넘겼다.
“차에 타서 드세요, 아니면 물에 타서 드시던가요.”
“히엑. 이 귀, 귀한 것을.”
요괴와 맞붙는 사신들에게 먼저 지급된 만월의 가루였으니 궁내 아이들은 아직 구경도 하기 전이었다.
내궁 아이들이야 저희들이 만들고 나누는 것이 일이라 몇 개씩 더러 가지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조양은 소희가 언젠가 손에 난 흉에 마음 아파하며 만월의 가루를 몇 주머니 챙겨준 참이라 이런 인심이야 조금 부릴 수 있는 처지였다.
소희에게서 받은 온정을 수라전 어린 나인에게도 베풀었던 것은 정말로 좋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인은 그런 조양의 마음에 그만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게 문제였달까.
각대를 손에 쥐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양의 귀를 청해 은근한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나!”
조금은 화난 듯 새된 목소리가 새어 나오던 것도 잠시, 이내 조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수라전 나인을 다독여주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알았으니. 오히려 잘되었지요. 귀띔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혹시라도 일이 그르칠까봐 염려하시어…….”
“아이, 그건 저희 잘못입니다. 못 미더우니 그러셨겠지요.”
조양은 이해한다는 말과는 달리 새침해진 눈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허면, 해가 저물면 그쪽으로 뫼시면 되겠습니까.”
“네네, 달이 뜰 때 움직여주십시오.”
“이쪽은 염려 마세요. 그나저나 그럼 각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아유, 요것은 요긴히 쓰일 것입니다. 사신대에 각대가 내려오지 않은 게 언제입니까.”
“그렇지요.”
조양은 저희의 수고가 마냥 허사는 아니라는 말에 치켜뜬 눈꼬리를 살며시 내렸다.
“그럼, 이따 달이 뜰 때.”
“예, 예.”
은밀하고도 수상한 대화가 끝났다.
조양은 수라전 나인을 상큼한 목소리로 배웅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칠거리며 소희에게 다가왔다.
“소희님. 곤하시지요?”
상천서 돌아오시자마자 아수라님께 붙들려 일을 한 아름 받아오신 분이 또다시 각대를 만드느라 하루 종일 동동거리셨으니 피곤치 않을 리 없었다.
조양의 말에 소희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곤하시지 무어. 잠시 눈 붙이세요. 제가 수라전 아이에게 귀띔해두었으니 풍천껜 좀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정말이니?”
듣자하니 반가운 소리라 소희는 희게 질린 얼굴을 해서는 방싯 웃었다.
자리를 봐준다 침의를 내드린다 바쁜 건 조양 하나였다.
반요며, 다른 아이들은 제 몸 하나 건사하지도 못할 만큼 늘어져 있었다.
수상할법했으나 소희는 조양이 내미는 침의에 반색하며 냉큼 침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불깃이 스치고,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소희가 잠이 들자 모두 소리도 없이 침전 밖으로 물러났다.
닫힌 장지문 바깥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터졌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소희님 일어나세요.”
점잖았던 것은 오직 저 한마디뿐이었다.
소희는 잠시 눈을 붙였다 뜬 죄로 새 옷에 소세까지 모두 죄다 다시 해야 했다.
심지어 아침에 윤나게 빗은 머리도 다시 빗어야 했고, 오늘따라 건네주는 옷마다 이렇게도 하늘거리는 것인지.
“밤이란다.”
목선이 깊게 파인 옷을 들어 보이며 소희가 말을 했건만, 반요는 완강했다.
“밤이니까요.”
다른 옷은 덜 말랐니.
소희는 빠져나오려는 말을 꾹 참으며 이상하게 구는 반요에게서 옷을 받아 입었다.
낮에 입으면 너무 아슬아슬해서 민망하고, 밤에 입으면 어둠에 가려진다 하나 바람이 새들어와 추울 것이 분명한 옷이었다.
잠자리 날개로 만든 것인가.
심지어 얇기도 얇구나.
작은 한숨과 함께 소희가 옷을 입고는 단장을 마쳤다.
풍천께서 청하셨으니, 지체 없이 가야 할 참이었다.
본궁 월하각.
지금이야 달 씨앗 하나가 귀하디귀한 것이라 나인 아이들이 여럿 붙어 돌본다지만, 원래는 월하각에서 키워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에 보내주는 것이었다.
풍천이 월하각에서 보자 함은 일전에 염휘께 받아간 달 씨앗 때문일 것이다.
소희는 가만히 짐작을 하며, 옷깃을 매만졌다.
오늘따라 아이들이 얼마나 화장에 공을 들이고 머리를 매만졌는지, 그 모습이 과한 참이라 자칫 풍천께 우세를 당하겠다 싶어 심란한 것도 잠시.
붙들고 온갖 치장에 공을 들이던 아이들이 달이 솟은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소희를 내쫓듯 밖으로 내몰았다.
“난 월하각이 어디 있는지 모른단다.”
“본궁으로 가시면 본궁 아이들이 안내해드릴 거예요.”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
종전에 길을 한번 헤맨 후로는 절대로 혼자 다니게 두질 않더니.
소희는 코끝에서 달큰하게 일렁이는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혼자 내궁을 나섰다.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닌 달밤.
등 뒤를 지키는 달빛이 어찌나 싱그럽고도 달큰한 것인지.
소희는 상쾌하고 벅찬 기분으로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풍천께서 뭘 도와달라 부르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귀문의 별이니 전보다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슬쩍 생겼다.
그건, 본궁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웃음을 머금은 아이들을 마주치며 더 해졌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아이들은 모두가 상냥하게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제 왼쪽으로 꺾어져 쭉 가시면 된답니다.”
소희는 아이가 알려준 대로 열심히 걸었다.
손끝에 흐르는 영력을 느끼며, 오늘 보게 될 달 씨앗에 절로 설렜다.
환이 영력을 흘려주어 교아가 나왔으니, 오늘 그녀가 만져주면 어떤 아이가 나올 것인지.
환에게 말하지 않고 살짝만 그녀의 영력을 흘려줄 셈이었다.
하지만 길을 꺾어, 월하각에 도착한 소희는 애써 손끝에 모아두었던 영력을 모조리 흐트러뜨리고도 모를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보드라운 잔디밭 위에 작은 지붕을 씌운 전각이 온통 환하게 빛을 머금어서도 아니었다.
기다린다던 풍천 뒤에 환이 보여서도 아니었다.
아수라가 청혼서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밀고, 그가 내민 세필에 황금빛 물이 넘실거려서도 아니었다.
“지금…….”
소희는 밤의 아수라가 붉은 입술로 호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 절로 몸이 떨렸다.
“지금…….”
하지만 벅찬 마음이 자꾸만 목을 메게 해 가늘게 떨리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말았다.
“지금 청혼하는 것입니다.”
풍천과 아수라를 사이에 두고선 환이 다정한 듯 단호하게 말을 했다.
“청혼하는 것입니다. 귀문의 별, 짐의 비가 되어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미성이 귀를 황홀하게 울렸다.
아찔할 만큼 달콤했다.
소희가 입을 막고선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환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옅은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등 떠밀지 않을 것이에요.”
귀문의 별이 되어라, 함부로 목숨을 끊은 야차 같은 이는 이제 없습니다.
환은 그 옛날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니, 전.”
놀란 소희가 그의 말을 막기 전 환의 손이 올라와 소희를 제지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허락하실 때까지 구애할 것 입니다.”
환의 말에 소희의 앞에 선 아수라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왕께선 저렇게 집요한 면이 있으십니다. 그 명도 길다 할 참이니 못 이기는 척 허락하십시오.”
“무슨…….”
아수라의 농담이라니.
소희는 여러모로 놀라워 이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성싶었다.
그러나 환의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기다릴 것입니다. 강요하지 않아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를 함부로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 그대 짐의 비가 되어주신다면 청혼서를 받고…… 허혼서에 날인하여주세요.”
귀왕인 염휘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하고도 다정한 청혼이었다.
“달 마마는 쉽지 않은 자리입니다. 짐이 강요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압니다.”
소희는 그즈음해서 자꾸만 환이 어른어른해 보여 열심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사방이 달큰한 내음으로 가득한데, 어째서 자꾸 코끝이 매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기껍게 와주세요. 그대의 의지로.”
염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희에게 용서를 구했다.
청혼이라는 이름으로, 인계에서의 사납고도 못났던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이었다.
소희는 시큰거리는 코끝을 만져주기도 전 뺨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는 것을 느꼈다.
“울지 마시고, 그저 네. 하고 답해주시면 된답니다.”
아수라였다.
“우…… 운다고요.”
소희는 아수라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울긴요, 웃는걸요.”
두 뺨이 푹 젖어서는 소희는 잘도 거짓말을 했다.
아수라의 손에서 얼른 청혼서를 받아들고, 다른 손으로 세필을 받아 풍천이 내미는 허혼서에 제 이름을 적어주었다.
풍천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달구어선 허혼서를 염휘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그의 청혼은 끝이 났다.
“크흠, 크흠. 소장 잘 시간이 지나서.”
“지긋지긋하게 미련하군.”
너무 뻔한 핑계를 대며 몸을 빼는 풍천과 그런 그를 익숙하게도 구박하는 아수라까지 자리를 비켜주자 월하각엔 환과 소희 둘만이 남게 되었다.
“고우십니다.”
오늘은 특히.
환의 사랑스러운 눈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곡차곡 쌓였다.
“아아…….”
그의 말에 그제야 소희는 오늘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단장을 하던 것과, 월하각을 안내하던 본궁 아이들까지 모조리 떠올랐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까?”
살짝 가시가 든 듯 뾰족해진 목소리에 환이 난처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내궁 아이들은 아마 마지막까지 몰랐을 겁니다.”
“그럼 각대도 거짓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언제고 필요한 것이었으나 오늘 내로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그대를 내궁에 매어주기만 하면 되었거든요.”
혹시라도 그대가 눈치채시면 안 되니까요.
환은 두 팔을 벌려 소희를 청했다.
사박.
“청혼서를 쓰는 것이 어찌나 어렵던지.”
사박.
“허혼서는 그보다 더했구요.”
사박.
“소리 내 그대를 청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힘들었지요.”
세 걸음 만에 소희가 그의 팔 안에 안겨들었다.
“그저 품만 내어주시길 바라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미안했답니다. 정말로 미안해요.”
“……태자를 용서하시려 노력하시듯, 스스로에게도 자비를 베푸세요.”
소희는 환의 가슴에 뺨을 가져다 대며 소곤거렸다.
“전 이미 너무 충분히 행복하고, 진심으로 달 마마가 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행복해지세요.
전 이미 숨 끝마저 다디달아진 참이랍니다.
소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푸스스 웃었다.
“공기마저 달큰한 이곳의 주인을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주인을 닮아 이곳 하계도 이다지도 근사한 것을요.”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단 것이 있지요.”
소희를 품에 안고 옅은 미소를 짓던 염휘의 홍안이 짙게 물든 것도 잠시.
그의 고개가 꺾어져 내려오며 소희의 입술에 가만히 그의 것을 맞대었다.
그리고 정말로 꿀보다 단, 달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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