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별비 내리는 날 (2)
2018.08.06.
대전의 차가운 돌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것은 직인이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몰아오는 온기와는 상관없이 대전의 공기는 차게 굳어있었다.
“염휘시여.”
귀왕을 부르는 직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경건했다.
지극하기까지 한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과한 면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귀왕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삼천외의 선인.
고귀함만으로 따진다면, 운명을 잣는 그녀 역시 천의 주인에 버금가는 자였건만 직인은 귀왕을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공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인은 염휘에게 엄연히 빚을 지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서왕모께서 함께 자리해주고 계시다지만, 엄연히 죄를 청하러 온 자리였다.
그랬기에 직인은 꿇은 두 무릎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뭐라 해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
직인은 염휘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제 죄를 읊었다.
차마 염치없다 싶었으나, 그보다 더한 짓을 한 것이라 이것은 수치도 아니었다.
직인은 목이 메는지 가만히 숨을 한번 고르고는 대답 없는 염휘에게 말을 이었다.
“저는 삼천외의 선인. 응당 마고께서 처분하심이 옳으나, 마고께서 이르시길 은원은 은혜로 풀리는 것이라 하시며 가서 귀왕의 자비를 구해보라 하셨습니다.”
조심스럽고도, 조심스럽게.
저를 한 번만 용서하여 달라 청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산들바람보다 가늘어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직인. 그녀의 최선이었다.
이대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과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그녀의 입을 막았으나 직인은 이 힘겨운 시간을 참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숨 한 모금 한 모금이 마치 묵직한 바위인 양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이러다가 정말로 눌려 죽을 것 같다는 압박감에 직인이 밭은 호흡을 터트릴 때, 기다리던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용서하란 말보다 더하시는군?”
“염치없습니다.”
직인은 차갑기 그지없는 염휘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하계에서 보인 호의를 제가 어떻게 짓이겼는지 알기 때문에 직인은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용서해주십사 하는 것은 바로 하계에서 받았던 따스함 때문이었다.
향풀에 심연의 물을 섞어 잊고 있던 표가공자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매일 아침이면 소희에게 심연의 물을 섞은 차를 권하며, 소희의 기억 속의 염휘를 더욱 무자비하게 각인시켰다.
끊임없이 태자를 떠올리라 암시하며, 쉬지 않고 이간질했던 것이 바로 직인이었다.
그러나 매일 첫 햇살이 터지자마자 염치없이 문을 두드리는 직인을 향해 소희는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맞아주었다.
그것은 상제의 영력에 부상당해 영체에 흠이 난 직인을 따스히 감싸주는 것이었다.
흠이 난 영체는 직인을 표독스럽고 야차 같이 굴게 했다.
시시때때로 잔악하게 굴게 했으며 어느 순간부터 기억도 끊어졌다.
그래서 직인은 소희에게 삼천외의 선인으로서는 하지 못할 일들을 하고 돌아오면 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계에 두 번 다시 발걸음 하지 못할 처지가 되고 나서야 직인은 소희의 귀여운 목소리가 그리워 목이 메고 눈물이 났다.
삼천외의 땅에 몸을 숨겨 귀왕의 분노는 피했다하지만 칼날같이 파고드는 죄책감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미안함을 속죄하듯 운명의 베틀에 앉아 그 어느 때보다 정성 들여 운명을 짜주었다 한들 그것으로 죄를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이 억겁같이 길고 지옥불 위에 앉아있는 듯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마고께서 찾아와 더없이 매섭게 호통치며 꾸지람하시니 차라리 살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제 죄를 덜어내는 것 같아 직인은 마고의 모진 말에 눈물을 하염없이 떨구면서도 웃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웃기느냐. 하기사 웃기겠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제정신으로 했을 리가 없으니. 미쳐 웃어야겠지.”
“마고시여. 벌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 보아라,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내가 어떤 벌을 내릴 줄 알고 감히 두렵지 않다 입질인 게냐?”
“이런 망가지고 더렵혀진 선인이 직인으로 있을 수는 없지요. 허나. 마고시여.”
직인은 눈물을 쉴새 없이 떨구며 무릎걸음으로 마고께 다가갔다.
그리고 경련하듯 가늘게 떨리는 제 입술을 마고의 작은 손등에 가져다 대고 울음 조각 같은 말을 뱉었다.
“용서는 받고 싶습니다. 고운 분께, 다정한 마음을 내준 분께 제가 한 짓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는 알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염치도 없고 욕심도 많구나.”
“압니다. 그러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제 사정 알아주실 분은 천지간에 마고뿐이십니다.”
직인은 작은 소녀의 손을 붙잡고 울며 통사정했다.
매섭게 뜨인 소녀의 눈꼬리가 엉망이 되어 우는 직인을 향하다 다시 운명의 베틀로 향했다.
“한 번이야.”
“……마고시여.”
용서를 구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에 직인은 반갑게 부르짖으며 마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고의 말에는 직인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
“두 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심지어 제가 한 짓을 마고께서 용서하시기까지 할 줄은 몰랐던 탓에 볼썽사납게 벌어진 입이 망신스러운 꼴이었으나, 마고는 직인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은원은 은혜로 풀리는 법. 귀왕께 그리 말씀드리거라. 별만큼이나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이니라.”
“마고시여.”
비명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직인을 보던 마고는 옅은 한숨을 쉬며 숙여진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직인도 몰랐던 화려한 장식 밑에 감춰진 영체를 검게 물들였던 얼룩이 마고의 손길에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직인의 짓이었으며, 탓이 아니었다.
모두가 괴롭기만 했던 시간이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마고는 직인 역시 고통의 이십여 년의 세월을 버틴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직인에게도 큰 벌 없이 이리 넘기는 것이었다.
이미 그녀 스스로가 마음에 상처를 새기며 너무도 괴로운 시간을 보내왔기에 이것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이 자비로운 처분에 제가 어찌 감사를 올려야 할지.”
마고의 손등이 직인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죄를 갚는다 생각하고…….”
“아니,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남의 운명에 손대지 말거라.”
마고는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직인을 나무랐다.
“성심을 다해 행복한 마음으로 잣거라.”
“네.”
“행복해지거라. 그래야 네 손에서 자아진 운명들도 다소간 행복해지지 않겠느냐.”
정말로 어질고 다정한 말에 직인은 마고가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을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함께 있어 너무도 행복했던, 사랑스러운 분께 그 발걸음을 청했다.
다만, 그녀가 홀로 찾아가서는 만나 뵙기도 전에 내쫓길 판이라 서왕모께 사정을 부탁드렸다.
그렇게나 쉽지 않은 걸음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리라는 것은 알았으나, 제 죄를 아는 입이 염치를 알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쌓여드는 침묵에 다시 한번 직인이 진심으로 청했다.
“귀왕께 은혜를 바라는 이 염치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겨주십시오.”
염휘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직인을 보며 잘생긴 눈썹을 실풋 일그러뜨렸다.
도도하기가 천의 지존보다 더한 자가 아니었던가.
그만큼 중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이었고, 마고께서 은원은 은혜로 풀라 하실 정도니 이미 그에게 남은 것은 ‘자비’뿐.
하지만 그저 넘기기엔 소희를 잃었던 날이 너무도 뼈아팠다.
내색하지도 않았지만 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잔뜩 열 올라 날뛰려는 염라의 불을 만류하며 짐짓 괜찮은 척까지 해야 했다.
그야말로 딱 죽을 맛이었다.
이보다 지독할 수 있나 싶었던 그 날을 맛보인 것이 바로 눈앞의 직인.
조아린 저 작은 머리통이야 그의 발길질 한 번이면 단번에 으깨버릴 수 있을 테지만, 염휘는 그녀를 용서해야만 했다.
염휘도 소희도, 그리고 태자도 직인도 모두 운명의 희생자.
태자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직인이야…….
염휘는 팔걸이에 괸 손을 들어 미간을 슬슬 문질렀다.
내키진 않았지만, 해야 할 일.
“마고께서 자비를 바라신다니, 기꺼이 내드려야 하겠지요.”
얼음이 떨어질 것 같은 냉한 목소리에 서왕모가 달큰한 숨을 한껏 풀어 놓았다.
흰머리가 지긋한 저분을 여태 마음 졸이게 했던가.
다정하신 분.
염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다 지워내지 못한 서왕모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직인께 언제고 한가지 청을 드릴 것입니다.”
“하명하십시오.”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직인께서는 들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럴 것입니다.”
그냥 용서하기엔 염휘의 마음이 흔쾌하지 못했다.
허울뿐이긴 하지만 직인에게 빚을 지우고 나니 조금 분함이 가시는 것도 같았다.
정히 뭣하면, 소희가 쓸 주머니라도 대신 만들어 달라 하면 될 일.
만월의 가루를 담을 주머니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염휘는 이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했다.
“직인께서도 일어나세요, 서왕모께서 불편해하십니다.”
“귀왕의 자비로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허면, 이제 차 한 잔 청해도 될는지요?”
여태 작은 보자기를 들고 서 있던 서왕모가 직인이 일어나는 것을 도우며 염휘에게 차를 청했다.
서왕모의 방문이라니.
차가 아니라 술을 청하셔도 드릴 참이었다.
이 유례없는 방문은 아마도 직인을 위함이었젰지만, 그래도 선한 마음 끝에 돌린 귀한 발걸음이라 염휘는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도 감사했다.
염휘는 시비를 불러 다과상을 차리라 하명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보라색 찻물이 진한 향기를 풍기며 하얀 자기잔을 넘실거리며 채웠다.
“아, 이것은 서녘의 달빛입니까?”
서왕모가 향기를 맡더니 기꺼운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네, 드십시오. 차를 잘 모르는 제가 마셔도 그 향이 일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직인도 마찬가지였다.
짤랑-
소리 내지 못하는 직인의 입 대신 금편이 부딪히는 소리가 직인의 대답인 양, 어색하고도 즐거운 다과 자리에 기쁘게 울렸다.
찻잔을 두 번쯤 비우고 나서야 서왕모가 들고 왔던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염휘에게 내주었다.
“이것, 받아두십시오.”
“무엇입니까?”
“큰 변이 날까 염려가 지나쳐 만든 천도환입니다.”
“!”
서왕모의 말에 염휘는 풀렸던 표정을 다시 딱딱하게 굳혔다.
큰 변이라 하면, 서왕모께서는 모르시겠으나 이미 한차례 지나간 후였다.
설마 또다시.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격한 긴장감이 염휘의 전신을 덮쳤다.
“허나, 마고께서 잘 해결 되었다 하시니, 쓸모는 없어졌다 하나 이왕에 만든 것 정성이려니 하시고 받아두세요.”
“하아…….”
안도감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잔뜩 긴장해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면건에 문질러 닦으면서도 염휘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서왕모가 말하는 큰 변이 이미 ‘과거’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건만 서왕모는 푸근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행입니다.”
“네.”
“지나간 일이라 다행이고, 천도환을 쓸 일이 없어져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기왕에 정성으로 만든 것. 아끼지 말고 드세요. 이번에 8천년 만에 열리는 영과로 만든 것이라 그 약성이 대단합니다.”
서왕모의 말에 염휘는 꾸러미를 풀어 세 알을 꺼냈다.
하나는 제 입에 넣고, 하나는 서왕모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차만 마시는 직인에게 내밀었다.
“!”
“드세요. 상제의 영력에 맞으셨다지? 마고께서 만져주셨을 테지만 흠이 난 영체는 기력을 갉아먹어 힘드셨을 테지.”
어서.
염휘는 조각같이 매끈한 얼굴을 한 채,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직인은 그대로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죄를 청하고 용서를 바라며 머리를 조아릴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러나 온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몹시 다정했기에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두 뺨을 흥건히 적시며, 직인은 염휘의 ‘은혜’를 감사히 받았다.
용건을 마친 서왕모와 직인은 이내 돌아갔다.
염휘는 비어버린 탁자에 홀로 앉아 찻주전자를 다 비우도록 자리를 지켰다.
입안을 가득채운 상큼함이 그의 가슴에 남아있던 못난 찌꺼기를 향긋하게 녹여주는 것 같았다.
“못난지고.”
염휘는 완벽히 혼자가 된 이후에야 조소했다.
청천의 전, 그날의 쓰라린 기억의 전말을 알게 되었으나 후련하지 않았다.
드느니 원망이었고, 치미느니 삭이지 못하는 분노였다.
다 늙어 구겨진 종이짝 같은 휘와 상제를 쳐 죽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마고께서는 아실 것인가.
태자가 나서서 치죄하듯 구는 것도 사실은 제 모친인 ‘휘’의 구명을 위해서라는 걸 뻔히 알았다.
그러나 그만 닥치라고 일갈하지 못했던 것은 입을 열면, 손끝이라도 움직이면, 멈출 수 없을 것을 알아서였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소희만을 품에 안고서 그녀의 온기가 전해주는 위안에 집착해 마음을 삭이고 삭였던 것인데.
이 울렁이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다시 고개를 드는 불안감은 무엇이며,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뭐며, 가려지지 않는 이 허탈함은 무어란 말이냐.
염휘는 마지막 남은 찻물을 입에 털어 넣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구나?”
“!”
명랑한 어린 계집의 목소리.
염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비었던 맞은편의 자리에 태연히 앉아 빈 찻잔을 굴리는 것은 천신 마고.
“……어쩐 일이십니까.”
청한 적 없건만, 불쑥불쑥 나타나시는 것이 또다시 무슨 일의 전조인가 싶어 절로 목소리에 근심이 스며들었다.
“환아. 찻잔이 비었는데 이리 야박하게 굴 것이냐.”
마고가 비어버린 찻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차 한 잔 다오, 나도 서녘의 달빛은 좋아한단다.”
차 한 잔 달라던 마고는 정말로 차를 마시러 온 사람처럼, 다른 이야기는 일절 꺼내는 법이 없어 염휘는 절로 심란해졌다.
천신 마고, 마고대할망.
이 세계이자, 창조주인 그녀가 얼마나 바쁜지 모르는 것이 아닌데 그녀가 단지 차 한 잔 청하러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천도환도 하나 주련?”
“다 드십시오. 그리고 빨리 말씀해주십시오.”
“뭘?”
“오신 이유 말입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왜? 나 몰래 또 누가 사고라도 쳤다던?”
빙글거리던 마고가 얼굴을 굳히며 외려 묻자 염휘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끝이 아니었습니까?”
“끝이라니? 내가 살아 있는 한, 끝이란 건 없단다, 얘야.”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던 마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염휘를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고의 눈에는 염휘의 근심이 마치 먹구름처럼 온 사방을 가득 채우는 것이 보였다.
놀리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둬야 했다.
“재미없긴.”
가볍게 눈을 흘긴 마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염휘에게 뭔가를 던졌다.
성의 없고, 장난스러운 손짓이었다.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내민 염휘의 손에 떨어진 것은 가락지였다.
“서른 밤 뒤에 혼례 올리거라. 그 정도면 충분할 테지?”
“그날은 만월의 밤이 아니온데……?”
“서른 날 뒤다. 그날 가락지 하나를 더 주마. 그날 혼사 치르거라.”
이제 그럼 안심될 것이지.
염휘의 불안함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안다는 듯 마고는 작게 덧붙이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
“서른 날 뒤라 했단다.”
다짐하듯이 마고는 힘주어 서른 날을 말하고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가락지?”
손에 들린 것은 은과 같이 찬 빛을 뿜었으나 은보다 단단한 것이었다.
“백금인가.”
염휘는 손에 들린 가락지를 가늠해보다 빙긋이 웃었다.
크기로 보아 소희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 그날서 주신다는 가락지가 소희 몫이려나.
마고께서 예물을 내려주신 것은 아마 그와 소희가 유일할 것이다.
심란해하는 그를 찾아 와주시는 마고의 자상함에 불현듯 치밀던 온갖 감정이 일시에 녹아 사라졌다.
불안감이며, 그리움이며, 허탈함이니 가당치 않다.
여운은 이럴 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서 털어내야 할 감정 찌꺼기.
그리고 염휘는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손에 든 가락지를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비 아이에게 당연하다는 듯 그의 별의 소재에 대해 물었다.
“별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내궁 후원에 계시다합니다.”
모든 감정이 가리키는 분을 찾아 염휘가 움직였다.
그래, 그리웁지.
품에서 내려놓은 지 몇 시진이나 되었잖은가 말이다.
소희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머나, 두 분께서 도와주시니 일이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염휘는 내실에서 울리는 소리에 웃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잔뜩 우물거리는 풍천의 목소리는 차치하고라도, 목 졸린 것 같은 아수라의 목소리라니.
천금을 줘도 못들을 소리였다.
“그럼 시왕들께선 성천궁서 머무시는 걸로 하면 되겠네요.”
그 뒤로 몇 번인가 앓는 소리가 나고서야 소희가 그럼 내일 다시 뵙자 청했다.
그제야 자리가 파하는 듯했다.
염휘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잘못하면 붙잡혀서 자신 역시 저 대열에 강제 합류하게 될 것이었다.
터덜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기척을 숨기고, 풍천과 아수라가 멀어지도록 숨을 죽였다.
“은쟁반 좀 내오련?”
아수라와 풍천을 배웅하고 난 뒤에도 새큰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소희는 언짢아 있었다.
염휘는 소희가 어째서 골이 나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옅은 웃음소리를 참기 힘들었다.
“큭, 짐이 때를 잘못 맞춘 것입니까?”
염휘는 지금 나서봐야 타박을 들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희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희는 그를 보자마자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고는 토라진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니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염휘는 나른하게 입매를 늘였다.
그리고 그보다 느슨하게 벌어진 두 팔이 소희를 불렀다.
“아니면, 잘못 찾아온 것입니까?”
어서 오세요.
청하는 듯 명령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 토라져 있던 소희가 한숨을 쉬면서도 못 이기는 척 품에 잠겨 들었다.
작고 보드라운 몸이 요철 없이 그에게 꼭 맞게 달라붙는 건 언제라도 기분 좋았다.
“너무하셨잖아요.”
불평을 터트리는 목소리마저 귓가에 감미롭게 울렸다.
염휘의 눈매가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그대가 너무한 것이지.”
“네?”
“사정 좀 봐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이십 년을 기다린 제 사정을 좀 봐주셔도 되잖습니까.
이번 일은 그대가 눈감아요.
뭐라 화낼 수도 없이 염휘가 미안함을 가득 담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롓날이 잡혔어요.
염휘는 소희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줘 꾸욱 끌어당겼다.
턱밑에 잠긴 그녀에게서 작은 신음이 터졌지만 못 들은 척, 제 욕심껏 안으니 그제야 마음을 들쑤시던 감정들이 완벽히 사라졌다.
“서른 날이 지난 달밤에 내게 와줘요.”
염휘의 말은 이상했다.
조양에게 듣기로 만월의 밤은 서른 날도 채 남지 않았었던 것이다.
소희는 염휘의 가슴에 힘껏 눌려있던 머리를 들어 그의 시선을 찾았다.
“만월의 밤에 치르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마고께서 정해주셨으니, 따르는 것이 저희의 몫입니다.”
“원래 혼롓날도 정해주십니까?”
“선물입니다.”
그 말을 하는 염휘의 표정이 퍽 즐거워 보여, 소희는 마을서 명망 있는 어르신이 길일을 받아주신 것과 같은 의미려나 대충 이해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소희는 염휘를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입술 끝을 깨물었다.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던 끝에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용건을 꺼냈다.
“그럼, 휘와 상제께도 서신을 넣어야겠네요.”
소희는 제 말이 염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길 빌며 작게 속삭였다.
정수리에 떨어지는 숨날이 순간 흐트러졌지만 염휘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무척 덤덤했다.
“그러세요.”
“그럼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보낼까 합니다.”
“그리고, 서신을 보내는 김에 귀문 쪽으로도 날리세요.”
“교아?”
“감재사자라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만, 혼례 올리고 곧 찾아가겠노라 언질 넣으세요.”
“어머나!”
감탄을 터트리는 소희의 두 눈이 별처럼 빛이 났다.
기쁨을 잔뜩 머금은 홍안에 얼마나 예쁘게 불길이 일었는지는 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소희는 귀문의 별이 되어, 별보다 아름답게 빛을 뿜었다.
“어째, 새신부가 된다는 것보다 교아를 보러 간다는 소리에 더 들뜨신 것 같습니다.”
“네에, 누구처럼 교아는 저를 이렇게 일을 많이 시키지는 않거든요.”
응석 부리듯 환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소희는 잘도 샐쭉한 목소리를 냈다.
“아수라와 풍천을 알차게도 부리시던걸.”
“……나쁜 남자.”
능글맞은 소리에 소희가 볼멘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별께서 짐을 이리 함부로 부르시는 줄 마고께서는 알고 계실 것인가.”
“이렇게 사사로이 마고를 들먹이시는 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상천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소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마고의 입을 단번에 막던 풍천이 떠오른 것은 불가지불문.
“설마.”
작게 중얼거리는 풍천의 말에 마고의 표정이 어땠는지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심지어 조금 전 아수라와 풍천과 내빈 거취를 정하면서도 아수라가 그 일을 들먹이기도 했었다.
“아니, 툭하면 말을 더듬는 이 미련한 자가 마고의 입을 막다니.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누가 믿을까요?”
부채를 팔락이며,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른 풍천을 가감 없이 구박했다.
“아, 하기사 이 무도한 자라면 그러고도 남을지도요.”
새카만 눈에 반쯤은 웃음을 매달고 매섭게 쏘아보는 아수라는 마고가 그날 자신을 가리켜 풍천의 짝이라고 했던 것을 잊지도 않고 써먹었다.
“미련한 자가 아니라 엉큼한 자라고 하여야겠습니다.”
“제발. 그런 게 아니래도.”
풍천이 사정할 때까지.
소희는 새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떠올렸다.
이름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 염휘가 자신을 바라여주고, 자신에게만 다정한 남녀를 담고 있는 아수라와, 자신 앞에서는 솔직하게 꿀타래를 청하는 풍천이 있는 왁자지껄한 이곳의 일원이 되려 준비하고 있다.
상천의 휘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소희는 그대로였다.
아직, 인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하계엔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곳은 이제, 소희가 머물 곳이었으니 괜찮았다.
모두가, 그리고 자신 역시.
천천히 알아가도 되었다.
이번 생 동안 물리도록 있을 곳이니, 문득 소희는 마음이 느긋하게 늘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풀린 입매가 미소를 그려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