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05화 (105/114)

105. 별비 내리는 날 (1)

2018.08.03.

“소희님!”

돌아온 소희를 본 내궁 아이들은 하나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야말로 소희를 빼앗겼다 생각하고 맥을 놓고 있었다.

무려 상태자가 직접 싸안고 상천으로 갔다 하지 않았나.

그 와중에 대전의 귀왕께서 아수라와 풍천까지 대동해 상천으로 가신 참이라 내궁 아이들은 마음이 재가 되도록 애를 태웠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마음을 졸이던 아이들에게 기별도 아닌, 소희가 들이닥친 것도 숨이 멎을 만큼 놀랄 일이었으나. 그보다 더한 것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하계의 색을 내림한 소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귀왕이신 염휘와 똑같은 홍안에 은발을 한 소희의 모습에 내궁 큰문을 연 아이가 소희를 부르다 목 졸리는 소리와 함께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문을 닫아걸고 있으……! 에그머니나!”

아수라가 내궁을 봉하라고 명령한 것을 기억하는 아이가 타박하며 다가온 것도 순간.

그 역시, 앞선 아이처럼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 중 하나가 목청을 돋웠다.

“소희님! 돌아오신 겁니까.”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터졌다.

“소희님, 소희님.”

그중 지척에서 소희를 모셨던 반요나 조양이 같은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그 감정이 훨씬 격했다.

말도 아니고, 부름도 아닌 것을 중얼거리며 반요가 그저 눈물만 흘리며 소희 앞에 섰다.

“왜, 이리 왔으니 됐다. 울지 말거라.”

“으흐흐흑. 매번, 매번 이리 험한 일을 당하시니……. 소인 마음이 다 타버리겠습니다.”

심지어 매번 점잖치 못하다며 반요를 구박하던 조양까지 나서서 눈물을 흘린 참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덩이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같이 서서 우는 대신에 소희는 우는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짐짓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마음이 다 타버리면 쓰겠느냐. 그럴 줄 알고 마고께서 아예 귀문의 별이라 못 박아 주셨단다.”

“……예에?”

다독이는 손길이 부끄러울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이들을 보며, 소희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 마고께서?”

지금 내 귀가 뭘 들었다니.

조양이 옆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반요에게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귀문의 별이 되었다 하셨지.”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아이들은 더 크게 소리 내 울었다.

안도감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벅찬 기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소희도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않았다.

모두의 울음이 잦아든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미 마고께서 소희를 ‘희’라 이름 내려주시고 귀문의 별이라 하셨다니 더 이상 애끓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반요는 모두가 진정한 후에도 코끝이 빨개지도록 계속 울었다.

“주책이야, 고만 좀 울어.”

두 눈이 벌게진 조양이 반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 눈물이나 훔치고 그러지!”

“시끄러, 요것이 자꾸 시비야.”

투닥거리던 둘에게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전하구나.”

“소희님!”

“이제 달 마마시지! 멍충아!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염휘께서 싸안아 오시고, 두 분 한껏 다정하신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먼 곳에 납치되어 갔다 오신 분이라 터지느니 쌓아둔 걱정이었다.

“다치긴.”

소희는 팔을 들어 올려 휘휘 돌렸다.

“보시다시피 힘이 아주 넘치는구나.”

“그래도 좀 쉬셔요. 상천이 어디라고 벌써 이리 다니세요. 이러다가 몸살이라도 나시면 어쩝니까.”

“안될 소리지.”

저를 염려하는 소리에 소희는 다부진 목소리를 냈다.

“이제 마고께서도 인정한 귀문의 별이 된 참이니 매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은쟁반은 잘 챙겨두었니? 오늘 밤서부터 다시 달 가루도 만들고, 각대도 손질해야 하니 바쁘구나.”

“……에?”

조금 전까지 펑펑 울던 반요의 눈물은 소희의 말에 어느새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가서 은쟁반이랑 좀 챙겨 오련? 곧 해가 질 것이니 지금부터 나르면 곧 닦겠구나.”

“…….”

어디 일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달고 오셨습니까.

등 뒤에서 삐죽이 솟은 투덜거림을 못들은 체 하며 소희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을 모두 끌어 바쁘게 움직였다.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해내야 할 일이 산같이 쌓여있다는 자각이 아이들을 등 떠밀었다.

“앞으로 한동안 몹시 바쁘실 것입니다.”

소희는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며, 저를 안고선 그의 말처럼 움직이던 염휘를 떠올렸다.

*

그의 가슴을 통해 울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몹시 생소한 경험이었으나, 어쩐지 따끈하게 건너오는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무척 좋았다.

“……어머나.”

맞은편에 있는 휘에게서 의미 모를 탄성이 터졌다.

과하게 반짝이는 눈과 두 볼에 옅게 오른 홍조가 휘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선명했다.

절로 부끄러워져 소희는 염휘에게 품에서 놓아달라 몇 번이고 부탁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염휘는 모든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불안한 듯 소희를 한 번도 품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었다.

마고께서 몸을 물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당연히 품 안에 넣고는 움직였던 것이다.

상제가 된 태자를 향해 태연히 건네는 인사는 물론 모든 것을 그녀를 안고서 해버려 소희는 창피해서 죽을 참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라고 하였던가.

그런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휘께서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선 탄성으로 부족하다 생각하심인지 기어이 말을 보태기까지 하셨던 것이다.

“……굉장히 좋아 보이십니다.”

누가 들어도 부럽고, 누구에겐 해달라 조르는 것 같은 말씀을 턱 하니 꺼내신 것이었다.

휘의 뒤에 서 있던 상제께서 움찔 떠는 게 보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선, 능청을 부리는 보습을 지켜보는 건 굉장히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고양감이 솟았다.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인 휘를 보며 나도 저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상승감.

그래서 소희는 볼을 붉히면서도 끝까지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휘께선 보기만 하시려구요?”

상제께 부탁드리세요.

염휘의 도포를 꾸욱 쥐고선 저 역시 뻔뻔하게 휘를 부추기는 말을 남겼다.

거기엔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생각보다 할 만했고, 생각보다 기분이 꽤 좋았다.

“역시. 그편이 좋겠습니다.”

물빛 눈동자를 예쁘게도 빛을 내며 미소짓는 휘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태자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한 쌍.

소희를 바라 늘 맴돌던 남자에게 드디어 그를 바라는 짝이 나타난 것이 그녀는 무척이나 기뻤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 서먹한 듯, 기쁜 듯 내외하는 모습이었지만, 마고께서 ‘휘’를 내어주신 후로 태자는 소희에게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서로 다정히 붙어 있지는 않아도, 태자는 어미닭처럼 늘 휘의 곁에 서 있었다.

반 보쯤 떨어진 저 거리.

그것은 곧 시간이 당겨줄 아주 좁은 거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소희와 표가공자가 혼약을 하고서도 늘 한걸음 떨어져 있던 그것보다도 가까웠다.

‘행복하십시오.’

소희는 전하지 못할 당부를 미소에 담아 ‘휘’께 전했다.

“모두 정리하여야 할 것이 한참이겠지. 상제. 그럼 다음에 봅시다.”

염휘는 소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돌아갈 것을 다시 한번 말했다.

상제는 염휘의 말에 가볍게 묵례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염휘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살펴가십시오, 곧 휘와 함께 찾아뵐 것입니다. 형님.”

“불러주실 것이지요?”

적당히 거리를 벌리는 염휘의 말에, 젊은 상제가 끝을 붙잡고 늘어져 다음을 확답 바랐다.

그뿐이랴.

부창부수라 하였던가.

거절하지 못하게 휘가 애교 있게 염휘에게 물어 오는 것까지, 소희는 보면 볼수록 휘가 마음에 들었다.

둘로 나뉜 자신이었으며, 완벽한 타인이었지만. 숨길 수 없는 친밀감에 터지는 것은 웃음이었다.

“자주 오세요.”

소희는 대답 끝에 저를 안고 있는 염휘의 팔을 힘줘 맞잡았다.

작은 손이 한껏 힘을 줘 그의 팔을 흔들며 바라는 것은 그의 허락.

염휘는 옅은 한숨을 쉬며, 드물게도 저를 조르는 소희를 바라보았다.

원하신다니 들어드려야지.

“……놀러 오십시오.”

모든 앙금이 한 번에 씻길 리야 없을 터.

저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없었다.

상제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롓날 불러주시렵니까?”

“언제 올리신답니까?”

염휘는 호들갑스럽게 묻는 상제와 휘를 보며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잘생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도무지 소희에게서 나뉘어 나온 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씩씩하고 활달하다.

턱없이 천진하며, 생글거리기도 잘하니 모르긴 몰라도 상제께서 꽤 애를 먹으실 것이 훤히 보여 어쩐지 상제가 애잔했다.

그래서 원래라면 거절했을 그 날의 방문을 허락했다.

“그러세요. 날을 정하면 알려드릴 것이니.”

원래, 상하천의 지존의 혼례라는 것은 인연의 고리를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러지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태자가 아니, 이제 상제가 된 상휘께서 저렇듯 조르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함이 컸을 것이다.

제 양친의 죄를 씻으려는 미안함과 급박한 순간에 기어이 저를 외면하지 못하고 한편에 서서 그를 보호해주려던 염휘에게 말로 전하지 못한 고마움 때문이라는 것을.

그 마음을 영영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했다.

악연은 정리하고, 도타운 정리는 쌓아가는 것.

염휘는 내미는 손을 내치지 말아야지. 좋게 생각했다.

업보를 길게 가져가 봐야 좋을 것이라곤 아무 데도 없다.

심지어 지옥을 다스리는 시왕들조차 모두가 업을 짓지 않고 착하게 살기를 매일 같이 기도하지 않던가.

그들의 바람이야, 과로에 시달리는 이들의 현실적인 소원이었으니 다른 이유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다.

흐응.

좋은 게 좋은 거지.

염휘는 품에 든 소희를 안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 이만 가보렵니다. 아수라와 풍천까지 함께 온 터라, 하계가 완전히 비워져 더 이상은 있지 못할 것입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연락 기다릴 것입니다.”

인사 끝에 다시 청하는 만남.

염휘는 이제 상제가 되어버린 젊은 왕을 천천히 마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숨을 고른 그에게서 태자를 천의 주인으로 반기는 인사말이 나왔다.

“상제. 즉위하심을 경하드립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저를 용서하신다면, 다시 한번 명이라고 불러주시렵니까.”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그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이 좌를 받은 상제는 귀왕 염휘의 인정뿐만이 아니라, 그 언젠가의 형님을 되찾으려는 아우였던 그의 마음 역시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마냥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될 마음.

앙금이 남았다고는 하나 기실 염휘는 태자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정리를 마쳤다.

다만 흔쾌하지 않았을 따름.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소희의 은발이 흩날렸다.

하늘거리는 은빛이 그를 간질이듯 눈 앞을 가려 염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간지러워 그만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었고. 기분 좋게 늘어진 입매를 구태여 가리고 싶지도 않았다.

염휘는 사실 웃고 싶었다.

이 끝없는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니 웃어야 했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소희를 간절히 바라였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남겨질 명이 마음 못처럼 남아 그를 괴롭혔다.

아우의 반려를 뺏었다는 말 못할 죄책감이 없다고는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간절했고 그보다 더 소희를 바란 참이라 염휘는 두 눈 꾹 감았었던 날들이었다.

생각이 터지자 상념이 길어질 것이라, 염휘는 몸을 돌려 천도에 올랐다.

자신에게도 벅찬 순간이었지만, 명에게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곧 뵐 것입니다.”

다정히 안부를 남기는 소희와, 남겨지는 휘를 따라 향긋한 천도향이 퍼졌다.

“큰 신세를 지고 갑니다.”

상제와 휘를 향해 풍천과 아수라가 묵례를 남기고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이번에도 요란했던 상천행은 마무리가 되었다.

천도를 달리는 천마들은 분명 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듯 쉴새 없이 커다란 날개를 퍼덕였다.

염휘의 품에 안겨 천도를 달리자, 소희는 문득 태자와 함께 걸어 올라왔던 그 날이 생각났다.

곧 돌아갈 것이다 불안한 다짐을 하며, 오전 내도록 걸었던 길을 염휘와 함께 달려 내려가는 기분은 묘했다.

충만한 행복감.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태자와 그런 식으로 사사로이 만날 일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안도감과 함께 후련함을 맛보게 했다.

이 모든 추억과 감정마저 또 다른 자신인 ‘휘’께서 가져가 주셨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이었지만, 가장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새로 태어나신 휘는 아무런 기억이 없으시니까.

“잘 지내시겠죠?”

“왜, 이제 와 생각하니 아쉬우십니까?”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소희는 팔꿈치에 힘줘 염휘의 명치를 쿡 찔러주었다.

아파했으면 좋았을 텐데, 단단히 안긴 터라 찌르는 시늉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제 내게 집중하시란 말입니다.”

염휘는 뾰로통한 소희에게 단정한 목소리로 달래듯 속삭였다.

“이십 년이나 기다리게 하신고로 지금 급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어유, 그렇게 겁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음?”

“만월의 가루도 넉넉하진 않지만, 다들 나눠 가졌고. 이대로라면 곧 쌀가마 재듯 쟁여둘 수 있답니다. 제가 얼마나 손이 빠른지 모르셨습니까.”

소희는 염휘가 제게 농을 건넨다 생각하고는 더러 뻐기듯이 턱을 치켜들고는 중얼거렸다.

흥.

작게 덧붙이는 콧방귀는 애교였다.

하지만 염휘는 그런 소희를 보며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라 보기엔 야릇했고, 화가 났다 보기에 짙게 얼룩져 일렁이는 홍안에는 열이 올라 어떤 의미로도 단정치 못한 얼굴이었다.

“저런.”

짐의 별은 정말 매정하신 분이 아닌가.

염휘는 눈을 가늘게 밀어 올려, 한껏 야한 눈꼬릴 만들었다.

“짐을 이십 년이나 독수공방하게 하셨으면 이제는 책임지셔야지.”

“……!”

“듣지 않으셨습니까? 가리지 말고 많이 내어 기르라고.”

“다, 다, 달 아이는 이미 내드렸잖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소희는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말을 더듬어 가며 항의했다.

“아아 그랬던가요? 그런데 어째서 얼굴이 빨개지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이잇! 진짜.”

능글거리는 환의 목소리에 소희가 참지 못하고 목청을 돋워버렸다.

천마가 달리는 소리 사이로도 뾰족이 솟은 목소리가 제법 컸다.

토닥이는 소리에 풍천이 천마를 몰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소리에 듣지 못했겠지만, 소희는 다시 한번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새큰거리는 그녀의 등 뒤로 온기가 전신을 감싸며, 환의 은발이 소희의 뺨에 드리울 정도로 그가 밀착해왔다.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또 부끄러워했다가는 혼자 엉큼한 이가 될 참이라 소희는 애써 태연한 척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를 감은 손이 은근하게 옆구리를 스치고, 그보다 훨씬 농밀한 목소리가 소희의 귓가를 달구었다.

“빈 씨앗 말고, 제대로 여문 것으로 주세요.”

“……!”

돌아보려는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단단히 품은 남자의 열띤 목소리가 농밀하게 울렸다.

“많이.”

거친 바람도 귓가를 스치기만 할 뿐인데, 어째서 그의 음성은 스쳐 지나가질 못하고 가슴에 콕 들이박히는지.

그러나 환은 다가올 때처럼, 물러날 때도 예고가 없었다.

뒤늦게 그가 한 말을 이해하고 막 입을 떼려던 소희에게 덤덤해진 목소리가 ‘별’을 불렀다.

“하계로 돌아가시면, 많이 바쁘실 거예요.”

“그래서 혼롓날은 언제로 잡으셨습니까?”

상념에 빠진 소희를 일깨운 건 반요의 들뜬 목소리였다.

은쟁반을 나르던 반요는 투덜거렸던 것도 그새 죄 까먹고선 마고께서 소희를 별로 점지하셨다는 것에 그저 들뜬 기색이었다.

손에 들린 은쟁반은 하나도 닦인 게 없었다.

“저런.”

소희의 한숨이 은쟁반에 닿았지만, 반요는 못 들은 척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만월의 밤에 하시겠지요?”

반요의 말은 이상했다.

하계의 달은 이지러지지 않아 늘 보름달이었다.

그 달을 일컫는 것이 바로 만월이건만.

갸웃거리는 소희의 의아함을 알아챈 건 이번에도 조양이었다.

“하계의 달은 늘 만월이긴 하지만 저희가 부르는 만월은 달에 한번입니다. 유난히 크고 밝아 만월이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리지요.”

“아아…….”

알 것도 같았다.

매일 같이 달밤을 즐기는 것이 버릇이라, 소희는 매일매일 달을 놓치지 않고 보았는데 그중에 달빛이 유독 밝은 날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날 달 아이 받아주셨지요?”

조양은 참 상냥했다.

부끄럽지 않게 넌지시 알려주는 품새가 어쩌면 저렇게 예쁘단 말인지.

소희는 티 나지 않게 ‘만월’의 날을 알려주는 조양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이 며칠 전 일이니 넉넉히 달포 잡아 준비하시면 될 것입니다.”

“따로 준비할 것이 있다니? 염휘께 듣기로는 그저 언약을 하는 것이던데.”

소희의 말에 반요와 조양은 물론 주변을 바삐 다니던 아이들 모두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왜, 왜?”

분명 뭔가 잘못 말한 게 있었다.

소희는 아이들의 반응에 떨떠름하게 입을 뗐다.

“그저 언약이라 하셨다고요?”

조양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떼자, 반요가 거들었다.

“혼례복은 어쩌신답니까?”

“아니, 황후사 지으시려면 염휘께서 고것도 알려주셔야 하고.”

“그날서는 모든 염라의 불이 모일 텐데.”

“귀왕과 별께서는 언약만 하시겠지만, 준비하여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온데.”

“그럼 염라의 불이 모두 모이면 거처는 어쩌시려고요? 더러 며칠 묵다 가시는 분들도 있사온데?”

“얘, 저승 시왕께서만 오셔도 열 분이시다.”

뭐어?

소희는 바쁘실 것입니다, 라며 멋들어지게 웃던 환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너른 품에 딱 안고선 천도를 달릴 때, 두 볼이 뜨끈해지도록 희롱하며 정신을 쏙 빼놓으실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신없는 틈에, 빨리 혼례 올립시다. 바쁘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고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할 때, 정신 차렸어야 했는데.

달 아이 많이 내려주십사, 영근 것으로 많이 많이 주십사 하는 목소리에 그만 부끄러워 다른 말을 흘려들은 것이 정말 큰 실수였다.

“인연의 고리만 덧씌우면 되는 것 아니니?”

“이미 인연의 고리는 새기고 계시잖습니까?”

아수라가 웬 문서꾸러미를 한가득 들고 들어서며 낭랑하게 대꾸했다.

“아수라님?”

“소희님. 돌아오시자마자 바쁘시겠지만, 확인해주셔야 할 것이 있어 소장 급하게 달려온 참입니다.”

여느 때처럼 쥘부채도, 미끈한 눈매에 눈웃음도 달지 않고 아수라가 담백하게 용건을 꺼냈다.

“확인……이라시면……?”

“예에, 혼롓날 모일 염라의 불들 명단입니다. 보시고 거처를 배정하시고 연회는 며칠을 허하실 건가 지옥에서 몇쯤 꺼내주실 건지…….”

급하게 왔다는 아수라의 말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급하게 말할 법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말을 했으나, 아직도 소희가 해주어야 한다는 일은 끝이 나질 않았다.

소희는 들고 있던 면건을 놓친 것도 모를 만큼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쁘실 겁니다.’

이, 이, 이분께서 지금!

‘하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고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 누굴 잡으려고!

이 남자가 정말!

소희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허리 위에 올려놓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덕실어멈이 행랑채 김 서방이 몰래 꿍쳐둔 돈푼을 발견했던 그 날처럼.

“빨리 혼례부터 올립시다. 짐은 그대를 너무 오래 기다렸답니다.”

“혼례가 그렇게 빨리 되는 건가요?”

그래, 분명 인계에서의 표가공자와의 혼약을 할 때도 혼삿날을 넉넉히 잡았던 것은 혼례복도 지어야 했고, 혼삿날 찾아와주실 마을 어른들을 대접해야 해서였다.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온데……?”

“준비는 무얼, 그저 달빛 좋은 날로 골라 언약하면 끝인 것을.”

여상히 대꾸하며 웃는 남자의 아리따운 모습에 넋을 빼서는 이 사달이 난 것을 누구 탓을 하랴만.

소희는 절로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소희님, 이것은 염라의 불들을 적어 놓은 명단이니 시간 나실 때마다 보시고.”

“보시고……?”

불길한 말이었다.

분명 저 뒤에 뭔가 해야 할 일이 따라붙을 것 같은.

“외우십시오.”

아수라는 산뜻하게 말하며, 두툼한 두루마리를 소희에게 안겼다.

“외우, 외우라고요?”

말을 더듬어야 마땅했다.

두루마리는 끝도 없이 펼쳐졌고, 깨알같이 적힌 글자는 분명, 모두 관직 이름인 듯했으니.

울지 않으려면 말이라도 더듬어야 이 마음이 표현될 성싶었다.

“가급적 얼굴도 같이 외우시면 좋사온데, 어렵겠지요? 하지만 언제고 외우셔야 할 이름들이니 이번 기회에 외우시는 것도 좋지요.”

쫘아악-.

오늘따라 아수라의 쥘부채가 펼쳐지는 소리가 참 얄미웠다.

소희는 그 누군가와 똑같은 말투를 사용하는 아수라를 몰래 흘기고는 묵직한 두루마리를 받아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것만으로도 숨이 턱하니 막히건만, 소희의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염라궁의 모든 궁 이름도 모르는 판국에 저 수많은 이들의 거처까지 배정해주라는 이야기에는 소희는 아수라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염휘께선 어디계십니까?”

울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환을 찾는 것을 즐거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수라가 몹시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삼천외에서 귀한 분이 오셔서 만나 뵐 수 없으십니다.”

“……직인?”

“설마요. 아아. 어쩌면? 글쎄…….”

아수라는 이상한 대꾸를 하며 부채를 팔락거렸다.

나풀거리는 그의 머리채가 마치 소희의 앞날같이 까맸다.

“……전 혼례 전에 죽을 성싶습니다.”

“저런 저런, 걱정 마십시오. 이제 생의 좌를 받으신고로 못해도 이천 년은 너끈히 사실 것입니다.”

“…….”

전에 없이 유들거리고, 능글맞은 대꾸를 하는 것은 아수라의 생명의 환이 염휘에게서 나왔기 때문인가.

소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맘껏 쥐락펴락하는 아수라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저의 장수를 축원하셨으니, 일조하여주세요.”

소희는 염라궁 지도를 그대로 바닥에 펼치며 아수라를 청했다.

“자, 부르세요. 누구를 어디에 머무르게 해야 평화롭게 이 혼사가 끝날지.”

소희가 제일 잘하는 것은 환을 다루는 것이었다.

변해버린 아수라쯤이야.

소희의 손에 들린 세필이 아수라를 찾아 팔랑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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