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어지는 시간 (11)
2018.07.30.
세상에, 뻔뻔하기도 하지. 그저 사과 몇 마디에 셈이 되었다 생각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풍천 자네보다 더한걸.”
그새 기운을 차린 아수라가 벽에 기대앉아 접선을 팔락이며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크흐흐흣. 이거 진귀한 구경을 했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풍천 역시 웃음을 참지 않았다.
지난날의 분노가 알알이 차인 그의 웃음은 사납게 울렸다.
활짝 웃는 그의 눈은 호곡선을 그린 지 오래였으나 그 안에 비쳐지는 눈동자는 진작에 동공이 지워진 채 반질거렸다.
당장에라도, 한주먹에.
풍천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누르며 실실 웃었다.
하얗게 쥐어진 주먹이 절로 떨렸다.
“그,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발끈한 상제의 외침에 마고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더럽혀진 영체를 가지고 천신이 되다니. 그거야말로 농이 지나친 거 아닌가?”
“그것은 휘의 핏자국 아닙니까!”
“저런, 아까부터 이해를 못 한다니깐.”
마고는 얼굴을 굳히고 초점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상제를 향해 다가갔다.
“운명의 베를 적셔서가 아니야. 다른 이의 운명을 찢고, 더럽히고, 끊어버리고, 운명을 짓는 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 모든 것이 업이 되어 자네의 영체가 더러워졌다는 것이지.”
내가 기다린 건, 휘 하나가 아닐세.
“억울합니다!”
발끈하는 상제와는 달리, 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시큰거리는 숨을 달래며, 태자, 아니 이제 곧 상제가 될 아들과 그의 옆에 선 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 대의 휘는 별과 똑같은 게지요?”
한참 만에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는 소리란 겨우 저런 것이었다.
이런 순간에서까지 별을 이기지 못했던 날에 목을 매고 있었다.
“미련이고 집착이란다, 아가. 넌 어째서 그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성정이 섬세하고, 더러 예민하시니 항시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터라, 태양의 아이들이 모두 잘 자랐지.’
‘무슨…… 아닙니다.’
‘아니긴. 그럼 네가 지금 마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니? 꽃같이 화사한 태자는 내 너를 보고 내려준 것이다.’
‘네?’
‘태양 아래, 활짝 피워내라고. 여태 해왔던 것처럼 잘 키우거라. 네 아들이 얼마나 수려하게 피어나는지 감탄하게 될 것이다.’
마고는 그날의 대화를 꺼내 휘의 귀에 들려주었다.
귓가를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저를 믿는 마고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그러자, 휘의 경계 어린 눈빛이 풀리기 시작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뒤늦게 기억을 떠올린 것을 감추지 않았다.
“어, 어째서…….”
쭈글거리는 두 손이 경악한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째서라니, 네가 태자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지.”
마고는 우는 휘를 바라보며 짧게 대꾸했다.
“그 누구보다 찬란히 피워내고 싶은 욕심이 네 아이를 몰아세우게 했지. 너무 사랑한 게 독이 되었단다.”
하지만,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사랑이라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잘못 아셨습니다.”
태자였다.
아니, 얼음처럼 투명하고 시원한 물빛을 눈동자에 새긴 그는 이미 상제였다.
마지막 힘을 견뎌내느라 그동안 말을 아꼈을 뿐, 모두 듣고 있었던 탓에 태자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애정이 지나쳐 병이 되었지, 네 어머니의 잘못은 그거란다. 멈추질 못했어.”
“병?”
휘가 마고의 말을 작게 따라했다.
“그래, 별도 태자도. 넌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지. 별을 사랑하는 만큼 같아지고 싶었지. 너 자신도, 네 아이도 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자 비틀린 애정이 미움이 되었지.”
“그것이 이 상하천을 뒤흔들 이 일의 면죄부가 될 것이라 여기십니까.”
마고는 날 세운 태자의 음성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명아. 나서서 그렇게 헤집지 않아도 된다. 저이는 네 어미 아니냐. 갑자기 고아가 된 귀왕이나 갑자기 두 몫을 떠안게 된 소희나 모두 딱하지만 그 운명에 휩쓸린 건 너도 마찬가지지.”
다정한 녀석.
마고는 태자가 나서서 유난히 휘를 치죄하듯 따지는 이유를 짐작했다.
차마, 제 어미를 다른 이가 나서서 몰아세우고 단죄를 청하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었다.
살갑든, 매정했든.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평생에 휘의 온정을 바라며 목을 매 살았던 소년의 마음은 모두 죽지 못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해서.”
마고는 길게 숨을 머금으며 말을 끊었다.
그녀의 끝도 모를 깊이를 품은 눈동자가 눈앞에 선 상하전 지존 내외를 담았다.
“이제 그 좌를 물리고 새로이 생을 받게 될 이들에게 벌을 내리고자 한다.”
마고의 손이 이제 제대로 서 있기도 벅차하는 상제와 휘를 가리켰다.
“너희 둘은 상천의 무게를 버티고 자애롭게 만물을 살펴야 하는 고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희 역시 운명의 실을 따르는 자, 어찌 그 잘못이 너희에게만 있겠느냐.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내게도 죄가 있는바.”
마고는 머리타래에서 금사와 은사를 한 가닥씩 끊어냈다.
기우뚱-.
갑자기 땅이 기울듯이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매년 하루, 태양과 달을 가려 오늘의 이 일을 잊지 않고 새기며 더 부지런히 보살피겠다고 약조하마.”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마고의 말이 선명하게 울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두 가닥의 실만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다시 한번 지엄한 책무를 이행하고 나서야 천신의 자리로 올 수 있을 것이다. 영체는 내가 거둘 것이며, 당장은 근신하라.”
지고한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끼쳐들며 거친 숨소리 둘이 꺼졌다.
태자, 아니 새로이 즉위한 젊은 상제와 귀왕 염휘는 전대의 상천의 주인들이 마고의 손에 거두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고 귀여운 용모에 번번이 속고 말지만, 그녀는 천신 마고.
옥황상제와 염라대제쯤은 손바닥 위에 놓고 어르는 분.
그리고 마고의 치죄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운명에 얽혀 괴로웠다고는 하나 그들은 천의 주인.
그 무게를 감당치 못해 서로를 상처 내며 얼룩지게 했던 시간에 대한 죄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은사를 쥔 마고의 한 손이 상제를 가리켰다.
“상제에게는 상제에게 내려오는 ‘높고 밝을 땅 상(塽)’에 염휘께 내드린 같은 ‘휘’를 내어드리지.”
상제와 귀왕에게 같은 휘호를 내려줌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지만, 마고는 단호한 음색으로 선언했다.
“같은 휘호를 내려 의아하시겠지만, 한 휘호 아래. 이번 일을 한마음으로 잘 이겨내시라는 뜻이지.”
“황공합니다. 내려주신 휘호가 그 뜻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니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허고, 상제는 이 모든 일이 상천에서 시작된 책임을 모두 면할 수는 없는바.”
“기꺼이.”
“그대에겐 향후 백 년 간 그 어떤 태양의 아이도 태자도 내려주지 않을 것이네.”
“너그러운 처분이십니다.”
백 년 간 새로이 태어나는 선인이 없을 거라는 말은 무시무시했으나 상제는 순후하게 대답했다.
전대의 귀왕이신 염혁을 살해하고, 별의 목숨을 앗았으며, 후대의 휘와 별까지 얽혔던 큰일이었다.
이정도의 처분은 자비로웠다.
심지어 마고는 그에게 새로운 휘도 내려주지 않았던가.
“하루를 삼킨 달은 상제에게 매어 놓지. 상제와 휘 역시 나와 함께 이번 일을 매번 떠올려 경계하시오.”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마고의 손을 떠난 은빛 실 한 가닥이, 나풀거리듯 나는가 싶더니 점차로 그 몸집을 키웠다.
그것은 이내 커다란 달덩이 같아져 사방을 가득 메울 듯 거대해졌고, 상제와 휘는 자신을 삼키는 은빛 빛무리에 두 눈을 감았다.
전신에 스미는 차갑고도 청량한 기운.
그리고 다시 뜨인 두 눈엔 푸른 눈동자를 그어낸 것 같이 은빛 실선이 박혀있었다.
마치 낙인을 새긴듯한 젊은 상제와 휘의 모습을 바라보던 마고가 몸을 염휘와 소희에게 돌렸다.
상제에게 엄정하게 굴었던 것과는 달리 염휘와 소희를 바라보는 마고의 표정은 몹시 온화했다.
“너희에게는 억지 부리듯 죄라 말하고 싶지 않구나.”
마고는 손에 들린 나머지 한 가닥의 실을 들어 올렸다.
“하루를 태운 태양이지. 너희에게 내릴 것이다. 천신 마고의 실책을 거울삼아 부디 더 잘난 왕이 되어주시게.”
그 말을 끝으로 역시 마고의 손을 떠난 금사가 거대하게 부풀어 염휘와 소희를 집어삼켰다.
가슴을 달구는 뜨끈한 기운이 기분 좋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는 염휘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잦아들었다.
그의 홍안이 영력을 돋우지도 않았건만 잔잔한 금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은발 사이로 비쳐드는 따스한 빛이 염휘를 한층 더 고아하게 보이게 했다.
무심한듯한 표정.
하지만 마고는 그 표정 아래 얼마나 뜨거운 마음이 감춰져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지금, 평온하고도 행복하게 두근거리는 염휘의 심박이 그녀의 귀를 즐겁게 울려주었다.
진즉에 허락됐어야 할 것들을 이제야 받게 되는 그에게 미안했고, 그럼에도 굳건하게 버텨낸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대견했다.
“보기 좋구나, 역시나 누가 빚었는지 참말 잘생겼지.”
여지껏 근엄하던 목소리는 오간데 없이 애정이 함빡 물린 목소리와 함께 칠흑 같던 어둠이 일시에 걷혔다.
안심한 듯 미소짓던 마고의 시선이 새롭게 내려진 휘에게 닿은 건 그때였다.
“아차, 휘야. 네게도 이름을 주어야겠구나. 둘 다 소희라 부를 순 없으니.”
“네, 마고시여. 참으로 기쁜 말씀이시옵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소희야.”
휘에게 이름을 준다던 마고는 염휘에게 기대있던 소희를 불렀다.
팔랑거리는 손짓에 소희가 공손히 앞으로 나서자, 마고가 똑같고도 다른 두 소희를 두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두 몫이었으나,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둘이 되었으니. 이만한 인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에게 의미 있는 이름을 주어야겠어.”
마고의 손가락이 소희를 가리켰다.
“네 이름자에서 소자를 받아가마. 빛나다 뜻의 희는 그야말로 별인 네게 딱이니라.”
“영광입니다.”
소희는 마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동의했다.
새 이름을 내려주시는 대신에, 한 몸에서 내어진 둘에게 이름자를 나누어주시려는 의미를 알 것도 같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휘께는 ‘소’자를 내리지 본디라는 뜻과 희다는 뜻이 있으니, 본래 자네 자리로 돌아와 세상을 밝게 비추는 일에 일조하시게.”
마고는 생각하시기에 적당하다 싶은 의미로 이름자를 나눠 주며 덕담을 같이 건넸다.
“하오나 마고시여. 감히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소라고 이름을 받은 ‘휘’가 마고에게 말을 건넸다.
얌전한 목소리이기는 하나 당돌한지라 마고의 눈썹이 살짝 솟았다.
맹랑한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지만 ‘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희다는 뜻은 별께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사오니, 제겐 불사를 소나, 빛날 소를 주십시오. 저는 휘. 상천의 어미입니다. 새 아이도 없이 백년의 날을 버틸 단단한 이름을 내려주십시오.”
“아하하하하하하!”
마고께서 부르신 터라 중간에 나서지도 못하고 듣고만 있던 상제의 얼굴이 희게 질릴 정도로 당돌한 소리였다.
마고는 한참을 웃더니 ‘휘’가 아니라 상제를 찾았다.
“큰일이구나, 대대로 어쩌면 휘들은 이리 대찬 것이냐? 명이 애쓰겠구나.”
볼우물이 움푹 패도록 생긋 미소를 지은 뒤에야 마고는 상제의 옆에 선 휘에게 답을 돌려주었다.
“허고. ‘소’야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다니 그럼 빛날 소자를 내려주마. 어디 얼마나 단단히 상천을 보듬는지 내 직접 지켜볼 것이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간간히 터트리던 마고는 한참 만에야 진정이 된 듯 두 ‘소’와 ‘희’의 손을 끌어 서로 맞잡게 했다.
“잘 지내거라.”
“네.”
“그럴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안 그러면 다음번엔 엉덩이를 두드려 줄 것이야.
마고는 돌아온 대답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고의 발끝이 머문 곳은 아수라 앞이었다.
아직까지 벽에 기댄 채인 아수라를 뒷짐 지고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개구졌다.
“요 깜직한 것. 내 이번에 네 덕을 크게 입었다.”
점잖은 서생 같아 보이는 아수라에게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마고가 건네는 말은, 그들의 모습과 대단히 어울리지 않았으나 아수라는 마고께 무척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려주신 은혜를 입은 것은 저입니다.”
고개가 미미하게 숙여지며, 인사라고 간신히 부를만한 모양새가 나왔다.
아직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아수라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사였다.
고지식한 녀석.
마고가 그런 아수라를 보며 밉지 않게 흘기며, 중얼거린 것도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언제고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그러나 아수라는 마고의 말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구명의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 것입니까?”
저를 구명해주신 마고께 감히 보은인 양 ‘소원’을 청하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했던 탓이었다.
저런.
그런 아수라가 못내 못마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특한 것이라, 마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납죽납죽 대답하는 꼴이 건방진 것이라, 금세 자리 털고 일어서겠구나.”
“당연하지요. 마고께서 직접 되살린 몸인 것을요.”
“아수라. 잘 생각하거라. 소원을 빌 때는 무척 신중해야 한단다. 언제고, 하나의 소원이니 준비가 되면 생명의 전에서 날 부르거라.”
세 번을 권하심이었다.
이쯤 되면 아수라가 물러서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다.
풍천이 아수라의 소맷자락을 티 나지 않게 잡아당기며 그를 말렸다.
아수라의 검은 눈동자가 제 옆에 있는 풍천을 흘깃 품고는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굳이 주신다니 사양치 않고 쓰겠습니다.”
“오오냐.”
아수라의 옅은 한숨이 사이사이 새어 나왔으나 마고는 못 들은 척 흡족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살펴 가십시오.”
저런, 눈치도 빤하니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마고는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우며 몸을 돌리려다 그 옆에 있던 풍천의 귀를 잡아당기며 은근한 소리를 냈다.
“딱하구나. 마냥 설레기만 해서야 진척이 있겠느냐?”
“네에엑?”
벌레라도 붙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 귀를 마구 털어대던 풍천은 이내 마고의 손에 단단히 붙잡혔다.
“아아아아야.”
“너도 소원 하나 들어주랴?”
“……에에?”
“입막음이다. 하나만.”
마고의 음성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은근하고 농밀했다.
“좌를 벗어나면, 삼천외 선인으로 연을 맺어볼 참이냐?”
“그,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고, 알아서는 안 될 것도 같았다.
놀라 더듬거리는 풍천을 향해 마고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아수라를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저 녀석을 마음에 둔 것 아니냐? 원하면 네 짝으로 줄 것이다.”
일부러인지 살짝 돋운 목청을 아수라가 들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마고의 미소가 능글맞았다.
아수라는 순식간에 마고와 그에게 귀를 잡힌 채 얼굴을 붉힌 풍천을 바라보다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 이이! 미친 작자가 지금 나를!”
이 염라의 불을!
몸을 추스르던 아수라가 접선을 털어 단번에 장검을 만들어 쥐고는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절대 마고의 고의가 아니었겠지만 풍천은 진심으로 살기를 피우는 아수라를 보며 도를 꺼내 들어 그의 분노의 칼질을 막아내야만 했다.
“흐아아악. 그런 게 아니야.”
그 와중에도 아수라가 몸을 일으켰다는 것이 풍천은 기뻤지만 그에게 휘두르는 칼끝에 영력이 꽉 들어차지 못해, 마냥 안심이 되진 않았다.
그 마음은 아수라는 모를 것이었다.
그저, 마고의 농에 펄쩍펄쩍 뛰며 화풀이를 했을 뿐.
그러니 풍천도 쇠와 쇠가 부딪히는 비릿한 냄새 사이로 스미는 기꺼운 마음을 모르는체할 셈이었다.
“흐응.”
활기찬 아이들이로고.
“자고로 아이들은 왁자지껄해야 제맛이지. 안 그러냐.”
마고는 갈 채비를 마친 듯 제게 묵례를 올리며 조용히 배웅하는 상하천의 지존들을 보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롱이다롱이 가리지 말고 낳거라.”
그리고, 그 와중에도 다정히 소희를 챙기는 염휘에게 마고가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대대로 상제와 귀왕에게 주어지는 혈육은 단 하나, 태자.
그러니 마고의 저 말은 달 아이를 말함일 것이다.
지난 이십 년간의 공백을 메우려면 어서 혼례 올리고, 어서어서 달 아이를 키워내야 했다.
사실, 상천이야 백 년쯤 아이가 없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더러 명을 다한 선인이 있어 그 자리가 조금은 빌지 몰라도, 하계는 모두가 요괴와 싸울 사자였기 때문에 빈자리가 크게 티가 났다.
제 명을 다 쓰지 못하는 사자의 운명에 하계가 얼마나 허덕였는지.
그 많던 사자의 대다수가 자리를 비워 위태롭던 순간에 달 마마를 돌려받아 얼마나 다행인지.
염휘는 장난스럽고도 다정한 당부를 남기는 마고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염려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잘 키울 것이지. 아이를 안는 품새가 아주 좋더구나.”
“……다 들여다보십니까?”
“가끔?”
“……!”
마고의 말에 염휘의 낯색이 희게 질렸다.
질린 표정은 비단 염휘뿐만이 아니었다.
투덕거리던 아수라와 풍천까지 모두 굳어져 마고를 바라보았다.
“시시때때로?”
풍천의 뜨악한 음성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고가 갑자기 성을 버럭 냈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게야! 설마 욕간 할 때 훔쳐보기라도 했을까봐!”
“세상에. 마고께서 그런…….”
질린 목소리를 내는 풍천을 보던 마고가 뭔가를 말하려고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줄행랑’이었다.
“도무지 어린 것들은 다루기가 힘들어서 원! 에잉.”
변태 취급에 마고께서 역정을 내고 돌아가시고, 모두가 귀환하고 난 이후로 삼천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마고 잡는 풍천.
그래서 이후 수천 년 이후 인간계에서 발견된 고서에는 풍천이 천신마고를 몰아내고 삼천을 보살피는 하늘 신이라 기술된 것이 더러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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