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어지는 시간 (10)
2018.07.27.
본래도 살갑지 않은 상제 내외였지만, 마고를 뵙고 돌아온 둘의 분위기는 한결 더 차가워져 아랫것들이 서로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상제 옆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장졸 하나가 몇 번이고 제 옆에 선 선인들의 눈치를 받고서야 입을 뗐다.
“상제시여.”
“음?”
그러나 걱정했던 것보다 돌아오는 대답이 무척 부드러웠기에 장졸은 꺼져가는 용기를 붙들고 다시 입을 뗐다.
“귀왕께서 이제 곧 출전하실 것입니다. 어서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활을 잡는 것은 짐이건만, 어째서 네가 더 긴장한 것이냐?”
이미 이틀을 내리 해온 것을.
“오늘이 마지막, 세 번째 화살을 날리는 날 아니더냐.”
상제는 장졸에게 손을 내밀어 활을 건네받으며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날을 위해 수천, 수만 번 활시위를 당겼다.
첫발을 날리기 전, 처음 느껴보는 전신을 덮쳐오는 긴장감은 꽤나 대단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이틀 지난날의 그의 노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귀왕을 위해 멋지게 길을 내지 않았던가.
대체, 짐을 얼마나 업신여기길래.
주르륵-
이깟 장졸들마저 귀왕의 길을 내주지 못할까봐 짐에게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이냐.
주르륵-
상제는 아까부터 귓가를 울리는 묘한 소음에 신경이 자꾸만 곤두섰다.
무언가 젖어 들어가는 것 같은 질척한 소음은 바로 귓가에 대고 울리는 듯도 했다가 아득한 어디선가에서 들리는 것도 같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 귀왕께서 나오셨습니다.”
상제는 지금 제게 건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마저도 짜증스럽다 할 참이었다.
“다들 저리 비키거라.”
상제가 반듯한 눈썹을 못마땅하게 일그러뜨리며 불이 붙어 화려하게 타오르는 활을 치켜들었다.
활대를 손에 쥐니 아직 채 차오르지 못한 영력이 느껴졌지만, 이깟 활시위를 당기는데 굳이 그런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상제는 활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손가락을 타고 뜨끈한 열감이 느껴지고, 힘껏 당긴 시위 너머 천마를 타고 나서는 귀왕의 일행이 똑똑히 보였다.
저 멀리 은빛을 나부끼는 귀왕과 별, 그리고 하태자 환까지.
말 위에 올라탄 염혁을 향해 별이 한껏 다정한 표정으로 뭔가를 전하고 그 뒤에 딸린 태자 역시 연신 웃는 낯이었다.
염혁이 내민 두 팔에 별이 안겨들고, 그 뒤를 아수라가 지키고 서 있는 모습에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내가 이어준 운명의 실로 연명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희희낙락.’
상제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주르륵-
다시금 귀를 울리는 질척한 소음.
“상제시여, 지금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소리에 마치 등 떠밀리듯 활을 치켜든 것도 잠시.
상제는 그만 활시위를 놓쳤다.
“이!”
아직 활이 날아갈 길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충분히 가늠하기도 전에 마치 미끄러지듯 놓치고 말았다.
핑---!
궤적을 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듯이 울렸다.
그리고 살이 쏘아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수라가 빗나간 화살의 궤적에 놀라 그대로 몸을 날려 막아서는 것과 함께 화살의 첫 제물이 되는 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위력을 잃지 않은 상제의 화살이 그대로 귀왕과, 그의 품에 안긴 별을 단숨에 꿰뚫어 버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지독히도 느리게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상제는 지금 제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한없이 느릿하게 펼쳐지는 이 믿지 못할 광경은 대체.
악몽이라 해도 지독한데.
“왕이시여-!!”
염라의 불이 내지르는 비통한 외마디가 온갖 소음으로 먹먹해진 그의 귀를 뚫었다.
“……!”
멀게만 느껴지던 모든 것이 갑자기 와글거리며 단번에 상제를 덮쳐들었다.
“귀왕이 살해당했다!”
누구의 입에서 터진 것인지는 모를 비명이 사납게 그를 후려쳤다.
“뭐, 뭐…… 뭐?”
상제는 뒤늦게 몰려드는 실감에 절로 손이 덜덜 떨렸다.
귀왕이 죽어?
귀왕이 살……해당해?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상제는 크게 외쳤다고 생각했지만, 속삭임보다 못한 혼잣말은 웅성거리는 소음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안돼애--!!”
단장을 녹여내는 애통한 피울음.
그리고 상제는 보았다.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살해된’ 귀왕의 대물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 눈을 뜨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해를 가른 달빛이 하태자인 환에게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환한 낮이었지만, 환에게는 암흑 같은 달밤이었다.
예민한 상제의 안력은 피할 수도 없게, 하태자가 억지로 성장을 끝내는 것을 보게 만들었다.
미끈하게 생긴 소년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순식간에 얼음같이 차갑게 생긴 준미한 청년이 되었다.
길고 곧게 뻗었던 두 다리에는 탄탄한 근육이 붙었고, 가늘었던 두 팔은 단단하게 길어났다.
쏟아지는 힘과,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아낸 태자의 눈에서 채 갈무리 되지 못한 귀왕의 영력이 황금빛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귀왕이시여-.”
세 목숨을 딛고 태어난 하계의 새 지존은 눈물 위에서 왕이 되었다.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우는 염라의 불을 바라보는 귀왕은 처연해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상제는 새로이 귀왕이 된 ‘염휘’를 바라보며 목 아프게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염휘의 홍안이 그를 잠깐이지만 바라봤을 때. 발밑이 꺼져드는 듯 막막하기까지 했다.
태자였을 때도, 그 영력의 깊이가 남다르다 했건만.
귀왕이 된 그는 상제인 자신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
그가 이대로 달려와 그의 선대의 목숨값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얌전히 목을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실수였다는 것을 말하면, 믿어 줄 것인가.
저 자신조차 놀랐다면, 이해하여 줄 것인가.
상제는 저를 바라보는 귀왕 ‘염휘’를 보며 하얗게 빈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려 했다.
전장을 메꾼 비통함보다 차게 식은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조금 전까지, 저와 함께 찻잔을 나누던 염혁을.
다부지며, 다정한 귀왕을 제 손이 죽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 것인지 어안이 벙벙하다면.
‘염휘’에게 위안이 될 것인가.
상제는 피울음이 피어나는 하계의 막사로 달려가려는 발걸음을 다잡아 눌렀다.
무어라 말을 하건 간에 자신은 갈 자격이 없었다.
가보아야 마음만 더 헤집을지도 모르는 일.
고의건 실수건 자신의 손에 귀왕께서 명을 달리 하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원망은 자신에게 퍼부어질 것이었다.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상제는 그저 처분을 바라듯 상천의 막사에서 염휘를 기다렸다.
절로 돋워진 안력에 염휘의 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슴팍까지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의 잘생긴 입술이 열리며, 말을 빚어내는 것까지.
“사방을 물려라.”
상제를 끌어내라.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말이 소리가 되어 울렸다.
단죄를 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을 셈이었으나, 염휘는 그러지 않았다.
출전은 잠시 미루고 그대로 사방을 물린 채 진을 그렸다.
아마 그도 수없이 연습했던 진이었을 것이다.
황금으로 물든 염휘의 손이 사방 열 자를 바삐 움직였다.
진을 그려내는 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고, 한점 망설임도 없다.
저것은 바로 마고께 선대의 영체를 보내드리는 진.
이제 귀왕 내외는 마고께 올라가 천신이 되실 것이다.
진을 모두 그린 염휘는 그 위에 귀왕이셨던 염혁과 별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뉘어드렸다.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는 것까지.
염휘는 단 하나도 서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풍천, 아수라를 수습하라. 곧 그의 대물림이 시작될 것이다. 밤의 아수라를 불러내 대물림을 함께 할 것이냐 물어라.”
“그리하겠습니다. 염휘시여.”
“풍천.”
“네.”
“오늘은 아무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니, 가거라.”
“염휘시여…….”
주르륵-.
의젓한 귀왕을 바라보는 상제의 귀에선 언젠가부터 시작된 축축한 소음이 쉬지 않고 울렸다.
그것은 착실하게 신경을 갉아내, 자꾸만 상제의 심사를 사납게 비틀어댔다.
“수, 수습하지 않으셨습니까?”
놀란 선인들이 모두 달아나 텅 빈 막사를 지키고 있던 것은 상제와 휘, 단 둘뿐이었다.
휘 역시 당장에라도 염휘가 달려와 치도곤을 낼 것이라 생각했던지 잔뜩 겁먹은 목소리를 냈다.
휘의 그런 목소리마저 상제는 짜증스러웠다.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저렇게 제 몸을 사리는 것인가.’
염휘는 이대로 일을 마무리할 것이었다.
하기사 상제와 귀왕은 대대로 피가 이어지지 않은 동기를 자처했다.
비극적인 실수가 불러낸 참사가 애석하다지만, 실수는 실수일 뿐 살의를 품은 것이 아니었다.
상제는 초조해하고 놀랐던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주르륵-
귓가를 적시는 습한 소음에 신경이 예민하게 돋았고, 만사가 짜증스러워졌다.
“수습하지 못 하셨냐고요!”
쨍하게 울리는 휘의 목소리는 상제의 마지막 인내심을 앗아가 버렸다.
“…….”
귓가를 앵앵거리고 울리는 목소리를 잡아 뜯어버리고 싶은 잔인한 충동이 올라왔으나 상제는 옅은 미소 뒤로 그것을 숨겼다.
“웃음이 나옵니까!”
초조한 휘의 목소리에 상제가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돌렸다.
그의 눈은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담아, 이미 그 빛을 잃고 어둡게 침잠했다.
탁해진 그의 벽안을 발견하고 휘가 신음을 삼켰다.
“어찌해야 합니까. 어서 말씀을 해보세요. 마고를 청해야 합니까!”
“조용, 조용……. 골이 울려 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결국 잇지 못 하셨냔 말입니다! 귀왕께서 어찌 저렇게!”
“무슨.”
상제는 파들거리는 휘의 두 어깨를 강하게 붙들어 그에게로 잡아당겼다.
강한 악력으로 금세라도 휘의 어깨를 짓이길 듯 함부로 다루었다.
“지금 뉘에게 책임을 씌우려 하심입니까.”
상제의 목소리는 진득한 살기를 물고선 목 아래서 으르렁거리듯 울렸다.
삐딱해진 말투만큼이나 기울어진 그의 고개가 휘에게 떨어져 내렸다.
귓가에 울리는 그의 숨소리마저 탁하게 울려, 휘는 절로 소름이 돋았다.
상제는 갑자기 다른 이가 되어버렸다.
“마고께서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나른한 듯, 차갑게 울리는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온몸을 떨게 했다.
“무슨……!”
“오늘 귀왕 내외께 마지막 인사를 건네시던 모습이 저만 생생한 것입니까.”
“……!”
휘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지금 상제는 모든 책임을 마고에게 돌리려 했다.
아니, 운명이라 우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운명을 따라 흐를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입을 다무세요. 시끄러워 짐이 살 수가 없으니.”
아니면, 짐이 그 입을 봉해드리리까?
“……미쳤군요. 미쳤어. 아니, 다른 이가 됐어.”
휘는 신경질적이고 사납게 변한 상제를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것은 상제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운명의 실에 베인 손가락이 엉망이 되어 쉬지 않고 통증을 일으켰다.
갑자기 변해버린 상제를, 그 이유를 떠올리라는 듯이.
“……설마.”
휘는 운명의 실이 끊어진, 귀왕과 별, 그리고 그의 장수를 떠올렸고, 그 옆에서 지어지던 옷감에 얼룩을 남겼던 자신의 핏방울을 떠올렸다.
설마.
불안감이 덩치를 키워 심장을 터트려버릴 듯 압박했다.
설마, 설마.
입안으로 그럴 리 없다 되뇌었으나, 갑자기 변해버린 이를 설명할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가세요. 짐이 자리를 지킬 터이니, 그대는 도망치란 말입니다.”
조롱하듯 울리는 상제의 목소리에 두 볼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평소라면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었지만, 휘는 그 모욕을 당하고도 몸을 돌려 나갔다.
지금의 상제는 몹시 위험했다.
그의 변화는 흥분했기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정말 그녀의 짐작 때문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으나, 그걸 알아내는 것은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휘가 허둥지둥 막사를 빠져나가 천마를 불러 상천으로 돌아가 버렸다.
귀왕이신 염휘께서 전대의 별과 귀왕의 배웅을 무사히 마치고, 염라의 불의 대물림까지 모조리 마친 것은 그 밤이 이슥해서였다.
그동안 상제는 아무도 없는 빈 막사에서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지켜봐 주었다.
제가 쏜 화살에 일어난 참극이라, 차마 나서서 죄를 청하지는 않는다고는 하나, 지켜봐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조용하고도 음울한 밤을 끝낸 것은 염휘의 출진명령이었다.
길을 터주는 태양의 화살도 없이 사자를 데리고 염휘가 달빛에 나섰다.
말에 올라탄 염휘의 홍안이 막사에 홀로 남겨진 상제에게 아주 잠시 와 닿았다 떨어졌다.
“…….”
원망하거나 분노할 것이라는 상제의 예상은 이번에도 무참히 깨졌다.
염휘는 아주 작게 머리를 까딱이며 그에게 묵례를 보냈다.
상제에게 전하는 출전한다는 인사이자 신호였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고요한 달밤을 닮은 귀왕과의 첫 대면에 상제는 아주 잠깐 얼어버렸다.
“미안하다. 실수였어.”
한참 만에 염휘를 향해 상제의 사과가 밤공기를 타고 새어 나왔으나, 그들은 너무 멀었고. 사과는 너무도 늦었던 탓에 이미 점이 되어 사라진 염휘가 들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밤 풍천과 만월 아래 새로이 태어난 염라의 불, 아수라를 데리고 출전한 염휘가 경계의 틈에 교묘히 숨어있던 요괴 둥지를 찾은 것은 우연이었다.
둥지를 털린 만에 달한 요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상천의 선인을 집어삼키고, 요괴에게 먹힌 선인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도륙한 것은, 바로 아수라와 풍천.
상제는 새로이 좌를 받은 아수라가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울음소리를 내는 검으로 단번에 선인 대여섯씩을 쳐내던 화려한 몸놀림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오천의 선인의 피가 천의 경계를 흠뻑 적시고 나서야, 태양이 떠올랐다.
밤새 피를 흠뻑 마신 태양은 몹시도 붉어 상제는 눈을 감아야만 했었다.
마고의 기억에 말을 덧붙이며 그날을 되짚은 것은 바로 상제였다.
상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매 숨마다 옅어지는 영력은 이제 두 팔 안의 것들도 희미하게 보이게 했다.
“놓은 건지, 놓친 건지.”
상제는 숨을 몰아쉬며, 고해하듯 말을 이었다.
그건 그날 이후 내내 상제를 괴롭혔던 것이었다.
괴로웠던 것은 직접 운명의 베틀을 휘저어버린 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못지않게, 아니 휘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고통받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떠밀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손끝에서 시위가 미끄러지던 감촉을 잊을 수가 없었다.
수천, 수만 번 잡았던 시위가 그런 식으로 손끝을 스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묘한 감촉이 지금도 손끝에서 만져지는 것 같아 상제는 주름지고 뻣뻣한 손가락을 맞대 문질렀다.
참, 끔찍했다.
그러나 그보다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귀를 울리던 소음은 근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계속 귀를 울렸다.
“아아. 좌를 벗어나 다행인 것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마고시여.”
상제는 진심으로 기쁜 목소리를 냈다.
“더 이상 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때, 후련한 듯, 담담하게 말을 잇는 상제를 지켜보던 마고의 고개가 흔들렸다.
오색 머리타래가 도리질 치는 머리를 따라 출렁이며 허공을 수놨다.
“무슨…… 의미십니까.”
잔뜩 쉬고, 쇠한 목소리가 어린 소녀에게 공손히 여쭈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자네는 모르는군.”
소녀는 손가락을 쭉 뻗어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시큰거리는 휘를 가리켰다.
“흉이 남았을 것이야. 운명을 더럽힌 업이 남아. 지워지지 않는 흉이.”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상제는 자신을 수십 년간 괴롭히던 소음이 휘의 핏방울이 제 운명의 베를 적시는 소리라는 것에 허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휘이니,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뿐인가. 감히 운명을 헤집으려 한 죄는 자네에게도 내려진 것.”
마고의 목소리는 더없이 근엄했다.
“그렇군요. 휘의 잘못을 덮으려, 상천의 이름에 오욕을 남길 수 없다 생각한 이기심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상제는 필사적으로 노력한 지난날이 마치 남의 것인 양, 너무 순순히 죄를 인정했다.
“이제 일각도 채 안 남았습니다.”
주름진 손이 훈장이라도 되는 양 들어 보이며 상제는 웃었다.
“아아, 저런 이해를 못 하셨어.”
마고는 그런 상제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네, 그리고 휘는 이번에 좌를 물려도 천신이 될 수 없어.”
“네?”
여태 느긋하고, 달관한 것 같이 굴던 상제의 목소리가 단번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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