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102화 (102/114)

102. 이어지는 시간 (9)

2018.07.23.

표정을 굳힌 것은 마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스스로가 한 말이었으나, 자신도 납득키 어려운 듯 미간에 실금을 긋고 귀여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천신.

치세에 한 번 뵙기도 어려운 분.

아마 하계의 태자가 성장을 시작했다니 미리 인사를 하시는 것이라 다들 놀란 마음을 다독이며 그렇게 짐작했다.

그리고 기묘한 침묵을 가르고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귀문의 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곱게 사배를 올리도록 마고는 아무 말 없었다.

“저의 좌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사오나, 천신 마고의 이름에 누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나이다.”

“충분히, 충분했다.”

그즈음 마고는 수시로 미간에 실금을 그으며 시선을 아득한 곳을 향해서는,

목소리에 담긴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상하구나.”

“네?”

“아니다, 그럼 모두 수고하시게. 난 급히 가보아야겠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마고가 문득 생각난 듯 뒤돌아 귀왕을 불렀다.

“귀왕 염혁.”

“네 마고시여.”

그녀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난 귀왕은 참 늠름했다.

달을 관장하는 하계라 극음의 기를 받아 태어나는바, 귀왕들은 대대로 그 선이 곱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번 대의 귀왕은 드물게 남자답게 생겨, 상제와 견주자면 오히려 그가 더 상제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짙고 시원하게 뻗은 눈썹, 의지를 담은 홍안.

곧고 날카로운 콧날과 매끈한 턱선까지.

귀왕을 물끄러미 보던 마고에게서 천신의 기운을 담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부지고 씩씩하신고로, 별과 함께 하계를 모자람 없이 잘 이끄셨지.”

“……그리 말씀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그대의 치세 후에 잠시 고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환이 더없이 잘 다스릴 것이네.”

은빛으로 물든 마고의 눈동자가 귀왕을 바라보며 ‘미래’를 읊어주었다.

“휘호를 내려줌세. 귀왕의 자리에서 불꽃 염자를 내려받고 아름답게 빛나라 휘자를 내가 내려주지.”

“황공하옵니다.”

“먼 길 조심히 가시게.”

마고는 그 말을 끝으로 간단 말도 없이 촛불 꺼지듯 훅 사라졌다.

마치 조금 전까지 꿈을 꾼 듯 현실감이 없었으나, 마고가 함께 있었던 것을 반쯤 빈 찻잔이 증명했다.

“가셨습니다.”

어딘지 넋 나간 듯한 염혁을 별이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식어버린 찻잔에 찻물을 따르고, 어딘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했지만 진지 안의 공기는 이미 깨진 유리잔 같이 어긋나 삐걱거렸다.

그건 마고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 때문이었다.

지존의 자리를 벗어나면 마고 휘하의 어린 천신의 자리를 받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천 년의 생의 끝을 선고받는다는 건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천 년에 가까운 삶이었다.

태자로 태어나 선대의 치세를 하루 같이 보고 배우며 몸에 익히는 첫 이천 년 동안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하나의 천을 감당해야 하는 건 이같이 막중한 일이었다.

이천 년의 배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좌가 내려졌다.

귀문의 별도, 귀왕도 그 긴긴 세월을 살뜰히 살피던 곳과 이별하고 새 직분을 받는 것이 설레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늘 어리기만 한 태자를 두고 가야 하는 것도, 한몫할 테였다.

이 며칠 상관에 태자는 아이에서 소년이 되었다.

아마도 곧 청년이 될 것이지만 젊은 왕이 될 환이 그들의 눈에는 평생 어리게 느껴질 것이다.

“환…… 환이는 어디에 있지요?”

염혁은 문득 생각난 듯 그의 태자를 찾았다.

“태자는 막사에서 풍천과 아수라와 있습니다. 그새 보고 싶으십니까?”

웃음을 머금은 별의 말에 염혁은 종전과는 달리 담백하게 대꾸했다.

“네. 보고 싶습니다. 이천 년을 보아도 보고 싶으니 이거 큰일입니다. 좌를 물려주고 천신이 되어도 보고 싶어 몰래 하계로 찾아가지나 않을지.”

“주책이십니다.”

그러던 때였다.

“귀왕.”

오붓한 내외의 한담에 상제가 끼어들었다.

그 역시 마고의 말에 심란했다.

친동기는 아니었으나 마고께서 이어주신 연이었다.

어린 시절 형님이라 부르며 따른 것이 바로 지금의 귀왕 염혁인고로, 상제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 같은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그, 저…….”

뭐라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울컥 치미는 애틋함과, 이해할 수 없는 미안함에 상제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던 휘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펴 가세요. 다음번엔 천신 길 배웅하러 뵈올 것이니 웃는 낯으로 찾아갈 것입니다.”

“휘께서도 강녕하시고요. 이번 청천의 전이 마무리되면 한번 뵈어요.”

“상제, 돌아갈 채비를 하셔야지요.”

쌀쌀맞고 어딘지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휘의 말에도 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그러려니 생각했던 것이었다.

마음이 여리고, 그 성격이 몹시 예민한 이라 조그만 일에도 쉽게 속상해했다.

퍽 다행이었다.

달빛이 고즈넉한 하계의 별이 되었다면 괴로워 하셨을 것이 한둘이 아니라, 별은 휘를 뵈올 적마다 그녀가 휘라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니, 이럴 땐 그래도 형님인 제가 모르는 척 다정히 굴면, 또 마음 풀고 찾아올 것이었다.

귀여운 이.

별은 잔뜩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휘를 보며 옅은 미소를 빼물었다.

곱게 맞절하고 몸을 돌려 나가며 별은 염혁의 단단한 팔뚝에 살그머니 팔짱을 뀄다.

“음?”

“이제 곧 좌를 물려준다 하셨잖습니까?”

“아하,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죽는단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먼저 용기 내 팔짱을 꿰었으면 모르는 체 하면 좋으련만, 오늘도 염혁은 별에게 짓궂었다.

“어윽!”

“그러니 매를 버시는 거고요.”

“별께서 이렇게 무서운 분인 것을 마고께선 모르셨나 봅니다.”

호되게 옆구리를 뜯긴 염혁이 끙끙거리며 웃는 표정으로 곱게 눈을 흘기는 별의 머리를 손으로 감아 당겼다.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한껏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환이와 헤어져야 하는 것도 슬프지마는 이 고운 분 없이 지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 가누기가 힘듭니다.”

“세상에, 허리에 두른 손이나 떼시고요. 이 엉큼한 양반.”

“이천 년이나 봐도 질리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환이가요?”

부러 말 돌리는 것이 뻔했고, 부러 짓궂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지척에 다가왔다는 끝에 서운한 마음을 다독이며 귀왕 내외는 다정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아수라와 풍천이 환에게 칼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며 뒹굴고 있을 것이니,

어서 가서 구해주어야 했다.

영력이 남다르다고는 하지만, 태자는 아직 소년.

아수라와 풍천만큼 노련하지 못해, 자칫 염라의 불들을 상처 입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혁이시여-! 달 마마-!”

벌써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문득 둘의 걸음이 빨라졌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야! 길이 이따위니 찾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한껏 다정한 귀왕 내외와는 달리 상제 내외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아슬아슬했다.

휘는 별과 멀어지자마자 온갖 짜증을 다 부렸다.

이번에 경계의 틈이 열린 것은 직인의 처소와 맞닿은 곳.

자연히 진지는 직인의 처소를 두고 양쪽으로 늘어져 그 막사를 자리했는데 휘가 잔뜩 흥분해 마구 걷다 보니 직인의 처소 안에서 길을 잃은 것이었다.

“크지도 않은 곳이, 쓸데없이.”

차마 듣기 민망한 타박을 쉴새 없이 하며, 마구잡이로 걷던 휘 앞에 또다시 작은 문이 보였다.

“뭐야! 또!”

뒤따라오던 상제가 뛰다시피 하는 휘를 놓친 것인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휘는 잔뜩 약이 올라서인지 급한 걸음 때문인지 시큰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어젖혔다.

거칠게 열어젖혔건만, 소리도 없이 열린 문은 끝도 없는 공간을 담고 있었다.

“……여긴?”

웅장한 빛을 뿌리며 쉴새 없이 철커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은, 운명의 베틀.

휘는 조금 전까지 사납게 투덜거리던 것도 잊고, 눈앞의 장엄한 모습에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철크덕.

철크덕.

아무도 없건만 북이 움직이고, 저절로 씨실과 날실이 엮이며 베를 짜나가는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짜여져 나오는 베의 모습이었다.

“운명의 베틀?”

누가 보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빼곡하게 베에 담아 한 필로 완성하는 저 거대한 베틀을 모를 수가 없었다.

넋 놓고 신기한 모습을 바라보던 휘가 문득 베틀 뒤로 유난히 빛을 뿌리는 여덟 필의 베를 본 것은 당연했다.

금사와 청사로 수를 놓은 것과 은사와 홍사로 엮어낸 베는 다른 것과 달리 유독 빛을 뿌려 눈길이 절로 갔다.

“아아?”

휘는 베를 보며 한참 웃었다.

“어쩜 실도 이렇게 정직하게 들어간담? 별이 아니랄까봐 은사에 홍사라니. 촌스럽게.”

제 운명의 베를 천천히 쓸던 휘가 별의 베를 보며 심술 맞게 중얼거렸다.

오늘 마고께 예쁨 받는 별을 보고만 있자니 샘이 나서 가슴속이 시커멓게 물들어 버린 참이었다.

“이까짓 걸 뭐가 예쁘다고 매번 그렇게 별이라고 떠받들어주시는지.”

모질게 내뱉는 말이었으나, 사실 별은 휘가 가장 좋아하는 분이었다.

매사에 담담하고 다정하고, 그러나 지조가 있어 웬만한 일에 흔들림도 없어 늘 존경하고 우러르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휘의 열등감도 깊어졌다.

상태자를 두고 태양을 품어냈다며 온갖 금칠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별의 품에 안겨있던 하태자를 보는 순간.

명이만큼 아름다운 아이가 있을 것이냐 하던 도도한 자존심이 대번에 깨졌다.

그녀의 아들이 여린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면, 하태자는 그야말로 미장부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첫눈에 알아봤다.

아아, 나는 어떤 걸로도 별을 이길 수 없겠구나.

“어쩌면 이렇게 곱고 유순합니까? 휘의 고운 성정을 한껏 내림해 태자께서도 무척이나 상냥하십니다.”

별의 말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날카롭고, 아름답게 쭉 빠진 아들을 품에 데리고 하는 말이 조롱이 아니면 무엇이야.

별의 베를 보고 있자니 온갖 것들이 떠올라 휘의 마음을 더욱더 휘저어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실타래를 보며, 입술을 잘근거리던 순간.

휘는 해서는 안 되는 못된 생각을 해버렸다.

어차피 얼마 안 남은 명.

그 잠깐이라도 내가 잘나 보여서 안 될 건 뭐야.

휘는 제 베를 쓰다듬던 손을 들어 베틀에 걸린 별의 실을 마구 헝클었다.

마치 그것이 별의 머리채라도 되는 듯 잡아 뜯고, 양손으로 마음껏 휘저어버렸다.

질투와 못난 마음이 눈을 가려 서슴없이 굴었던 것이다.

쌕쌕거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베틀에 걸린 실을 죄 뜯다 손가락에 엉킨 실이 보드라운 살에 파고들어 기어이 피를 냈다.

화끈한 아픔과 함께 휘를 부르는 벼락같은 목소리가 공기를 무섭게 울렸다.

“휘--!”

상제였다.

“정말 미친 게요!”

대노하여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군 상제가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을 한 채 단숨에 휘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을 때.

그의 손에 두 손목이 모두 잡혔을 때.

그제야 휘는 엉망이 된 운명의 베틀이 눈에 보였다.

분명, 조금만 헝클어뜨리려고 했는데.

“이…… 이게…….”

휘가 가닥가닥 끊어진 실을 쥐고는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때만큼만은 휘도 상제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어, 어떻게 합니까?”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로,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상제에게 구원을 바라며 휘가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걸 왜 내게 물으시오?”

“네?”

“항시 그대 마음대로 다 하고 사시지 않으셨소?”

“상제!”

“이제 와 겁이 나니 찾으십니까? 해결해달라 감히 명령하는 것이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게 제정신이십니까?”

“그러는!”

말을 잇던 상제는 잔뜩 벌게져 번들거리는 눈을 힘들게 감았다.

격해진 심정을 다독이는 듯 그의 옷섶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가슴이 몇 번이고 크게 부풀었다.

“……그러는 그대는 제정신이라 이래 놓으신 겁니까? 이 와중에!”

“…….”

“이 와중에도 짐에게 감히 언성을 높이며 힐난하는 것이냐 묻는 겁니다!”

상제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크흣.”

그의 두 손에 쥐어진 휘의 팔은 피가 돌지 않아 검푸르게 변한 지 오래였지만 휘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표독스럽게 상제를 노려보았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못한다고 하세요. 지금이라도 마고께 아뢰고 죄를 청할 것이니!”

한 번도 굽혀주지 않는 휘였다.

상제는 벼랑 끝 궁지에 몰려서도 한없이 거만한 휘의 목청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흐흐흣. 정말 대단하단 말이지.”

“무어라고요!”

“그대 말이오. 이렇게까지 구는데도, 미워지지가 않으니 이 진절머리나는 마음이 정말 징그럽단 말이오! 징그럽고 징그러워!”

상제는 마지막에 가서는 속삭이듯 휘에게 낮게 읊조리고는 휘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쳐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조금 전의 절절했던 말과는 달리, 무척이나 무미건조했다.

바짝 마른 눈에 남은 것은 경멸뿐, 그 어디에도 온기는 없었다.

상제는 허리를 살짝 숙여 휘에게 스산한 음성 그대로 속삭였다.

“가보시구려, 말마따나 마고께 죄를 청하게 두기엔 상천의 체면도 있으니. 수습이라도 해야 하잖겠소.”

상제는 당장에라도 휘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듯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을 해서는 퍽이나 예의 바르게 휘를 배웅했다.

“막사에 가 계시구려. 곧 뒤따를 것이니.”

모멸감과 숨기지 못할 공포를 드러내며 휘가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숨기고, 남겨진 건 상제 하나뿐.

“금수만도 못한 것.”

감히 상천의 어미를 자처하는 자가 운명의 베틀을 헤집어?

온순하기 짝이 없는 상제였으나 한번 화를 터트리자 그 역시 목줄 풀린 짐승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욕지거리를 한다 한들, 끊어진 운명의 실이 절로 이어 붙을 리 없으니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듭을 지어 묶어보려고도 했고, 가닥가닥 짜여진 베에 덧대어도 봤으나 이 매끄럽고 무정한 것은 단 한 가닥도 이어지질 않았다.

그러길 이 각 째.

상제는 슬슬 불안해졌다.

끊어진 것만 셋.

하계의 지존 내외와 상천의 휘를 타고 날 여아의 것.

이대로라면 휘가 하계의 두 지존을 살해한 전대미문의 파렴치한이 될 것이라 절로 입안이 말랐다.

“제기랄.”

고귀한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자연스럽게 욕이 터졌다.

상제관이 벗겨질 만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본들 뾰족한 방법이 생각날 리가 없었다.

어째서 직인은 자리를 비운 것인가.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애먼 이에게로 튀었다.

제 직분을 다하지 않고 자리를 비워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닌가.

흡사 광기에 물든 것 같은 상제의 눈이 휘의 핏물에 얼룩이 진 나머지 운명의 베를 보며 솟구치는 분노를 영력으로 갈무리했다.

어째서인지, 이상하게 이 분노가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서 저 끊어진 실을 이어야만 했다.

묶어지지도 끼워지지도 않으면……

영력으로 이어놔주지. 새롭게 엮어주면 될 것 아닌고.

상제는 두 손 가득 힘을 눌러 담기 시작했다.

태자시절 황후사를 뽑아내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 그의 손에서 실을 뽑아 끊어진 것들을 차례로 덧이었다.

영력은 그의 의지를 따르는 것.

살아있는 덩굴처럼 잘려진 ‘귀왕’의 운명의 실을 붙잡아 잇고, ‘별’의 것을 이어 엮었다.

“허억…….”

그의 영력도 몇 번이고 놓치고 나서야 간신히 귀왕과 별의 운명의 실을 붙들어 이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아직 실타래가 두둑한 휘를 타고날 여아의 것은 도저히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고 해서 후대의 휘 자리를 빈 채로 둘 수도 없는 법.

상제는 턱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잘려진 다음 대의 휘의 실을 집어 들었다.

이을 수 없다면.

그의 눈이 일순 교활한 빛을 발했다.

상제는 허공을 혼자 나는 북을 잡아 실을 덧댔다.

합사된 실은 다음 대의 별의 베로 짜여 들어갔다.

“크흐흣.”

들썩이는 상제의 어깨와 함께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괴한 소리가 한차례 터졌다.

상제는 합사된 실이 베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 그 길이가 한 자쯤 되었을 때, 두 손 가득 영력을 돋웠다.

황금으로 물든 두 손, 그것이 그가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영력이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그대로 다음 대 별의 운명의 베를 둘로 갈라냈다.

한쪽은 하태자인 환에게, 다른 한쪽은 상태자인 명에게 대충 당겨주고는 그대로 손을 털고는 몸을 돌렸다.

이미 삼 각.

자신의 부재를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영력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전신이 텅 비어 다급한 발끝이 자꾸만 엉켰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이 들이치는 한낮.

숨을 쉴 때마다 빠르게 영력이 차오르니 일각도 채 안 되어 다시 그의 영력은 모두 돌아올 것이었다.

이미 그사이에 사지 끝으로 착실히 영력이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어서 그의 막사로 돌아가, 태연히 활을 들어 쏘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급한 그의 발걸음을 막아서며 이 엄숙한 공간에 발을 들이는 이가 있었다.

“어머나, 상제 아니시옵니까?”

비틀거리며 자리를 뜨는 상제의 앞에 나타난 것은 직인이었다.

배를 빵빵히 불린 소청조를 어깨 위에 얹고는 생긋 웃으며 저를 반기는 직인의 모습에 상제는 잊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길을 잘못 드신 것이옵니까? 청조를 먹이러 나가는 바람에……!”

콰앙--!

불벼락을 맞은 듯 환한 빛이 터지며, 직인이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직인은 죽은 듯 하얗게 질려 베틀 앞에 쓰러졌다.

“오늘의 이 일은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너의 죄가 가장 크다. 어째서 직인이 자리를 비운단 말이냐. 새 따위를 먹이러 나가? 이 돼먹지 못한 것의 입에 오르내리느니 불쾌하구나.”

넌 앞으로 생이 끝날 때까지, 상천의 지존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며. 상제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새기리라.

감히, 내게 반하는 말은 올리지도 못할 것이니.

네 입을 막고, 반할 시 그 영혼에 죄인의 낙인을 찍을 것이다.

상제는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직인을 향해 무시무시한 금제를 내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철커덕

철커덕

베틀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 한 그곳에서, 상제의 베에 튄 얼룩이 점점 더 진하고,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쾅-.

그리고 직인의 방을 벗어난 상제가 힘껏 문을 닫은 것과 동시에 그가 억지로 이어놓았던 모든 운명이 실들이 그대로 끊어져 흩날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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