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99화 (99/114)

99. 이어지는 시간 (6)

2018.07.13.

짜랑-

불어드는 실바람을 타고 오색의 머리타래가 흩날렸다.

“조금 더 이러고 있고 싶긴 하다만 그랬다간 늦을 것 같구나.”

장난도 좋지만 아무리 나라도 운명은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거든.

마고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콩콩 뛰었다.

한참 신난 표정에 어린 것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악의 없는 짓궂음이었다.

염휘가 돌변한 마고의 태도에 뭐라 묻기도 전, 그녀의 아쉬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아무래도 네 녀석이 우는 꼴은 영 못 볼 것 같구나.”

“무슨……!”

“역시 웃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단 말이지.”

요 녀석, 누가 빚었는지 잘생기기도 하였지.

가늠하듯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선 요리조리 둘러보는 것까지.

죄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느새 얼굴이 푹 젖은 풍천까지 의아한 표정으로 마고를 올려다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칼날 같은 영력을 뿌리던 염휘의 두 손이 다시 희게 돌아온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눈이 쓰러진 아수라와 소희를 담았다.

“귀여운 아이들이야.”

가늠하듯 마고의 귀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흐응, 곱구나. 고와. 정신 못 차릴 만하구나.”

콧소리를 내며 아수라와 소희를 뜯어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놀러 나온 어린 계집아이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소를 지운 마고에게서 새어 나오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장엄했다.

“아수라. 일어나거라.”

풍덩한 소맷자락이 펄럭이도록 힘을 일으켜 손을 휘두르는 품새는 몹시 가뿐했으나, 마고의 손짓에 담긴 힘은 그렇지 않았다.

가벼운 손짓에 처참한 몰골로 누워있던 아수라가 소리도 없이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피로 흥건히 적셔진 도포는 이미 그 색을 잃고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힘없이 떨궈진 아수라의 머리 아래 가슴에 난 흉물스러운 구멍은 주먹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랬다.

“……큭.”

갑주마저 깨끗하게 터트려버리는 상제의 영력에 보드라운 육신이 어떻게 짓이겨졌는지, 그 모습이 너무도 잔인하게도 드러났다.

풍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염라의 불인 그가 전장을 누비며 본 것은 훨씬 더 잔혹한 것들이었으나, 이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가 베어내고, 검을 휘두른 것은 요괴.

생이 없는 것들이며, 귀한 영을 해치는 것들이었다.

무가치하고, 재고될 여지조차 없는 것들.

생이 없어 베는 즉시 곧장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들이었지, 따뜻한 살 밑에 피가 흐르며, 생을 가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눈앞에서 짓이겨진 것은 바로 아수라.

그의 아랫단의 장수이자, 그의 절친이며 더없이 소중한 이였다.

마음이 미어진다는 말을 그의 생전에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아…….”

잔뜩 떨리는 신음이 탄식이 되어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아수라.

소리가 되지 못한 부름이 간절하게 그의 가슴속에서 울렸다.

사박-

비단신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마고가 아수라에게 다가가 파리하게 식은 뺨을 다정히 매만져 주었다.

짙은 속눈썹을 늘어뜨린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가만히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보기까지 하는 모습에 모두가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그러나 마고의 입에서 천신의 음성이 울리자 그마저도 사라져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수라, 염라의 세 번째 불.”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다홍으로 물든 예쁜 입술 사이에서 선언하듯 떨어졌다.

“아직 네 운명의 실타래는 두둑이 남아있느니라, 이제 그만 눈뜨려무나.”

늦잠꾸러기라 엉덩이를 두드려야 할 것이냐.

천진하면서도 묵직한 말에 거짓말처럼 아수라의 눈이 뜨였다.

분홍빛 눈동자에 마고를 가득 담은 아수라가 슬핏 미소를 지었다.

“마고시여.”

꺼질 듯이 잦아드는 목소리는 속삭임보다 더 희미했다.

“오냐. 이 귀여운 것. 꽤나 깜찍한 일을 했더구나.”

그러나 마고는 아수라를 향해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주고는, 그를 허공에 띄운 채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을 따라 마치 아수라가 묶인 듯이 딸려 갔다.

마고가 멈춘 것은 소희의 옆.

마고는 소희의 머리꽂이에 남은 붉은 구슬 두 개를 마저 떼어 내 손에 쥐고는 비쳐 보았다.

“좋구나. 적당한 간절함, 온기를 담은 애정, 그리고 진실함까지. 제법 쓸만해.”

혼잣말인 듯했으나 그렇지만도 않았던 듯, 힘없이 눈을 깜빡이는 아수라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마음에 드느냐.”

그러나 아수라의 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마고가 그 말과 동시에 아수라의 구멍 난 가슴에 기꺼이 손을 담갔기 때문이었다.

피에 젖은 살점을 파고드는 소리에 풍천이 참지 못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흡.”

놀란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지만, 마고는 태연했고, 아수라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두어 번 눈을 끔뻑거릴 시간에 마음껏 아수라의 가슴을 헤집은 마고가 손바닥에 은근한 빛을 건져내 보여주었다.

“상제의 영력이 네게 남아 좋을 것 없을 테지. 특히 밤의 아수라에게 치명적일 것이라 꺼내는 게 나아.”

친절한 설명 끝에 마고는 가물거리는 아수라에게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붉은 구슬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마고가 쥐고 있던 두 개의 구슬은 이미 소희의 머리꽂이에 달렸던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훨씬 크고 영롱하며,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고는 가물거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아수라를 향해 한껏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하나는 네 몫, 그리고 하나는 너희들의 삼생의 몫이란다. 앞으로도 열심히 싸우거라. 이번 청천의 전은 볼만하겠구나.”

대답도 못 하고 늘어진 아수라를 향한 말끝에 생긋 웃으며, 들고 있던 구슬을 가슴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기대한다는 말 그대로 아수라의 가슴을 툭툭 쳤다.

모두 가볍기 그지없었으나 단지 그것으로 아수라의 구멍 난 가슴이 메꿔지고 죽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 아수라……?”

마고시여.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에게서 감정이 듬뿍 물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넘치도록 들어찬 경악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으나, 마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아수라의 가슴을 쓸어내려 주었다.

작고 흰 손을 따라 너덜거리는 옷감이 이어 붙고 그 아래 뚫린 갑주가 새순을 틔우듯 새롭게 이어 붙어나갔다.

그리고, 맨 아래 숨겨진 아수라의 맨가슴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피어오르며 구멍이 빠르게 메워지는 것까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슬쩍 쓸어내리는 것으로 이 놀라운 일이 마무리되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놀라운 권능을 눈앞에 목도한 이에게서 참았던 숨이 터지는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마고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발치의 풍천.

“좀, 자게 해두자꾸나. 이 아이 주어진 수명도 두둑하고 영력도 돌아왔으나 고단할 것이다.”

마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풍천에게도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살려, 살려주신 겁니까? 마고시여.”

풍천은 정신이 아득하고, 믿을 수 없어 마고께 달려들 듯 목청을 돋워 물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수라의 생환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고는 그런 풍천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를 나무라는 대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작게 웃었다.

“저런. 살려주다니. 저 아이의 생이 아직 남았을 뿐. 살려준 게 아니란다. 천수를 누릴 것이니 풍천 너도 너무 애 끓이지 말거라.”

저런, 그러고 보니 너도 엉망이로구나.

염휘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던 마고가 다시 한번 풍천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단지 그뿐이었으나, 풍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루가 나 부러졌던 다리가 멀쩡하게 이어 붙었던 것이다.

“이…… 이게…….”

“쉿.”

마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고는 염휘에게 걸음을 옮겼다.

아수라를 되돌리는 사이, 소희는 한층 더 바스러져 있었다.

영력을 봉인하다시피 억누른 염휘가 그사이 소희를 단에서 내려, 품에 보듬고 있었다.

소희의 늘어진 두 팔은 이미 투명해질 대로 투명해,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반쯤 남은 몸을 끌어안고 있는 듯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반투명해진 소희의 뺨에 얼굴을 맞댄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애통해 이 모습이 섬뜩하다기보다 처연할 따름이었다.

홍안 가득 눈물을 머금은 채 바스러지는 소희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은 눈부신 햇살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난 비극이었다.

마고 역시 잠시 숨을 참아야 할 만큼.

“염휘야.”

마고의 부름에도 염휘는 소희에게 얼굴을 맞대고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수라가 살아 돌아옴은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소희는 불가능했다.

천신마고께서는 운명을 거스르는 자가 아니니,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소희를 먼저 봐주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테니, 염휘는 미약한 불만도 모두 삼키는 중이었다.

귀왕은 이제 곧 빛가루가 될 제 반려를 안고 남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에 새기려고 노력 중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마저 아까워 염휘는 마고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 순간 놓쳐버릴 소희의 숨소리가 아쉬울 것이었다.

“이리 주련?”

“…….”

마고는 그 말을 끝으로 애틋하게 보듬고 있는 사내에게서 소희를 힘들이지 않고 빼냈다.

“오늘은 울리지 않겠다 했거늘.”

감히 마고의 말을 믿지 못하고 함부로 홍안을 적셔놓다니.

너야말로 엉덩이를 맞아야 하겠구나.

“고얀 녀석. 이런 꼴을 보자고 내가 이리 나선 줄 아느냐.”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던 마고는 놀라 커진 염휘의 홍안을 즐겁게 지켜보던 것도 잠시, 빼앗아 온 소희를 다시 부서진 단 위에 뉘이고는 그를 불러 세웠다.

“염휘야, 환아. 이리 오너라.”

그리고 마고는 여기에 또 다른 이를 하나 더 청했다.

“명아, 네 녀석도 와야겠구나.”

단지 한마디면 충분했다.

혼잣말인 듯 작게 울린 목소리에 대전에 남겨졌던 태자가 소리도 없이 소환되어 나타났다.

“이, 이 무슨……!”

그가 놀란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

“이리 오래두.”

마고는 손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쉽게 들어 염휘와 함께 그녀의 지척에 세워놓았다.

“이것이 대체……!”

“쉿.”

지켜보면 알 테지.

두 녀석 다 상제처럼 묶어두기 전에 조용히 하고 있거라.

경고하듯 이어지는 마고의 말에 염휘도 태자도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마고의 뒤에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마고는 아수라 때처럼 손을 소희에게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소희를 희게 빛나는 손으로 슬슬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마고의 손이 한번 스칠 때마다, 소희는 조금씩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슥슥-.

마치 옷에 붙은 구김을 정리하듯, 정성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먼지를 터는 것같이 성의 없어 보이기도 했다.

대여섯 번의 손짓이었다.

“……!”

소희의 투명하던 사지가 불투명해지고, 영이 바스러지며 내던 소음이 멈췄다.

“역시, 이편이 훨씬 보기도 좋구나.”

마고는 흥이 오른 목소리로 소희를 두어 번 더 만져주었다.

이내 온전한 것이 되어 차게 식은 두 뺨에 홍조가 머물 때까지, 마고는 손끝 가득 천신의 기운을 담아 소희의 부서진 영을 매만져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손끝에서부터 시작해서 소희에게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마고 뒤에 서 있던 염휘에게서 다급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살아났다.

파득이는 그의 심박이 기쁨에 들떠 마구 날뛰는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울려 마고는 아주 잠깐이었으나 두 귀를 손으로 막기까지 했다.

“떠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타박하는 것 같았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웃음마저 완벽히는 지우지 못했다.

팔불출 같은 녀석.

그저 좋대는군.

마고는 들으라고 투덜거리며 소희를 매만지던 손을 거둬들였다.

흘끗 돌아본 마고의 시선에 ‘영체’가 되살아난 기적을 목도하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왕’과 아무것도 모르고 얼떨떨한 모습 그대로 서 있는 태자가 잡혔다.

꽤나 고초를 겪은 듯 까맣게 죽은 안색이 퍽 딱했지만, 딱하기로 치면 지금 생명의 전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애썼느니.”

누구에게인지 모를 말을 나직이 속삭이며, 마고는 다시 소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소희의 영은 되돌렸다지만, 아직 남은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마고는 이번에 허공을 움켜쥐고는 뭔가를 끌어내렸다.

“그건!”

“아……!”

허공에서 마고의 손에 잡혀 빛가루를 흩뿌리며 나타난 은빛의 찬란한 그것은,

“사신의 문!”

놀라 작게 부르짖는 염휘의 목소리에 뒤이어 태자 역시 신음을 흘렸다.

사신의 문마저 끌어내는 모습에 그들은 새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천신 마고.

그녀의 지고한 힘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더더군다나 그들 위해 친림하셔 자비를 베풀어주심이라.

두고두고 회자될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귀왕이라는 말이 헛것은 아니구나.”

염휘의 말에 마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주었다.

“아직, 일곱 번째 문이 남았지.”

그리고는 마고는 모두가 말릴 새도 없이 사신의 문을 그대로 소희에게 떨궜다.

영을 관장하는 하계의 지존인 염휘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신의 일곱 번째 관문은 마고의 손을 따라 소희에게 떨궈짐과 동시에 빛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희가 애써 견딜 필요도, 관문이 끝나도록 기다리지도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자, 이제야말로 정말 온전한 것이 되었구나.”

마고는 그 말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소희의 목덜미에서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하얀 목덜미에서 뭔가를 손에 걸고는 끌어내는 모습.

텅 빈 두 손을 맞잡고 뭔가를 찢어내는 듯 비트는 모습.

꽤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마고의 움직임을 따라 들려오는 뭔가 찢어지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는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고 있는 것을 들려주었다.

몇 번이고 잘게 찢어낸 끝에 마고는 뭔가를 움켜쥐었다.

“이것은 명이 것이고.”

그리고는 움켜쥔 것을 태자의 손에 던져주었다.

분명 빈손이었으나, 깜짝 놀라 내민 태자의 손에는 새파랗게 부서지는 빛가루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염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네 것이지?”

무심하게 던진 그것은 마고의 손을 떠나자 붉은 빛을 뿌리며 염휘의 손바닥에서 부서졌다.

“이건…….”

“알아보는구나.”

마고는 염휘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방금 마고가 소희의 목덜미에서 뜯어낸 것은 그녀가 상하천에서 받은 진이며 인 따위.

“집착인 게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쉽지 않았을 것이야. 그래서 집착이거든.”

“마고시여. 소희는, 소희는.”

상황이 정리되자, 눌러둔 조바심이 터진 듯 태자가 마고께 입을 달싹거렸다.

저는 물러난다 했었다.

이 단심을 꺾으련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쉽게 꺾일 리 없었다.

심지어 억지로 제 곁에 묶어두려다가 ‘죽음’을 선고받았던 그녀 아닌가.

죄인이라 생각해 차마 나서서 묻지도, 함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두고 마고께서 힘써주시는 모습에 정말로 마지막이다 다짐하고 입을 뗀 참이었다.

“괜찮은……으신 겁니까.”

다급함에 함부로 나가려던 말을 황급히 갈무리 하며 태자는 다시 말미를 고쳤다.

귀문의 별.

형님의 비가 되실 분이었다.

공대함이 옳았다.

안위를 살피려는 듯 다급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태자에게 마고는 웃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이도 간만이구나.”

“괜찮은 것입니까?”

태자는 마고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도 못 하고 다시 한번 소희를 챙겼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마고는 그런 태자에게 나무라는 대신에 그가 바라는 답을 가벼운 목소리로 내주었다.

“오냐. 질릴 때까지 괜찮다 말해주마. 그럼 되겠느냐.”

“그렇습니까.”

잘되었습니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마고의 말에 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온 소희를 반긴 것도 잠시.

희게 질린 얼굴로 미소를 짓던 태자의 두 무릎이 그대로 꿇렸다.

털썩 소리가 날 만큼 함부로 꿇린 두 무릎에 놀랄 틈도 없이 태자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조아려졌다.

“마고시여. 제, 제가…… 제가 탐을 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태자는 마고에게서 소희가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제 ‘죄’를 고하기 시작했다.

태자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생명의 전의 차가운 돌바닥을 울렸다.

“탐을 냈다고?”

“예, 마고시여. 그녀는…… 귀문의 별.”

목이 메는지, 기어이 마른침을 삼키고서야 태자에게서 ‘귀문의 별’이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이어가는 말이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를 것이 아니었기에 염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명아. 그만하거라.”

태자를 말리는 염휘의 목소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으나, 시선만은 안타깝게 일그러져있었다.

“아닙니다, 형님.”

태자는 머리를 조아린 그대로 몸을 틀어 염휘에게 사죄했다.

대전에서의 태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도망가지 않고, 소희가 괜찮아지면 죄를 청하겠다는.

이제 마고께서 소희를 구명하셨다 하셨으니, 남은 것은 은원의 정리.

태자는 이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것은 악연이었다.

모두의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인생을 헤집어 버리는 인연.

이것이 바로 악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셋 중, 물러나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자신.

접어지지 않는 마음이니 죽어서 끊어낼 것이었다.

설움이 차오르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으며 태자가 이를 악물고 마고께 고했다.

“제가 과욕을 부린고로, 이 사달이 났습니다. 이 죄인을 벌하십시오.”

죽어라 명하십시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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