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97화 (97/114)

97. 이어지는 시간 (4)

2018.07.06.

두 지존에 하나의 비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꼬락서니랍니까.

염휘의 저릿한 살기를 받으면서도 상제는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늘어진 눈매와, 입가에 매달린 희미한 웃음꼬리.

마치 아침 산책이라도 나온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신색이었다.

“하……?”

기가 찬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염휘의 두 눈은 이미 진득한 살기가 빼곡히 돋아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미 염라의 불들도 함부로 솟아난 영력 덕에 평상시와는 그 모습이 달라진 지 오래였다.

절로 오금이 저리는 상황이건만,

상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하나하나 시선을 맞댄 다음 흥얼거리듯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바로 잡으려 합니다. 역시 그편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상제는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휘둘렀다.

소맷자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시퍼런 살기가 물려있었다.

쐐애애액--.

“무슨……!”

이렇게 낌새도 없이 갑자기 살수를 던질 줄 몰랐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영력을 제대로 피워 올리면 조금이라도 해로울까봐.

죽기 살기로 날뛰는 살기를 잡아 누르고 있었건만.

오직 단 한 분뿐인 그녀를 위해 솟아오르는 자존심도 접어가며 상제의 도발을 못들은 척 고비를 넘겨보려 했건만.

염휘의 뼈를 깎는 인고의 보람도 없이 상제는 멋대로 힘을 휘둘러버렸다.

뻐억-

염휘가 몸을 일으켰을 땐,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온 후였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깨져나가는 기분 나쁜 소음이 폭음 사이로 울렸다.

흑빛 운무를 뿌리며 생명의 전 바깥으로 날아가 처박히는 풍천의 다리는 기괴한 모양으로 꺾여있었다.

하지만 풍천에게선 작은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제길-!”

염휘는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을 쏘아 보냈다.

상제의 시선이 그의 뒤로 닿아있었던 것을 보았던 것이다.

소희와 아수라가 있는 바로 그곳.

“안 돼!”

소희는!

염휘는 이를 갈며 쏘아진 활처럼 몸을 날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염휘의 손이 닿기도 전 스산하고도 파괴적인 소리가 그의 귀를 적셨다.

콰앙---!

상제의 영력에 빗맞은 단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염휘는 단위에 뉘여 놓은 소희가 무너지는 단에서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튀어나가는 파편에 맞은 것인지 소희 뺨에서 생채기가 길게 그였다.

희게 질린 뺨에서 상처를 타고 붉은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본 순간 염휘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잠시였으나 모든 것이 멈춰진 듯 느리게만 흘러갔다.

툭-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소희의 뺨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긁어내듯 받아내는 것도 잠시.

이내 투명해져 맑은 이슬로 화하는 것을 보고 있자 가슴 깊은 곳이 망가진 것처럼 아려와 잠시 숨이 멎었다.

끝 간 데 없기에 절망이었는가.

“하아…….”

아들이 망가뜨리고, 아비가 기어이 명줄을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옥으로 끌고 가주마.”

목 아래서 긁어내는 듯한 쉰 목소리가 남의 것인 양 스산하게 울렸다.

“직접 처넣어주겠다.”

온갖 상처를 싸안고도 한없이 상냥했던 귀왕의 분노를 결국 상제가 터트려 버린 것이었다.

염휘는 더없이 흉흉한 기세를 뿌리면서도 소희를 내려놓는 손길만큼은 깃털같이 보드라웠다.

조금이라도, 덜.

잠시라도 더.

부서지는 그녀의 영을 마고가 현신할 때까지 붙들고 싶은 단심이 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상제는 그런 염휘를 조롱하며 키들거렸다.

“크큿-. 눈뜨고 못 봐주겠군. 애잔하다 해야 하오? 애틋하다 감동해야 하오?”

그따위 것에게 절절매다니.

꼬락서니가 볼만하오.

차마 듣기 민망할 소리를 함부로 중얼거리던 상제가 소희의 머리가 돌바닥에 채 닿기도 전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염휘시여--!”

푸콱-----

다급한 아수라의 목소리와 두 번째 소음이 울렸다.

익숙한 소음이었다.

살점을 짓이기고, 핏줄을 끊어내는 소리.

“……!”

시뻘건 것이 사방으로 터져 나오듯 흩뿌려지며 염휘의 뺨에도 세차게 뿌려졌다.

뺨에 튄 붉은 것이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염휘는 홉 뜨인 눈을 해서는 뻣뻣하게 굳은 손이 뺨을 긁어내 가지고 온 것을 바라보았다.

피.

소희의 맑은 이슬에 스미는 것은 붉은 피였다.

사정을 두지 않고 퍼부은 공격을 받아낸 것은 아수라였고.

두 다리로 딛고 서서 버티는 아수라의 등 뒤로 솟아 나온 흉물스러운 것은 상제의 검날이었다.

그의 검 끝에 깨져 매달려 있는 아수라의 생명의 환.

“이…….”

귀왕의 분노가 둘의 피로 물든 손가락 끝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의 앞을 버티고 서있는 아수라를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안음과 동시에 주제를 모르고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상제의 검 끝을 손끝으로 퉁겨냈다.

챙-

유리가 울리듯 차가운 파열음이 울리며 그대로 아수라의 가슴에서 빠져나간 상제의 검은 날아가는 그대로 공중에서 산산이 바스러졌다.

투두둑-.

아수라의 구멍 난 가슴에서 둑이 터지듯 피가 사정없이 흘러나왔다.

“쿠흑…….”

작게 헐떡이며 피를 게워내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아수라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에 흠뻑 젖은 검은 머리가 엉망이 되어, 무너지는 그를 따라 붉은 궤적을 그렸다.

힘을 잃은 아수라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 염휘가 단단히 붙들어 그대로 아수라를 받았다.

“아수라.”

염휘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수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희도, 그리고 아수라도.

모두 사그라지고 있었다.

“하아…… 하……하…….”

염휘는 상천의 사정을 살펴 모질게 굴지 못한 자신에게 분노했다.

천륜을 저버리고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상제를, 이제는, 그들의 악연을 끝맺음 낼 때가 된 것을 알았다.

“염휘……시여.”

“힘을 아껴두어라 아수라.”

염휘는 생명의 전 아래에 서서 천진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상제를 차게 식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쿨럭.

작은 기침 소리와 함께 아수라의 가슴에서도 핏물이 무섭게 솟구쳤다.

“염라의…… 어버이시며…… 염라이신…… 나의…… 주인…….”

염휘의 만류에도 아수라는 꺼져 드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가 산들바람보다 더 작고 작아 염휘는 아수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력이 돋아 선연했던 핏빛 눈동자는 생명이 꺼져들어 그 빛이 바래 매화꽃잎처럼 어슴푸레한 분홍빛을 간신히 물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새하얗게 질려버린 낯짝을 하고선.

아수라는 피범벅이 된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뫼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끝끝내 제 주인이 영력을 끌어올리게 만들만큼 잦아드는 목소리로 속삭여놓고는 웃는 모습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유순하고 차분한 기다란 눈매가 감겨들어 더 이상 뜨이지 않았다.

“아수라……?”

꽉 막혀든 염휘의 목소리가 잔뜩 쉰 듯 새어 나와 아수라를 불렀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염휘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흩날렸다.

늘어진 하얀 목이, 떨구어진 팔이.

흘러내리는 새빨간 핏물처럼 자꾸 아래로만 꺼져들었다. 힘을 잃고.

“아수라. 염라의 세 번째 불. 눈을 떠라.”

“…….”

“눈을 떠서 달 마마를 수호하여라.”

명령을 내리는 말과는 다르게 염휘의 목소리는 잔뜩 슬픔에 잠겨있었다.

애잔한 그의 목소리가 생명의 전을 울렸다.

“아수라. 네 책무를 후대에…… 미루지 말아라.”

별을 잃고,

아수라를 잃고.

이것은 마치 이십 년 전의 그날과 똑같았다.

물밀 듯이 들이치는 괴로운 기억.

다른 것이 있다면, 아직 살아있는 귀왕인 자신뿐.

격정적으로 감겨든 두 눈꺼풀이 사정없이 떨렸다.

빡빡하게 돋은 긴 속눈썹 끝에 물기가 어려 촉촉해진 것도 잠시.

다시 눈꺼풀이 들렸을 때, 보석처럼 일렁이는 홍안은 사라져있었다.

“상제, 널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다-!”

염휘의 피울음 같은 다짐이 삼천 너머의 땅까지 쩌렁하게 울렸다.

“이 상천을 짓이겨버리겠어!!”

그의 비통한 목소리에 넝마처럼 구겨진 채 늘어져 의식을 잃고 있던 풍천이 벌떡 일어났다.

주군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숨기지 못한 분노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상실감이었다.

“마고시여-!”

대지를 찢어발기는 염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풍천의 고막을 사납게 훑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풍천은 부러진 다리뼈를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둘러진 영기가 부러진 뼛조각을 대신해 그의 몸을 지탱했다.

힘을 줘 일어섰건만 풍천은 다시 한번 무릎이 꿇려 앉혀졌다.

“……!”

눈앞에 보이는 믿지 못할 참극에 그의 심력이 흐트러져 조각난 다리뼈를 붙잡아주던 그의 영력이 흩어져 버렸던 탓이었다.

돌 파편들 사이에 고요히 잠든 듯 누워있는 소희의 모습도,

으깨진 것 같은 아수라의 모습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계의 모든 것들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모두, 더없이 고귀한 존재였건만, 상천에 와 더없이 참혹한 모습이 되어 숨날이 꺼져들고 있었다.

“이…… 이것이!”

어서 가보아야 했는데 급한 것은 마음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믿기지 않은 광경을 확인해야 했다.

풍천은 튼튼한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자랑인 흑주가 대리석 계단을 긁어내리는 기괴한 소리가 마고의 생명의 전을 가득 채웠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말릴 수 없었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염휘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 개방된 영력에 사방에 금홍의 운무를 뿌리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고. 상제는 미치광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이 무슨…….”

염휘의 뒤에는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소희가 혼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하얀 얼굴에 상냥한 웃음이 어울리던 별은 그 빛을 잃고 태양빛에 사라지듯 투명하게 바래버려 풍천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을 뽑아냈다.

쿨럭.

비현실적인 현실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아수라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안 돼.

더 이상은 잃지 않기로 맹세했건만.

맹세를 지킬 기회조차 받지 못한 것인가.

풍천은 절박하게 기었다.

끼기긱-

그의 갑주가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소음을 내며 바닥을 긁어댔다.

“아수라.”

풍천은 아수라의 멱살을 잡고 호통을 칠 작정이었다.

염라의 세 번째 불.

어서 일어나 달 마마를 수호하라.

이러다 별을 잃을 것인데, 한가로이 누워 있는 게 말이 되는 것이냐!

이 한심한 작자!

시원하게 욕을 해줄 참이었다.

아니다. 일어나라 사정할 참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붉게 물든 두 눈이 생기를 잃고 사그라들어버렸음을 깨닫고. 풍천의 입에서 속삭임 대신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아수라아아아아-!”

청천의 전에서 한번 잃은 것으로 족했다.

“별이시여---!”

눈앞에서 잃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눈앞에서 이런 참극이 일어나는 것은 두고 보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생명의 전을 기어오르는 풍천의 맑은 눈물이 계단을 적셔나갔다.

생명의 전에서 흘러내린 아수라의 붉은 생명이 마지막 계단을 짚은 풍천의 손에 묻어났을 때,

풍천은 염휘와 마찬가지로 제게 허락된 모든 영력을 개방했다.

이것은 전시였다.

적은 눈앞의 상제.

아니. 이제는 괴물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야 터져 나온 영력이 그의 두 다리에 힘을 주었고, 부러진 뼛조각을 맞춰 이어 붙였다.

풍천은 웅크려 울던 모습 그대로 온몸을 하나하나 펴서 세웠다.

흑주는 이미 온통 긁히고 먼지가 묻어 평상시의 아름다움은 가려졌지만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먹구름 같은 풍천의 기세가 더할 나위 없이 장엄했다.

“풍천.”

염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들었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지극한 권능이 실린 목소리에, 풍천은 잠시 제 영력이 폭주하듯 치솟음을 느꼈다.

하계의 지배자가 극한으로 뿜어내는 기세는 권속들에게도 영향이 미치기 마련이었다.

영향을 받은 것은 풍천뿐만이 아니었다.

둑이 터진 듯 마구잡이로 솟아나던 아수라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잠시였지만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수라는 가망 없었다.

맞은 부위가 나빴다.

가슴 정중앙에 커다란 구멍 사이에 있어야 할 생명의 환은 보이지도 않았고, 지금은 아주 미약하게 남은 생명이 그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을 염휘의 기세가 늦췄을 뿐이었다.

억울하게 선고된 죽음 앞에 분노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진배없었다.

풍천은 마지막 무릎 조각이 들러붙으며 제자리를 잡은 것을 느꼈다.

“하명하시옵소서.”

스산한 풍천의 목소리에 염휘가 실쭉 웃었다.

“별을 죽이고, 염라의 불을 살해했구나. 마치 이십 년 전의 그날같이 말이다.”

“…….”

“나는 하계의 지배자이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염휘의 긴 손가락이 투명하게 부서지는 소희의 하얀 뺨을 덧그렸다.

애달프고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풍천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비를 잃고, 권속을 잃는 치욕은 한 번으로 족하단다.”

두 번은 실수가 아니지.

이것이 운명이라 하면, 모두 부숴버리겠다.

다정한 듯 섬뜩하게 중얼거린 염휘는 소희의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경건하고 진중해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짐은 오늘 이 상천을 지워버리기로 결정하였어. 그 죄를 받아 마고께 소멸된대도 기꺼이.”

바람마저 잦아든 그 순간, 염휘가 입술을 눌렀던 자리를 타고 금빛이 일렁였다.

“미련이, 차마 그대를 혼자는 못 보낼 것이라. 짐의 영력을 함께 묶었으니. 먼저 가시더라도 외롭다 마세요.”

염휘는 소희에게 다정히 속삭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짐도 곧 따를 것입니다.”

마냥 손을 놓는 것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니, 전력으로 따라갈 것입니다.

더없이 감내하여도,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질 것이라면.

그까짓 운명을 짐의 손으로 지우겠습니다.

진작 이렇게 해버릴 것을요.

그랬다면, 그대가 짧은 생이나마 행복하셨을지도 모르는데.

“으윽-!”

“얼마나 기다려드려야 할까요?”

휘의 비명과 함께 이죽거리는 소리가 이 순간마저 함부로 헤집고 끼어들었다.

염휘는 상제의 목소리에 그제야 소희에게서 시선을 뗐다.

“기다리게 하였습니까? 곧 지워질 풍광이니 천천히 보시지 않고요.”

여유로운 목소리로 상제에게 답을 한 염휘는 몸을 일으키기 전 아수라의 가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되살리기는 못 하여도, 붙잡아 볼 순 있겠지. 아수라. 내 너를 혼자 보내진 않을 것이다.”

염휘는 말을 마치며 구멍 난 아수라의 가슴에 손을 올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기세를 한껏 흘려보내 주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지도록.

그리고는 쓰러져있는 소희 옆에 아수라를 가만히 눕히고 일어섰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그의 시선 끝에 혼절해 늘어진 휘가 잡혔다.

미쳐 날뛰는 상제를 말리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진 휘는 이미 엉망이 되어 화원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아마 마지막 인사를 건넬 시간을 그녀가 벌어준 것일 테지만, 휘를 바라보는 염휘의 시선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염휘는 일어섬과 동시에 손끝의 영력을 칼날같이 피웠다.

그의 모든 행동은 신중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빨라 실상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정리가 된 것이기도 했다.

“풍천. 이곳을 지켜라.”

“저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말이 되지 못한 그의 바람을 염휘는 안다는 듯 금안을 부드럽게 휘어뜨리며 웃었다.

“너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느니라. 아수라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듣지 않아도 아는 것은 염휘뿐만이 아니어서 대답을 하는 풍천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저승 길동무를 말이다.”

내, 다른 건 모르겠으되 상제는 지옥으로 직접 처넣을 것이란다.

콰아아앙!

평온한 말과는 달리 상제에게 내뻗어진 염휘의 손끝에서 터져나간 영력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염휘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은 상제에게서 폭발음이 터지며 지축이 흔들렸다.

삽시간에 생명의 전의 일부가 가루가 되어 깨져나갔다.

사위가 돌가루와 먼지가 뒤섞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풍천은 위험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손끝에서 묵빛 도를 뽑아 올려 쓰러진 두 사람 앞에 결연한 태도로 굳건히 서 자리를 잡았다.

사방으로 그의 영력이 결계 치듯 두 사람을 감싼 것은 이미 염휘가 상제에게 공격을 시작할 때부터였으니, 자잘한 파편쯤이야 막아줄 것이었다.

풍천이 막아낼 것은 길을 잃고 날아들 두 지존의 전력을 다한 영력.

이 생명의 전 안에 남겨진 모든 생명은, 우습게도 모두 그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다.

‘생명의 전’ 안에서 말이다.

상하계의 두 지존이 뿜어내는 영력이라는 건 지고하고도, 극의에 달한 것.

제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독이었다.

두 지존의 영력이 살의를 가지고 마구잡이로 뒤섞이자 생명의 전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아다니는 듯 공기가 무섭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실로 거칠고 매섭기 그지없어 마치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 것 같았다.

풍천은 제 뒤에 놓인 두 사람을 생각하며 방어진을 단단히 펼쳤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묵빛 결계가 쉬지 않고 날카로운 소릴 내질렀다.

마치 유리가 터져나가듯 높고 긴 파열음이 귓가를 살벌하게 울렸다.

챙-

째앵-

두 지존의 영력 부스러기가 날아와 박히는 소리였다.

이미 결계의 수많은 곳이 패이고 흔들려 금이 가 풍천은 수시로 결계를 덧그려야 했다.

아직 1각도 안 되었건만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한계치를 넘어선 영력으로 펼친 결계는 지존들의 무위 앞에 바람 앞의 촛불보다 미약했다.

“허억-!”

드디어 불안정한 숨이 터졌다.

결계 밖은 이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금빛 운무에 뒤덮여 있었다.

채앵-

드디어 결계가 찢어지며 커다란 구멍이 났다.

“허억-.”

풍천의 턱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울컥, 가슴을 타고 오르는 비릿한 것을 삼키며 풍천이 다급하게 찢어진 부분을 메꿨다.

열을 품고 지글거리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상제의 영력임이 분명했다.

결계에 튀어 들어온 상제의 영력의 조각이 아직 사그라들지 않아 뒤통수가 후끈했다.

풍천은 들썩이는 가슴을 억누르지도 못할 만큼 엉망이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채 일각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별을 죽이고, 염라의 불을 살해했구나.”

차갑게 울리던 주인의 목소리가 순간 머릿속에 울렸다.

미약한 숨소리가 커다란 파열음 사이로 선명하게 들렸다.

“아직입니다. 아직입니다.”

풍천은 어금니를 사리물며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렸다.

별도, 아수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

염휘께서 어째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있지만,

모두 아직 살아 있었다.

염휘께서 억지로 발을 묶어주셨다고 해도.

허락된 시간이 단 일각에 그칠지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지켜야 했다.

마지막 숨날이 붙어 있을 때까진.

그의 맹세와 같이 목숨을 갈아서라도 지켜낼 것이었다.

오늘 자신은 아무도 잃지 않을 것이니, 지킬 것이었다.

“흐아아아앗-!”

영력이 빠르게 고갈되자 다리뼈에 균열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치유된 것이 아니라 영력으로 억지로 맞춰진 것이라 영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다리는 다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풍천은 기합을 넣듯 소리를 지르며 두 다리를 생명의 전에 깊게 박아 넣었다.

적어도 영력이 흐트러져 다리가 쓸모없어지더라도 몸을 지탱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모든 영력까지 자신은 이 결계를 지키기 위해, 그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쓸 것이니.

빠각-.

드디어 무릎뼈부터 다시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고 풍천은 영력을 다스렸다.

결계 밖의 사나운 바람 소리가 금세라도 그의 결계를 찢어발기고 등 뒤의 두 사람을 헤집을 것 같아 풍천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절망적이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결계를 보는 풍천의 눈에서 고이지 못한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땀과 같이 흘러내렸다.

마고시여----!

제발 하계를 버리지 마옵소서!

가여운 왕의 절규를 외면하지 마옵소서!

마고시여----!

‘스팟---’

절규와 같은 풍천의 읊조림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무언가를 잘라낸 듯한 작은 소음과 함께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졌다.

깨끗하게.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