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이어지는 시간 (3)
2018.07.02.
필사적으로 소희의 손을 잡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왜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걸까.
그저 미련이 남아서라고 생각했건만. 어째서 저 은발이 해를 받아서 비어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차디찬 돌바닥이 다 비쳐 보이는 것을.
“하아…….”
염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세요.”
속삭이듯, 간청하는 목소리가 대전을 조용히 울렸다.
“그대, 이리…… 와요.”
끝까지 부르지 않았던 소희를 드디어 염휘가 ‘그대’라고 지칭해 불러버렸다.
아무것도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게 품은 마음이었건만, 피우기도 전에 지려 했다.
염휘는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력을 잃고 바스러지는 소희만이 두 눈에 담겼다.
터져버릴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 염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였다.
단 하루.
그 사이 소희는 태자에게 붙들려 상천으로 왔고 혼자 관문을 건넜고, 그리고 영이 깨져버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을 겪어버렸다.
자신이 없는 그 짧은 사이 소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영이 깨지다니…….”
절망으로 짙게 물든 나직한 한마디에 순식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영력이 느껴졌다.
염라의 불인 풍천과 아수라가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힘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염휘도 그들을 다독이지 못했다.
함께 돌아가리라, 이제야말로 모든 것이 끝이다 했다.
그러나 그의 다짐은 한낱 먼지만도 못하게 흩어졌다.
“어째서.”
염휘는 매 순간 생기를 잃어가는 소희를 보며 멍하게 되뇌었다.
“짐은 전력으로 움켜쥐었다 믿었건만, 어째서 번번이 이렇게 허망히 놓치고 마는 것입니까.”
닿지 않을 혼잣말이 서글프게 그의 입안에서 사라졌다.
모든 것이 단번에 그의 감각에서 멀어졌다.
염휘는 이 넓은 대전에 바스러져가는 소희와 자신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둘의 사이는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멀고도 멀어.
속삭임 따위는 전해지지 않을 만큼.
“환.”
태자에게 두 손이 잡힌 채로 그를 향해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소희를 보며 두 손을 늘어뜨린 염휘가 속삭였다.
“어째서.”
두 눈이 시큰해지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닿지 않을 거리임을 알면서도 염휘는 그녀를 바라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런 말로는 이 참혹한 심사를 표현할 수 없었다.
헛것을 본 것이라 잘못된 이 눈을 파내면,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참사에 염휘는 한발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저 힘이 풀린 두 다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대, 이리 와요.”
갈라진 목소리가 산들바람보다 더 힘없이 공기를 울렸다.
넋 놓고 소희를 향해 손을 뻗은 염휘에게 말을 건넨 건 상제였다.
“이런 이런. 그대라니요. 그저 귀왕의 것이 아니라, 귀문의 별이셨습니까?”
어쩐지 유쾌해 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염휘는 분노로 머리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지금 이게,
이 처참한 광경이,
소희의 죽음이,
그에겐 우습단 말인가?
염휘는 상제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웃었다면, 이 자리에서 지옥으로 던져버려 주마.
염휘는 더할 나위 없이 사나운 기세를 피워 올리며 상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옥불을 심은 듯 이글거리는 홍안에 잡힌 상제는 싱글거렸던 목소리와 달리 적잖이 슬퍼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마치 염휘가 헛것을 들은 양 그 표정이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염휘의 표정을 살피며, 되레 염려를 담아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주름진 눈꺼풀이 처지며, 순한 눈매가 울상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상제시여, 저는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시기에 차도 한잔 안 드시고요.”
상제가 염휘를 만류하며 붙잡을 태세라, 염휘는 말을 아끼던 것을 포기하고 상제에게 사정을 구했다.
“전 이 길로…… 마고께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고께? 아니 무슨 일이 난 겝니까?”
캐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염휘는 ‘귀문의 별에게 영원한 죽음이 선고되었습니다.’라고 더없이 깔끔하게 대꾸했다.
그가 천의 주인이라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었다.
더는 붙잡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염휘는 대답과 동시에 등 뒤의 염라의 불들을 턱 끝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막 염휘가 한걸음 내딛는 순간 상제는 꽤 놀라운 제안을 했다.
“중한 일이시니 상천의 생명의 전으로 가십시다. 기꺼이 내드릴 것입니다.”
“네?”
붙잡기 위해 헛소리라도 하며 귀한 시간을 축내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한 참이었다.
그러나 상제는 여태까지 괴상하게 군 건 다른 이인 양, 상천의 가장 내밀하고도 어려운 자리를 서슴없이 내어준다는 믿지 못할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생명의 전.
상, 하천 지존들이 마고를 만나 뵙고 청을 올릴 수 있는 곳이었다.
천신 마고께서는 삼천과 그 외의 천을 모조리 관장하시는 탓에 몹시 바쁘셔서 어지간한 청으로는 뵙기 힘들었다.
마고의 곤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지존들도 그 대에 한 번도 청을 넣지 않고 좌를 마감하는 경우도 많았다.
허락된 곳이나 함부로 들어갈 수도, 들어가서도 안 되는 곳이 바로 생명의 전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상제 자신을 위해서도 아닌, 귀왕을 위해 내준다니.
염휘는 의아함과 의심도 잠시, 소희를 떠올렸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이기적으로 굴어야 할 때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라면, 마고께서 계시는 곳으로 찾아 올라가는 것보다 마고께서 현신하시는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영체가 깨져 매 순간 무너져 내리는 소희가 이동을 견딜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염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상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제가 이날서 괴이하게 굴긴 하였지만, 귀문의 별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까지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염치없으나, 마다치 않을 것입니다.”
염휘는 가볍게 묵례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상제는 손을 내밀어 길을 청했다.
미약한 경계를 눈치챈 듯 앞장서서 길을 냈다.
대전에 엎드려있는 태자와 소희 옆을 지나쳐 흘끔 돌아본 상제의 시선이 잠시 그들에게 향했으나 그 눈빛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의미 없는 시선이라 대전에 나섰던 휘도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걷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내디디니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염휘가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자 태자가 기다렸다는 듯 소희의 두 손을 풀어주었다.
“흣.”
풍천이 급박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요란했다.
대전 바닥이 비쳐들 듯 투명해진 작은 두 손.
외면하지도 못할 만큼 잔인한 확인이었다.
태자의 눈에 어린 죄책감이 뚜렷했다.
“형님 소희님이…….”
그리고 그보다 딱한 목소리가 염휘를 불렀지만, 염휘의 시선은 소희의 두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홍안이 찰랑이고 습한 것을 잡아 눌렀다.
“아아…….”
두 눈을 질끈 감은 염휘에게서 뼈아픈 탄식이 작게 흘러나왔다.
삽시간에 공기가 침중함을 물고 잔뜩 무거워졌다.
“어서 움직이십시오.”
그러나 더 이상 미적거리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아수라의 재촉이 뒤를 잇자 염휘가 무언가를 삼키는 듯 목울대를 울렁였다.
아픈 것을 삼키듯, 그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
그리고는 끝이었다.
눈 한번 깜빡일 사이 염휘는 말끔해진 얼굴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한없이 걱정에 물든 표정을 짓던 태자도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지금 이 순간, 그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마음이 아플 이가 바로 염휘였다.
그 앞에서 죄인인 자신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자는 단정한 표정 아래 서글픈 심사를 그렇게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귀왕이신 염휘가 마고께 청을 올릴 것이라 하였으니, 소희가 큰 변을 당하긴 했으나 방도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니 살짝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염휘시여, 어서.”
풍천까지 멀어지는 상제 내외를 보며 재촉 아닌 재촉을 하자 염휘가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들린 소희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품는 것이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염휘는 제 품에 잠겨든 소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그녀만큼이나 험하게 구겨지고 초라해진 모습의 태자를 불렀다.
“태자.”
“죄는 언제든 물을 수 있으니 우선 소희님부터.”
태자는 염휘가 그에게 단단히 경고를 하려는 것인 줄 알고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급한 것은 단죄가 아니었다.
비루하게 도망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염휘께서 내리는 벌을 달게 받을 것이니 지금은 소희를 돌보아 달라.
아직도 그녀를 마음에서 놓지 못한 사내의 간절한 청이었다.
살려주십시오.
형님, 살려주십시오.
입안에서 맴도는 염치없는 청에 태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염휘에게서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자, 너의 단심을 죄로 몰지는 말라.”
뜻밖의 소리였다.
영에 대해 모르는 태자도 소희에게 큰 탈이 난 것은 알만큼 상황은 좋지 못했건만, 참담한 심사를 누른 염휘에게선 다정한 당부가 돌아왔다.
“그…… 그…….”
적잖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 태자에게 염휘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주었다.
태자의 입을 막고 있던 상제의 영력이 흩어지고 태자의 억눌린 목소리가 제대로 터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네가 소희를 돌려주러 왔다며 유난히 말을 삼키더구나.”
“그런……!”
“그리고 네게 섞인 내 영력 덕에 조금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그건, 소희가 건네준 것일 테지?”
염휘의 시선이 엉망이 되어 앙상해진 소희의 머리꽂이에 머물렀다.
그간의 사정을 하나도 설명해주지 못했음에도 그는 많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포승줄에 묶여 여직 죽지 않고 버틴 것도 내 영력 때문일 것이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상제의 영력을 조금은 막아줬을 테지.”
“네, 맞습니다.”
“소희에게 간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것이고.”
단정하는 염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태자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형님.”
그러나 공손한 그의 대답에 돌아오는 염휘의 이야기에는 태자는 대답 대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희는 죽었단다.”
“네?”
놀란 태자 목소리만큼이나 염라의 불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아는 것과 그것을 다시 새기는 건 또 다른 의미의 고통이었다.
“그 무슨!”
태자는 조금 전까지 염휘에게 지극히 공손하던 태도를 잊어버린 듯 새된 목소리를 냈다.
충혈돼 치뜨인 눈이 몹시 화가 난 것 같았으나, 그런 태자를 내려다보는 염휘는 뜻 모를 미소를 지어주었다.
모르니, 침착할 테지.
몰랐으니,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야.
이것은 태자의 섣부른 행동을 단죄하고자 하는 심술인지, 그저 상황을 알려주려 함인지 염휘 자신조차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설명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이 깨져버렸어. 간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짐작키에 사신의 문을 건너며 사달이 난 듯싶구나.”
“깨지다니요?”
태자의 순진한 말에 염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잠시 그의 홍안이 물기를 머금었던 것도 같았다.
“영은 깨지면, 무로 돌아간단다. 환생을 할 수도 없는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야.”
염휘는 느릿하게 대꾸하며, 또다시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무로 돌아가다니.
태자는 염휘의 말에 머리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
그럴 리 없다 도리질 치던 태자는 문득 희게 질린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제가…… 제가 휘를 욕심냈기에 벌을 받은 것입니까.”
태자는 절망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평생에 마음붙이 하나 바랐기로…… 휘의 마음을 바랐기로서니 이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태자는 진심이었다.
처참한 절망 끝의 태자는 염휘의 심사를 헤아릴 여력도 없고, 그가 어떻게든 해주겠거니 하던 희망마저 모조리 놔버린 채 어린 시절처럼 염휘 앞에서 울었다.
염휘는 두 뺨을 푹 적시도록 눈물을 떨구는 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자신에게 안겨 힘없이 늘어진 소희가 들어왔다.
흠.
작게 목청을 가다듬은 후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몰랐을 뿐, 휘의 마음이야 진작 받지 않았느냐. 소희는 이 머리꽂이가 정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꺼이 너를 위해 사용하였지. 그리고…….”
염휘는 포승줄 끝에 매달린 황금사를 집어 들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휘께서 신경을 써주셨구나.”
휘가 갑작스레 난입해 언성을 높인 이유라는 듯, 태자가 잘 볼 수 있도록 들어 보여주었다.
상제의 의지가 아닌 외력으로 포승줄을 끊어내는 건 오직 황후사뿐이었다.
아무도 몰래 살짝 얹어주려던 게 잘 되지 않았던 듯 제대로 포승줄 위에 놓지 못해 끊어내지 못했던 황금사.
염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금사를 포승줄 위에 제대로 올려주었다.
그러자 가늘거리는 황금빛 실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포승줄을 차근히 녹여 끊어내기 시작했다.
치익거리는 소리도 없이 열도 빛도,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듯.
포승줄을 가르고 툭.
그리고 포승줄이 두 동강이나 떨어지자, 제 소임을 다한 황후사는 그 영력을 다해 검게 변한 채 흩날렸다.
“전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항시 휘의 애정을 받아왔음을. 이것에 담긴 온기를 기억하라. 태자.”
“염휘시여. 어서.”
풍천이 잔뜩 애끓는 목소리로 염휘를 재촉했다.
포승줄을 끊어낸 황금사를 그것만큼이나 까맣게 죽은 태자의 손 위에 올려주며 남긴 말이 마지막이었다.
염휘는 그길로 멀어져 가물거리는 상제의 뒤를 따랐다.
“이제 좀 진정 되십니까.”
대전을 나서기 전 아수라가 염휘에게 낮게 물었다.
“음. 글쎄.”
제가 저지른 것이 얼마나 참혹한 짓인지 알려주어 분이 풀렸다 묻는 것이냐.
아니면, 소희를 품에 안으니 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인지 묻는 것이냐.
염휘는 그저 제 심사를 아프게 삼킬 뿐이었다.
이젠 완전히 정신을 잃고 힘없이 늘어진 소희가 서럽게 두 눈에 박혀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이라니.”
염휘는 아수라의 말에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겁이 나는구나.”
짐은 이분을 놓아야만 하게 될까봐, 무척 겁이 나.
햇살 아래 차게 빛나는 그의 은발을 바람이 함부로 헤집었다.
생명의 전이 햇살 좋은 곳에서 잔뜩 빛을 머금고 그들을 반겼다.
“이곳입니다.”
“그럼.”
염휘는 상제의 안내에 소희를 단 위에 뉘어 두고는 무릎을 꿇고 마고를 청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더없이 간절하고, 다시없이 애절한 그의 기도는 애원에 가까웠다.
“마고시여, 귀문의 별, 그녀의 영체가 곧 무로 돌아갈 위험에 처했습니다. 부디 가여이 여기셔 돌보아 주시길 바라옵니다.”
해를 받아 따사로운 빛을 머금은 염휘의 은발이 조아리는 고개를 따라 눈부시게 흘러내렸다.
“오랜 시간 달 마마를 기다려온 하계의 청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뿐만입니까. 휘이기도 한 것을요. 귀하디귀한 분입니다.”
상제가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염휘의 기도에 끼어들었다.
“……상제.”
휘가 경악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생명의 전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상제, 그 무슨…….”
잔뜩 놀라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휘를 향해 상제가 히죽 웃었다.
“잊으셨습니까. 휘?”
점잖게 말을 꺼냈지만, 그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며 기괴한 빛을 뿌렸다.
“그 일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라니요?”
이상한 상제의 말에 호들갑을 떠는 휘의 반응에 촉각을 세우던 것도 잠시.
풍천과 아수라는 끌어올렸던 영력을 흩어버렸다.
그저 사이가 도탑지 못한 두 분의 으레히 있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 청천의 전 이후 정상인 적이 없는 이들이니 이런 상황에서조차 다투는 두 내외를 한심히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접선 뒤로 숨은 아수라의 두 눈 가득 담긴 경멸.
“…….”
기도를 멈췄던 염휘 역시 작은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곧이어 더없이 경건한 그의 기도가 생명의 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가는 상제 내외의 언성이 점차로 높아져 아수라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엉큼하긴, 그 긴 세월을 모르는 척 날 속였습니까!”
“엉큼이라고요? 그 일을 수습한 것이 누구인데!”
말이 사나워지는 만큼 언성도 높아져 염휘의 기도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풍천의 짙은 눈썹이 와그락 일그러졌다.
염치도 없고 무도한 자들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십 년 전의 풍천의 기억보다 훨씬 더 고약했다.
무려 저런 자들이 상천의 지존이라니.
개탄할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간곡히 기도를 올리는 염휘의 모습이 한층 더 고아해 보였다면 너무 편파적인 시각이었을까.
풍천은 생각 끝에 고소를 짓다 아수라를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
“이거, 마고께 기도가 들리기는 하겠는가?”
“간절한 목소리이니 닿을 것일세. 참아 보시게나.”
묻는 쪽이나, 답을 주는 쪽이나 목소리에 배인 언짢음을 지우지 않았다.
“하여간…….”
“쉿. 소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아시잖는가.”
우리라도 보태지 말자구.
풍천의 헝클어진 심사를 다독이듯 아수라는 들고 있던 접선으로 가볍게 그의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툭.
작은 소음과 함께 진한 도화향이 물큰 풍겨들자, 청량함이 스며들었다.
“흐음.”
풍천은 아수라의 만류에 더 이상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쉬지 않고 염치없는 소음을 피워내는 상제와 휘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언짢음에도 서로를 다독이는 염라의 불이 생명의 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가능한 염휘의 기도를 듣지 않으려 애쓰던 그때.
상제에게서 묘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요, 차라리 잘됐어요. 그냥 가기 찜찜했지. 태자를 치우지 못하게 방해를 하셨으니 그럼 저것이라도 치워버리겠습니다.”
어차피 죽은 것 아닙니까.
“……!”
“……!”
“……무어라?”
상제의 말 속에 담긴 잔학한 의미에 기도를 하던 염휘도, 불쾌함을 누르던 풍천과 아수라도 모두 바람 소리가 일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려 상제를 바라보았다.
저건,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기에도 과했고. 다툼 끝에 함부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도 이미 너무 넘쳐버린 말이었다.
콰득-.
무릎 꿇고 있던 염휘에게서부터 돌바닥이 깨져나갔다.
살기가 더없이 사납게 뻗쳐나간 탓이었다.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려 상제를 바라보는 염휘의 눈에서 지글거리며 불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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