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95화 (95/114)

95. 이어지는 시간 (2)

2018.06.29.

아이들에게는 탄성을 내뱉게 하고 휘에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한 그것은 바로 황후사였다.

“!”

그녀를 부축하던 아이들에게서 연신 터져 나오는 탄성을 못 들었을 리가 없건만, 휘는 아이들을 타박하는 대신 그것을 돌돌 말아 손에 야무지게 쥐었다.

그리고 손에 쥔 황후사를 낭창하게 늘어진 휘의 소맷자락 밑으로 숨겼다.

황후사의 존재를 아는 것은 휘와 그녀를 부축하고 선 아이들뿐이었다.

“문을 열어라.”

굳게 닫힌 대전 앞에 선 휘에게서 엄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마치 문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절로 열렸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거대하고 묵중한 문이 감춰둔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 휘에게 내보였다.

옥좌에 앉은 상제와, 그 옆에 자리 한 귀왕과 염라의 불.

대전에 꿇어앉은 태자 명의 모습까지.

환한 태양빛을 담뿍 담아 가림 없이 낱낱이.

“이런 이런.”

태자의 핼쑥해진 모습이 각막에 새겨들 듯 또렷이 보여, 휘에게서 작게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에서 불이 터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두 다리에 힘만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뺨을 힘껏 올려붙였을 것이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지.

휘는 독오른 눈을 주름진 눈꺼풀 아래로 숨겼다.

주름진 미간이 꽤 유용하다니.

매끈하고 팽팽하던 피부는 못마땅하게 구겨진 미간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탄력을 잃고 늘어진 피부는 속눈썹보다 훨씬 더 시선을 감추기에 용이했다.

휘는 늙고 볼품없는 제 육신의 쓰임에 헛웃음을 지었다.

“…….”

포승줄에 묶인 태자는 착실히 생기를 빼앗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하루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상제의 치세에 단 한 번도 꺼내 든 적 없던 포승줄이었다.

그런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태자에게 쓰다니.

무너진 것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었는가.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휘는 휘청이는 두 다리에 힘을 줘 대전 문을 넘어 발을 디뎠다.

“휘……?”

성장을 하고 들어선 휘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상제가 얼빠진 목소리로 작게 불렀을 따름이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기별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였답니다.”

휘는 그런 상제에게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걸음,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태자의 모습에 미소진 휘의 입꼬리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태자…….”

속삭임 같은 휘의 말에 태자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

탐욕스러운 빛을 발하는 황금빛의 포승줄에 휘의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대전을 울리는 커다란 마찰음에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흩어졌다.

애잔한 목소리로 태자를 부른 휘가 돌연 손을 높이 쳐들어 그대로 태자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민망할 정도로 크게 울리는 소리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태자까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망극한 것이라.

아주 잠깐. 태자가 몸을 추스를 때까지 모두의 시선이 떨어졌다.

“……태자는 도대체 언제 자랄 것입니까.”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이 대전을 울렸다.

그러나 태자는 제게 퍼부어지는 휘의 독한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모두의 침묵 아래 묵인되는 일방적이고도 몹시도 폭력적인 모습이었다.

귀왕을 위시로 한 염라의 불들은 상천의 일에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처지라지만, 상제는 휘가 태자를 함부로 다루는 것을 무감하게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비는 죽이려 들고.

어미는 거들뿐인.

끔찍한 광경을 휘의 사나운 목소리만이 빼곡하게 채울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휘, 그러지 마세요.”

물기 없이 바짝 마른 목소리가 휘의 시선을 앗고, 그녀의 독설을 막았다.

소희였다.

태자가 고집스럽게 소희의 두 손을 맞잡고 있었던 탓에 같이 휩쓸려 태자에게 쓰러진 모양새라 민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태자를 위해 나서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소희는 잔뜩 지치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을 해서도 휘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히 받았다.

“너는…….”

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희를 부르기 전 염휘의 대답이 먼저 대전을 채웠다.

“제 것입니다.”

“무어라고요?”

황망하다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휘가 되물었지만, 염휘는 다시 한번 힘 줘 대답했다.

“제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목소리에 담긴 것은 귀왕의 권능.

아주 잠깐이었지만, 농후한 영력이 담긴 귀왕의 목소리에 휘는 무너지던 육신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남을 느꼈다.

“곧, 가지고 갈 것입니다.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염휘는 한 자 한 자 힘줘 휘에게 이야기 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느긋한 말투까지 모든 것이 여유로웠지만 순간적으로 그의 홍안을 스치고 가는 초조함을 휘는 엿본 것도 같았다.

“곧…… 가지고 가신다고요?”

마치 물건을 이르듯 성의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염휘는 휘의 말에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여태 말없이 이 괴상한 광경을 좌시하던 귀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난입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것’이 연루되었으니 드디어 자격을 얻었다 주장함이신가.

휘는 염휘의 이상한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의 속셈을 가늠해보려 했다.

그의 말은 정말 이상했다.

그의 것은 무엇이고, 가지고 간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오늘의 귀왕은 그녀가 알던 염휘가 아니었다.

휘는 염휘의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왔었다.

그가 얼마나 의젓하고, 상냥한지.

또 얼마나 기품 넘치고 예의 바른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오늘 그의 말은 정말이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 말속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하지만 휘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조급한 듯하기까지 한 염휘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네. 태자께서 마침 돌려주려 오셨지 뭡니까.”

“아아…….”

알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휘가 염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고 상냥하던 하태자.

휘가 너무나 닮고 싶어 했던 별을 그대로 빼닮은 어여쁜 하태자가 이십 년의 시간을 거스르고 그녀의 앞에 다시 나선 듯했다.

언제나, 명이 그처럼 자라길 바라 닦달하게 만들었던 전대의 별을 쏙 빼닮은 상냥한 마음씀씀이 그대로를 간직하고.

이제는 귀왕이 되어.

휘는 귀왕의 얼굴에서 전대의 별의 흔적을 찾아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귀왕의 괴상한 말투와, 무언가 빠진 것 같은 이 이상한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까지 모자란 제 아들을 감싸는 샘나도록 상냥한 귀왕의 마음에 감사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질투가 솟는다.

그러나 이번에도 휘는 귀왕의 배려에 감사하며 그 마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도움이 절실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조금 전보다 나이를 먹고 스러진 육신이 방금 전보다 훌쩍 쉰 목소리를 냈다.

“명이가요? 돌려주러 왔답니까?”

소희의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태자의 모습을 보고도 나올 법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귀왕과 휘의 대화는 평화로웠다.

“귀왕의 것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깨뜨린 것은 이 기묘한 상황에서도 한마디 말도 없던 상제였다.

마치 이대로 휘와 염휘의 대화가 끝나서는 안 되는 양 끼어들어 굳이 ‘책임’을 따지기 시작했다.

“돌려드린다니요, 허락 없이 손을 댔다는 말입니다.”

상제의 눈은 태자를 담고 있었다.

휘의 뒤에 반쯤 가려진 태자는 여전히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희라고 불리운 여아도 그런 태자에게 동조하는 듯 ‘귀왕의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태자에게 잡힌 손을 빼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상제는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 혐오스러운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태자와 소희 모두에게 공평하게 닿았다.

“흠.”

그런 시선을 염휘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저 작은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대전 안의 모든 이들은 이상했다.

두 손을 맞잡고 있는 태자와 소희를 비롯해, 굳이 추궁을 하는 것 같은 상제와 대전 한가운데 서 있는 휘까지.

“…….”

뭐라 콕 찍어 말할 수 없으나, 기묘하고 일그러진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분명, 시작점이 있을 텐데.

아수라의 시선이 차분하게 대전을 훑었다.

상제에게서 시작된 것이 소희에게 이를 때까지, 모두에게 빠짐없이.

꼼꼼하고 섬세하게 하나하나.

그리고 이 기괴한 광경을 두 눈에 다 담았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차례 불어 닥쳤다.

그것은 활짝 열린 대전 문을 타고 시작해 상제의 빛바랜 금발을 흐트러뜨린 후에야 자취를 감췄다.

“!”

느릿하게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아수라의 시선에 날이 선 것은 그때였다.

하늘거리며 날아오른 소희의 머리카락이 그의 시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염휘시여.”

당황한 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제 주인을 불렀다.

“소장, 눈이 침침한 듯하여…….”

더듬거리듯 불확실한 말이 갈피를 못 잡고 조각이 난 채로 도움을 바랐다.

“무슨 일이냐, 아수라.”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아수라가 놀라 얼굴이 핼쑥하게 질릴 정도라니.

염휘가 걱정스레 아수라를 불렀다.

이제 와 그가 놀랄 일이 무어 있으랴.

사실 염휘는 이제 거의 마무리 되었다 싶어 안달복달하던 마음고삐를 놓으려던 차였다.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천마위에서는 이것의 자신의 만용인지, 아량인지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다.

천의 주인이라는 자리 따위 벗어던지고 싶다 수만 번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토록 바라는 것이라, 단 한 분뿐인 정인인데.

그마저도 이렇게 놓쳐야 한다면, 대체 천의 주인이라는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지극히 본능적인 질문이 쉬지 않고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다그닥 거리는 편자 소리에, 덜커덕 마음이 떨어져 내렸다.

빛처럼 닿고도 싶고, 감당하지 못할 사실이 기다리고 있을까봐 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등 뒤의 염라의 불들이 이 망측한 심사를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어되지 않는 온갖 심사가 그의 가슴을 할퀴고 상처 냈다.

태연한 신색 아래 그의 마음은 이렇듯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웠다.

이해되지 않는 눈앞의 상황 따위,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제며 휘며 언제는 이해되는 이들이었던가.

청천의 전 이후로 미치광이가 된 이들.

염휘는 제 아비가 묶은 게 분명한 포승줄에 묶여 착실히 죽어가는 태자를 보며, 안타깝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구하는 것은 소희를 건네받고 나서 할 일.

상제의 눈길이 태자와 소희에게 차례로 넘어간 것을 모를 리 없다.

진득한 살의가 가득한 시선.

염휘는 도대체 ‘왜?’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의 운명조차 ‘왜?’라는 것들로 점철되어 이십여 년의 세월이 고통스러웠으니, 상제의 것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지쳤고, 더없이 괴로웠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의 고리를 끊고 그저 소희를 데리고 하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 것.’

소희를 이름이나, 별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를 휘는 알아들었다.

귀문의 별을 타고났다 한들, 그녀가 휘를 받았다 한들.

지금의 소희는 사신의 문을 건너는 영체일 뿐,

태자는 귀왕의 반려가 되실 분을 납치한 것이 아니라, ‘영’을 무단으로 데려온 것이니 그의 죄가 덜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영’은 귀왕의 소관이니, 염휘가 영체인 소희를 돌려받는 것 역시 몹시 당연했다.

모든 일의 아귀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았다.

귀왕께서 문제 삼지 않으련다, 덮겠다 휘에게 대놓고 말했고, 휘는 감사히 받아들였다.

일은 이렇게 해결될 것이었다.

아프도록 그의 심장을 조여대던 불안감이 그 위세를 잃고는 먼지처럼 흩어지던 중이었다.

그가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태자가 순순히 소희를 보내주고, 소희가 무사함을 확인하는.

이제 곧 소희를 넘겨받아 돌아갈 참이라 그로서는 마음이 한껏 느긋해졌다.

눈앞의 소희가 태자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마땅찮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눈감을 수 있었다.

태자의 절박함을 막막함을 그가 헤아리지 못한다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염휘는 내궁을 가득 메운 따사롭던 풍경을 떠올리며 이 잠시간의 언짢음을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그리고 곧 닥칠 결말 끝에는 태자의 구명 역시 그의 손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아수라의 이런 모습은 의외였다.

청천의 전 때도 본 적 없던 태도였다.

요괴의 독에 그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서도 태연하기 짝이 없던 이가 놀랄 일이 무엇 있단 말인가.

염휘는 다급한 표정의 아수라에게 몸을 기울였다.

달싹이는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째서 소희님의 발끝이…… 어째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점점 더 투명해지는 것입니까?”

소장의 눈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무어라!”

염휘는 아수라의 말에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대전 한가운데, 태양빛을 받고 있던 소희였다.

하루사이 또 관문을 건넌 것인지 고운 머리채가 온통 은발이 되어 한층 더 어여뻐지신 참이었다.

긴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맑은 홍안이 사랑스럽게도 반짝여, 무척 지쳐 보이긴 했으나 그 모습도 사랑스럽다 생각하던 중이었다.

“투명이라니.”

영체가 투명해질 때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영이 깨졌을 때, 만에 하나 요괴가 되지 않고 먼지가 될 때가 그러했다.

깨진 영체는 전신이 유리같이 투명해지면 일시에 먼지 같은 빛가루가 되어 무로 돌아갔다.

먼지라고 부른 것은, 그것의 대다수가 빛을 제대로 발하기도 전 사라지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것쯤이야 아무래도 다 좋았다.

소희의 영이 깨지다니?

이것은 죽음보다 더한 선고였다.

환생도 못 하고 더 이상 생을 받지 못한 완벽한 끝을 이름이었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덩치를 키워 염휘를 삼켰다.

느긋하던 표정이 온기를 잃고 죽어버렸다.

온 세상이 색을 잃고 소희만이 그에게 색이 되어 아프게도 눈을 찔러 들었다.

“하아…….”

염휘의 홍안이 투명해진 소희의 영체를 드디어 확인해버렸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연약해진 영체였다.

영이 깨지기 시작하면 가장 약한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지 말단. 영력이 가장 옅게 머무는 곳이었다.

“태자가…… 손을 잡고 있구나.”

그래서였구나.

텅 빈 목소리가 슬프게 울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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