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비틀린 웃음 (13)
2018.06.22.
스산한 영력을 피워올린 염라의 불들을 맞이한 건 상제 하나였다.
그 외의 다른 이는 하나도 없었다.
화려한 정원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아름다웠으나, 새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 마치 박제된 짐승 같았다.
다그닥.
염휘의 말이 드디어 천도에서 그 발을 내리고, 뒤이어 풍천과 아수라의 말도 정원에 내려섰다.
염휘가 낸 천도가 사라지자 등 뒤의 서늘한 기운이 삽시간에 걷히고 한층 따사로워진 햇살이 그들을 덮쳤다.
“어서 오세요.”
상제가 주름을 깊게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선한 모습이었다.
두 손을 공손히 소맷자락 안으로 넣어 묵례를 올리는 상제는 더할 나위 없이 극진히 염휘를 맞이했다.
주름진 눈 뒤에 가려진 푸른 눈동자에 물린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며 말에서 내리던 아수라는 순간 무언가가 번쩍임을 느꼈다.
본궁 지척에서의 빛이었으니 무언가가 반사된 것일 텐데.
재빠르게 둘러본 그의 시선에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나무들이 살랑거리며 잊고 있던 소음을 만들어 냈을 뿐.
쏴아아아아-
풍성하게 늘어진 나무를 거칠게 헤집는 때아닌 바람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한참을 불어닥친 바람은 빙긋 미소를 짓는 염휘가 손을 들어 올리자 멎었다.
“환영인사 치고는 짓궂으십니다.”
하늘로 들린 염휘의 손은 은근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볍게 쥐어진 그의 손안에는 반짝이는 금사가 들려있었다.
상제가 ‘만들어낸’ 바람을 잡아낸 것이었다.
“하계와 달리 이곳은 해가 따사로우니까요. 시원하셨습니까?”
염휘의 말에 감춰진 가시를 모를 리 없건만 상제는 구부정한 등을 해서는 연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잇!”
모르는 체 건네는 상제의 말에 박힌 묘한 기운에 풍천이 울컥 치미는 모양인지 작게 소릴 냈지만, 아수라의 접선이 그의 입을 가렸다.
“그간 일기가 안 좋으셨나 봅니다. 이 정도에 따사롭다니. 괜찮으신 겁니까?”
염휘는 저를 염려하는듯한 상제에게 역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그의 답을 돌려주었다.
날 선 대치가 이어지던 그때, 어디선가 작은 소음이 들렸다.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작게 부르짖는 남자의 목소리가 뒤엉킨, 묘하게 귀를 긁는 소리.
그 소리에 염휘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상제의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하하핫. 염휘께서 가벼운 농담에 이토록 성실히 답하여 주실 줄이야. 어서 들어가세요.”
상제는 무엇이 웃긴지 계속 웃음을 터트렸다.
“얘들아, 귀왕의 천마를 받아들여라.”
“네.”
어느새 등 뒤로 나타난 태양전의 아이들이 천마의 고삐를 받아가려고 두 손을 내밀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자자, 어서 드십시다. 귀한 손님을 제가 너무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상제는 조금 전까지 음험한 대화를 주고받은 건 기억에 없는 듯 마냥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내며 앞장섰다.
앞장선 상제의 뒷모습은 초라했다.
구부정한 어깨가 그사이 조금 더 구부러져 곧 허리가 펴지지 않을 것 같은 딱한 모양새였다.
“그래, 곤하진 않으셨고요?”
상제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뒤늦게 먼 길을 달려온 염휘를 염려하며 물었다.
“제가 곤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지척에 계시는 분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이리 배웅하게 되어 송구할 뿐입니다.”
염휘는 상제의 말에 지극히 담담한 예로 답을 했다.
둘 다 오늘의 만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태평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저 풍천의 시큰거리는 숨날을 아수라가 몇 번이고 경계했을 뿐이었다.
아수라는 풍천을 다독이며 옅은 한숨 끝에 발끝으로 시선을 떨궜다.
발끝에 밟히는 잔디가 며칠 전 내린 비에 살이 올라 연하고 풍성하게 자라있었다.
보들거리고 연약한 것이 발을 딛자 마구 뭉개지는 것이 참 딱했다.
그러나, 아수라의 시선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새카맣게 죽어버린 잔디가 군데군데 나 있었다.
긴 타원형의 그 모습은 마치 발자국 같아 아수라의 고개가 절로 앞선 이를 찾았다.
“!”
상제의 걸음걸음마다 타죽어 버리는 잔디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 치익 소리를 내는 것은 여린 풀들.
아수라는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봐버린 것 같았다.
상제는 생을 가진 것을 관장하는 이가 아니었나.
그이의 발자국을 따라 타 죽어버리는 잔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십 년 전, 청천의 전이 시작되기 전 만났던 상제는 저런 이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전대의 기억에 그는 그저 유약하여 휘에게 휘둘리는 마음 약한 사내였다.
도도하고 그 기가 세기로는 휘가 일등이라 상제는 전을 열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도 연신 웃으며 대답을 했다.
딱하신 것인가, 너른 아량으로 품으시는 것인가.
전대의 기억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천을 책임지는 어버이께서, 자상한 것도 좋다지만 줏대 없이 ‘휘’께 휘둘려 말을 번복하시다니.
과연 괜찮은 것인가.
혼잣말인 듯 굵고 힘 있는 목소리가 낮게 깔려 들었다.
아수라는 물밀 듯이 치고 들어오는 기억에 잠시 숨을 골랐다.
기억 속의 상제는 그저 그런 정도였다.
딱히 뭐라 특정할 것도 없고, 유난히 희미한 인상이 특징이랄까.
곤란한 듯 웃는 것이 유난하달까.
쩔쩔매는 듯 휘의 기분을 맞춰주는 그의 인상은 희미하기까지 했는데, 청천의 전이 종막으로 치달을 무렵, 갑자기 인격이 바뀐 듯 변했다.
웃는 것도,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는 것도 늘 같았지만, 말투에 묘하게 가시가 실렸고, 휘어진 눈매 뒤의 두 눈이 음험한 빛을 머금었다.
이상했다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상제, 아수라의 주인이 아니셨고, 아수라가 상천의 지존께 뭐라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었다.
그것이 하계의 지존인 귀왕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줄도 모르고.
욱신
기억의 끝에 불현듯 명치끝이 아려와 아수라는 황급히 손으로 가슴을 눌러주었다.
요괴의 독에 당한 후 손톱이 매섭게 박혔던 마지막 지점이었다.
생명의 환 옆까지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손톱은 뼈를 부수고 살을 갈라 독을 밀어 넣었다.
만월을 가루를 바르고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지만, 마지막 남은 부분이 끝까지 낫지도 않고 한 번씩 욱신거렸다.
“흠.”
뜨끔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에 아수라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풍천이 뒤늦게 그를 발견해 알은체를 해왔다.
“보름은 정양하여야 한다니까.”
“조용히 하시게. 누가 들을지 모르지 않나.”
“듣긴…….”
아수라의 입단속에 풍천이 작게 투덜거리긴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어 주위를 살폈다.
“……아수라.”
“왜?”
“걱정 말게.”
비장한 듯한 목소리를 해서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풍천은 해맑아 보여 이질적이었다.
“이 풍천이 오늘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저런. 그런 꼴사나운 소리를. 듣는 내가 다 창피하군.”
아수라가 풍천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풍천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서 오시게. 염휘께서는 벌써 저만치 가셨음이야.”
발걸음에 속도를 내 먼저 앞서 가버리는 아수라를 지켜보던 풍천에게서 미소가 거둬진 건 그때였다.
맨 뒤에 홀로 남겨진 풍천은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메마른 표정을 해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진짤세. 오늘 이 풍천은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야. 이곳에 두고 와야 한다면. 그건 바로 이 풍천의 목숨일 것이니. 모두들 오늘 무사히 돌아가게 될 걸세.”
잃는 건 한번으로 족했으니.
두 번은 없어. 아수라.
풍천은 아수라에게 들리지 않을 다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손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있는 그의 묵빛 도를 가만히 쓸며 이글거리는 분노를 차게 식혔다.
“어서 오시게!”
한참을 멀어진 아수라가 소리 내 그를 부를 때까지.
“이것 놓지 못할까!”
태자의 성난 목소리에도 장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태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앗-.”
두 손이 무겁게 묶인 소희가 떠다미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이잇!”
태자가 버티자, 보란 듯이 소희를 떠밀어 버리는 것은 너무도 뻔한 수였으나, 태자는 멈췄던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습니다.”
태자는 쓰러진 소희를 일으키며 면구한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하기에 이 상황은 상천의 태자로서도 염치없었다.
휘청이는 그녀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장졸들은 소희를 무척 험하게 다뤘다.
애초에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장졸들은 상천의 선인이라고 보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선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시퍼런 안광이 돋아 잔뜩 힘을 과시하는 것이 마치 악귀 같아, 태자는 절망스러웠다.
다 꺼져가는 힘이라고 생각해 상제를 만만히 본 벌을 받는다고 하기엔 억울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
상제는 적어도, 그의 아비라면. 중도는 지켜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그리고 적어도 소희는 건드려선 안 됐다.
태자는 당장에라도 상제에게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소희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제게 기대세요.”
태자는 비틀거리는 소희에게 팔을 내밀며 정중하게 청했다.
그 역시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라 내줄 수 있는 것이 겨우 포승줄 밖으로 조금 나온 팔이 전부였으나, 그녀 하나는 가뿐히 지탱해줄 테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상제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고, 게다가 영력마저 고갈된 터이니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즉위까지 다섯 날이 남아 원래라면 그의 힘은 단전까지 차올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를 묶고 있는 포승줄 때문인지, 그의 힘은 텅 비어버린 채 차오르질 않았고, 이제 천신이 되어 떠날 상제의 위력 역시 줄지 않았다.
매일 매 순간 힘을 내려받고 있건만, 그 힘은 들어오기 바쁘게 증발하듯 사라졌다.
포승줄이 빨아낸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것은 바로 태자를 지탱하고 있는 염휘의 영력이었다.
상제의 포승줄은 살아있는 것의 생기와 영력을 모조리 빨아내는 것이었다.
염휘의 영력이라고 해서 예외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몸 안에 들어온 염휘의 영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태자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그의 힘을 북돋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태자가 포승줄에 묶여서도 지치지 않고 버티는 이유였다.
하지만 문제는 소희였다.
상제가 포승줄까지는 아니나 그의 영력을 두른 밧줄을 무겁게 매달아 놓은 덕에 소희도 영력의 손실이 상당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바짝 말라버린 입술과 생기를 잃은 두 뺨이 희게 질려 마치 종이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태자 혼자였다면, 장졸들을 따돌리고 어디론가 몸을 숨기기라도 하련만.
소희까지 데리고는 무리였다.
괜스레 도발했다가 소희에게 변고라도 생길까 봐 태자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저를 꼭 잡으십시오.”
비틀거리는 걸음을 해서도 혼자 걸으려는 소희를 태자가 만류했다.
손이 묶인 소희는 넘어질 때 뺨이 쓸린 것인지 오른쪽 뺨에 생채기가 그득했다.
얕게 패인 상처이긴 했으나 피가 끊임없이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것은 차마 보고 있기 딱할 정도였다.
“잡으십시오. 부축해 드릴 것입니다.”
기운 없이 늘어지는 소희에게 태자가 손을 달라 재차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소희가 두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
태자의 눈이 홉 뜨인 것은 그때였다.
밧줄에 묶여 흐늘거리는 두 손은 누가 봐도 투명했다.
이미 손끝은 유리알같이 맑아 그대로 빛이 통과했고, 바닥이 비쳐 보였다.
“이, 이게.”
태자는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않고 황급히 소희의 손을 맞잡아 감췄다.
태자는 영에 관해서는 모르지만 이건 뭔가 좋지 않은 신호였다.
소희가 태자에게 기대자마자 다시 날카로운 창칼이 그들에게 드리워졌다.
태자는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본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을 가져다 다오.”
들어주지 않을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태자는 장졸들에게 물을 달라며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물?”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생각과 달리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창칼을 들고 위협하던 장졸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새파란 눈빛을 터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물?”
“그래 물. 모르느냐?”
태자는 소희를 힘줘 끌어당겼다.
묶인 몸이라 쓸 수 있는 건 팔꿈치 아래의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가까이 붙이고 있으니 훨씬 안심이 되었다.
“물?”
“물이지. 투명하고 찰랑찰랑한 것.”
“물?”
새파란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물.”
“물?”
“시원하고 새파랗지.”
“물…….”
“물을 너도 마셔보았느냐.”
그 말이 끝이었다.
창칼을 들고 있던 장졸들의 눈에서 기괴하던 안광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손에 든 무기들을 떨어뜨렸고 어지러운 듯이 머리를 짚고선 신음을 삼켰다.
“물을 주겠느냐.”
“무……울……이라니.”
그리고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
“물을 다오.”
태자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가슴팍에 머리를 붙이고 서 있는 소희의 정수리가 태양빛에 반투명한 빛을 머금었다.
“물을…… 다오!”
태자는 제 눈에서 흐르는 것을 닦지도 못하고 그저 물을 달라 외쳤다.
정신을 차리라고.
사정하듯, 분노하듯 소릴 질렀다.
소희에게 문제가 생겼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귀왕이신 형님께 보내야 했다.
태자는 상제가 될 자. 그는 생을 가진 것을 주관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에는 그의 능력이 통하질 않았다.
소희는 영이니,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그는 포승줄에 묶여 있어 마음껏 몸을 뺄 수 없으니 장졸들이 제정신을 차려주길 바라며 무력하게 외칠 뿐이었다.
“물을 달란 말이다!”
형님!
염휘시여!
소리가 되지 못한 비통함이 눈물이 되어 왈칵 터졌다.
후회처럼 떨어지는 굵은 눈물방울이 소희의 정수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졸들이 고개를 들어 태자를 올려다봤을 때, 이미 그들의 두 눈은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선인의 눈동자.
지존에게만 허락되었던 푸른 눈동자가 걷힌 그들은 맑은 눈을 하고선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태자전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뒤늦게 울렸다.
“이게…… 이것은 포승줄 아닙니까!”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상제의 포승줄을 알아본 장졸들은 난리를 부렸다.
칼을 가져다 대 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것이 그런 무구 따위에 끊어질 것이 아니었다.
태자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장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귀왕께 가야 하니 안내하거라. 여기는 어디이냐.”
“여기는…….”
“본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압니다.”
부산스러운 가운데 얼굴에 살집이 있는 이가 손을 들었다.
“어릴 적에 놀다 길을 잃어 와본 적 있습니다.”
“그래? 잘됐구나. 본궁으로 가자꾸나. 귀왕께 급히 가봐야 한다.”
태자는 그를 독려해 걸음을 재촉했다.
소희를 업고서 가면 좋으련만 장졸들에게 감히 지존의 비를 손대게 할 수도 없고, 그가 업을 방법도 전무해 그저 소희를 부축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앞선 장졸들이 길을 안내하는 이에게 물었다.
그들로서도 처음 와보는 있는지도 모르던 곳이라 궁금했던 것이다.
“여기요? 여기 거기잖아요. 제대로 부화하지 못한 태양의 아이를 되돌리는 곳.”
“아아. 휘께서.”
태자는 그들의 이야기에 정수리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상제는, 자신을 단순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우려고 했었다.
“하…….”
헛웃음이 절로 터지며 이가 앙다물렷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이것은 모두 귀왕께서는 모르실 터였다.
지금 이 하늘 아래 가장 안전한 곳은, 귀왕이신 염휘의 곁이었다.
귀왕에게 가면 수가 생길 것이다.
확신과 같은 짐작이 들었다.
막막한 가운데 한줄기 가느다란 빛 같은 희망이 태자에게 드리워진 듯했다.
“기운 내세요.”
태자는 소희를 붙든 손에 힘을 더해 소희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태자.”
“네.”
“괜찮으십니까.”
가물거리는 눈을 해서는 이 와중에도 그저 남을 걱정하는 저 미련스러움이라니.
태자는 상제에게서 받은 상처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기운 내세요. 형님께서 모시러 오셨습니다.”
“환?”
귀왕의 아명을 작게 중얼거리는 소희의 말에 물린 그리움에 태자는 명치가 아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지만, 대답하는 표정만큼은 화사했다.
“네, 모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기운 내셔야지요.”
“환이 데리러 와주었습니까.”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소희의 은발은 어느새 조금 더 투명해져 있었다.
쿵.
무언가 무거운 것이 태자의 가슴에 떨어지며 숨을 막았다.
“어, 어서 가십시다. 형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태자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한껏 다정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그는 절망의 끝을 맛보았다고 생각했건만, 절망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이었다.
단심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절박하고 가슴이 녹아내릴 만큼 슬펐다.
“소희님, 미안합니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말뿐인 사과라 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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