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92화 (92/114)

92. 비틀린 웃음 (12)

2018.06.18.

이 고운 분은, 영력을 뭉친 구슬이 무슨 의미인지 아셨을 것인가.

소희를 내려다보는 태자의 두 눈에 절로 뜨끈한 열이 돋아올랐다.

그것을 소희에게 내준 형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자신에게 내어준 소희의 마음은 어땠을까.

수많은 물음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태자, 그 자신 하나였다.

태자는 눈감고 외면하던 진실을 이제야 받아들이려 했다.

“하아…….”

하지만 가릴 수 없는 탄식까지는 차마 감춰지지 않고 잇새로 흘러나왔다.

감은 두 눈이 어쩐지 쓰라렸다.

두어 번의 길고 긴 호흡을 끝으로 태자는 눈을 떴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투명해진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단호함이 물려있었다.

태자는 제 옆에 누워있는 소희를 가만히 불렀다.

“소희님.”

보내드릴 것입니다.

미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바란 당신이었던 고로, 쉽게 단념하지 못했답니다.

붉어진 숨 끝에 눈물이 찾아들었다.

태자는 들창을 타고 쏟아지는 햇살을 잡았다.

뿌리 깊은 연심이었다,

소희로 물들어 붉디붉은 그의 단심이었다.

하지만, 끊어내는 순간을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언제고 남은 미련이 또다시 그녀를 붙잡아 위험에 처하게 할지도 몰랐다.

마음먹었을 때 어서 보내드려야 했다.

하지만 햇살을 움켜쥔 태자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소맷자락에 짙은 자국을 남기도록 태자는 애를 썼지만 햇살은 그 틈을 내주지 않았다.

“이런.”

살아나 움직이고, 포승줄에 맞서 생명력을 지키기는 하였으나 태자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염휘의 영력.

하계의 지고한 영력이 햇살을 잡아 길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소희만은 안전하게 지켜주려 했던 태자는 잔뜩 지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파리한 한숨을 쉬며 들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우연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 뜻 없는 행동이었으나, 창밖의 풍경은 그렇게 무의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태자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차가운 현실을 아침 햇살 아래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정녕 끝을 보려 하심인가.”

그의 시선이 본궁 너머 아득한 곳에 걸렸다.

달빛을 갈라 만든 듯 차게 빛나는 길이 열렸다.

그 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내드리려 하였으나 그의 마음은, 그의 사죄는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결국 빼앗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가벼운 한숨이 터졌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태자는 형님께 정식으로 제 잘못을 빌 기회를 받은 셈이라 여기자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태자의 시선에 길을 따라 다가오는 황금빛 무구를 갖춘 장졸들이 눈에 띄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새파랗게 날 오른 창칼이 무섭게도 번뜩였다.

“하.”

태자는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한 장졸들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귀왕께서 상천으로 오시고, 상제가 자신을 끌어내려 하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상제는 자신을 추국할 작정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은 적당한 명분 아래 살해될 예정이었다.

살아나자마자 다시 살해될 위기에 처하다니.

그가 박복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진실이었던 것인가 보다.

“하하하하하.”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났다.

어버이 아니셨는가.

그런 상제가 나서서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유약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노인네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절로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자신이 깨어난 것을 알았을 것이다.

상제의 포승줄은 상제의 영력이 담긴 것.

꺼져 들어가던 생명이 되살아남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저렇게 급히 장졸을 보내는 것이리라.

귀왕께 죽어버린 자신의 시체를 보여야 하는데 살아났으니, 야단났다 싶었던 건가.

상제의 속을 가늠할 수 없으니 태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일이 돌아가는 품새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야 어찌 되어도 좋으나 상제가 소희를 이렇게 험히 처분했다 함은 그녀도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소희는 지금 영이긴 하나 귀문의 별이기도 했다.

귀왕의 비가 되실 분을 이렇게 험히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상제는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어떻게 은폐할 작정이지?

소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소희님. 일어나세요.”

태자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실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당신을 내 손으로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푸른 눈에서 찰랑 맑고 습한 것이 차올랐다.

“소희님.”

말을 모는 이는 셋이었지만 천도 위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다그닥거리는 편자 소리가 경쾌하게 천도를 두드리며 연신 적막을 깨뜨렸다.

앞서 달리는 것은 염휘였다.

햇살아래 은발이 눈부시게 빛을 머금고 흩날렸다.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천마를 독려하는 염휘에게선 한 시진 내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간밤 한숨도 못 주무신 것인지 그 안색이 몹시 어두워 풍천은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품이 넉넉한 도포 아래 걸친 경장이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오랜만의 무장이었다.

실제로 염휘는 청천의 전 이후로 경장을 걸쳐본 적이 없었으니 오랜만이라는 말이 맞았다.

귀왕으로서 칼을 빼 들어야 하는 순간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염휘는 언제나 가벼운 도포를 걸친 그대로였다.

이렇게 무장을 하시다니.

정말로 상천을 불바다로 만들 작정이라도 하신 겐가.

절로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과 그보다 더한 분노로 자신이 먼저 날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풍천은 질풍처럼 달리는 말 위에서 염휘의 뒷모습을 연신 흘끔거렸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모는 아수라 역시 신경 쓰이긴 했으나, 오늘 염휘는 평소와 다른 이였다.

그 어떤 순간에도 서두르는 법 없는 분이었건만, 오늘의 그는 본관에 첫 햇살이 터지자마자 조급하게 천도를 열었다.

조심성 없이 잡아 쥐고는 그대로 찢어버리듯 양팔을 크게 벌려 내놓은 천도에 뛰어들다시피 말을 모는 모습에 풍천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소희가 상천으로 간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녀 스스로 ‘도망’갔다고 여겼던 처음보다 이번에 더욱 반응이 나빴다.

이거 예감이 좋지 않아.

일이 나도 단단히 났어.

풍천은 제가 모르는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곧 도착이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수라에게서 첫 마디가 떨어졌다.

과연 그의 말대로 눈앞에는 화려한 정원이 햇살을 가득 머금고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것은 인자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풍천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잠시.

웃을 때 벌어지는 입매와 휘어지는 눈꼬리의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키자 말릴 새도 없이 그에게서 사나운 영력이 터져 나왔다.

“상제!”

청천의 전을 치른 지가 벌써 이십여 년 전의 일이나,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고.

상제라는 말이 피에 절은 것도 아닐 텐데, 코끝을 진득한 피비린내가 달구기 시작했다.

맞다, 그였다.

하나도 삭혀지지 못해 울부짖는 그의 분노가 그의 영력을 더욱 사납게 날뛰게 했다.

“그르르륵.”

검붉은 연무가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새어나오고, 동공이 지워진 두 눈이 까마득히 먼 곳에 서 있는 상제를 담고서 미쳐 날뛰려 했다.

“진정해라. 풍천.”

“그르르륵.”

아수라가 냉담한 표정 그대로 차갑게 일별했다.

“어쭙잖은 분노 따윈 넣어둬. 오늘은 받아갈 것이 있어.”

“…….”

아수라의 지적에 풍천이 낮게 이가는 소리를 내며 달아오른 영력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그랬다.

오늘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풍천은 오늘 그들이 ‘소희’를 돌려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응어리진 마음에서 눈 돌렸다.

“그가 어떤 이인지 잊지 말아.”

아수라는 정면에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풍천에게 이야기했다.

한데 묶은 그의 검은 머리채가 햇살 아래 붉게 물들어 날렸다.

“큭.”

밤의 아수라의 기운이 터져 나올 정도로 흥분한 아수라의 모습에 풍천은 실소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제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사람 좋은 표정을 한 채 피로 물든 과거를 유야무야 덮을 정도의 능력이라니.

“그래, 좋은 지적이야. 저 선량한 표정의 늙은이가 어떤 괴물인지 이제야 생각났다구.”

풍천은 방정맞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직까지 동공이 지워진 눈은 제대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그의 손바닥에서 튀어 나오려는 도를 밀어 넣느라 애먹는 중에도 그는 웃었다.

도대체 이 악연의 고리는 언제 끝이 나려는지. 지긋지긋해서 웃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소희를 되돌려 받으며 웃을 수 있길 다시 한번 더 빌었다.

풍천은 아무것도 잃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웃는 것뿐.

“크하하하하하.”

“미친 작자 같으니 적당히 하게.”

아수라의 언제나 같은 핀잔이 들리자 풍천은 그제야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아수라.

오늘 풍천은 아무도 잃지 않을 것이었다.

저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아수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히럇!”

세 남자의 호령이 천도를 쩌렁하게 메웠다.

“어머니. 오늘입니까?”

달큰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어린 선인들의 목소리가 귀엽게 울렸다.

어머니라고 불린 서왕모는 바구니를 들고서 답을 기다리는 어린 선인들에게 푸근히 웃어주었다.

“잠시만.”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크고 실한 천도들이었다.

그 향이 상서롭고 정순해 여태 키워낸 것 중 최고라 할 만했다.

하지만 서왕모는 천도를 요리조리 둘러보기만 할 뿐 열매를 따오라는 말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 째였다.

익을 대로 익은 천도는 날이 갈수록 그 향이 짙어져 나무에서 십 리가 떨어진 곳도 온통 달큰한 향으로 가득 찼었다.

크고 아름다운 자태는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건만, 서왕모는 며칠을 고민만 하며 아이들에게 허락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

“잠시.”

보채듯 부르는 말에 또다시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며칠째 아이들은 천도를 만져보지도 못했다.

8천 년 만에 열린다는 천도밭 뿐만이 아니었다.

서왕모는 마고를 뵙고 오던 날부터 이상하게 굴기 시작했다.

천도밭의 모든 복숭아를 따지 못하게 했다.

천도들은 농익어갔다.

시기를 놓친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가지에 매달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은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 오늘은 따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저 귀한 것들을 죄다 못쓰게 될 것입니다.”

한 아이가 목청을 돋워 서왕모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서왕모는 열매를 바라만 볼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

아이가 다시 한번 채근하듯 서왕모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불었다.

따끈하면서도 어딘지 서늘한 기분 좋은 바람이었지만 서왕모는 대번에 안색이 푸르게 질렸다.

“따거라!”

그리고 그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내달리게 했다.

“어서 따거라. 농익어서 그 영력이 극의에 달한 것들 모두 가져오너라.”

“예 어머니.”

아이들은 서왕모의 외침에 바구니를 들고 재빨리 흩어졌다.

아이들 열 명이 모여 팔을 벌려 감싸 안아도 남는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셀 수 없이 빼곡했다.

8천 년에 한번 그 열매를 맺는다는 상서로운 천도목이었다.

서왕모께서 따로 비구름을 불러 듬뿍 물을 먹이고, 햇살을 쬐어가며 공들여 열매를 키운 나무였다.

유독 신경 쓴 만큼 매달린 천도들이 남달랐다.

일전에 천의 지존들께 보냈던 것보다 훨씬 실하고 잘생긴 것들이라 아이들은 두 손으로 열매를 받아냈다.

크고 무겁기도 했지만, 서왕모께서 이렇게 공을 들이는 열매에 흠집을 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묵직한 열매들이 하나둘 바구니를 채우고 이윽고 천도로 가득 찬 바구니가 서왕모의 앞에 빼곡히 몰렸다.

“어머니 다 땄어요. 이제 이것을…….”

“모두 모여 이것을 으깨고, 말려 환을 만들자꾸나.”

비단 보자기 꺼내 싸두어라 할 줄 알았건만 서왕모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의 소리였다.

“설마…….”

“그래 정말로 환을 만들 것이란다. 어서 서두르자. 급하구나.”

바람이 너무 늦게 불었어.

아리송한 말을 하며 서왕모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바구니 속의 천도를 들어 올렸다.

“어서어서. 오늘 오후에 써야 한단다.”

“오후에요?”

“그래, 서둘러 만들자꾸나. 햇살도 좋고 천도도 잘 익었구나.”

놀라는 아이들을 두고 천연덕스런 소리를 하는 서왕모의 얼굴에 미소는 한 점도 없었다.

‘이거 사달이 났구나.’

그리고 그중 나이가 있는 선인이 그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며 재빨리 천도를 집어 들었다.

항시 느긋하신 서왕모께서 딱 한 번 아이들을 재촉해 환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날도, 한껏 정성 들여 키운 천도를 모조리 으깨 급하게 환을 만들었었다.

그날 밤 서왕모께서 두 광주리의 환을 싸 들고 사라지셨고, 다음날 귀왕께서 대물림을 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상천의 선인 오천이 그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보다 더 뒤에 들려왔다.

그날 서왕모의 표정이 이랬고.

그날 쓰였던 천도 바구니가 이것의 절반이었다.

“큰일이구나.”

저도 모르게 문득 무섬증이 인 선인이 절구에 넣고 복숭아를 으깨다 중얼거렸다.

아침 햇살이 따가웠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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