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비틀린 웃음 (11)
2018.06.15.
산란한 정신과 겁에 질린 마음은 좀처럼 소희가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게 했다.
매 순간순간.
초조함과 불안감이 소희의 마음을 좀먹으며 검게 물들였다.
염려마시라 환에게 의젓하게 말하던 그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려 소희는 그저 매 순간이 몹시도 벅찼다.
“흐으…….”
터지는 숨날에 절박함이 맺히고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어떻게 해야 끝나는 거지.
소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기억이라고 해봐야 그저 쏟아지는 이 빛줄기가 오래지 않아 걷혔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온몸이 바스러질 것 같은 압박감을 버텨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서, 어서.
벌써 얼마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시간 동안 소희는 주문처럼 외던 소리를 또다시 입안에서 외쳤다.
어서. 제발.
그러나 점점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거세졌고, 이제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소희님.”
그리고 태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자 소희는 한데 묶인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괜찮으십니까? 저 명입니다.”
덜컹거리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소희는 자신이 어느 한데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두 손이 묶인 것은 알고 있었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소희는 최선을 다해 몸을 웅크려 자신을 숨기려고 했다.
사신의 문을 건너는 것을 들킬 수는 없었다.
어서 건너야 해.
소희의 절박함이 두 배로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하아…….”
“괜찮으십니까? 소희님?”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자 소희는 당장에라도 태자가 들어올 것 같아 그만 심장이 쿵 떨어지듯 놀라고 말았다.
‘환.’
소희는 다급할 때면 늘 습관처럼 입에 오르는 그 이름을 부르다, 바닥을 긁는 맑은소리에 잠깐 정신을 차렸다.
환이 건네준 머리꽂이.
그의 영력을 담은 귀한 것이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리에 소희는 그를 만난 듯 반가워 머리를 더듬어 찾았다.
야물게도 물린 머리꽂이가 쉽게 빠지지는 않았지만 다급함이 그녀의 손에 힘을 실어주었다.
“어서! 어서어서!”
그리고 불안함과 초조함에 떠는 손이 머리꽂이를 뜯어낼 때였다.
뭔가 깨지는 듯 찢어지는 듯 미묘한 소리가 한차례 울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손에 들어온 머리꽂이가 주는 위안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관문을 건너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쏟아지던 빛무리가 일시에 멈칫하더니 다시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소희는 이것이 기다리던 것임을 깨달았다.
건넜다.
드디어.
무언가 가늘게 찢기는 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귀를 울렸으나, 빛무리가 그치자 소음도 뚝 그쳐 소희는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았다.
그저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태자의 목소리에 귀를 세웠다.
“소희님. 소희님! 괜찮으십니까?”
“…….”
소희는 계속 갈등했지만, 그녀의 침묵은 오래가질 못했다.
곧 꺼져들 것 같이 생기 없는 목소리가 절박하게 자신을 찾는 것을 모질게 외면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소희님!”
“네…… 태자께선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네네. 그런데, 목소리가 좋지 못하십니다.”
소희는 돌바닥에 머리를 괴고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저는 걱정 마십시오.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십니까?”
“……제가 편치 못할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태자께서 곤욕을 치르셔서 걱정입니다.”
“저야 그저 결박되어 있을 뿐,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태자는 말하는 사이사이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를 냈고, 그 사이로 숨기지 못한 희미한 기침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잠든 이슥한 밤, 사방이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가운데 태자의 불안정한 호흡은 소희를 더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 때문에.’
소희의 젖은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떨쳤다 생각했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리고 이명처럼 무언가 찢겨져 나가는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가늘디 가느다란 소리였다.
찌이익.
소희는 머리를 빼곡히 메우는 얇고 가느다란 것을 쉬지 않고 찢어내는 듯한 소리에 정신이 잠시나마 아득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 관문을 넘으려 용을 썼던 탓인지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빛무리가 들어 놀라 불렀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 괜찮습니다.”
잠시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져 소희는 말을 더듬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괜찮다 말했다.
“곧, 동이 틀 것입니다. 어떻게든 버티면 됩니다.”
태자는 소희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새로운 해가 뜨면, 겨우 닷새가 남는 것을요. 어제와 다르게 쿨럭…….”
그러나 태자의 상태는 처음보다 방금 전보다 자꾸만 더 나빠졌다.
소희는 점점 노곤해지는 정신을 가누려 애쓰며, 태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다치신 겁니까? 사술에 당한 것입니까? 태자께선……!”
다시 한번 머리를 크게 울리는 어지러움에 소희는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몸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자꾸만 밭은 숨을 쉬는 태자였다.
어지럼증이야 쉬면 좋아질 것이었다.
소희는 포박당한 손을 움직여 소맷부리에 넣어 다니던 만월의 가루를 찾았다.
“어, 어디 계십니까?”
겨우 한마디를 하는데도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이 덮쳐왔다.
두 손을 그러모아 앞이마를 꾸욱 눌러주자 조금 살 것 같았다.
허기가 지기 때문인가. 아니면 탈진할 정도로 애썼기 때문인가.
소희는 지난밤부터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사신의 문을 건넌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찌이익
그 와중에도 귓가를 울리는 가느다란 소음은 여전했다.
“바로 벽 뒤입니다. 각기 다른 방에 가둔, 가둔 듯싶습니다.”
태자의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에 소희는 흩어지던 정신을 다잡았다.
“잠시만요, 태자. 제가 나갈 방도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소희의 말에 당연히 말릴 것 같았던 태자에게선 아무런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머리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몸이 흐느적거렸다.
하지만 소희는 이를 앙다물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버티고 서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험한 곳은 아닌 듯 간소한 침상과 작은 창, 그리고 굳게 닫힌 장지문, 그리고 분합문이 보였다.
소희는 장지문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가두어 놨으니 분명 잠겨 있을 터.
실상 벽이라고 생각한 것은 분합문이 막고 있던 것이었으니 죽으라는 법은 없다 싶어 웃음이 났다.
소희는 분합문에 기대다시피 몸을 실었다.
문고리를 찾아 열 기력이 없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그대로 실어 쓰러지듯 무게를 싣자 문이 덜컹거렸다.
“태자.”
소희는 몸을 일으켜 다시 한번 문에 던졌다.
“태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태자에게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태자. 괜찮으세요?”
초조함에 입안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쉰 듯 이상해졌다.
마치 누가 목이라도 조른 듯 목청이 한껏 잦아들고 쉬어버린 것처럼 힘이 없었다.
“태자!”
소희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몸을 크게 던졌다.
“읏!”
힘껏 들이받은 어깨에 뭔가 닿아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소희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문이 열렸다.
어깨를 타고 오르는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붙은 줄에 묶였던 태자가 어떻게 됐을지.
왜 갑자기 목소리가 끊어져버린 것인지 견디기 힘든 불안감이 소희를 잠식했다.
소희는 바닥에 쓰려져서는 제 몸도 돌보지 않고 바로 태자를 향해 기어갔다.
벽에 기대 있는 태자는 달빛아래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태자! 태자!”
늘어진 사지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소희가 흔드는 대로 마구 흔들거렸다.
검게 죽은 낯빛.
언제나 빛을 머금고 있던 찬란한 그의 백금발마저 모조리 색을 빼앗긴 채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소희는 그가 죽은 것만 같아 다급하게 그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걱정하던 태자였다.
조금 전까지 괜찮습니까, 라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던 이였건만.
바짝 들이댄 귀 끝을 스치는 미약한 호흡만이 아직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알려왔다.
어둠과 절망으로 물든 처참한 밤이었다.
그저 이 와중에도 찬란한 것은 오로지 태자를 묶고 있는 이 황금의 밧줄뿐이었다.
소희는 이것이 원흉임을 눈치챘다.
상제가 이것으로 태자를 묶었을 때 그가 지르던 비명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마도 생기를 빨아먹는 징그러운 것인 듯했다.
칼이라도 있으면 단번에 끊어내련만.
소희는 다시 어지럼증이 이는 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태자의 가슴에 올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맞닿은 태자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꺼져 드는 맥박이 안타깝게 그녀의 귀를 울렸다.
“환.”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를 바라 이십 년을 기다렸다는 이 사람이, 끝내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태자가 죽을 것 같아 걱정이 되고, 겁이 납니다.
저는…….
울컥 치미는 눈물을 닦던 소희의 소매에서 짤랑이는 맑은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벼락에라도 맞은 듯 움찔 몸을 떨며 일어나 앉은 소희가 정신없이 찾아 든 것은 바로 환이 건네준 머리꽂이.
그의 영력을 뭉쳐 만든 붉은 구슬이 달밤에 핀 홍매같이 만개해 있었다.
작은 구슬 안을 가득 메운 환의 영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히 보였다.
소희는 그 구슬들을 머리꽂이에서 다급하게 뜯어냈다.
아수라의 생명의 환을 닮은 이것이 죽어가는 태자를 살릴 수 있길.
환의 아름다운 불꽃이 태자의 꺼져가는 생명에 다시금 불을 지필 수 있길.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희는 마구잡이로 구슬을 뜯어냈다.
풍성하게 피어난 홍매 같은 것이 뭉텅뭉텅 뜯겨나가 이내 빈자리가 생겼다.
힘을 줘 뜯어내는 손끝이 베여 피가 나고 손톱이 깨졌지만 돌아볼 새도 없었다.
태자의 낯빛이 점점 더 까맣게 질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소희는 뜯어낸 구슬을 태자의 입에 넣어주었다.
“삼키세요. 삼켜요, 어서!”
다급한 소희의 목소리가 조심성 없이 터졌지만, 큰소리에도 태자의 감긴 두 눈은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태자!”
울음 같은 부름에도 태자는 그저 소희가 흔드는 대로 흔들거렸다.
“이, 이렇게 죽어선 안 됩니다!”
소희는 검게 죽어가는 태자를 보며 빠르게 머리꽂이에서 남은 구슬을 더 뜯어냈다.
그리고 대여섯 알을 뜯자마자 모두 자신에 입에 털어 넣고는 그대로 태자에게 입을 겹쳤다.
예민한 살에 차갑게 식은 남자의 입술이 맞물렸다.
충격적으로 와닿는 생생한 죽음의 기운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그의 죽음은 그가 자초한 것이기는 하나, 그 모든 것은 자신 때문이란 것을 소희는 잘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모르되, 본 이상 이것은 자신의 책임.
소희는 태자를 살릴 의무가 있었다.
맞닿은 차가운 입술을 벌리고 머금고 있던 구슬을 그에게 밀어 넣었다.
환에게도 해본 적 없던 내밀한 움직임.
수줍지 않을 리 없었지만 그보다 우위에 있던 것은 꺼져 들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소희는 눈을 질끈 감고는 태자에게 필사적으로 구슬을 건네주었다.
미동도 없던 이에게 억지로 구슬을 넘기고 목울대가 움직여 삼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소희는 흠뻑 젖은 얼굴을 그에게서 떼어냈다.
어느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솟아났다.
이렇듯 서럽고도 절박한 입맞춤을 태자에게 해주게 될 줄이야.
소리 없이 흐느끼는 소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달빛을 머금은 머리꽂이였다.
환이 준 머리꽂이는 이미 앙상해지고 볼품없어졌다.
군데군데 소희의 핏물이 묻어 흉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소희에게는 여전히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소희는 눈물을 대충 문질러 닦고 얼른 머리꽂이를 주웠다.
두툼하게 묶인 두 손은 들어 올리기도 벅찼지만,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집어 들어 머리에 꽂을 수 있었다.
그제야 미칠 것 같이 날뛰던 심정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구슬을 삼켰어도 태자는 아직 그대로였다.
소희에게 남은 것은 만월의 가루.
달 아이를 위해 만든 것이나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이니 적어도 해를 끼치진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의 영력과 환의 영력이 더해진 것이니 귀하다 할 것이었다.
소희는 만월의 가루를 손바닥에 다 털었다.
엉망으로 찢어진 손가락 상처는 이미 흔적도 없이 나아버렸다.
“깨어나세요.”
다시 매끈해진 손을 태자에게 자랑하듯 보여주며 소희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서는 손바닥 위에 수북이 올려진 만월의 가루를 태자의 정수리에 쏟아 부어줬다.
저물어가는 달빛을 받은 만월의 가루가 잔상처럼 빛을 뿌리며 태자에게 스며들었다.
아주 잠깐 빛을 머금었던 태자의 얼굴이 이 아침 산책하던 그때의 모습이라 소희는 다시 한번 치미는 눈물을 쓰게 삼켰다.
“하아…….”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곧, 달이 지고 첫 햇살이 터질 것이었다.
그리고 바라건대 햇살이 혹독한 밤을 견딘 태자의 눈을 뜨이게 해주길 소희는 빌고 또 빌었다.
태자에게 급히 먹이느라 덩달아 두어 알 삼킨 환의 구슬이 열기를 터트리는지 가슴 속이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소희는 무거운 두 손을 들어 가만히 가슴께를 눌렀다.
그가, 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첫 햇살이 터져 나오는 것을 지켜보던 소희가 소리도 없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햇살을 받은 손끝이 투명하게 물들어있었다.
가볍게 뺨을 어르는 손에 희미한 정신이 들었다.
귓가를 스치기만 하던 소리가 말이 되어 의미를 갖고 들려왔다.
“소희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밤 내내 그녀를 울게 만들었던 이의 그리운 음성.
“……태자?”
소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살아나라 바라긴 했지만 눈앞에서 초췌한 얼굴로 웃는 태자를 보자니 막상 꿈인듯해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핼쑥한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는 태자를 보자, 소희는 그제야 그가 살아났단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태자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까슬한 뺨이 마음에 쓰여 자신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으로 태자의 얼굴을 쓸었다.
“!”
태자가 당연한 듯 소희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소희는 태자 손의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태자는 놔주지 않았다.
“태자…….”
놔주십시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물기를 머금은 태자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며 소희의 손에 사과를 남겼다.
“미안합니다.”
손바닥에 태자의 날숨이 온기를 머금고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그대만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려 했는데.”
툭.
날숨이 지나간 자리를 따끈한 눈물이 대신했다.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소희에게 사과를 했다.
“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상제의 포승줄에 묶여 모든 영력이 고갈되었어요. 날 깨운 것은 그대이지요?”
소희는 태자의 고백이 얼떨떨했다.
영혼까지 졸라매 벌하는 상제의 포승줄은 그가 풀어주지 않는 한 착실히 생기를 빨아들여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영력이 소진되어 가사상태에 이르렀던 태자를 깨운 것은 정말로 환의 구슬들이었다.
태자는 멀어지는 의식 끝에 끝을 짐작했었다.
하지만 다시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풍경에 태자는 놀라고 말았다.
상제가 죽으라 포승줄로 묶은 것이었건만, 환생의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니.
포승줄에 묶여 반나절 이상을 버티는 영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자는 자신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낯선 영력에 신경을 집중했다.
상천의 영력과는 달리 몹시 서늘하고 상쾌한 것이, 절로 심신을 돋워졌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이었다.
“형님?”
태자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살린 귀왕의 영력은 실재하나 주인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 대신 어수선한 전각 안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분합문을 사이에 두고 한 방에 소희와 따로 갇혔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곁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과 이상한 머리꽂이.
붉은 구슬이 방울방울 달려 참 어여뻤던 것이 앙상해진 채로 소희의 머리에 엉성하게 꽂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희님?”
신경이 예민하게 당기는 기묘한 감각에 태자가 그녀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뺨과 입 주변에 묻은 핏자국이며, 머리꽂이에 두어 개 정도 남은 붉은 구슬.
모로 누운 소희를 부르던 태자가 머리꽂이에 손을 댄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앙상한 그것이 그저 눈에 거슬려서, 헐겁게 꽂힌 그것이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그저 절로 손이 나간 것이었다.
뻗은 손끝에 잡힌 구슬이 그대로 터지며 그의 손에 흡수되기 전까진.
태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터진 구슬이 스며들며 몸 안의 영력에 자연스럽게 합쳐지고 몸이 한층 더 살아남을 느꼈을 때.
태자는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리고서야, 이 주체할 수 없던 연심을,
인계에서부터 이어지던 이 간절함을,
지워지지 않을 서글픔을,
단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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