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비틀린 웃음 (10)
2018.06.11.
육중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그대로 염휘의 영력이 문을 한 번 더 감쌌다.
이제 이곳은 염휘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고,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할 밀실이 되었다.
바람조차 사라진 대전에서 염휘가 금시조에게 둘러진 전언을 펼쳤다.
금시조의 발목에 감긴 글줄을 풀어내자 익숙지 않은 영력이 향을 품고 대전을 메우기 시작했다.
“흡.”
아수라가 황급히 코와 입을 막고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더 빨리 그의 영기가 날을 세웠다.
흉포하게 드러난 송곳니와 그보다 무자비하게 찢어진 동공이 붉게 달아올라 아수라의 심사를 대변하듯 솟아올랐다.
“흐으…….”
아수라는 저도 모르게 치미는 살기를 누르려 애를 썼다.
“진정하라 아수라.”
염휘에게서 권능을 실어 보낸 목소리가 그를 달래려 했지만, 도무지 이것은 그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상제의 영력.
청천의 전에서 시작된 악연 아니던가,
그날 이후 상천의 것은 아수라에게 ‘독’보다 더한 것이 된지 오래였다.
그가 살기를 피우는 건 본능과 같은 ‘방어’였다.
아수라는 순간 제 코끝이 피에 절은 듯 치받는 비린내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수라, 버텨라.”
다시 한번 염휘의 목소리가 그의 들끓는 심사를 다독이며 눌러주었다.
아수라는 아득한 가운데서도 염휘의 명령에 착실히 따랐다.
제멋대로 발산하는 영력을 다잡아 누르고, 들끓는 살심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쯧.”
옆에서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등을 타고 뜨끈한 것이 생명의 환을 따라 돌았다.
풍천의 영력이었다.
상제의 기에 폭주할 것 같이 구는 아수라를 위해 그의 영력으로 심화를 다독이는 데 힘을 보태주는 것이었다.
“……크읍.”
염휘와 풍천의 노력에 아수라는 한참 만에야 제 기세를 갈무리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직도냐.”
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음을 대전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풍천의 목소리가 쓴웃음을 담고 옅게 흩어졌다.
“평생을 갈지도 모르지.”
아수라는 등 뒤에 붙은 풍천의 손을 떼어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무심하려는 그의 노력과는 달리 목소리 끝에 담긴 희미한 분노까지는 완벽하게 감추지 못했다.
가늘게 떨리는 말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분노.
그것을 염휘와 풍천은 지켜봐 주었다.
아수라의 분노는 타당했고, 그 와중에 풍천마저 이성을 잃고 덤비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둘의 대물림을 지켜본 것은 바로 풍천.
그 분노가 아수라보다 얕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풍천은 시종일관 덤덤한 기색이었다.
슬쩍 굳은 뺨이 아니었더라면, 당과를 물고 있어도 아무도 모를 참이었다.
그는 염휘가 대전을 봉할 때부터 이 모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미 단단히 영력을 두르고 있는 채였다.
입과 코를 막아 상제의 기운이 그에게 스미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해둔 덕이라 해야 했다.
금시조에 언령을 담아 보낼 것은 상제밖에 없었으니, 미리 방비하지 못한 아수라의 잘못이었다.
풍천은 시큰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아수라의 등을 가볍게 한번 두드려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
한바탕 파란이 인, 요란한 소동이 마무리되자 모두들 그제야 상제의 전언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상제가 보낸 글을 보고 난 이들은 조금 전 아수라의 소동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모두 분기탱천해버리고 말았다.
[태자가 하계의 것을 탐하다니, 의외입니다.
본디 욕심이라고는 없는 아이이지 않습니까.
한 번쯤 아우에게 너그러이 양보해주심은 어떠하십니까?
굳이 바라신다면야 돌려드릴 것이긴 합니다만, 아량을 청해봅니다.
하옵고 내일서 다과를 청하시니 자리를 마련해둘 것입니다.
먼 길 가기 전 그리운 분을 뵐 것이라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살펴 오십시오.]
“모르는 것인가.”
풍천이 투박한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간신히 입을 뗐다.
“과연, 그럴까요?”
아수라가 삐죽 돋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쇳소리를 냈다.
“군대를 내주십시오. 아니 그저 눈감아 주십시오.”
전쟁을 바라던 풍천을 만류하던 아수라의 입에서 군대를 내어달라는 소리가 나왔다.
염휘 역시 상제의 전언에 헛웃음이 났다.
도대체, 자신의 인내심이 얼만큼인지 알고 싶어 이러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정말 몰라 이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짐을 우롱하는 것이냐.”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염휘가 얼굴을 굳히며 누구에게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제가, 다녀올 것입니다. 두 번의 관용을 베푸신다는 아량을 제가 지켜드릴 수 있게 윤허하십시오.”
달빛을 타고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처리할 것입니다.
아수라가 전신에 두텁게 영력을 두르고선 한 무릎을 꿇어 그의 왕에게 간청했다.
“소장이 다녀오겠습니다.”
상제의 전언에 얼어버린 듯 한참을 뻣뻣하게 굳었던 풍천이 뒤이어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렸다.
“불허한다.”
염휘는 귀왕의 얼굴로 염라의 불들에게 엄하게 명령했다.
“상제께서 귀왕의 관용을 보고 싶어 하신다니, 가서 보여줄 참이니라.”
활을 그린 염휘의 두 눈은 이미 금안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옥의 불맛도 원하신다면 보여줄 것이다. 직접.”
미소짓고 있는 염휘는 더할 나위 아름다웠지만, 이미 그의 머리카락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사납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염휘의 영력은 이미 한계를 넘은 분노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염휘시여, 진정하시옵소서.”
한뜻으로 외치는 말에 염휘가 제 앞에 부복한 아수라와 풍천을 내려다보았다.
“진정하다니. 짐이 진정치 않았다면 상제께서 이때까지 천수를 누리셨겠느냐.”
붉은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는 그는 진심인 듯 마냥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나 짐의 관용을 뿌리치고, 천신의 자리를 마다하신다면. 굳이 시왕 앞에 무릎 꿇길 바라신다면. 거절하지 않겠다.”
염휘는 장수들에게 단정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그러니 너희들이야말로 차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일 첫 햇살이 터지거든 본궁 앞으로 오너라. 짐이 직접 길을 낼 것이니라.”
부드러운 목소리 가득 살기가 진득하니 물려 대전 안을 울렸다.
그리고 봉인되었던 대전문이 열린 것은 그 직후였다.
염라의 불들은 비장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본궁을 나섰다.
반나절, 산책하듯 걸었던 길은 태자의 후원에서 그 끝이 났다.
“긴 산책이었습니다.”
태자는 후원에 내려서며 기쁜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내민 손은 소희를 위한 것이었으나 소희는 태자가 낸 길 위에서 보란 듯이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소희의 두 발이 후원에 닿자 한없이 뻗어있던 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소용을 다했으니 햇살로 돌아간 것입니다.”
원래 햇살에서 따온 것이니까요.
태자는 궁금해하는 소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하며 손을 태자궁 앞으로 내밀었다.
“재고해보세요.”
소희는 태자가 가리키는 궁을 바라보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다시 그를 달랬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까?”
“태자궁에 제가 발을 디디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 할 것이니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똑똑하신 분이시로고.”
소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한 노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누구……?”
낯선 목소리에 소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동시에, 한 발짝 옆에 떨어져 점잖게 굴던 태자가 소희를 대번에 품에 안았다.
“어서 와요.”
선한 인상을 가진 노인.
그런 이가 온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서는 다정하니 반겨주는데도 소희는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태자궁으로 달려가세요. 어서.”
잔뜩 죽인 태자의 목소리가 산들바람인 양 한숨인 양 희미하게 귀를 울렸다.
하지만 소희는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웃는 낯인 노인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태자, 그만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그리고 노인의 당연하다는 듯한 하대와, 그의 말에 얼굴을 굳히는 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희의 입에서는 저도 모를 소리가 먼저 새나갔다.
“상제.”
“맞아요. 내가 상천의 옥황상제랍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돌아가 줘요.”
태자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를 가르고 노인의 느긋한 음성이 뇌리에 박히듯 깨끗하게 울렸다.
그러나 급박하다면 급박한 이 순간, 소희는 노인의 얼굴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묘하게 노인의 얼굴이 바뀌었다.
아…… 이건.
기묘한 이질감에 소희가 무례한 것도 잊고 노인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자 이 이상한 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은 한 호흡마다 늙고 있었다.
한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없던 주름이 생겨나고, 허리가 굽고 있었다.
소희는 어쩐지 소름이 끼쳐 노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노인의 이상한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인자한 듯 웃으며 다정히 말하지만, 태자를 향한 노인의 시선은 매섭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야 태자를 염려해 소희를 돌려보내려는 것 같았지만, 소희는 노인이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생생히 느꼈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적의.
그리고 이 따갑고 아픈 것은.
‘살기인가?’
심지어 그 무서운 것이 향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태자.
노인이 시선을 태자에게로 돌리자 그러지 말라 터질 것 같은 고함을 참느라 소희는 깊은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알 수는 없지만, 노인은 태자를 불청객인 소희보다 더 껄끄럽게 대했다.
“태자. 말 듣거라.”
뒷짐을 가볍게 진 노인이 태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비로소 굳었던 몸이 풀렸다.
와들와들 떨리는 몸뚱이는 태자가 안아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었다.
“지금 명령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권유하는 것이란다. 항시 그랬듯.”
느긋한 노인의 말과 감정을 세운 태자의 대화란 건 뻔하게도 노인의 주도하에 흘러갔다.
“이것이 과연 권유입니까? 마지막 남은 상제의 권능까지 쓰시는 분께서.”
이죽거리는 태자의 말에도 노인은 미소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들의 치기를 바라보는 듯 보란 듯이 작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여유로운 그의 표정에 태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소희의 눈에 또렷이 잡혀들었다.
평정을 잃은 듯 비단 옷감 너머 그의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리며 날숨에 열기가 흘렀다.
그의 옷을 필사적으로 붙들고서도 소희는 태자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걱정되어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
“제가 걱정이 된다고요?”
“그럼, 내가 누굴 걱정하여 이러겠느냐?”
“제가 아니라 휘를 걱정하심이겠지요.”
“휘를? 언제나 휘의 걱정을 받던 네게서 나올법한 소리구나?”
마치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에는 태자 역시 감정을 누르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목소리가 높게 솟았다.
상제가 바라는 대로.
감정에 휩쓸리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었고, 태자는 노인이 쳐놓은 덫에 쉽게 걸려들었다.
“휘의 걱정이라고요? 역정이었겠죠. 그리고 이제 저도 더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든 역정이든.”
“그 무슨 소리더냐.”
노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격정을 담은 목소리가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돋웠다.
“더 이상 ‘휘’를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힘으로 얻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휘’를 데려왔다?”
“네.”
그 말을 끝으로 상제는 웃는 표정을 지워버리고 딱딱한 돌덩이같이 얼굴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하여간, 전부 이렇게 손이 간단 말이야.”
그리고는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 같은 손가락이 태자를 가리키자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태자가 타오르는 것 같은 밧줄에 칭칭 묶여 나동그라졌다.
상제가 태자를 묶은 것은 상제의 포승줄.
상제의 힘이 사그라지는 마지막까지 남겨지는 최대의 권능이자,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상제가 허락하기 전까지 절대 풀리지 않으며 , 살아있는 모든 생기를 태우는 것.
그것이 저절로 풀릴 때는 오로지 죄인의 목숨이 다하였을 때뿐이었다.
상제의 마지막 힘을 내려받는 중인 태자는 영력이 극도로 불안정할 뿐 아니라 모든 영력이 새로이 짜 맞춰지며 자리를 잡는 중이라 평생에 가장 약할 때였다.
태자는 벗어날 수 없었다.
“……!”
소희는 등 뒤를 필사적으로 감싸주던 태자가 떨어져 나가자 갑자기 떨리던 몸이 일시에 멎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소희를 가리켰던 것이다.
더 이상은 떨고만 있을 수 없었다.
상제는, 아니 이곳 상천의 이들은 모조리 미친 게 틀림없다.
소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선 제게 손가락을 뻗은 상제를 노려보았다.
가진 힘이 없으니 뭐라 해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태자를 죽이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고, 그녀를 해하려는 것을 가만두지도 않을 셈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온몸을 저릿하게 무언가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 좋은 눈빛입니다.”
킬킬거리는 쉰 목소리가 뜻밖의 소리를 하기 전까진.
그리고 당황한 소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거대한 빛덩어리가 그녀에게 쏘아져 들었다.
*
“아…….”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이 애처롭게 공기를 울렸다.
소희는 가물거리는 시선에 힘을 줘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 했다.
상제가 던진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로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희끄무레한 시야를 돌리려 눈을 깜빡거리며 멍한 머리를 깨우려 애쓰던 소희는 제가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뺨에 닿은 바닥에서 냉기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흐음…….”
어딘지 모르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안전했겠지만, 목이 칼칼해 그만 기침이 나왔다.
태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와중에도 상냥한 마음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태자를 떠올렸다.
무자비한 노인.
아무리 인간과는 달리 하늘에서 받아온 아들이라지만, 그렇게 험하게 대하다니.
상제를 탓하는 것도 잠시. 소희는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혔다.
죽음으로 좌를 물리는 이곳 천계에서 버젓이 계시는 휘를 제치고 아들이 또 다른 휘를 데려왔다 하니 상제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상제의 마음을 헤아리고, 조급한 태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녀의 마음이야 진작 제자리를 찾았다지만, 이곳 상천은 아직이었다.
그러니 파란이 닥치기 전 태자를 설득하고 하계로 돌려보내달라 부탁해야 했다.
어서 돌아가야 해.
다른 무엇보다도 환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혹시 자신 때문에 아수라가 질책을 듣지는 않았는지.
마음이 쑤석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희뿌연 시선이 점점 맑아지긴 했지만 말끔해지진 않았다.
안개 속에 있는 듯. 빛무리 속에 있는 듯.
어쩐지 눈이 부신 것도 같았다.
필사적으로 깜빡거리는 눈 끝에 희게 빛나는 큰 틀이 잡혔다.
익숙한 모습.
‘설마 이건 사신의 문?’
소희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정오쯤 기억이 끊겼는데 사신의 문이 열리도록 정신을 잃고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도 사신의 문이 열리다니.
순식간에 마음을 지배하는 절망감과 불안함에 소희는 입술을 질겅였다.
사신의 문을 늘 환과 함께 넘었던 터라 혼자서, 그것도 상천에서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지.’
심지어 안전하긴 한 걸까.
사신의 문이 누군가의 이목을 끄는 것이 아닌가.
초조함이 배가 되어 소희를 잠식했다.
소희는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빛무리를 절망처럼 받아들였다.
질끈 감긴 눈꺼풀 아래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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