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비틀린 웃음 (9)
2018.06.08.
눈이 부시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은근한 빛이 오히려 대낮 운종가를 걷던 그 날보다 오히려 편안해 소희는 어리둥절했다.
손그늘을 만들던 손이 무안해져 이미 소매 속에 깊이 감춘 것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리가 아프시진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소희는 조금 전까지 그녀를 을러대던 태자가 다정히 묻는 말에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꾸를 했다.
그가 본심을 드러낸 지금, 소희가 내외할 처지가 아니었다.
소희는 아예 보란 듯이 그와 거리를 두려 노력했다.
그런 소희에게 태자가 잔잔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아무리 제가 밉다 한들, 옷자락을 놓지 마세요. 이 길에서 혼자 남겨지면 아무도 찾질 못한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소희의 질색하는 대답에 태자의 얼굴이 비로소 풀리며 입꼬리에 미소라 불릴 만한 것이 걸렸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태자는 자신의 소매 끝을 야무지게 쥐고 따라오는 소희를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소희는 모르나, 태자는 소맷귀를 잡은 소희에게도 티 나지 않게 영력을 둘러 자신과 함께 보조를 맞추게 힘을 북돋고 있었다.
지금 슬슬 산책하듯 걷는 이 길이 얼마나 멀고도 까마득한 곳을 향하는지 소희만 몰랐다.
그녀의 한걸음에 수십 자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
그를 놓치면 해를 빌어 낸 길에 그녀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겁주려 한 말이 아니었다.
까마득히 먼 길을 한 걸음씩 차분히 되짚어가지 않는 한 소희를 만날 수 없었고, 삼천을 가로지르는 이 길 위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지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굶어 죽을 것이었다.
혹은 이 끝없는 길 위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소리인지 소희는 하나도 몰랐다.
그러니 저렇게 말간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것이겠지만.
“꽉 잡으세요.”
태자는 부디 그녀가 겁먹질 않길 바라며, 가벼운 목소리에 진심을 실었다.
“태자.”
미소 띤 그에게 소희가 입을 열기 무섭게 태자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금만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싶으면 소희가 하려는 말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태자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 그저 듣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나았다.
하지만 돌아가자고 청할 줄 알았던 소희에게선 조금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네?”
“인계에 있던 저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것입니까?”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태자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정말로 그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워진 본능처럼 모든 기억 역시 전부 날아가 버린 게 분명했다.
인간들의 ‘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잊었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다정했던 시간과, 즐거웠던 순간들은 오로지 그에게만 추억으로 남아 이토록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무심하신 분.
그러나 원망하는 것과는 달리 태자는 소매 끝에 매달린 가벼운 무게를 느끼며, 말을 골랐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오래전에 만났었습니다.”
“오래전에요? 그럼 언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주 오래전입니다. 그대가 기억하지 못할 아주 오래전.”
먼 길 벗 삼아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인가.
쓴웃음을 삼키며, 태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전 내내 걸어야 할 것이니, 가는 길에 소희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 기억을 찾는다 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 설레기도 했다.
태자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는 말을 골랐다.
“그날은…….”
느리게 깜빡이는 눈썹사이의 푸른 눈동자가 이십여 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풀렸다.
“어머님께 꾸지람을 들은 날이었습니다.”
대충 시작된 첫마디서부터 소희는 대번에 관심을 보였다.
“태자께서도 어머니께서 혼을 내셨습니까? 워낙에 반듯하신 분이라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애매한 대꾸였지만 태자로서는 최선이었다.
치부가 될 이야기를 얼버무려가며 시작하자니 많은 것들이 뭉뚱그려졌지만 따사로웠던 그 날의 감정까지 뭉개지는 못했다.
“그대는 이제 갓 말문이 트인 아기였습니다. 저는 막 인계에 도착한 고로 낯설고 먼 길에 지쳐 쉬던 참이었는데, 산길을 올라오는 아기가 있었지 않겠습니까?”
“아기요?”
“네 지금 생각하니 아기였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그대는 아기였을 때도 무척이나 고왔답니다.”
“그런 짓궂은 소리는 하시는 게 아니에요.”
뺨을 붉히며 말하는 소희는 태자의 칭찬이 싫지는 않은 듯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아기가 저였답니까?”
“그랬지요.”
“그럼 그때서부터?”
“아닙니다. 웬걸요. 천관이 휘라 알려주었지만 저런 어린 것이 비라니 흥미가 식었지요.”
“어머나.”
의외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원하는 태자를 미루어보았을 때 분명 처음서부터 구애를 했을 거라 믿었건만.
어린 아가라 흥미가 식었다는 그 말에, 없던 호기심이 생겼다.
어린것에게 음심을 품은 것이 정신이 온당한 이일 리도 없건만.
그래도 소희는 태자가 저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이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소희는 거리를 두어야지 다짐한 것도 잊고선 그래서요, 라고 보채듯 물었던 것이다.
태자는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소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는요. 인계에서 잘 버텨보련다 하고 온 참이었고, 마침 ‘휘’도 있다니 그 근방에 자리를 잡았지요. 사실 삼관대제가 어찌나 등을 떠밀던지.”
“네.”
그러셨구나.
그런데 삼관대제는 태자의 가신들을 말하는 것인가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홍안이 아까처럼 밉지 않았다.
석양을 담은 듯 은근한 붉음이 오히려 소희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찰나.
태자는 가볍게 머리를 털고는 말을 이었다.
작고 볼이 통통해서 더욱 귀여웠던 어린아이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떠올랐다.
커다랗고 새카만 눈이 무척 귀여웠었는데.
“흠. 그래서 그 아이 커가는 모습을 하루 이틀 지켜보자니 자꾸만 눈정이 드는 것이 아닙니까. 두 계절이나 지났으려나.”
태자는 소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말을 이었다.
마당서 나와 놀아야 하는데, 보이지가 않더란 말입니다.
그즈음해서 태자는 아예 눈을 감고 음미하듯 했다.
“천관아,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어린 것이 며칠째 보이지가 않는구나?”
“어린것이라니요, 휘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아니 상천에 ‘휘’이신 모친께서 버젓이 계시는데, 이게 가당키나 한 것이냐.”
“그러니 괴이하다 말씀 올렸잖습니까. 지키고 계십시오. 휘가 확실하니 비를 지켜주셔야지요.”
“그것참. 그나저나 휘인지 그것이 어째서 안 보이느냐 묻지 않았느냐.”
태자의 재촉하는 말에, 술술 잘도 떠들던 천관의 입이 꽉 다물렸다.
머뭇거리고,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던 천관은 태자에게서 한소리 더 듣고 나서야 기함할만한 소리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사실, 휘께오선 ……의 별도 타고나신지라…… 그 몸이 버티질 못해 자주 앓아눕는다 합니다.”
“응? 무슨 말이더냐? 무슨 별?”
곶감 빼먹듯 쑥 꺼져든 목소리 덕에 제대로 듣지 못한 태자가 되묻자 천관이 마지못해 답을 올렸다.
“귀문의 별 또한 타고 났다 말씀드렸사옵니다.”
“이날서 실성하였구나. 한 대에 휘가 둘인 것도 괴이하건만 고작 인간 아이에게 휘며 별이며 온갖 것을 타고 났다 하니. 실성한 게지.”
천관은 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 떠 저 역시 그렇다 슬쩍 고백하기까지 했다.
“저도 귀를 의심하였고, 눈을 씻고 다시 보았지 뭡니까.”
예민하고 실없는 소리 하는 것을 질색하는 천관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저런 유들유들한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 그 날.
그가 얼마나 놀랐을 것인지는 아무도 짐작 못 했으리라.
“그럼 신열이라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인간의 육신에 천신이 담긴 꼴입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거니와 그 기운이 서로 상충하니 저 아이 명을 다 못 채우고 깨질 것 같아 염려됩니다.”
담백하게 읊는 말에는 온기 없는 진실만이 담겨 있었다.
“그럼, 저렇게 스러지도록 두란 말이더냐?”
태자는 어린 계집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것의 미태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얀 얼굴에 작아도 오뚝한 콧날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곱고 고운 선인들을 보고 자란 자신의 머릿속에 예쁘다고 자리 잡을 정도면 고것 인물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아니면 자꾸만 어린 인간 계집아이 따위가 걱정되고 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불안감에 녹아버릴 것 같은 이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으니 태자는 어린것의 미태가 보기 드문 것이구나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고운 것인데.”
“고운 것이 아니라 ‘소희’라는 이름도 있고, 휘를 타고난 분이시니.”
천관이 태자의 경박한 말에 진저리치며 말을 올렸다.
“소희든 휘이든 이리 두고 보란 말이냐? 죽어간다는데.”
매정한 것.
인간들도 기르던 개가 아프면 들여다보더라만.
사람이 죽어간다는데도 그깟 호칭에 연연해 질색하던 천관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된다.
“천도를 내주어라.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다.”
“그건 안 됩니다. 휘가 되시려면 인간의 육신은 벗으셔야 하는데 인간의 육신을 선인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냐. 자꾸 이야기가 제자리잖느냐. 답답한지고.”
“그럼 약수를 떠다 드리오면 어떻겠사옵니까.”
그저 눈앞에 두고 있던 것이 다 죽어 간다니 측은해서였고, 머릿속에 남을 만큼 고운 것이라 신경 쓰인다 치부했던 과거였다.
하루가 한 계절이 되고 그 시간이 채 일 년이 되기 전에 태자는 소희에게 목을 매 안달복달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이 무려 이십 년에 가까워졌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으랴.
더없이 소중하고,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나 싶도록 마음이 다정해졌다.
미태가 곱다하여 깊어질 마음이겠는가.
곱디고운 그 마음이, 다정하기 짝이 없는 성정이 온기를 바라던 태자의 마음을 흠뻑 적신 것을 태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어린것’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고 몇 년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미태’가 빼어나서라고 자신을 속이던 시간을 그만두고 마음을 인정하자 하루하루가 얼마나 충만하고 따사롭게 차올랐는지 모른다.
어린것에게 쏠리던 변태 같은 마음이라 스스로를 욕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지켜보며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성혼할 정도로 자라서야, ‘표가공자’가 되어 그녀를 맞이하러 당당히 나섰던 것이다.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해진 그분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불사할 것이다.
고귀한 분께서 천하게 인간의 탈을 쓴다며 천관이 무릎 꿇고 만류했으나 태자는 괜찮았다.
저 고운 분과 함께 상천으로 갈 수 있다면 이까짓 것이 무어 대수라고 생각했다.
손꼽아 함께 상천으로 돌아갈 그 날을 기다렸다.
지존에게만 전해져 내려온다는 육신을 벗기는 약도 준비해두었더랬다.
혼례를 올리는 날 합환주 대신에 그것 내밀며, 휘가 되어 이번 생을 나와 함께 해달라 할 참이었다.
“그래서 두 계절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길어진 생각 끝에 소희가 답답했던 듯 태자를 과거에서 불러들였다.
“그래서는요. 잘 지내셨느냐, 건강하시라 당부해드렸지요.”
“그랬습니까?”
뭔가 밍밍해진 이야기 끝이었다.
소희는 뭔가 더 있다는 걸 알았지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졸라 들을 만큼 잔인해질 수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잊고 있던 과거의 남자는 환, 그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걷는 걸음걸음 미안함과 죄책감이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글쎄요. 그새 지루하십니까?”
“아침도 먹기 전 누가 내도록 걸으라 심술을 부려서 곤하여서요.”
“하하핫. 그렇습니까?”
소희는 웃는 태자를 밉지 않게 흘겼다.
“차라리 대놓고 이렇게 말해주세요. 전 이게 더 기쁩니다.”
태자의 근사한 저음이 황금으로 물든 길을 따사롭게 채웠다.
조금만 더 빨리 솔직하였다면 어땠을까.
늦은 후회가 돋았지만, 그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소희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이건만 등 뒤에서 흩날리는 그녀의 은발이 태자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염라궁의 궁인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전쟁을 바라는 쪽과 조용히 해결되길 비는 쪽.
내궁 아이들에게 궁문을 닫아걸라, 아수라가 당부하였건만.
염휘께서 대전에 진을 두른 채 염라의 불들과 이야기를 나눈 보람도 없이 그 잠깐 사이 조심스러운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조용한 듯 무섭게 들끓고 있었다.
“그럼 염휘께서 뭐하러 갑주를 찾으셨다니!”
“혹시나 하시는 게지. 좋은 상황이 아니지 않아.”
“좋은 상황이 아니라고? 이보다 나쁠 수 있대니? 간도 크지 태자가 귀왕의 비를 납치하다니?”
“너 그 입 다물어라. 이러다 온 사방에서 알겠다?”
“이런 걸 왜 쉬쉬한다니? 상천에서 이리 업수이여기는데 어째서 쉬쉬하며 감춰야 한다니?”
넌 밸도 없대니?
샐쭉한 소리를 하며 눈을 치뜨는 아이는 본궁에서 온 시비였다.
내궁에서 일하던 아이가 새초롬한 눈빛에 고대로 성을 왈칵 냈다.
“그럼 내궁이 비었다고 온데 다 이야기해서 웃음거리가 되어야겠니!”
“누가 감히 웃는대니, 혼쭐을 내야지. 한번 본때를 보여주어야 다신 안 하지.”
두 아이가 시큰거리며 서로에게 감정을 세우고 있을 때,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단정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불렀다.
“그만하렴.”
“아수라님!”
아이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입을 맞춰 아수라를 불렀다.
평소 즐겨 입던 하얀 도포는 어디론가 벗어던지고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한 아수라는 평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생 같던 유약한 모습을 했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롭게 벼려져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그 기도가 대단했다.
“웃전의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만큼 불경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네…….”
“첫 입을 뗀 아이를 잡아 본보기를 보이기 전에, 입단속들 하라 이르거라.”
무감한 목소리가 온기 없이 ‘처형’을 거론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저희가 얼마나 겁 없이 떠들어 댔는지를 실감한 듯 찔끔한 기색이 되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두 번은 없을 것이니라.”
아수라가 변한 것은 그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는지 평소의 상냥하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해져있었다.
기가 질린 아이들에게 차갑게 일별하고 돌아서는 아수라에게 언제와 같은 것은 길고 섬세한 손에 들린 묵빛 접선 하나뿐이었다.
긴 걸음, 한 발자국마다 전에 없던 향긋한 내음까지.
다정하던 수라전의 주인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의 등 뒤로 훌쩍이는 작은 울음소리가 따라붙었지만 아수라는 두 번 다시 돌아봐 주지 않았다.
아수라가 향한 곳은 본궁이었다.
염휘께서 부르신고로 그 걸음에 다급함이 실려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본궁 회랑에 발을 막 디뎠을 때, 아수라는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뒤를 돌았다.
“풍천.”
“염휘께서.”
“음. 금시조가 돌아온 것인가.”
토막 나는 말은 바쁜 염라의 불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경쟁하듯 발걸음에 속도를 낸 둘은 이내 대전 앞에 다다라 고했다.
“부르셨습니까.”
“소장 풍천이옵니다!”
그들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전 문이 열리며 옥좌에 앉은 염휘가 그들을 반겼다.
“어서들 오시게.”
그들을 부르는 염휘의 어깨엔 금시조가 올라 앉아있었다.
“벌써……?”
아수라의 놀람은 당연했다.
제아무리 왕의 전령이라고는 하나 금시조가 다녀와야 할 거리는 삼천.
무려 답을 받아와야 하는 것이니 으슥한 밤서나 돌아오리라 생각했건만.
“풍천, 아수라. 어서 들어오너라.”
염휘는 놀란 듯 주춤거린 둘을 불러들이고는 그대로 대전 문을 봉해버렸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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