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비틀린 웃음 (8)
2018.06.04.
살얼음판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위태로운 분위기가 염라 본궁을 감쌌다.
자리를 지킨 것은 세 염라의 불.
염휘와 아수라, 그리고 아수라의 식신을 따라온 풍천이 그들이었다.
“관용이 넘쳤습니다. 지엄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두 번은 넘길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아수라마저 풍천의 말에 힘을 실었다.
“하옵고 저의 죄는 소희님께서 환궁하시거든 청하겠사오니, 이 미련한 자를 한 번만 더 가납하십시오. 소장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허하십시오.”
염휘에게 소희를 잃은 죄를 청하는 것까지, 아수라는 남의 일인 양 무감하게 읊었다.
온기 없이 단정한 목소리가 대전을 가볍게 훑고 사라졌다.
“…….”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염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염휘시여!”
풍천은 사정을 들은 후,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대전에 불려온 것이 자신과 아수라 둘뿐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모든 염라의 불이 알아야 할 중차대한 일이라고 전에 없이 매섭게 아수라를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모자란 작자라고 입에 달고 살더니, 그 머리가 굳은 것인가 아수라!”
풍천은 금방에라도 아수라의 멱살을 잡아 메다꽂을 듯이 길길이 날뛰었다.
아수라라고 해서 억울한 것은 아니었고, 풍천이라고 해서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것 역시 확실했다.
소희는 납치되었다.
이 하계에서, 염라궁의 가장 안전하다는 내궁의 그녀 침전 안에서, 상태자에게.
이 얼마나 안 좋은 조합이란 말인가.
태자는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하계에 멋대로 내려왔다는 것조차 크게 문제가 될 일이건만.
심지어 내궁 마마님의 침전이라는 내밀한 장소까지 함부로 스며 소희를 납치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염휘께서도 그를 죽이고 말 것이라 풍천은 믿었다.
그런데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아수라가 한 짓이라니, 절로 속이 터졌다.
“군대를 소집하십시오, 반나절이면 모두 모을 수 있나이다.”
“그만하라 풍천.”
당장에라도 염라의 불들과 모든 사자들을 끌어모아 상천으로 쳐들어갈 것 같은 풍천을 말린 것은 염휘였다.
옥좌에 걸터앉은 그가 팔걸이 위의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은근한 황금으로 물든 염휘의 손끝에, 날뛰던 풍천의 입이 단박에 다물렸다.
“…….”
영력을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염휘 역시 괴로우신 게 분명했다.
급박하고 분노로 머리가 날아갈 것 같긴 했지만, 그 누구라 한들 염휘만하랴.
풍천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사방이 적막한 가운데 실바람만이 간간히 스며들었다.
염휘는 풍천이 대전으로 들자마자 사방을 봉하고 진을 펼쳤다.
그 어떤 소리도 시선도 이 대전을 염탐하지 못할 것이었다.
큰일이었다.
소희가 달아났던 것과, 태자가 납치한 것은 분명히 일의 무게가 달랐다.
염휘는 마지막 남은 이성 한 가닥으로 대전을 봉하는 것까지는 했으나 그 이상은 당장에 무리였다.
그는 귀왕 염휘였으며, 또한 소희를 사랑하는 환이었다.
왕으로서의 신중함과는 별개로 치미는 분노와, 모멸감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태자가 직접 나섰다는 말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배신감까지 들었다면, 웃으려나.
상태자, 명이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형님.”
저를 따라다니던 작고 귀여운 녀석이 제게 직접 그럴 리 없다고.
정말로 그랬을 리 없다고.
진심일 리가 없다고.
그의 수하들이 등 떠밀었을 것이라고 그의 직위가 어쩔 수 없이 그리 만들었을 거라 믿었던 아우에 대한 견디기 힘든 배신감이었다.
손끝으로 차고 드는 영력이 칼날같이 사납게 솟았다.
군대를 일으키자고?
어째서 그래야 하나.
그는 귀왕 염휘.
상천까지 원한다면 단숨에 달려갈 수 있고, 이제 대의 물림을 시작한 상제와는 비견되지 않을 만큼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젊은 왕이었다.
상제라 해서 그를 말릴 것인가, 스러지는 휘가 그의 앞을 막을 것인가.
단 한 번.
그의 일격에 태자는 단번에 죽어버릴 테였다.
자꾸만 머릿속이 검게 물들고, 참기 힘든 분노가 까맣게 일어 눈앞을 붉게 달구었다.
영력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손가락 끝이 절로 꺼떡거렸다.
조금만 더, 의도를 가지고 살짝 공기를 가르기만 하면 바로 상태자의 코앞에 그가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상제가 말릴 틈도 없이 바로 죽여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었다.
괘씸하고, 도의를 지나쳤다 한들 곧 즉위를 앞둔 ‘상제’였다.
염휘 역시 새로운 상제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새로운 천의 주인을 함부로 꺾는 것은 여전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결핍을 경험해본 지존의 마음이란 그러했다.
“하아…….”
치열한 갈등에 속에서 불이 이는 것 같았다.
억누르기 힘든 분노에 터지는 한숨에 서리가 맺혔다.
죽여버릴까.
죽여버려도 될까.
소희를.
감히.
온갖 것들이 조각이 나서 그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었다.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환의 마음과 염휘의 이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환을 충동질하는 시끄러운 소리는 가까이에 둔 아수라와 풍천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지금도 풍천은 상태자를 벌해달라 그에게 고하고 있었다.
“군대를 내주십시오. 허해주십시오. 소장 단박에 상천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정말로 군대를 일으키고 징벌할 참이라면, 그때 가서 염라의 불들을 모으는 것이 나았다.
아니, 군대를 일으키는 번거로움까지도 필요 없었다.
태자를 벌해, 죽음을 선고할 것이라면 단신으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했다.
그것은 군대처럼 반나절이나 걸리지도 않을 테였다.
지금 당장.
어느 때라도.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튀어나가려는 환의 손가락을 염휘의 이성이 다잡아 누르며 천의 무게를 떠올리던 그때, 죄를 청한 후 말이 없던 아수라가 풍천에게 무감한 목소리를 냈다.
“별을 찬탈당하였습니다!”
“찬탈이라? 납치이지요.”
풍천의 이야기에 아수라가 정정해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같은 고함이었다.
“지존의 반려이지. 그러기에 달 마마라 부르는 것이고. 그런 분을 빼앗긴 것이 찬탈이 아니면 무언가! 이것이 고작 납치로 설명될 일인가?”
“고작 영입니다.”
아수라는 풍천이 저를 세 번째 불로 취급하며 하대를 하자, 그 역시 끓어오르는 분기를 누르며 공대를 하기 시작했다.
맞붙을 상대는 염라의 불들이 아니었으니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는 쪽이 조절해야 함이 옳았다.
“고작 영이라니! 아수라!”
“사신의 문을 건너는 것을 영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것입니까 풍천.”
흑요석을 닮은 까만 눈에 은근한 불이 타오르며 그를 직시했다.
“영 하나를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에 반박하실 수 있습니까?”
그 잘난 명분에 정말로 발목 잡히시려 애쓰시는 겁니까?
저라고 해서 당장에 도륙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이러는 것입니까.
마냥 용서하는 것은 저도 싫습니다.
아수라는 풍천을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그렇지.”
아수라와 풍천의 말싸움을 듣고 있던 염휘가 바짝 마른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목소리만큼이나 마른 손가락이 움푹한 눈두덩을 가렸다.
골치가 아픈 듯 눈을 가리고서도 염휘는 한참을 가만있었다.
아수라는 비교적 냉정하게 사실을 짚었다.
그 역시 분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수라가 바라는 치죄는 보다 합리적인 것이었다.
“아수라의 말이 맞아. 군대를 일으킬 명분이 없다, 풍천. 소희는 아직 ‘영’의 신분을 벗어나질 못했어.”
그리고 아수라의 날카로운 지적은 상천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던 환에게 얼음물을 끼얹은 듯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며, 귀왕 염휘가 다시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풍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풍천은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차마 수긍할 수는 없어 이를 갈아댔다.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니 말을 가리십시오.”
아수라는 저 역시 잔뜩 흥분해 있으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냉하기 그지없었다.
거칠게 솟은 동공이 풍천을 향해 쏘아지듯 들이박혔다.
“상태자가 직접 내려왔습니다. 아직 그의 자취가 남겨져 있으니 무단으로 영을 탈취했다는 것으로 일을 끝내십시오.”
“군대를 일으키십시오. 염휘시여. 저는 이 말도 안 되는 명분 따위에 휩쓸리고 싶지 않습니다.”
“풍천 진정하라.”
염휘는 아수라의 말에 빠르게 냉정을 찾았다.
여기서 그가 감정에 휩쓸려 움직이면 ‘명분’마저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태자가 고작 영을 납치하러 하계까지 길을 냅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런 수치를 그냥 참고 넘기란 말씀이십니까!”
군대를 내어 주십시오!
풍천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염휘에게 소리를 질렀다.
실핏줄이 돋아 이미 불긋해진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꼭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불허한다.”
그런 그의 간곡한 청을 염휘가 단박에 물렸다.
“염휘시여!”
대전의 공기가 찢어질 듯 풍천이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른 건 그때였다.
공기가 일순 터져나가듯 크게 떨리며 파공음을 냈다.
“커헉.”
“군대뿐이더냐.”
황금으로 물든 홍안이 타오르듯 불을 뿜었다.
“군대만 보내고 싶겠느냐, 살리고 싶어 이러고 있겠느냐. 짐이.”
분노에 떠는 숨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짐이. 염휘가 아니라 환이기만 하였다면 당장에! 당장에 그 건방진 것의 명줄을 짓이겨 버릴 것이었다!”
단번에 옥좌를 박차고 날아와 풍천의 목줄기를 죈 염휘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달을 깎아 만든 듯한 유백색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은 지옥문을 열 때의 ‘귀왕’의 모습이셨고, 청천의 전에서 요괴를 쓸어낼 때의 염휘의 얼굴이었다.
“크어억.”
“눈 가리고 아웅이라 하였더냐!”
“염휘시여!”
“그 짓을 하여야 하는 짐의 마음은!”
“염휘시여!”
풍천의 얼굴은 거의 흙빛이 되어 있었다.
아수라가 이성을 잃은 듯한 염휘를 재차 부르다 막, 그 손에 영력을 두텁게 올릴 때였다.
으르렁거리며 풍천에게 사납게 을러대던 염휘가 그를 들어 올린 손에 힘을 풀어 풍천을 바닥에 내려놨다.
들어 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갈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풍천이 아니었다면 언제 노호성을 터트렸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염휘는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짐의 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르고 섬세하게 생긴 손이 황금으로 물든 눈을 가리며, 읊조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풍천도 아수라도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영을 탈취했다는 것조차 밝히시기 싫으시다면, 염휘시여. 소장을 보내주십시오. 아니. 그저 한나절만 모르는 체하여 주십시오.”
무거운 침묵을 가르고 입을 뗀 것은 아수라였다.
“소장의 실책이오니, 소장이 직접 수습할 수 있도록 그저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흔적도 없이 모셔올 것입니다.
한 무릎을 꿇어 고개를 떨구는 그를 따라 흑발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아수라의 표정은 그대로 감춰졌다.
감춰진 그의 표정이 어떻든 염휘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불허한다.”
“하오나!”
목청을 돋우는 아수라를 향해, 염휘가 손을 뻗었다.
내밀어진 손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 흔들림 없었다.
그리고 길고 곧게 뻗은 손이 돌아 손바닥을 보였을 때 손바닥 위에서 빚어지는 것은 새였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머리가 쑤욱 올라오더니 이내 6척의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발톱이 그 부리만큼이나 위협적이고 날카로워 맹금류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새는 전신이 황금빛이었다.
날개깃 끝을 물들인 은근한 홍조가 하얀 가슴털과 비교되어 더욱 선명하다.
매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새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늠름한 자태가 아름다운 이 새는 왕의 전령.
금시조.
“금, 금시조?”
풍천조차 새의 모습에 말을 더듬고 말았다.
“상제께 설마.”
염휘는 아수라의 말에 답해주지 않았다.
“걱정 말아라, 짐은 허언하지 않아. 태자의 목숨을, 젊은 상제의 명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짐의 것은 돌려받아야겠다.”
금안을 한 채 넋이 빠진 것 같은 염라의 불을 내려다보는 염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선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짐과 해로하기로 약조하신 분이 아니더냐. ‘영’이긴 하나 반드시 돌려받아야겠다.”
아수라는 굳이 소희를 ‘짐의 것’이라고 지칭하는 염휘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놓을 수 없이 절박하지만, 상천을 혼란에 빠트릴 수도 없는 젊은 왕의 깊은 배려였다.
더없이 솔직한 그의 고백이기도 한 그 말을 금시조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염휘는 팔뚝을 움켜쥐고 까만 눈을 깜빡이는 새에게 다정히 웃어주었다.
“알겠느냐. 상제께 아뢰거라, 태자께서 가져가신 짐의 것을 돌려주십사 한다고. 내일 찾아뵐 것이라고.”
실수는 누구나 종종 하지 않느냐.
염휘는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을 한 채 금시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언을 담아주었다.
“곧, 천신이 되실 분을 배웅하는 날을 조금 당겨 뵙고자 함이라, 그저 핑계거리일지도 모르겠다. 놀라시지 않게 차분히 전하거라.”
말을 마친 염휘는 그대로 팔을 크게 휘둘러 새를 하늘로 쏘아 보냈다.
마치 황금빛 폭풍우가 몰아치듯 눈부신 잔상을 남기며 새가 단번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충직한 가신들에게 금시조가 듣지 못한 한마디를 더 남겼다.
“한 번은 천의 무게를 아는 자의 배려였다면, 두 번은 그를 아꼈던 형 된 자의 마음이었으니. 세 번째에는 상천을 지옥불로 살라버릴 것이다.”
“염휘시여.”
“더 이상은 내게 남은 것이 없으니, 아니 그러하냐.”
염휘는 저를 부르는 아수라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러나 분노와 초조함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홍안은 상처로 얼룩져 그를 바라보는 아수라의 표정 역시 그 마냥 일그러졌다.
“아직 이르다. 아수라. 그런 표정은 아직이야.”
염휘는 고통으로 찌푸려진 아수라의 표정에 혀를 차더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풍천까지 한번 훑어보았다.
“내일, 다 같이 상천으로 갈 것이니 차비들 하여라.”
“저희도요?”
“그래, 짐에게 세 번을 참으라 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짐도 그건 내키지 않는구나.
염휘는 코웃음 치며 일어선 그대로 걸음을 옮겨 대전을 빠져나갔다.
“짐의 갑주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아수라와 풍천은 염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청천의 전 이후 한 번도 걸치지 않았던, 왕의 갑주를 청하는 염휘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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