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85화 (85/114)

85. 비틀린 웃음 (5)

2018.05.25.

차마 태자의 얼굴을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로 꺼내지 않은들 저 참혹한 심정을 모를 것인가.

감히 그의 심사를 제 망극한 눈물이 더럽혀서는 안될 일이었다.

천관은 이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든 오욕이며 치욕이라 생각했다.

태자께서 견디시는 것을 저 역시 못 견딜 리 없으니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는 말을 아꼈다.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으시니 기다리기도 한참.

태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미동도 없이 허공 너머 어디 아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관은 태자께서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아우들을 불러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도의도, 명분도 좋았지만 이대로라면 ‘휘’를 놓치게 생겼으니, 정 안되면 천관 그라도 내려가 휘를 납치해볼 요량이었다.

이 한목숨 주인을 위해 값지게 쓰일 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고양감으로 아프도록 뻐근해졌다.

“그럼 소신은…….”

이만 나가보려 한다는 천관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새로이 힘을 받으시는 분께서, 이 망극할 소식에 그저 예전처럼 후원 전경이나 보시며 마음을 달래실 것이라 생각한 건 그의 착각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네?”

천관은 뜬금없는 소리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으나, 태자는 더 이상 천관에게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직접 다녀와야겠다.”

“전하!”

다급함에 목소리가 불경하게 뾰족해졌으나, 태자는 그런 천관을 나무라는 대신 빙긋 웃었다.

“도리라니 웃기지 않느냐?”

“하오나!”

“내게 도의나 도리 명분을 따질만한 상황이 언제는 주어졌었느냐?”

이것은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이냐?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데 혼자 순리대로 풀어가려 하니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천관이 태자의 말에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오나.”

소신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천관이 할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안다는 듯 태자는 진심으로 자애롭게 웃어주었다.

가볍게 젓는 고갯짓을 따라 찬연한 백금발이 햇살처럼 흩어져 내렸다.

“가신의 죽음으로 비를 얻은들 기꺼울 것이냐?”

“기쁘게 죄를 받을 참입니다.”

천관은 아우들의 업을 떠올렸다.

백기전에 상제의 죽음을 간원하던 지관과 심연의 물을 퍼다 올린 수관의 이야기를 너무 늦게 안 자신을 탓했다.

태자를 붙들어 놓았다 막연히 믿고 방만하게 굴었던 사이 아우들은 지우지 못할 업을 자처하며 물심양면으로 태자를 보필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은 그의 차례였다.

“상천의 주인 되실 분께 조그만 흠도 내고 싶지 않은 소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천관.”

차갑게 생긴 얼굴을 해서는 언제나 냉정하게 아우들을 꾸짖던 천관에게서 터져 나오는 불같은 충심에 태자가 기쁜 듯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천관의 생각은 틀렸다.

잘게 떨리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속박의 권능.

상제의 마지막 힘을 내려받느라 태자의 영력이 불안정해 언령이 떨려 나왔을 뿐, 그것이 태자의 마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천관은 순식간에 돌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

눈동자도 돌릴 수 없을 만큼 뻣뻣해진 몸은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언령 하나도 버겁다니.”

조금 전까지 천관을 달래던 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만큼 냉담한 목소리가 차게 울렸다.

“천관, 일각이면 언령은 풀릴 것이다. 허나 너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아우들을 단속하고 있거라. 금세 다녀올 것이니라.”

천관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굳어 있는 자신이 답답했다.

하지만 용을 쓰는 것과는 별개로 겉으로 보이는 것은 미동도 없는 모습이었다.

다급함과 절박함에 절로 눈물이 터졌다.

“……울지 말거라. 너희의 충심을 믿지 못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옅은 한숨과 함께 태자는 허공에 비쳐든 태양빛을 두 손으로 친히 잡아 길을 냈다.

두 손에 잡힌 햇살이 두 조각으로 길게 갈라지고 그 사이로 황금으로 물든 길이 났다.

다리가 딛고 있는 이 바닥 저 밑 어딘가로 끝이 보이지 않도록 길고도 깊숙이 나 있는 저 길의 끝에 누가 계시는지 알 것 같아 천관은 손을 뻗으려 애썼다.

이미 길을 내 들어서려는 분을 잡으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투둑투둑-

허나 그에게 허락된 것은 눈물뿐.

천관은 핏발 어린 눈 가득 한껏 눈물을 머금고 쉬지 않고 떨궈냈다.

“허나 모든 것은 순리를 벗어났고, 더 늦기 전에…….”

태자의 뒷말은 잔뜩 흐려졌다.

언령에 붙잡힌 천관이 죽을힘으로 발악을 하는 통에 그의 핏발 오른 눈은 이미 핏줄이 터져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 핏줄기.

피눈물이었다.

태자는 몸을 돌려 황금의 길에 발을 딛기 전 마지막으로 천관을 바라보았다.

“염려 말거라, 이러나저러나 내게 정해진 운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면 적어도 후회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끝’을 예고하는 태자의 처연하고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리고 태자는 미련 없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크으으…….”

그의 등 뒤로 천관이 필사적으로 짜내는 신음이 가늘게 울렸다.

일각이면 풀릴 언령이라고 했건만, 그것은 불안정했다.

마지막 힘이 깃드는 순간은 언제나 위태로웠다.

그간 스며들었던 모든 힘과, 마지막 조각이 뒤섞여 완벽한 상제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태자의 영력은 무척 불안정했다.

조절할 수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힘이 재배열 되는 동안엔 영력을 끌어다 쓰기도 벅찼다.

지금의 언령도 태자가 최선을 다해 펼친 것이었을 터.

천관은 저가 죽을힘을 다하면 깨트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태자의 한걸음마다 심장이 깨져나가는 듯 극한의 절망이 들이찼다.

천관은 신음을 시작으로 언령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두 눈에 흐르는 피눈물이 땀과 뒤섞여 단정한 얼굴이 지옥에서 건져 올린 악귀처럼 엉망이었다.

“크아아…….”

드디어 손가락이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전신을 옭아매던 무형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귓가에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파열음이 울렸다.

파창창----

온몸을 후려치는 날 선 감각.

천관은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털썩 꿇린 무릎이 절로 떨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탈진한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천관은 필사적으로 기었다.

일어설 수 없으니, 기어서라도 태자를 쫓아가 말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길은 태자가 내었고, 그것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은 길을 낸 자가 허락한 이에 한함이라.

천관의 손은 햇살 밖에서 차갑게 튕겨 나갔다.

“전하!”

울음을 담은 비명 같은 그의 새된 목소리에도 태자는 돌아보는 법 없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발자국에 수십 걸음씩 멀어지니, 태자는 이내 점처럼 작아져 버렸다.

“돌아오십시오! 아직 돌이킬 수 있사옵니다!”

목에 핏대가 솟도록 천관이 태자를 불렀으나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내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눈을 찌르는 황금빛 길만이 남겨지도록 천관은 태자를 목놓아 불렀다.

“전하! 소신을 보내십시오! 돌아오십시오!”

천관은 아예 악을 쓰듯 고래고래 소리를 높였다.

귀가 쨍하게 울릴 만큼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도 태자의 입매에 물린 미소는 지워질 줄 몰랐다.

돌아오라니.

태자는 힘이 돋은 두 다리로 단번에 수십 걸음을 거리를 걸으며 빙긋 웃었다.

등 뒤의 천관이 어떤 음성으로 어떤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부르고 있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지만 돌아보지 않은 것은 그의 미소에 경악할 충직한 가신을 배려함이었다.

일주일이라 했었다.

기다려 준다면, 상제의 모습으로 맞으러 갈 것이고.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면, 손을 내밀 것이라 다짐했다.

폐허가 된 태자전을 보며 태자는 마음을 다졌다.

운명이 내려주지 않는다면, 그가 나서서 가질 것이라고.

평생에 원한 단 하나이니 이제는 허락하시라고.

제힘으로 가지리라 다짐했다.

단지 그것을 삼관대제는 몰랐을 뿐.

태자는 빛으로 낸 길을 걸으며 웃었다.

“진작 이럴 것을.”

느긋한 음성에 조금 전의 서글픔이 묻어날 리 만무했다.

평생에 바란 ‘마음붙이’를 모시러 갈 참이니 이 아니 기쁠쏘냐.

태자는 산책이라도 가는 듯 쭉 뻗어난 길을 휘적휘적 긴 걸음으로 걸었다.

천마로 달려도 인계까지 반나절.

상천에서 인계를 지나 하천으로 내려가야 하니 하루 내내 걸어야 마땅했지만, 태자의 두 다리는 이미 상제의 그것.

힘이 충만하게 차올라 천마와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영력이야 불안정하다지만, 육신은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그저 산책을 가듯 가볍게 발걸음에 힘을 올리기만 하여도 될 것이었다.

태자는 가볍게 손을 휘두르며 기꺼이 걸음을 옮겼다.

눈치 보며 애만 끓인 지 이십 년.

그리고 두 눈 뻔히 뜨고 소희를 귀왕께 빼앗긴 지난날이 그 이십 년보다 억겁처럼 길다 느껴졌다.

그사이 마음을 빼앗기신 것인지, 저를 경계하던 눈빛이 떠올라 가슴이 지끈거렸지만, 다시 상천으로 모셔 찬찬히 오해를 풀면 될 일이었다.

이상하게 다들 태자가 ‘휘’에게 집착한다 했지만, 그건 오해였다.

태자는 마음붙이를 바랐을 따름이었다.

어린 태자 시절, 다정한 모친을 바라였고. 장성한 사내가 된 지금 제 곁에서 평생 함께할 이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저 휘였을 뿐.

그는 소희를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때때로 떠올렸다. 작은 산새 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지던 산길에서, 그의 이목을 끌던 고운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귀엽던 모습.

그저 귀엽다 생각하였건만, 그녀의 곁에 머무르게 된 것은 삼관대제의 생각이었다.

‘휘께서 두 분이시라니. 연유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곁을 지키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려고 인계로 오시게 된 것 같사옵니다.’

‘인연입니다.’

입을 모아 휘와 엮었다.

작은 것이 참 귀엽구나 하던 생각이 옆에 두고 지켜보자니 매일같이 눈에 익어 어느 날서부턴가는 보이지 않으면 궁금했다.

‘역시 운명입니다.’

저런 것이 휘라고.

콧방귀를 뀌며 핀잔을 주었다.

자꾸만 관심이 쏠리는 것은 휘라서가 절대 아니었다.

귀엽던 것은 제 아비만큼이나 착하고 순했다.

욕심부릴 줄도 모르고 저 먹으라 불러다 손에 다디단 것 쥐여주면 쪼르르 저보다 어린 것을 불러다가 같이 먹기 일쑤였다.

‘역시 휘이십니다. 얼마나 자애로우신 분이십니까.’

그럴 리가.

입을 모으는 삼관대제의 말에 늘 속으로 핀잔이었다.

휘라서 자애로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태자의 모친이신 금번 대의 휘께서 그를 얼마나 모질게 대하시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가 인계로 어떻게 발을 딛게 된 것인지 그새 잊은 것인가?

허나 제 입으로 모친을 흠낼 순 없으니 매번 속으로만 통박이었다.

천성이 순한 것이지.

천성이 어여쁜 것이고.

타고나길 원래가 귀여운 사람이지.

태자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소희를 보며 헛헛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채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잦은 병치레를 하는 소희를 보며 늘 애간장이 녹아나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또 앓아 누었더냐?”

“가을이니 고뿔이 들었습니다. 쿨럭.”

“고것 참.”

찬바람이 스미는 계절이건만, 제 아비는 두툼한 솜옷이며 솜털배자 둘러줄 생각은 않고 동구 밖 걸인을 불러다 밥 먹이는 일에만 골몰이었다.

“요것 먹거라.”

마땅찮으니 나가는 목소리라고 고울 리 없었다.

“괜찮습니다. 선비님이나 드십시오. 쿨럭쿨럭.”

“정과야 차고 넘치는 것이니 같잖게 사양 말거라. 누가 어린것에게 어른 말씀 밀어내는 것이라고 가르쳤느냐?”

“……고맙습니다.”

나무라듯 몰아세워서야 겨우 도라지정과를 받아드는 작은 손이 참 어여뻤더랬다.

그것이 과연 휘여서였을까.

태자는 걸으며 웃었다.

휘라서가 아니야.

그저 소희가 착하고 선한 이였던 것이었지.

저런 고운 아이 탐내지 않을 이 누가 있을 것이라고.

그 모습에 매료된 것, 그것이 그녀가 휘가 아니든 그녀를 욕심낸 것이 이 고약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휘라서가 아니었건만, 휘였기에 그랬다 하니 그런 것인가 했었다.

그건 태자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는데 모두들 태자가 소희가 휘라 집착한다 생각했다.

아무렴 어떠랴.

무엇이 먼저이건 간에 마음을 준 것은, 마음을 바라게 된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인 것을.

“아니, 소희가 휘를 타고 난 것이 천운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태자는 미소짓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풀거리는 백금발 사이로 빛을 머금은 청명한 눈동자가 누군가를 한껏 머금고 한차례 떨렸다.

지금 태자가 소희를 되돌릴 ‘명분’이 그녀의 운명밖엔 없으니, 그녀가 휘인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인가.

휘라 괴로웠으나 마지막에 기댈 곳 역시 그것뿐이라니.

고운 미간에 절로 실금이 지어진다.

그녀를 바라는 이 마음이 결국 폄훼되겠구나 싶어 서글펐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고 아쉬운 건 그였으니 상제가 되어 빌 옆자리를 채워달라 그녀에게 읍소할 것이다.

며칠 후에 어엿한 지존이 될 것 아닌가.

이런 처지를 살펴봐 주시지 않을 만큼 야박한 분이 아니셨다.

태자는 새 전각의 주인을 찾아 걸음에 속도를 냈다.

아침에 출발했으니 정오께에 뫼시고 오리라 짐작되었다.

혼자 걷는 이 길에 곧 고운 분과 함께 올 것이니, 절로 흥이 돋았다.

등 뒤에서 울리던 천관의 목소리는 진작에 잊혀진 지 오래였다.

*

“태자전하!”

시큰거리는 숨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늘어질 때까지 태자를 부르던 천관이 네발짐승처럼 기다시피 태자궁을 빠져나왔다.

온힘을 다해서 태자를 불렀다.

돌아와 주실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희망을 놓지 못한 탓이었다.

잔뜩 쉬어버린 목에서 더 이상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천관은 그 누구에게든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했다.

천관의 급한 손짓이 작은 새를 하나 불러들였다.

기력이 쇠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가 새의 발목에 ‘별을 거두러 태자께서 하계로 가셨다.’라고 짤막히 적어 새를 날렸다.

단 한 문장이었다.

지관이든 수관이든 근처의 누구든 보거든 저를 도우러 오라 간절함을 담아 날린 것이었다.

새는 화원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간신히 너럭바위에 몸을 기대 앉힌 천관은 그런 새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했다

새가 어서어서 제 아우들을 불러모아 오기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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