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비틀린 웃음 (3)
2018.05.18.
말없이 이어지는 시간이 한참이었지만, 환도 소희도 침묵이 주는 무게가 불편하지 않았다.
떠올렸을 것은 다른 감정이나, 그들이 그렸던 것은 같은 이였다.
서로에게 말로 전하지 못할 감정이 충만하게 들어차며, 묻어둔 기억이 추억이 되어 떠올랐다.
그리고 환은 문득 소희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대?”
“네.”
“부친께서 가산을…….”
“모두 기민을 위해 쓰셨답니다.”
모두 제가 베푸는 것이라 그리 말씀하셨어요.
소희는 작게 말을 덧붙이며 억지처럼 웃었다.
“아마, 제가 혼자 남겨져 험한 꼴을 당할까봐 그러신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을.”
환은 소희의 말을 단번에 부정했다.
“달 어미로 사랑받으시라 하신 겁니다.”
되물을 수도 없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삼켰지만, 소희는 그저 그러려니 웃어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환의 말에는 정말이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선친께서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으셔서, 재물을 더 내어드렸더니 말씀하시길.”
‘차고 넘치다 못해 깔려 죽을 참입니다. 곤궁한 시절 저만 호사스러울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소희 귀한 자리 만백성 어미가 될 아이라 하셨으니 어려서부터 널리 베푸는 법을 가르치렵니다.’
“예에?”
‘어린아이는 부모를 본따 큰답니다. 제가 귀왕의 도움 덕에 좋은 본보기를 보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소희의 복. 맞으러 오시기 전까지 부지런히 덕성을 길러놓겠습니다.’
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정말이지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란 걸 알 수 있어서.
오랜만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 너무도 생생해서 소희는 두 눈을 활처럼 휘며 웃고 웃었다.
“그러셨을 분입니다.”
“허나, 그대를 이토록 곤하도록 키우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풂도 적당히 하실 것이지.
그의 목소리에 깃든 안타까움 덕에 환이 하는 통박에도 웃었고.
고지식한 아버지가 염라대제를 만나 얼마나 결연한 의지를 다지셨을지 그 긴장했을 모습이 그려져 웃고 웃다가 그만 눈물이 났다.
“저런,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닙니다.”
“알아요. 오랜만에 그리운 분 이야기를 들었더니 주책이 터졌습니다.”
소희는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으며 울며 웃었다.
환의 이야기 속 과거와 그들의 극악했던 첫 만남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비어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소희가 잊어버린 기억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하나하나 알면 알수록 소희는 환에게 미안했다.
산길에서 분노하던 모습 뒤로 숨겨진 그의 배신감과 슬픔이 이제는 조금씩 보였다.
무얼 잊은 걸까.
저렇게 상냥한 이가 그토록 무섭게 변했을 정도라면.
잊혀진 기억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을 빼곡히 채웠다.
“많이 아팠느냐? 물놀이도 나오지 않고.”
“예에?”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대화가 떠올랐다.
“물놀이?”
“네?”
뜬금없는 소리에 되물을 수밖에 없지만, 소희는 오히려 자신에게 반문하는 환에게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저 목소리, 당신의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기억은 떠오를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고 착각인 양했다.
“아닙니다.”
소희는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었다면 백번이고 공들였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아수라전을 찾아가는 오솔길 아래서 시작된 기억의 균열.
왜곡된 기억과 비어버린 순간들.
그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소희가 사신의 문을 모두 넘게 되면 전부 해결될 것이다.
소희는 그렇게 믿었다.
“차가 다 식었습니다. 새로 내오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이만 가봐야지요.”
환은 자신을 청하는 소희에게 아쉽다는 듯 살며시 거절을 전했다.
지금 자신이 소희 곁에 있어 아수라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만 내궁 지척에 밤의 아수라의 기척이 선명했다.
‘하여간.’
이렇게까지 달 마마를 아끼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소희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아수라와 소희의 기묘한 관계에 환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염라의 불과 삼생을 나눠 가진 달 마마라.
이미 시작부터 남다르긴 했다.
밤과 낮의 아수라들끼리는 등을 맞댄 전우의 느낌이라면, 소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마치, 어미새랄까.
지극하고도 애정 어린 태도는 아수라가 교아를 대할 때와 일견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환은 소희가 사신의 문을 모두 건너기 전까지는 아수라의 세 번째 목숨을 소희에게서 걷어내지 않을 참이었다.
만에 하나.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과연 아수라의 목숨이 급박한 순간 소희의 영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순조롭긴 하지만 만사불여튼튼.
그때였다.
‘과연 순조로운가?’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환은 숨을 들이켰다.
‘이미 네 손에서 두 번이나 놓쳤던 별이야. 과연 순조로운가?’
느긋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환의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
순조롭다.
환은 요동치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누구에게인지 모를 답을 돌려주었다.
이미 소희가 남기로 했고, 자신 역시 보낼 마음이 없는바.
그것보다 더 강력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태자가 또다시 소희를 데려간다 한들, 그가 상제가 되어 구애를 한들.
소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환은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치미는 불안감에 이미 손바닥이 축축했다.
아니라고 하나, 불안하지 않다고 우겨도 마음이 쓰였다.
“어서, 사신의 문을 넘으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빠르지만, 짐의 마음이 안달을 내고 맙니다.
환은 미안한 듯 용서를 구하며 소희의 작은 손을 잡아들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손등을 꾹 누르는 그의 입술이 따뜻했다.
“바라는 마음이야, 똑같은 것을요.”
소희는 수줍은 듯 볼을 붉히면서도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차 한 잔 더 청해도 되겠습니까.”
결국 일렁이는 마음에 환이 밖에서 마냥 서성이는 아수라를 눈감고 말았다.
도저히 이 고운 분을 두고는 못갈 참이니 차 한 잔은 더 마시고 일어날 참이었다.
차 한 잔만 더 하며 서로를 청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그 밤.
사신의 문이 다시 열릴 거란 건 아무도 몰랐다.
궤를 달리한다지만 하루걸러 문이 열리는 것은 귀왕인 환조차 듣도 보도 못한 소리임에랴.
“하…….”
절로 터진 누르지 못한 신음이었다.
찻주전자를 쥐고서 하얀 다기잔을 채고 있던 소희는 희미한 신음을 듣지 못했다.
소희의 등 뒤에서 가늘게 그어져 내리는 은빛 실선.
실선이 그어지고, 이내 그 덩치를 불리며 문틀을 꺼내 들듯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으나, 환은 저도 모르게 소희의 손을 잡았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작은 손이 손바닥 안을 채우자 그제야 숨이 터졌다.
사신의 문이 언제부터 귀왕을 놀라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환에게는 그랬다.
사신의 문은, 반갑기도 하고 꺼려지기도 하는 것.
어서어서 사신의 문을 넘어 생의 좌를 받아오세요, 하고 조금 전에 그녀의 등을 떠민 것은 자신이었으나, 반대로 소희가 견뎌야 할 고통이 제 것인 양 생생해 마냥 기쁘지만 않았다.
“그대.”
“네?”
기쁜 듯 대답을 하는 소희의 목소리에 섞인 어리광에 환은 더욱 입을 떼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사신의 문은 그사이 착실히 준비를 끝내고 이제 그 문을 열려고 했다.
더 이상은 머뭇거릴 수 없었다.
“오늘 밤에도 사신의 문이 열렸네요.”
“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어제 열리지 않았습니까?”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소희는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맞아요, 이건 짐도 예상하지 못한…… 아니 유례없는 일이랍니다.”
“아…….”
그의 말에 소희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일지 짐작이 가는 표정에 환 역시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고단하시겠지만.”
“걱정 마세요.”
언제고 해내야 할 일.
소희는 금세 말쑥해진 표정을 해서는 환과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지켜봐 주실 테지요?”
그에게 의지하듯 응석 부리는 말이었으나 표정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의젓했다.
오히려 환을 다독이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물론이지요.”
격려받아야 할 분께서 오히려 달래주는 모습에 환은 옅게 지은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힘 있게 끄덕였다.
“아…… 오늘로써 다섯 번째 관문입니까?”
“네.”
“그렇다니 염려가 덜합니다.”
뭔가를 짐작한 듯, 심란해하던 환도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사신의 문에서 쏟아지는 빛무리는 언제나 황홀했다.
소희는 제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동요가 일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렸다.
그 어떤 감정이 솟더라도 모두가 그저 지나간 일.
더 이상 묶이지 말자고 다독이고 다스렸다.
맞잡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하길 수 분.
드디어 언제나처럼 사지 끝까지 멀어지는 감각이 그녀가 관문 안에 제대로 들어섰음을 알려왔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환에게는 감춰두었던 억눌린 긴장감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빠르게 두근거리는 맥이 곧 닥칠 시험에 겁을 먹고 있었다.
후회든 미련이든 그 어떤 것이든 쉽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무서워 힘들었지만, 서글픈 건 서글퍼서 쉽지 않았다.
이번엔 또 어떤 감정이 자신을 옭아맬 것인가.
소희는 두 눈을 꾹 감고서 닥칠 시험을 기다렸다.
환한 빛무리는 그 기세를 점점 더 피워올려, 예전처럼 사방을 에워싸 모든 것으로부터 소희를 격리시켰다.
혼자인 듯, 고립시키는 그것이 시험에 든 이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드는지 소희는 이제는 잘 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희는 무려 귀왕께서 친히 격려를 하는 영.
맞잡은 손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새삼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이인지.
충만한 애정을 부지불식간에 생생하게 체감하고 말았다.
소희는 가슴이 기분 좋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긴장감도 잊을 만큼 기분 좋은 설렘에, 관문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잊고선 잔잔한 미소를 빼물었다.
기분 탓인지 오늘은 그 빛이 무척 다정하기도 하다.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소희, 그대.”
전신이 노곤해지려는 찰나, 귓가를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끝났습니다.”
달빛만큼이나 상냥한 남자의 시선이 조용히 맞닿아 왔다.
“벌써요?”
“네, 벌써라기엔 이 각이나 지난 것을요?”
소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너무 편안하고 따사로운 느낌에 흠뻑 취해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는 기분 좋은 감각만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었을 따름이었다.
“이 각이나요.”
믿기지 않았으나, 환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등 뒤로 비쳐들던 달빛이 얼마나 기울어졌는지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고되지 않으셨군요?”
“……좋았답니다.”
“저런.”
미려한 사내가 터트리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잠잠하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대라면 쉬이 넘길 줄 알았다지만, 즐기실 줄이야.”
부드럽게 휘어진 눈에 담긴 대견함에 뿌듯할 새도 없었다.
“어떻습니까.”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소희는 환에게 달라진 제 모습을 물었다.
기꺼운 기색이 잔뜩 물린 홍안이 느릿하게 전신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조바심이 일었다.
어디가 얼마나, 조금 더 그대에게 가까워졌습니까.
당신을 흡족케 하였나요?
어여뻐 보이나요?
소희는 노골적으로 묻고 싶은 말을 최대한 고르고 골라 묻고는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런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은 전에 없이 뜸을 들였다.
뿐만이랴, 소희의 질문에 기회다 싶었는지 다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마치 그의 진득한 시선에 희롱을 당하는 듯 눈길 닿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흐응.”
길고 곧은 손가락이 습관처럼 턱을 쓸고는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제, 정말 귀문의 별이라 하시겠습니다.”
환은 손가락에 감긴 소희의 은발을 집어 올려 보여주며 한껏 낮은 목소리로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그곳뿐만이 아니었건만, 환은 은근한 열이 실린 시선을 거두고는 대번에 담백한 표정을 지었다.
“…….”
불만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의 눈길에 담긴 집요함과 진득한 만족감을 보았건만.
시침을 뚝 떼고선 기껏 집어 든 것이 머리카락이라니.
그러나 소희가 환에게 앙탈 부리듯 다시 묻지 않았던 건 그가 집어 든 자신의 머리가 무척이나 흡족했던 것이다.
달빛을 머금은 듯.
환의 그것처럼 은을 품고 빛을 발하는 모습에는 절로 입꼬리가 솟아 그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뻤다.
겨우 머리 끝단만이 물들던 과거와는 달리 이미 머리의 절반이 넘게 달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제 머리채를 만지작거리던 소희는 되레 환에게 물었다.
눈을 활처럼 휘어뜨리고 묻는 그녀의 심사야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했다.
이제는 환이 대답할 차례였다.
“들다마다요. 잘 어울리십니다.”
“받지 못하면 내려주신다고도 하셔서 집착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만.”
소희는 그 말을 끝으로 제 머리타래를 자랑스레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타고 곧 달빛이 타고 흐를 것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신기하고, 어여뻤다.
물론 환과 비슷해졌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그의 곁에 서도 좋다는 허락 같고, 조금 더 그에게 어울리는 이가 되었다는 증명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에게도 내려지니 그저 신기하고 새삼 그 자태가 고와 보인다.
“제 것이지만, 탐이 나고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소희가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어 빙빙 꼬며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하신다니 저도 좋습니다.”
확연히 드러나는 소희의 만족감에 환 역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별로 서준다 했고, 그 역시 바랐지만 가슴 못처럼 남아있는 기억이 그를 못나게도 움츠러들게 했었다.
‘벽안에 금발을 내려주십시오.’
그 말을 하던 그녀의 마음이야 백번 이해가 가지만, 꽤 아픈 기억이었다.
그것은 두고두고 떠오르며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녀에게 하계의 색이 깃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기쁨 뒤에 들이치던 작은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했다.
스스로도 어이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알아도 못난 마음이 자꾸만 그를 좀먹었다.
‘좋아하시더냐? 진심으로 좋아하신 게 확실하느냐.’
마음 상처는 이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쉬이 아물지 못하고 자꾸만 근심을 사서 하는 것이다.
‘기쁜 척이 아니고?’
“어서, 저도 환처럼 되고 싶습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옅은 미소를 짓는 소희가 무척 행복해 보여, 환도 웃어버렸다.
언젠가 그가 또 의기소침해지고, 상황이 나빠진다면.
아니, 소희가 사신의 문을 모두 넘고서 정말로 귀문의 별이 되어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그는 수시로 못나게 굴지도 몰랐다.
겉으로 점잖은 체 괜찮은 척 위선을 떨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수시로 불안해하고, 때때로 의심하며 또한 더러는 스스로를 상처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괜찮았다.
환은 산길에서 서 있던 그 날보다, 첫 관문을 넘던 그 날보다,
상천으로 소희가 가버렸던 그 날보다.
매일 매 순간 조금씩 그의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도 소희도 상처 입은 이 마음이 아물어, 옅은 흉터만을 남기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무척 곱습니다.”
“어서, 머리타래가 전부 은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요것이 더 예쁘게 어울리겠지요?”
소희는 환의 말에 그가 건네준 머리꽂이를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리며 웃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환은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아물어 드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그가 수시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동안 소희는 열심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행복했다.
“은발이 되면…… 사신의 문을 건너 별이 되시면 새 머리꽂이 내드릴 것입니다. 더욱 화려한 것으로.”
“정말입니까.”
“네.”
가릴 것 없는 두 마음이 수줍게 마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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