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바람을 머금은 향내 (13)
2018.05.07.
아침이면 걷히려나 했던 비는 늦도록 계속 이어졌다.
사방을 울리는 촉촉한 소리는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눈꺼풀이 풀어진 마음만큼이나 늘어져 자꾸 감겨들었다.
소희가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다 비비길 수차례.
지켜보던 아수라에게서 다정한 말이 건너왔다.
“졸리십니까?”
아수라가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으며 소희의 안색을 살폈다.
“아,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노곤해지네요.”
졸음에 겨운 표정이 민망해 소희가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아수라의 답은 무척 담백했다.
“빗소리 문제가 아니라 간밤 제대로 주무시질 않아 그러겠지요.”
아수라의 시선은 소희가 간밤 새로 지어놓은 망토에 닿아있었다.
가벼운 책망을 담은 말에 소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수라의 시선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왔다.
“다음에도 이러시면, 소장 아무것도 부탁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네.”
“몸을 축내가며 지어주신 옷에 아이들이 가볍게 걸칠 수가 있겠습니까.”
“……네.”
풀죽은 목소리가 나오고서야 아수라의 시선은 거두어졌다.
“흠. 흠.”
기죽은 소희의 모습에 아수라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조그맣게 움츠러든 뒷모습이 못내 눈에 밟혔다.
“소장이 넘쳤습니다.”
“아니에요. 걱정하신 것을 아는걸요.”
“야단한 것은 아니지만, 소장의 말은 확실히 무례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아수라의 사과는 그의 말투만큼이나 담백했다.
서책을 내려놓은 그는 소희에게 다가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소장의 실수를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항시 제가 많은 분께 걱정이 되는 터라…….”
“걱정은요. 늘 마음 기댈 곳이 되어주심을 모르십니까.”
아수라는 의자에 앉은 소희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그대로 꿇고선 올려다보았다.
“아닌 듯, 더딘 듯하지만, 많이 변하셨습니다.”
“……네?”
“그대로인 듯 한결같은 듯하면서도 이곳도 변하였고요.”
“아…… 네.”
소희는 아수라가 하는 말을 되짚어 본 뒤에야 이해했다.
아마도 네 번째 관문을 건너며 조금 더 뚜렷해진 하계의 색을 받은 저를 이름일 것이다.
“사념에서 더 이상 요괴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네, 월력이 하루가 다르게 온순해지고 원래의 자애로운 빛을 띠기 시작하니 사념이 굳을 틈이 없는 것이지요.”
아수라는 까만 눈을 가늘게 늘이며 웃었다.
유백색의 얼굴에 생기가 물려 더 이상 병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수라께서도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소희가 하얀 볼 위에 따스한 색을 더하며 수줍게 말했다.
“보살펴 주신 덕이옵니다.”
“!”
“늘 연약한 분이신 듯하나 항상 넉넉히 온기를 품어주시는 분이신고로.”
“아수라.”
“소장, 마마를 뫼시는 것이 더없이 즐겁고 영광되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듣기 부끄러울 정도로 과한 말에 소희가 질색했지만, 아수라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삼생을 공유하는 자로서의 집착이라 하셔도 좋고.”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힘을 담아 울렸다.
“되살려주신 소희님께 은혜 갚음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미 낮과 밤의 아수라는 소희님께 구명 받은바, 남은 생을 모두 소희님께 보은하는 데에 쓸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떠온 것 같은 짙은 눈동자가 온기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아수라의 맹세는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며, 삼생의 명이 끊어질 때까지 유효한 것. 종전같이 소희님을 맥없이 놓치고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수라님!”
소희는 아수라의 맹약에 놀라 그를 낮게 부르짖었으나 아수라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소희님. 저의 생이 끊어진대도, 밤의 아수라가 그 목숨을 다해 지킬 것이옵고, 그것은 상황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끈했던 온기는 이내 불같이 달아올랐다.
넘실거리는 열기가 아수라의 검은 눈동자에 홍조를 드리우며 전신에서 기세를 피어오르게 했다.
“염휘의 반려로, 달 마마로 서시기 전까지. 아수라가 목숨을 걸어 지켜드릴 것입니다.”
“항시…… 항시…….”
소희는 갑자기 아수라가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막연한 불안감은 상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늘 이어져 있어 그 역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수라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마무리.
지금으로썬, 아무것도 아닌 소희를 염휘가 비로 세울 수도 없고, 운명에 점지된 그녀를 탐내는 태자를 단죄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같은 문제가 모두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명분’과 ‘자격’.
이 은근하고 잔인한 고문을 마흔 아홉 날을 버티라니. 참으로 가혹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지옥 같은 세월을 근 이십 년 버텨온 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희가 하계에서 사신의 문을 여는 고로, 매 관문이 예상보다 빨리 열린다는 것.
관문을 넘을 때마다 하계에 내림하는 명부가 착실히 늘고 있다는 것.
오직 그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이 고단하고 지루한 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혼례뿐이었다.
상태자가 더 이상은 가망 없을 희망에 목매달지 않도록,
소희가 끊어주어야 했다.
“어째서 전 안된다 말씀이십니까.”
소리가 되지 못한 그의 원망이 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제 마음은 이렇게 무참히 짓밟혀도 되는 것입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절로 고개가 떨궈졌다.
“항시 모두의 넘치는 마음을 받기만 하는 터라, 마음이 무겁고…… 죄스럽습니다.”
감추고 있던 속내였다.
“어째서 제 운명은 이렇게 모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희님.”
“저는 별이 될 것입니다. 전 교아의 달 어미입니다. 자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염휘를 놓을 수도 없습니다.”
소희는 한 자 한 자 다짐하듯 힘줘 말했다.
빨개진 코끝이 그녀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뻔히 보였지만 아수라는 그녀의 다음 말을 참을 성 있게 기다렸다.
“아니, 교아가 아니더라도 전 염휘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기어코 옷 위로 짙은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저를 원해준 분이셨습니다.”
“소희님.”
아수라가 신음하듯 그녀를 불렀다.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서 저런 딱한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탓에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가 무엇을 들었는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눈물에 젖은 저 입술은 알 것인가.
“태자께 돌려드릴 말입니다. 난생처음 ‘저’를 바라여준 것이 염휘이시라 이 마음이 그만 그를 탐냈다고 용서하시라고. 할 것입니다.”
“아무도 소희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선친의 약조를 지키련다 하던 사내보다, 너를 바란다고 말해주던 이를 원한 것이 제 마음입니다.”
소희는 가책을 느끼는 마음을 변명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이번에, 말하고 올 것을.”
“아무도 소희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책 마십시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소희는 작게 도리질 치며 희게 웃었다.
“인간일 적, 몹시 기우는 혼사였습니다. 식솔들이 태자의 심부름꾼이 오면 바들거리며 파혼서가 온 것인가 근심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죄를 고하듯 아수라에게 담아둔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께서 약조하신 혼사라 하셨기에, 유훈을 지킨다 생각하였지만 잘난 사내 앞길 막는다 싶어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공자께서는 늘 다정하셨지만, 그만큼 무게로 괴로웠습니다.
이 넘치는 애정을 제가 받아도 될 것인가, 욕심에 눈멀어 죄를 짓는 것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서 다정하신 그분, 눈이 멀 만큼 잘난 그분을 제가 자꾸만 밀어낸 것이겠지요.
그런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저도 언젠간 수줍은 방심을 내어드렸을까요.
아수라를 앞에 두고 가림 없이 속내를 털어놓던 소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달싹거리던 예쁜 두 입술이 맞물려, 소리를 잊고 먼 데를 바라보던 두 눈에 무언가 잡히는 듯 빛이 새겨들었다.
뭔가를 떠올린 듯.
뭔가를 보고 있는 듯.
희미하게 머물던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그런 모습에 아수라는 궁금해할 법도 했건만, 침착하게 소희가 말을 정리하도록 기다렸다.
언젠가는 한 번쯤 정리하고 털어야 할 감정이었다.
소희는 마냥 괜찮다, 미안하다. 죄스럽다며 상태자와의 추억을 밀어 감추기 급급했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소희가 편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길 한참.
소희에게서 멋쩍은 듯 수줍은 목소리가 삐죽 새어 나왔다.
“……이건 사실, 변명입니다.”
정말 창피하기라도 한 듯 두 볼을 발갛게 달구고선, 아수라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작은 두 손이 서로를 붙잡고 비틀고 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어 바라보던 아수라까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태자께 마음이 가지 않았을 뿐이지요.”
오랫동안을 머뭇거리던 소희의 이야기란 고백이었다.
아수라는 가볍게 탄식했다.
소희의 시선은 어느새 한껏 몽롱해진 시선으로 먼 곳을 더듬고 있었다.
“전 이제 생각해보니 귀왕께 한눈에 반했습니다. 숲길에서 만난 남자에게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세상에 달빛 아래 빛을 머금은 사내라니요. 헌헌장부라는 말로도 부족했답니다.”
염휘를 그리는 목소리에 어느샌가 달뜬 열기를 실리고.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
“내 것이다 집착해주는 그 말이……. 처음이었고, 이제 와 고백하건데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은근히 마음에 울리고, 그리고 기뻤습니다. 든든했어요. 그래서 그날 일을 쉽게 용서 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염휘께 품었던 설레임을 죄로 새겨 고해하는 소희를 향해, 아수라가 단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이시니까요, 귀왕의 비가 되실 분이니까요.”
그녀의 설렘은, 첫 순간의 호감은 당연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 힘줘서.
그러나 소희는 아수라의 말에 아주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생긋 웃었다.
역시 아수라, 다정하시네요.
입안으로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까지, 소희는 무척 상냥했고. 무척 여렸다.
그 잠깐 사이, 웃음을 머금었던 두 눈 가득 물기가 한가득 차올랐다.
“전 휘이기도 했습니다. 태자에게 흐르지 못하는 이 마음을 미안해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소희는 두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단번에 훔치고는 아수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원래도 고약한 운명에, 제가 보탠 것이 아닌가 싶어 늘 마음이 무거웠답니다.”
태자께 제가 너무 잔인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비감 어린 소희의 말에 아수라는 매끈한 얼굴을 한 채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염라의 불, 환의 가신.
아수라의 의견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거기에 위안을 얻으려는 자신은 귀문의 별.
그래서 아수라의 말은 놀랍도록 명쾌했다.
“태자껜 마음이 동하지 않아야 옳습니다. 휘는 상제의 반려. 태자의 반려는 아니니 귀왕께 첫눈에 반할 수밖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귀문의 별이신 소희님.”
“……그런……!”
“잔인하다 하셨지만, 다정한 두 분께서 휘둘린 것뿐. 고약한 운명은 오직 태자만의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상쾌한 결론에는 소희의 눈물도 말라버렸다.
명쾌했고, 타당했다.
늘 가슴을 누르던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잠시였지만 걷어 내줄 법한 단호한 말.
“고맙습니다.”
소희는 아수라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전부는 아니었으나, 마음이 후련했고, 한껏 가벼워졌다.
그녀를 절절히 바라는 태자와, 그를 외면할 자신.
그리고 이십 년을 외롭게 버텨온 환.
모두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넘어야 할 고비는 분명히 있을 테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아수라 정말 고맙습니다.”
말을 맺은 소희가 아수라가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젓는 것을 바라보다, 바늘에서 실을 잡아당겨 매듭을 짓고는 이로 뚝 끊어냈다.
“이 망토 받으시고, 오늘 들은 이야기 모두 덮어 주세요.”
“소장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수라전의 사신을 이끄시는 분께서 없으셔야 되겠습니까? 언제고 염휘께서 찬바람 불 적에 귀문으로 데려가 주신다니 그때 두르세요.”
오늘 일은 비밀입니다.
소희가 다시 한번 눈물 젖은 뺨에 볼우물을 패며 웃었다.
그리고, 정오가 다된 그즈음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멎었다.
울컥 치미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환을 찾아 나선 것까진 좋았다.
호기롭게 아이들을 모두 물리고 본궁으로 향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돌고. 저기서 꺾었으니…….”
그냥 문제라면 길을 잃었다는 것 정도.
조금 전까지 운명을 들먹이며 눈물짓던 것이 꿈인 양 아스라했다.
지금 제일 걱정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니 소희는 이렇게도 가볍게 움직이는 자신의 마음에 혀를 찼다.
태자가 안쓰럽다니.
누가 누굴.
“여기--- 아무도 없어요?”
툭 터진 너른 공동.
소희의 목소리만이 되돌아왔다.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이미 되돌아간다며 발걸음을 돌린 것만 수차례.
이쯤 되면 자신은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내궁 첫 문을 지나, 대숲을 따라 걸었던 것까지는 확실했는데.
소희는 그래도 되돌아간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왔으니, 왼쪽으로 꺾어 나가볼 셈이었으나 소희가 막 문을 넘기도 전 문 너머에서 뻗어 나온 손이 소희의 허리를 낚아챘다.
“꺅!”
의도치 않은 귀여운 비명과 함께 어마어마한 힘에 그대로 딸려갔지만,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대!”
놀란 듯 들썩이는 가슴.
당황한 것이 분명한 목소리마저 근사한 울림을 가진 것은 환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진심과 반가움을 담은 소희의 말에 환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소희의 말에 지쳐버린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환은 흘러내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냈다.
그리고는 등 뒤에 열렸던 문을 가벼운 손짓으로 꾹 닫아걸어버렸다.
덜컹.
육중한 소리와 함께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까지.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것과 동시에 스산한 타격음이 울리자 소희는 움찔 놀라 환에게 바짝 파고들었다.
“내궁 아이들도 물리시고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놀란 듯 가늘게 떠는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며 환이 입을 뗐다.
“아, 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어째서 그랬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 소희는 말을 어물쩍 흐렸다.
차마 면전에 대고 보고 싶어, 보자마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그랬노라 말할 뻔뻔함까진 없었던 것이다.
“본궁에 가신다 하셨지요.”
“어찌 아셨습니까?”
“내궁서 다니러 온 아이가 본궁 아이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답니다.”
아직 안 오셨다니?
초행이라 걱정되어 멀리서 살그머니 따라왔는데 놓치고 말았지 뭐야.
불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염휘의 귀에 굉음처럼 닿았다.
이미 소희를 한번 잃었던 염휘는 소희가 없어졌다는 말에 놀라 곧장 인연의 고리를 찾아 내달려 온 참이었다.
놀란 마음에 축축하게 젖은 손이 바람에 그새 차갑게 식었다.
소희가 지척에 있었고, 이 염라궁내에 있었으니 큰일이야 없을 것이었나, 하필이면 지옥의 입구에 서 계신 것이 문제였다.
영인 그녀는 아마 홀린 듯이 들어섰을 것이었다.
지옥문 앞에는 악인들이 남기고 간 원망과 두려움, 그리고 저주가 남아 념이 되어 떠돌았다.
사방에서 삿된 것들이 노리는 것도 모르고선, 아무도 안 계시냐 목청을 돋울 적에는 그만 혀를 깨물 뻔했으나, 늦기 전에 그의 품에 들어와 천만다행이었다.
놀란 마음이 아직도 가늘게 경련하는 것도 모르고 품에 든 고운 분이 저를 혼내는 것인가 해서 눈치를 보는 품새는, 그럼에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염휘는 주의를 단단히 주어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도 잊고는 다정히 웃어주었다.
“늦으시기에 마중 나왔답니다.”
“좀 헤맸지 뭐예요. 대숲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길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설프게 지름길을 따라 오시다니.
왼쪽으로 꺾으셔야 했답니다.
염휘는 제게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소희를 향해 쓰게 웃었다.
‘어째서 혼자 오시게 한 거야?’
‘아수라님과 계시다 갑자기 염휘님 이야기 끝에 본궁에를 가신다는데, 무슨 수로 따라가니. 따라오지 말라 야무지게 말씀까지 하시는 분을.’
무슨 이야기였든, 중요하지 않았다.
도망치던 분께서, 만나러 와주셨다는 것에 염휘는 마음이 울렁여 치미는 것을 삼키기에도 벅찼다.
그러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품에 안겨드는 그녀를 온 마음을 다해 안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친 뒤의 햇살이 참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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