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79화 (79/114)

79. 바람을 머금은 향내 (12)

2018.05.04.

비는 무겁게 내리고 있었다.

한여름 장마지듯 마구 쏟아져 내리는 비에 심란할 법도 했지만 소희는 그럴 새가 없었다.

풍천의 고백을 위시로, 아수라까지.

모두 작정이라도 한 듯 소희에게 단번에 바짝 다가왔다.

거리감이 없어진 그들은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했으며, 서슴없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도 했다.

바로 이렇게.

“각대는 필요 없습니다.”

“왜요?”

“더 급한 것이 있습니다.”

태연한 표정으로 소희의 며칠간의 노고를 깨끗하게 치워버리고는 두툼한 옷감으로 망토나 만들어 달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귀문은 열풍이 부는 시기가 지나면 얼음장같이 차가워집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각대 같은 것 말고, 차라리 두툼한 망토를 지어주십시오. 사자들이 잠시 쪽잠을 자고, 추위에 몸을 감쌀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산뜻한 표정으로 ‘별’을 부리는 아수라는 능수능란했다.

어떤 의미로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교아를 기준 삼아 지으시면 다들 맞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떤 말을 해야, 소희가 조금 더 열성적으로 움직일지도 확실히 아는 영리한 가신이었다.

“신은 안 지어도 될까요?”

“망토만 제대로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수라는 소희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느긋하게 책을 손에 말아 쥐고는 망토를 짓는 것을 야무지게도 감독해주었다.

폭이 좁다, 두껍다, 끈이 짧다.

그의 지적은 끝이 없어서 소희가 첫 망토를 완성할 때쯤엔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수라는 내궁으로 퇴청하는 염휘에게 소희를 떠넘기듯 교대하고선 수라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망토는 살뜰히도 챙긴 후였다.

기진맥진해서 늘어지는 소희를 딱하게 여겨줄 법도 하건만 환은 늘어진 그녀를 보고서도 슬핏 미소를 지었을 따름이었다.

“아고고.”

삯바느질로 단련되었다 생각했는데 옆에서 수시로 눈을 번뜩이는 아수라를 두고 바느질을 하자니 잔뜩 긴장이 되어 절로 온몸이 쑤시고, 피곤했다.

소희는 절로 앓는 소리가 새나왔다.

다행히 환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자리를 비운 터라 소희의 앓는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무례하다 할 만큼 아수라는 소희를 부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바느질을 하고 종종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것은 빤히 보이는 그의 속내 때문이었다.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못하게 바삐 움직이게 하려는 아수라의 서툰 배려에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어휴, 정말이지 다들…….”

“다들?”

그사이 침의로 갈아입은 염휘가 침전으로 들어서며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서 주무시게요?”

소희는 염휘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꾸하며 말을 돌렸다.

차마 눈치챈 척하며 산통을 깨고 싶진 않은 그녀의 배려였다.

다행히 염휘는 소희의 질문에 귀 기울여주었다.

“음, 곤란하시다고 하셔도.”

“주무세요.”

아수라는 아직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낮이고 밤이고 그 육신을 움직이자면, 회복이 더딜 터.

달빛 받고 달게 주무시면 빨리 좋아질 것이라, 밤의 아수라가 팔자에도 없는 잠을 매일같이 자고 있었다.

그러니 밤 내내 풍천더러 번을 서라 할 수도, 낙오되어 궁내 선인으로 남은 아이들에게 소희를 지키라 할 수도 없어 염휘가 모르는 체 발을 디뎠다.

혼례를 올리지 않았으니 그럴 수 없다 밀어내면, 문밖에서 밤을 새우더라도 지켜줄 참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선선히 승낙할 줄이야.

“진심이십니까?”

멈칫하는 그의 손을 끄는 것은 역시 소희였다.

“침상에 올라가 먼저 주무세요.”

“그대는……?”

어쩐지 쉽다 했더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는 요것 마무리하고 갈 것입니다.”

소희는 손에 들린 바느질감을 보이며 상냥히 웃었다.

척 보기에도 두툼하고 옷감이 제법 너른 것이라 눈에 익었다.

“사자들의 망토?”

“역시,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어찌 그대가 하십니까? 침방 아이들도 여럿이니 내달라 하면 되는 것을요.”

“교아가 있는 귀문으로 보낼 것입니다.”

소희는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저으며 손에든 옷감을 야무지게 쥐었다.

“교아가 제 첫 달 아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고된 것은 똑같고 마음이야 다를 바 없을 텐데 교아에게만 제가 지은 것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흠.”

소희의 말은 일리가 있었으나 환은 그녀가 굳이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이미 하나를 지어 아수라께서 챙겨가셨습니다.”

“그럼 그것은 아수라더러 입으라고 하세요.”

네 벌씩이나 짓는 것은 무리이십니다.

환은 어떻게든 소희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소희는 무척 단호하게 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건 안될 말입니다. 감재사자는 넷이지만, 염라의 불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드니. 저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농담인 듯 진심인 듯.

그럴듯한 변명을 들이밀며 소희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제 손에 익어서 하나 짓는 것은 금방입니다. 이 밤서 하나만 더 하고 잘 것이니 먼저 주무세요.”

“그럼, 짐은 곁에서 무얼 한답니까?”

“주무시라니까요.”

“그대가 고생하는 밤에 혼자 자다니, 얼마나 무정한 이로 만들 셈이십니까.”

다정한 실랑이가 밤바람을 타고 내도록 이어졌다.

어느새 소희는 바늘을 놀리고, 환은 상소문에 답을 쓸 것이다 하여 붓을 든 참이었다.

“북쪽 샘이요?”

“음, 귀문이 있는 쪽입니다. 메마르고 뜨거운 바람이 부는 곳에 딱 한 달, 차고 습한 바람이 찾아 들지요. 그때 모여든 것이 샘을 이루었고요.”

“전 샘이라길래 굉장히 귀여운 것을 생각했답니다. 저 살던 뒷산에도 샘이 하나 있는데 물이 달고 맛있어 약 달이려고 물을 뜨러 다녔었거든요.”

“약이라니…….”

“아버님이 병환이 깊으셨습니다. 여하튼, 샘물을 뜨러 가면 가는 길은 무섭긴 해도 샘 주변에는 해가 잔뜩 들고 풀꽃이 지천이라 별세상 같아 참 좋아했습니다.”

“……흠?”

소희의 말에 환은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아마도, 혼약을 깨뜨린 그녀 부친의 이야기에 심사가 언짢아진 것이리라 소희는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기분이 별로이십니까?”

“……아닙니다.”

“언짢아 보이십니다.”

“그저…….”

환은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렸다.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모두 단 한 번도 어린 소희의 고단함,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피를 토하며 기침을 하는 아비를 두고 늘 불안해하며 온기에 허덕이던 그녀에게 돌아오던 이야기는 부친을 위한 당부였다.

네가 얼마나 곤하니, 네 마음 외롭겠구나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설은 것이라, 소희는 이 와중에도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울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무서운 산길을 건넌 아이가 위안을 얻을 것이 어디에나 내리쬐는 햇살과 길바닥에 지천으로 핀 풀꽃 따위라니.

어린 소희가 딱하다 이제야 저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 끝에 새삼스레 환에게 또다시 미안해졌다.

저 다정한 이가 분명 어떤 마음으로 근 이십 년을 기다려왔을지 눈에 선해서.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별을 맞으러 산길을 걸어 내려오다, 저를 밀어내며 혼약자 있다며 그를 경계하는 별을 보며 얼마나 상처받았을 것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서.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소희는 눈을 재빨리 깜빡이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두툼한 천을 뚫고 야무지게 솔기를 잇고, 미리 마름질한 끈을 매달고 매듭짓기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뗐다가는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좋았던 기억이라고 하시니, 저도 좋습니다.”

“……네.”

“북쪽의 샘은 그대의 기억 속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환은 분위기를 바꿔볼 셈인지 서신을 쓰던 붓을 내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곳은 바다만큼이나 너르고 광활한 곳입니다.”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커다랗다면 호수가 아닙니까?”

“그러나 샘이라고 굳이 부르는 건, 정말로 물이 솟기 때문이지요.”

“아……. 신기하네요. 멋지겠지요?”

소희는 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북쪽의 샘이란 걸 떠올려보았다.

“열풍이 가시는 날, 한번 가보시렵니까? 귀문과도 가까우니 간 김에 교아도 보고 오고요.”

환은 다시 붓을 들며 웃었다.

“갈래요. 가보고 싶어요.”

그의 말에 소희가 어떤 답을 할지 아는 눈치였다.

“으음…… 그리고 북쪽의 샘은 이름 없는 강의 끝과 맞닿아있으니 간 김에 답례도 하고 오면 어떻겠습니까?”

이미 궁리를 해둔 것인지 환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답례라고 하시면, 아! 달을 낚는다던.”

“네, 서녘의 달빛은 정말 귀한 것이라, 상제께서도 좀체 드시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냥 나눠주다니.”

“그럼 망토를 하나 더 지을까 봐요.”

“하하핫.”

“천천히 하세요. 열풍이 가시는 시기는 그대가 사신의 문을 건너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니까요.”

“전 벌써 네 번을 넘어서 금방이온데, 바람의 시기는 당길 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소희는 그의 말에 정말로 아쉬운 듯 바늘을 들면서도 연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그분 봬오면, 저도 부탁드려 달을 한번 낚아 볼 수 있을까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달빛이 정수리를 비추는 한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소희의 손에는 그녀가 장담한 것처럼 똑 떨어지게 바느질된 망토 한 벌이 들려있었다.

*

“바람이 차가운데.”

지관이 태자의 어깨 위에 도포를 두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속이 답답해서인지 그저 시원하구나.”

태자는 등 뒤의 지관에게 메마른 목소리를 내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그가 약속한 사흘이 지나가려 했다.

폐허가 되다시피 부서진 전각을 내려다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차마 가늠도 할 수 없었지만 지관은 속이 엉망일 태자를 다독여 볼 심산이었다.

말렸으니, 그 심사를 받아 주기도 해야 할 것이라 오늘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참이었다.

“전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태자가 놀랄 법도 했으나 그에게서는 날 선 목소리 대신 은근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순리대로 돌아가겠지. 안 그러느냐 지관.”

태자는 이번 일에 마음을 비운 것인지, 모조리 포기한 것인지 애매한 말을 사용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달빛 아래, 희게 빛났다.

“애태우지 말아라.”

오히려 그를 다독이는 말이 꿈인 양 흘러나왔다.

태자께서 변하셨다.

지관은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미소 짓는 태자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푸른 눈동자에 달빛을 머금은 폐허가 담겼다.

무감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에 알 수 없는 열기가 물려있었다.

“전하.”

그의 눈이 담고 있는 것이 폐허뿐만이 아닌 것 같아 자꾸만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무엇을 포기하신 겁니까.

대체 무얼 보고 계신 것입니까.

지관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가려는 질문을 삼키느라 목이 아프도록 참고 참았다.

지관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자는 칼날같이 부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서서는 웃었다.

펄럭.

어깨에 걸쳐진 도포가 거센 바람에 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허공에 쓸려 가버렸다.

밤하늘을 구름처럼 어슴푸레하게 물들이며 비바람에 그대로 묻히는 모습이 어째서 태자가 겹쳐 보이는 것인지, 지관은 방정맞은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지관아.”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는 그에게 잔잔한 목소리가 귀를 붙잡았다.

“이제 곧, 약속한 사흘을 채우게 되는구나.”

“그렇습니다.”

“사흘이야.”

점점 더 세차지는 바람이 기어코 빗물을 싣기 시작했다.

거세게 불어 닥치는 비바람이 창을 넘어 함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자는 간간히 얼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비가 들이칩니다. 전하.”

“지관아, 지옥 같았단다.”

비를 흠뻑 머금은 것이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태자의 목소리에 가득 들어찬 습기에 지관은 고개를 절로 떨구어졌다.

그의 사흘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더 이상 다른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지관은 태자께서 침전에 두문불출하시며 계시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하아…….”

말라버린 탄식마저 빗소리에 묻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다른 방책을 찾아…….”

다급하게 아뢰는 지관의 진심이 태자의 손짓에 막혀버렸다.

“순리대로 풀어갈 것이니라, 더 이상 너희들을 애끓게 하고 싶지 않구나.”

태자는 예의 그 말을 그대로 돌리며 손을 들어 지관의 입을 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마음을 정한 것인지 단호하기 그지없어, 지관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태자의 눈에 담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열기였다.

폐허를 덮는 비바람만큼 처참한 상황에 놓였는데, 저 꺼지지 못한 불길은 무엇인가.

그 불길을 눈에 품고서 포기한 듯한 태자의 말은 무엇인가.

지관은 한껏 혼란스러워졌다.

지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태자는 태연한 표정 그대로 창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면건을 다오. 시원한 것도 좋지만, 이래서야 원.”

한두 방울이던 것이 제법 쳐들어와 얼굴 곳곳이 젖어 들은 태자가 껄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면건을 청했다.

바짝 마른 면건을 받아든 태자는 꼼꼼히도 젖은 얼굴을 닦았다.

“내일 날이 밝으면 아이들을 불러 저곳을 단장하거라.”

곧게 뻗은 태자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그가 부숴버린 전각.

바로 소희가 잠시 머물렀던 그곳이었다.

휘께서 소희를 빼돌려 하계로 보내준 뒤, 그 격정을 못 이겨 가루를 내버렸다지만, 그녀가 머문 곳이다 하여 바스러진 돌멩이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한 참이었다.

“단장이라고 하시면…….”

지관은 태자의 의중을 가늠하려 조금 더 여쭙기로 했다.

“저런, 이렇게 아둔하였더냐. 치우고 새로 지으란 말이다.”

“새로요?”

“그럼 언제까지 저렇게 흉물스러운 것을 그냥 둘 참이었더냐.”

태자는 푸른 눈을 휘어뜨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가벼운 타박을 했다.

“진정이십니까? 저곳은……!”

“치우거라. 깨끗하게.”

그는 지관이 하려는 말을 자르며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 단단히 당겨진 턱.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 위에 떠오른 건, 진심이었다.

모진 방해 끝에 결국 포기한 건 소희님이셨던가.

태자께 남은 건 분노밖에 없는 것인가. 눈 속 깊이 갈무리된 이글거리는 것이 고작 그것이었다니.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하오시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정성들여, 잘 지어라.”

“그럴 것입니다.”

청명한 푸른 눈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지관을 담고 있었으나 그의 슬픔을 동정이라 부르며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늦게 알았느니라.”

“무엇을 말입니까.”

“기다림이 능사는 아니고, 정성이라 하나 그것이 보답을 바라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후회하십니까?”

아차 싶었다.

감히 태자께 삼관대제인 그가 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태자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태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날카로움도, 격한 성정도 모두 그 사흘 안에 버리고 온 듯 한없이 자상하고 끝없이 너그러웠다.

소희를 잃고 죄를 청하던 천관의 팔을 쳐내던 분이 아니었다.

실상 따지자면, 그것은 천관의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운명이었을 뿐이었다.

귀왕께서 점지된 별을 맞이해 하계로 돌아가신.

그야말로 순리대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죄라 청한 천관에게 정말로 죄를 물어 팔을 잘라낸 분께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웃어주시다니.

심지어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시다니.

얼떨떨하고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지옥 같다던 그 사흘에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기셨길래.

그렇게나 놓지 못하던 분을, 그녀를 마음에 품었던 그 시간을 후회한다 하는 것일까.

한번 터지기 시작한 궁금증은 끝을 모르고 솟아났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값싼 호기심에, 제 주인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불충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오냐.”

지관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태자의 등 뒤에 인사를 남기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내일 아침, 비가 그치면 잔해를 치우고, 새로이 전각을 올려야 하니, 이 밤 그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서두르면 내일 해가 어둠에 먹히기 전에 전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관은 본궁 용머리를 틀었던 목수를 떠올리며, 발걸음의 방향을 잡았다.

멀어지는 지관의 발걸음을 듣고 있던 태자의 입술에서 미미하던 미소마저 거둬지자 남은 것은 얼음이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어리석은 것들.”

보기 좋은 입술이 심술 맞게 일그러졌다.

“항시 무능한 고로 생각하는 것이 늘 답답한 말이지.”

풍성한 속눈썹이 게으르게 들려 올라가자 그 아래 감춰진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세찬 비를 뿌리는 후원을 담았다.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걷히고 나면 더 맑은 하늘이 나온다는 것을 모른다 이 말이다.”

구르륵-

태자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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