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77화 (77/114)

77. 바람을 머금은 향내 (10)

2018.04.27.

별께서 그 용모가 많이 달라지셨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아침 해가 달궈지기도 전 온 염라궁에 파다하게 퍼졌다.

“보았니?”

“그럼 허언하리?”

“정말 은발에 홍안이시니?”

“내림 받고 계시단다, 내궁에 있는 아이가 나랑 친하지 무어.”

“세상에, 그럼 곧 내궁에 이름도 내려오겠구나?”

“내궁에 새 이름만 내려오겠니? 이제 황후 사도 뽑으시겠지.”

종알거리는 말이 들불같이 번졌다.

아수라는 꿀타래를 집어 들다 맞은 편의 풍천을 보았다.

“그러시다는데.”

“바빠지기 전에 꿀타래를 더 주십사 부탁드려야…….”

빡-----!

아수라의 말에 맹한 소리를 한 대가는 참혹했다.

접선이 부러질 정도로 세차게 후려친 탓에 풍천의 손등은 접선의 모양 그대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진짜 손버릇이 어째 그리 험한 게야!”

“머리를 때리자니 입이 걸리고, 입을 때리자니 만월의 가루가 아까워 손이었지.”

아수라는 만월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꿀타래를 입에 물며 무심히 대꾸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제정신인가?”

“어째서!”

“이런 미련한 작자라니, 정말 염휘께 간청드려 내가 두 번째 좌를 받아야겠음이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상태자.”

아수라는 길길이 날뛰는 풍천을 향해 짧게 대꾸하고는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갑자기 그분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것이야!”

달큰한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다 기분이 잡친 탓에 풍천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저 소식을 들으면, 조급하지 않겠는가?”

“무어?”

“나라면 조급해질 것 같은데.”

“아니 이제 직인도 못 오는데 어떻게 손을 쓴단 말인가?”

풍천은 불안해하는 목소리를 해선 애써 억지 부리듯 목청을 높였다.

“말도 안 되지. 내궁에 계신 분을.”

“직인은, 그럼 예상하셨던가?”

“그럼…… 돌아가며 번이라도 서보자는 말인가?”

“나쁘지 않지.”

아수라가 찻물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접선을 꺼내 한가롭게 부쳤다.

힘을 들이지 않고 설렁설렁 부쳐내는 바람에는 진하게 물린 도화향이 끝없이 풍겨나왔다.

“나라면 말이야.”

느긋한 음성을 따라 달큰하고 상쾌한 향이 훅 끼쳐들었다.

“지금, 바로 지금.”

까만 접선이 바람을 부르듯 쉬지 않고 흔들렸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아.”

조바심에, 분노에 미쳐버릴 테지.

붉은 입술이 마치 향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를 해서는 맞은 편의 풍천의 얼굴을 단단하게 굳게 했다.

“혹시 뭔가 들은 게 있는가?”

단번에 은밀하게 잦아든 목소리에 지글거리는 노기가 물렸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만 말일세, 풍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건 쉬우니까 말이야.”

“허나 벌써 달 아이도 내주신 ‘어미’ 아닌가? 태자께서 아무리 그러신들.”

“그깟 달 아이 하나야, 지워버리면 그만 아닌가.”

“무슨……!”

“교아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계, 이곳일 뿐이지. 상태자껜 거치적거리는 것일 뿐이야.”

“그럼 교아를 불러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풍천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지만, 아수라는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답답함에 풍천이 목청을 터트리기 전, 아수라에게서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귀문에 두어야 안전하지. 영이 몰려드는 그곳에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말이지.”

“뭐어?”

“상천에서도 귀문까지 문을 열 수는 없고 말이지. 풍천, 내가 태자라면 말이야 굳이 무리하면서 교아를 손댈 필요는 없거든. 그저 소희님만 얻으면 사실 다른 것이야 눈감으면 그만이니.”

“괜히 소희님 곁에 두었다가 해를 입을 수 있다 이 말이군? 그래서 서둘러 보낸 것인가?”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귀문의 사정도 급박했고 말이야.”

“정말 엉큼하다니까.”

풍천은 이제야 속내를 털어놓는 아수라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서운해했지만 아수라는 비어버린 찻잔을 내리고는 계속 부채질을 했다.

“향이 좋아.”

“홍월에도 물렸는가?”

“그녀가 꽤 애를 썼지.”

“무구는 이만하면 됐고, 번을 서기만 하면 되려나.”

제길.

성가시다니까.

“원래 아이들이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법이지.”

“이제 갓 스무 해를 산 어린것에게서 나올 소리는 아니지.”

빡-!

날뛰는 태자를 두고 조롱하는 아수라의 말에 무심코 대꾸한 풍천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섬뜩한 타격음이었다.

“크으…….”

사그라지는 서늘한 아침 기운을 타고 풍천의 숨죽인 신음이 은근히 퍼졌다.

*

찻잔을 기울이고, 다시 비어버린 잔을 채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온종일 차를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풍천은 지루함에 몸을 비틀었다.

“소희님. 괜찮으시면 소장 내궁을 둘러보고 오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그런데 풍천께서는 오늘 내도록 여기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소희의 천진한 물음에 풍천이 뺨을 굳힌 것도 잠시, 그저 가벼운 묵례를 남기고는 자리를 비웠다.

무례했지만, 그로서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아수라 녀석.

상태자로부터 별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번갈아 가며 번을 서자는 말에 불타올라 자청한 것도 잊고선 그새 아수라 탓이었다.

무료하고, 무안한 시간이었다.

말주변이 없으니 차만 냅다 들이키고, 당과를 집어 먹는 것으로 오전을 버틴 참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그가 단맛에 질릴 정도였다.

걷는 발끝에 뱃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마셔댔으니 그가 마신 차가 몇 주전자인지 일러 말하기도 귀찮을 정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낮이고 밤이고 그 녀석더러 번을 서라고 해야겠다.

어차피 두 녀석 다 안 보이는 시간엔 몸에 깃들어 쉬는 것이니 그야말로 딱이다.

풍천은 뒤늦게서야 이런 좋은 생각을 떠올린 저를 향해 긴 한숨을 내쉬며 내궁을 따라 부지런히 걷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바로 아수라를 불러다 놓을 생각이었다.

보폭이 점점 넓어지고, 두 다리에 속도가 붙기 시작해 그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내궁을 둘러보았다.

과연, 모든 것은 직인 탓이었던가.

그녀가 발걸음을 끊은 뒤로, 내궁에서 느껴지던 괴이한 기운이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해를 받고 서 있는 내궁에는 주인을 맞아 안온한 공기가 일렁이고, 오가는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모두 소희, 그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실로 그녀의 존재감은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

“…….”

바삐 움직이던 풍천의 발걸음이 멎은 건 그때였다.

저 웃음을 상태자는 빼앗긴 게 아닌가, 하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해해서는 안 됐지만, 그의 도를 넘는 행동을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간밤 아수라의 말도, 그가 교아를 서둘러 귀문으로 보낸 것도 모조리 피부에 와닿았다.

귀를 스치고 가던 아수라의 말이 들이박히듯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거…… 염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풍천은 내궁의 안온한 이 풍경을 빼앗기고는 살지 못할 것 같다 생각했다.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하물며 젊은 상제가, 견딜 수 있을까……?

오싹.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올랐다.

목덜미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일어서며 그에게 날 선 경고를 보내왔다.

“제길.”

이거 뭐지.

풍천은 목덜미를 세차게 문질러 소름을 가라앉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력을 돋워 작은 티끌 하나까지 음험한 기운을 모조리 잡아낼 심산으로 느긋하고,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기묘하게 터지는 불안감이 자꾸 그의 신경을 잡아챘다.

“입장을 바꾸면 쉬운 것을.”

직인도 발걸음을 끊은 지금, 이 불안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동공이 지워진 은회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허공을 헤매었다.

쿠르릉-.

그리고 그의 불안한 마음을 부채질하듯 저 멀리서 뇌우가 떨어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어머나! 먹구름입니다!”

작고 귀여운 목소리들이 곧 불어닥칠 비를 기다리는 것이 들렸다.

“바구니! 바구니!”

“아이참. 이제는 안됩니다. 풍천께서도 우천화를 찾으신단 말입니다.”

투둑-.

툭-.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풍천의 눈에 허둥거리며 바구니를 찾고 우산을 찾아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잡혔다.

툭툭-.

빗방울이 그의 갑주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풍천은 갑주를 적시며 점차 그 기세를 세우는 빗방울을 손 내밀어 받았다.

가슴에 치미는 불안감은 그대로였지만, 차가운 빗속에 서 있자니 들끓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이 비처럼, 운명지어진 것은 피할 수 없다 이거겠지.”

목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피었습니다!”

“만개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아직이에요.”

그의 다부진 발걸음이 비를 반기는 즐거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멀어졌다.

“또 비라니, 서왕모께서 복숭아를 키우시려는 것인가.”

문득 시작된 세찬 빗소리에 상소문을 들여다보던 염휘가 창밖을 내다보며 빙긋 웃었다.

“최근 비를 자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귀한 것이 열리는 해이니, 애써 가꾸심이겠지.”

아수라의 말에 여상히 대꾸한 염휘는 귀문에서 올라온 서신을 아수라에게 넘겨주었다.

“보시지도 않고, 바로 주심입니까?”

단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미 그의 손은 밀봉한 서신을 찢고 있었다.

“낯설지만 낯익은 필체이니. 그대가 먼저 봐야 하지 않겠나.”

염휘는 세필을 들어 북쪽의 샘에서 온 상소문에 답을 써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거침없는 붓끝을 따라 그를 닮은 씩씩한 글이 새겨졌다.

빗소리만 가득한 대전의 공기를 가른 것은 아수라였다.

받아든 서신을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은 후, 기다리고 있는 염휘께 웃는 낯으로 말을 올렸다.

“잘 하고 있답니다. 영도는 깨끗하여졌고, 두 사자 그 합이 잘 맞아 교아가 실력이 제법 늘었다고 합니다.”

“잘됐군.”

염휘는 무심한 듯 대꾸했지만, 입술에 물리는 옅은 미소를 완벽히 가리진 못했다.

두 군신은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교아의 소식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참이었다.

낳고, 기른 어버이가 한자리에 있는 형국이었다.

교아의 소식에 절로 흥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만월의 가루는 넉넉하다던가?”

자상한 귀왕의 말씀에 아수라가 뻐기듯 대꾸했다.

“만월의 가루를 쓸만한 부상을 입을 아이가 아닙니다.”

교아가 얼마나 날랜 녀석인지 모르십니까.

쫘아악-.

버릇처럼 부채를 펼쳐 팔랑이는 아수라의 얼굴에 걸린 것은 자부심.

그의 대의 첫 사자였다.

비록 그가 부상 중이라 검을 끝까지 가르치지 못하고 보냈다지만, 그가 가는 행장까지 꾸려준 아이였다.

그 아이 내보내도 괜찮을 것인가 스러지는 몸을 해서는 준비시켰더랬다.

당연히 잘 할 것이었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수라는 입꼬리에 매달린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안다, 짐이 키워낸 아이가 아니더냐.”

“내림하셨겠지요, 교아를 가르치고 키운 것은 접니다.”

“그래그래. 수라전의 사자이니 어련히 하였겠느냐.”

염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들었다.

늘 냉한 표정으로 어디서든 한 발짝 물러서 있던 아수라가 저렇게 열을 낼 줄이야.

확실히 아이는 대단했다.

염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붓을 쥔 손에 속도를 냈다.

“귀문에 감재사자가 모두 충원되면, 시왕께도 보내드려야 하고, 북쪽 샘에도 보내드려야 하니 이것 참.”

“사방에서 아이들을 내어달라 앙앙입니까?”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 이십 년간 새 아이가 나지 않은 참에 첫 아이를 수라전으로 보냈다고 보내온 이 서신들이 안 보이시는가?”

짐이 머리가 아프구나.

“곧, 아이들이 깨어나면 부족하나마 모두에게 보내질 것 아니옵니까?”

“한두 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잖느냐. 시급한 곳부터 보내야 하니 당분간은 이 불만에 가득 찬 상소를 일삼아 그저 받아 주어야 할 것이다.”

“흥.”

아수라는 비웃음도 아니고 콧소리도 아닌 애매한 것을 내며 부채를 팔랑였다.

“왜 그러느냐.”

“여태 숨죽이고, 손 놓고 있다가 소식 듣고서 몰려드는 것들이 우스워서 말입니다.”

“아수라. 그대와 풍천이 무척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아 달라 투정부림이 아닙니다. 동고동락의 의미를 모른 채 어린것처럼 왕께 떼쓰는 모습이 같잖아 그렇습니다.”

“다 짐의 백성이니라. 그러니 지존을 일러 천을 보살피는 어버이라 하지 않겠느냐.”

“매번 속 좋으신 분 앞에서 제가 못나 보입니다.”

아수라는 이번에도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끌어안는 염휘를 향해 날 선 어조를 해선 대꾸했다.

“왜 그러느냐 아수라.”

아수라의 반응이 생각보다 꽤 날카로워 염휘는 그제야 글을 쓰던 손을 멈추고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저 답답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거라 생각했지만, 아수라의 반응은 그렇다고 보기엔 몹시 뾰족했다.

“……아닙니다.”

“아니기는. 무언가 일이 있으니 네가 이럴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이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더러 눈감고 모질어지셔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관용은 한 번으로 족하십시오.”

은근하고도 뼈가 있는 말이었다.

염휘는 지금 아수라가 상소를 올린 염라의 불들을 일컬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수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함부로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자.

“……무엇을 들은 게냐?”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아닙니다. 하오나.”

“하오나?”

“염휘시여. 왕께선 놓이겠습니까?”

“…….”

염휘로서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답은 정해져 있으나 소리를 내 말로 할 수 없었다.

태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순간 염휘는 소희를 놔줄 수밖에 없으니, 그는 태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참담한 마음까지는 가려지지 않아 염휘는 붓을 내던지다시피 놓고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었다.

놓일 리 없다.

저 고운 분이 놓일 리 없다.

“그럼 어쩌면 좋겠느냐.”

“그저 지키는 수밖에 없잖겠습니까.”

“……생각해둔 것은 있느냐.”

“없습니다. 풍천과 번을 나누어 서려 합니다.”

“짐도…….”

쏴아아아아-.

염휘의 말이 채 맺기도 전.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들이쳤다.

“이런.”

염휘는 북쪽의 샘에 보내려 쓰던 서신이 물에 젖어 번지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새로 쓰셔야겠습니다.”

“음.”

“한번 망가진 것은 되돌릴 수 없지요.”

“흐응. 당연한 것을.”

염휘는 아수라의 말에 빼곡히 적은 서신을 미련 없이 구겨버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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