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람을 머금은 향내 (8)
2018.04.20.
달을 담고, 마치 환의 것인 듯 똑 닮은 은빛 머리타래.
소희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아쉬운 듯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에는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런.”
생각보다 소희가 은발을 너무 탐내 하는 것이 선명해 환은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의 색을 바꾸는 것 정도야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삼천과, 삼천외의 땅을 모두 둘러볼 정도의 힘이 있는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환이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소희를 보고도 머뭇거리며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은 그녀가 아직 ‘영’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왕인 그의 영력의 영향에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잠시 좋자고 소희에게 불필요하게 그의 영력을 두르는 것이 과연 득이 될지 독이 될지.
“흐음…….”
자꾸만 손끝에서 터져나가려는 영력을 잡아채듯 힘줘 주먹을 움켜쥔 그때,
소희에게 희미한 빛이 쏟아졌다.
“어머……!”
머리카락, 가닥가닥 타고 흐르는 고운 빛이 눈부셨다.
아쉬워하는 기색에 환이 다시 한번 빛을 내려준 것인가 해, 소희는 작게 웃음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환의 것이 아니었다.
환은 소희의 머리 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듯, 길고 깊은 눈매가 한껏 벌어진 젊은 왕의 얼굴에 새겨진 것은 너무도 명백한 경악.
도대체 무슨 일이……!
그의 표정에 지레 놀란 소희 역시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너무도 찬연하고 익숙해서 반갑기까지 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신의 문?”
두 눈은 사신의 문을 보고 있었으나,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들어차 있었다.
불과 사흘 전에 사신의 문이 열렸었다.
그러나 그녀가 실성한 것이 아니라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그 빛은 또다시 열린 사신의 문의 것.
“벌써?”
놀란 것은 소희뿐만이 아니었다.
장엄한 문을 열고서 빛을 뿌리는 사신의 문을 바라보는 환 역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잔뜩 당황한 채였다.
사흘.
갈수록 사신의 문이 열리는 주기가 짧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그와 동시에 이번 문의 고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소희는 와락 덮쳐드는 긴장감에 다급히 환을 찾았다.
“환, 이번 문은…….”
뭐예요?
뭘 견디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소희가 마저 말을 맺기도 전 활짝 열린 문이 그대로 빛가루가 되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밝은 빛에 소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급히 손을 뻗었다.
빛 속이든, 어둠 속이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어딘가 불안했다.
이제, 사신의 문이 두렵지는 않았다.
언제나 사신의 문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이생에서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다음 생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남은 감정과 기억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도록 극한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영을 묶어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풀어주기 위함.
이미 세 번의 관문을 거치며 소희는 이제 저 문이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건넌다는 것은 다른 말이었다.
반가울 리 없다.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외롭고도 격렬하기까지 한 시간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소희가 기꺼이 사신의 문을 반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환의 덕이었다.
그가 옆에서, 그녀와 함께 관문을 건네주기 때문이었다.
실상, 관문을 건너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이었으나, 소희는 번번이 관문을 환과 함께 넘었다 믿었다.
모든 감각이 멀어지고 질척이는 감정에 발목이 잡혀 헤매는 그녀를 건져내 주는 것은 바로 환.
그의 다정한 음성이었다.
귓가를 울리는 힘이 실린 미성은 그 어떤 것보다 소희의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환!”
소희는 빛의 감옥에 갇혀 그를 불렀다.
다급하게 내뻗은 손이 그를 바라 필사적으로 뻗어 나갔다.
체면 같은 것을 따질 이유란 게 있을 리가.
애당초 소희는 굳이 사신의 문을 혼자의 힘으로 건너겠다는 미련한 고집 같은 건 부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일상이 고단한 이였다.
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수월한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내밀어 주지 않는다면, 붙들어서라도 사신의 문을 넘어갈 것이었다.
소희는 손끝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자 조금씩 불안해졌지만, 이전처럼 훌쩍거리며 눈물을 짓는 대신 소리를 내 환을 부르는 쪽을 택했다.
“화안---!”
방금 전보다, 아까 전보다 힘을 담은 목소리가 빛무리로 가득 찬 공간을 가볍게 흔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기다리던 것이 소희를 찾아들었다.
매끈하고도 다정한 손길.
손끝에서 시작한 서늘한 온기가 그녀를 반기며 감겨드는 것이 느껴지자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던 미약한 불안감이 모조리 사라졌다.
“하아.”
소희는 그제야 참았던 긴 숨을 넣으며 사신의 문에 집중했다.
눈을 감아도 눈이 부실만큼 대단한 빛무리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조리 빛 속에 잠겨 든 소희는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웅장하고 거대한 힘에 짓눌린 미약한 날벌레 같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이 문은…….”
분명 고요할 테지만 시끄러운 한가운데 있는 듯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귀가 먹먹하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 문은 도대체 뭐지?
소희는 눈을 감고 맞잡은 환의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공기가 말라붙은 듯, 모든 소리가 잡아 먹혀 웅웅거리는 느낌만이 남았다.
‘환이 분명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는데.’
하기사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내가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환의 목소리를 간절히 바라던 소희는 돌연 만사가 무의미하다 싶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무겁게 가라앉는 심정 사이로 불현듯, 이것인가 하는 깨달음도 같이 찾아 들었다.
포기의 관문 같은 것인가?
이미 반절이나 지나온 것을.
그리고 그때부터 소희는 온몸이 눌린 듯 거대한 힘 안에 갇혀서도 끙끙거리며 버티기 시작했다.
환은 사신의 문이 소희에게 부서져 내리며, 아주 짧은 순간에 완벽한 장막이 드리워진 것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 견고하고도 아슬아슬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희가 그를 찾아 가느다란 팔을 내민 것도, 하얀 가지처럼 뻗은 손이 나풀거리며 그를 찾아 헤맨 것도 모두 알고 있었으나 잡아 줄 수가 없었다.
그를 부르는 소희의 목소리에 옅게 스미는 불안감을 그라고 해서 모를 리 없었다.
환은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그가 기꺼이 관문을 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소희를 위해 열린 문.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켜보며 그녀가 지쳐 포기하지 않도록 작게 격려하는 것뿐이라 무척 무기력하다 느꼈다.
얇은 유리막 같은 경계를 초조하게 지켜보며 애를 태우던 것은 어쩌면 짧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괴로웠다.
어쩌면 막 안에서 자신을 찾아 불안한 손짓을 하는 소희보다 더.
힘을 써서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수천 번은 아니, 수만 번은 터트렸을 영력이었다.
이미 소희를 한번 잃어봤던 환은 그녀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위험도 간과하지 않을 참이었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잠깐 사이 입안이 바짝 말라버렸다.
버석해진 입안이 쓰디써, 환은 긴장감에 혀끝으로 입술을 적시는 순간마저 고통이라 생각했다.
“환---!”
소리마저 집어삼킨 희미한 막을 찢고 드디어 소희가 그를 청했다.
그녀가 그를 소리 내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을 나누던 여리고도 견고하던 것이 순간, 거둬졌다.
환은 긴장감에 차게 식은 손을 내밀어 소희의 보드라운 손을 다급히 맞잡아주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손끝에서 시작된 안도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에 단번에 머리끝까지 찌릿하도록 전율이 일었다.
잡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녀를 되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식, 모양 좋은 입술을 비집고 숨기지 못한 헛웃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힘겨운 듯 앓는 소리를 내는 소희의 작은 신음이 울리자, 환의 입매에 걸려있던 미미한 미소마저 단번에 거둬졌다.
‘힘내세요. 힘내 건너오는 겁니다.’
그저 지켜볼 뿐인 환은 사신의 문을 건너는 소희에게 마음속으로 간절한 당부를 건넸다.
전신이 부서지는 듯, 새로이 짜 맞춰지는 듯.
거대한 압력이 쉬지 않고 소희를 눌렀다.
얕게 몰아쉬는 숨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무자비하게 가해지던 압박에 이대로 짓눌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포기하고 싶어지던 그때, 소희는 이미 귀객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했다.
생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나.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한 자신이 죽을까봐 두려워하다니.
“아하하.”
갈비뼈가 으스러질 만큼 눌러진 상태였건만 참지 못한 웃음이 소리가 되어 터져버렸다.
소희는 한번 웃음이 터지자 웃고 또 웃었다.
깊게 들이쉰 호흡 덕에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할딱이던 숨은 점차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전신을 무섭게 누르던 압박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하아.”
웃음을 삼키는 마지막 숨에 소희는 이제 네 번째 관문의 시험이 끝났음을 느꼈다.
하지만, 사방을 가득 메운 빛무리는 아직이었고 맞잡은 손은 굳건했다.
소희는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전신을 압박하던 빛의 폭포가 드디어 거두어지고, 떠지지 않던 눈꺼풀이 들렸다.
“소희야…….”
흐릿한 시선 끝에 잔뜩 염려하는 표정의 환이 보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며 흐트러진 초점을 잡자 환과, 그의 손을 잡아 비틀듯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자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어멋!”
손톱이 박혀, 자국이 선명히 남도록.
아팠을 것인데 내색도 없이 여전히 소희를 내려다보는 환의 표정에 그제야 억눌렸던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이…… 이제 끝난 것이지요?”
“잘 버티셨습니다.”
소희는 저만큼이나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환에게 칭찬을 듣자 전신의 긴장이 풀렸다.
첫 관문 이후, 두 번째, 세 번째의 관문이 생각보다 수월했고, 자신도 모르게 넘어버린 두 번째 관문에 어쩌면 얕잡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 관문은 기억 속의 어떤 것보다 혹독했다.
온몸이 짜부라지고, 존재감이 희미해져, 만사가 의미 없어지는 그 묘한 허탈감이라니.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소희는 자신의 손톱이 상처를 낸 환의 손등을 살그머니 쓸었다.
“제가 그만, 상처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이야 금세 낫는 것을요. 관문을 통과하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환은 소희가 상처에 신경 쓰는 것을 보고는 소매로 슬쩍 손을 가려버리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쳐 보이십니다. 많이 힘드셨습니까?”
소매를 정리하고선 환이 두 팔을 벌려 품을 내주며 물었을 때, 아니라던가 하는 겸양의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괜찮다는 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소희는 환이 기꺼이 내주는 품에 안겨들었다.
제 것인 양 딱 들어맞는 넉넉한 품에 안기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자만했었나봅니다. 사실 두 번째 관문은 저도 모르게 넘겨버렸고, 세 번째 관문도 솔직히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핫. 모든 관문이 똑같이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흐음…… 두고 온 자식이 있는 어미라면 아마 세 번째 관문에서 발목을 잡힐지도 모르지요. 미련의 관문을 못 건너는 이의 태반이 출산 직후 숨을 거둔 젊은 어미입니다.”
“세상에…….”
“생떼같은 자식을 품에서 놓을 수가 없어 결국 건너지를 못하더이다.”
“그…… 그럼 어떻게 됩니까? 어미의 정이 죄는 아니잖습니까?”
소희는 자신의 이야기라도 되는 양 흥분해 항변했다.
“죄는 아니지만,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벗어야 다음 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면…….”
“사신이 있는 것이지요.”
“네?”
뜻밖의 말에 소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환의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렸다.
“요괴와 싸우기만 하는 것이 사자의 소임이 아닙니다.”
가늘어진 홍안이 즐겁게 빛을 발하며,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기분 좋게 늘어진 입술이 정수리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고, 뺨을 통해 건너오는 듣기 좋은 심박이 소희의 놀란 마음을 다독였다.
“……해서 일곱 번의 관문을 지난 영이 들어서는 곳이 귀문입니다.”
이미 가여운 이의 구명에 마음이 풀린 소희는 반쯤은 건성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의 문을 건너며 고단했던 마음이 과한 염려에 부쩍 지쳐 더 이상 듣는 것이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렇구나.”
“졸리십니까? 곤하실 테지.”
대답할 새도 없이 이마 위로 날아드는 가벼운 입맞춤에 노곤하던 정신이 바짝 당겨졌다.
“아!”
“흐응.”
코끝으로 웃는 환은 놀라는 소희의 표정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지…… 짓궂게!”
동그란 앞이마를 손으로 가리며 소희가 싱긋이 웃는 환을 향해 볼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조금 더 야무지게 한마디 하려던 소희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아 잡아당겨, 달싹이는 입술을 당연하게 포개 달큰한 숨을 나누는 환의 덕이었다.
말이 되지 못한 날숨이 모조리 그에게 흘러들어 갔다.
말캉한 살이 싫지 않게 뭉개지며, 따끈한 온기를 공유하는 것은 부끄럽게도 너무 좋았다.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인지, 이마를 짚은 손까지 열감이 뻗힌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지로 뻗어 나가는 짜릿함은 처음처럼 새로웠다.
두 숨이 섞이고, 예민한 점막이 쓸리는 기분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아찔하기도 했다.
“하아.”
가쁜 숨이 터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의 앞섶을 쥐고 매달렸던 것은 소희 자신이었다.
“…….”
미처 고르지 못한 호흡을 터트리는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던 환이 얼굴을 감싸 쥔 손을 움직여, 커다란 엄지로 꾹 눌렀다.
그의 손끝에서 촉촉해진 입술이 뭉개지며 소름이 오싹 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감추지 못한 붉은 한숨이 새어 나갔다.
그 모습에 환이 가슴을 들썩이도록 깊은숨을 내쉬고는 콧날이 스칠 만큼 대번에 다가왔다.
불꽃을 박아 넣은 것 같은 홍안을 아름답게 한껏 피워 올린 환은, 사내의 얼굴을 해서는 낮게 읊조렸다.
“매, 관문마다 지켜드릴 것입니다.”
“……네.”
뜻밖의 소리였지만 소희는 작게 대답했다.
“그러니, 일곱 번의 문을 지나면 제게 와주세요.”
“전…… 이미!”
소희가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오해하는 건가 싶어 황급히 말문을 열려고 했지만, 환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소희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덮고는 시선을 맞댄 채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신다 그저 답하세요.”
불만스러운 듯 제 입을 막은 환의 손을 밀어내려는 작은 두 손을 역시 제압하고서
환은 다짐하듯이 소희에게 말했다.
“그러신다 해주세요.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니 그러마 고개를 끄덕이세요.”
이상한 소리였다.
“일곱 문이 지나야 허락해 주실 거라 답해주세요.”
이미 마음을 확인했건만, 또다시 무슨 허락을 구하는 것일까.
그러나 소희의 의문은 환의 이어지는 낯 뜨거운 소리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이 밤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
잔뜩 벌어진 커다란 눈이 답이 된 것인 양 환은 붉은 눈동자에 한껏 불을 지펴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기다릴 수 있도록, 족쇄를 거세요.”
“…….”
“기다릴 수밖에 없게, 안달이 나도록. 어서.”
“그건.”
“영인 그대를 탐하려는 나를 말려요.”
마지막 말은 잔뜩 은근해져서 숨소리보다 옅어졌지만, 어째서인지 귓가를 천둥처럼 울렸다.
어째서 환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인지.
소희는 알아듣는 자신도 야하다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신 분.”
가늘어진 두 눈으로 호를 그리며 한껏 짙은 미소를 짓는 환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일곱 문을 지나면, 한껏 치장하시고 오세요.”
“네?”
“혼례복을 겹겹이 입고서.”
“……네?”
혼례야 올릴 것이고, 그의 안곁이 될 것인데.
예장하는 것까지 귀왕이신 그가 내림하시는 것인가?
“너무 다급히 그대를 맞지 않게, 칭칭 동여매고 오시란 말입니다.”
느른한 미소를 짓는 그는 아름답고도 요염한 사내였다.
소희는 문득 후끈해진 공기에 창밖에서 비쳐드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달 밝은 밤, 싸늘해야 할 달빛이 여간 따끈한 게 아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