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74화 (74/114)

74. 바람을 머금은 향내 (7)

2018.04.16.

소희는 간밤 썼던 은쟁반들을 한쪽으로 치워두다 쟁반에 비쳐든 제 모습에 어설프게 웃었다.

세 번의 관문을 건넌 뒤, 아주 조금이나마 무언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믿어서인지, 그렇다 말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래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희는 희게 빛나는 손을 내려다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을 느꼈다.

‘빛’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미약한 빛.

그녀 자신도 간밤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다.

일곱 날을 지새워야 열리는 사신의 관문은 이미 처음부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검붉어진 눈동자에 적응할 새도 없이, 희게 빛을 머금은 손을 보았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미약한 빛 보다는 훨씬 강력할 것이다.

소희는 쟁반을 쓸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희게 어룽이는 것들이 쟁반에 맺히다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염휘든 아수라든 만나게 되면 붙잡고 물어볼 것이었다.

“소희님.”

“응?”

쟁반을 가만히 쓰는 그녀의 뒤에서 아이들이 불렀다.

“점심상 올려야 할 것인데 어쩔까 여쭙니다.”

“먹자꾸나. 간단히 먹고. 오랜만에 꿀타래나 만들어 볼까.”

“꿀타래요?”

아이들의 목소리에 설렘이 담겼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럼, 하고 작게 대꾸하며 쟁반을 마저 해가 닿지 않는 곳에 밀어 넣고 일어서자, 등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이 마구 달려들었던 것이다.

“엿도 고을 것입니까?”

“전 타래과도 좋사온데.”

반요와 조양이가 그녀에게 거리감 없이 친근하게 구는 것을 부러워함인지, 아이들은 소희가 돌아오자 어려워하던 기색은 단번에 버리고 이렇게 어리광부리기 일쑤였다.

“오후 내내 하여도 다 못하겠구나.”

소희는 싫지 않은 타박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먼 곳에서 고생하는 사자들에게 보낼 것이 급하다고는 하나, 지척에 있는 어린것들을 보듬지 못할 만큼은 아닐 터였다.

소희의 마음에 차지 않았을 뿐, 모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이틀 정도야.

소희는 용기 내서 제게 다가와 준 아이들에게 저 역시 다가가기로 했다.

고단한 밤을 함께 지켜주던 덕실이를 그리워 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힘든 밤을 이 아이들이 자신의 곁에서 함께 해주었다.

소희는 지난 추억을 마냥 그리워하기보다는 곁을 지켜주는 인연에 충실하기로 했다.

“어서 먹자꾸나. 만드는 김에 넉넉히 마련해야 풍천께도 보내드리고 아수라께도 보내드리지 않겠니.”

*

“하아……?”

두 몫이 분명한 꿀타래를 받아들고는 아수라가 이마를 쓸어내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아수라의 손이 수북한 꿀타래 두 접시를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설마 밤의 아수라에게 이런 것을, 이라는 표정도 잊지 않았다.

“설마라니요. 섭섭하실 겁니다.”

“아니. 우선 이런 걸 먹을 리가…….”

“왜요?”

소희는 지는 해를 받아 붉게 물든 아수라를 보며 되물었다.

불그레한 빛을 머금은 그 얼굴이 오랜만에 혈색이 도는 모습이라, 그저 반갑고 좋기만 했다.

“만월의 가루도 아낌없이 담았지요.”

“어쩐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수라는 미미하게 웃는 입술을 끝끝내 감추지 못했다.

“정성이니 그저 드시면 된답니다.”

“못 이기겠습니다.”

“늘 그러셨으니, 이번에도 져주세요.”

“제가 그랬습니까?”

아수라의 웃음이 마지막 햇살을 타고 붉게 흘렀다.

가늘고 긴 눈매가 낭창해지며, 턱선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워졌다.

“아아아.”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꿈인 양 소희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졌다.

한층 풍성해진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를 끌고 올라왔다.

“자주 뵈옵니다.”

드디어, 한 자락 남은 햇살이 잠겨 들고 붉은 머리채를 늘어뜨린 밤의 아수라가 나타나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희는 눈앞에서 일어난 믿지 못할 일에 숨을 골랐다.

놀랍고, 신기했지만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수라는 그런 소희의 심사를 헤아리는 듯 그저 한 번 더 웃어주었을 따름이었다.

“해가 지면 달이 뜨는 법이지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손에 들린 꿀타래를 붉은 시선에 담았다.

역시, 낮의 아수라가 기겁하던 것을 흘려들을 것이 아니었다.

농염한 미인이 꿀타래를 들고 있는 것은 어딘지 어수선했다.

벼루 위에 앉은 개보다 이상했다.

그저 규방의 미녀였다면 그럴싸했겠지만, 아수라는 풍기는 기도가 이미 검사의 것.

“……소장에게도 한 접시라는 의미가 맞겠지요?”

그래서 의아하게 묻는 아수라의 말에 소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정성이라 여기시고, 만월의 가루를 듬뿍 넣은 것이라 원기를 돋울 때……!”

“기쁘옵니다.”

속삭임 같던 소희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꿀타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수라에게서 그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한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멍해져 뭐라 답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아수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잘 먹겠습니다. 소희님.”

아수라는 제 몫이라고 생각하는 접시를 들어 보이며 다시 한번 웃었다.

솟은 입꼬리가 정말로 웃고 있다고 소희에게 알려주는 듯 그 곡선이 아찔하기도 했다.

“저…… 정말……?”

“정말입니다. 처음이기도 하고요.”

아수라는 낮의 아수라의 몫인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두고는 제 것에서 하나 집어 맛보기까지 했다.

꿀타래 위로 수북이 쌓인 만월의 가루를 떨어뜨릴세라 한입에 집어넣는 모습은 분명 점잖지는 못했지만, 경박하지도 않았다.

“으음.”

입안을 가득 채운 꿀타래를 천천히 음미하던 아수라가 눈을 뜨고 두 손을 맞잡고서 기다리는 소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습니다. 많이 달지도 않고. 소장도 이 정도라면 먹을 수 있습니다.”

“역시, 단 것을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습니까?”

“만월의 가루가 올려진 꿀타래라니, 소장. 유례없이 입호강한 아수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수라는 답지 않게 농담까지 했다.

소희는 아수라와 지난 감정을 털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려워하며 아수라를 멀리하고 빙빙 돌았다면 분명 이런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원하고, 청량하기까지 하니. 두고두고 청할지도 모릅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저런, 오냐오냐하는 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저도 꽤 엄한 사람입니다.”

흐응.

“과연 그럴까요?”

작은 콧소리와 함께 아수라가 다시 꿀타래를 집어 먹었다.

손가락에 묻은 만월의 가루는 그녀가 빨아 먹을 새도 없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어 사실, 어떤 의미로는 제일 깔끔한 간식거리이기도 했다.

아수라는 이번에도 꿀타래가 다 녹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맛은 아닐 텐데.

하지만 두 번째 꿀타래를 먹고 난 후에 이어진 아수라의 날카로운 말에 갸웃거리던 소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달 마마의 영력이군요.”

늘어지는 입술을 붉은 혓바닥이 살짝 핥고는 사라졌다.

“!”

“아까부터 궁금하였습니다. 이 시원하고 익숙한 것은 무엇인지.”

“그건…….”

“염휘께서 부어주신 영력은 아니옵니다. 이것은 보드랍고도 말랑한 것이지요.”

마치 혓바닥에 그 느낌이 남은 듯 다시 한번 입술을 할짝대는 아수라는 정말로 소희의 영력이 마음에 든 것처럼 몹시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확실하십니까?”

“제일 정확한 것은 염휘께서 아실 테지만, 달 마마의 영력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이루신 성취입니까?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한 소희에게,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은근히 넘어왔다.

끄덕거리는 작은 머리를 내려다보던 아수라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무척 기뻐하는군요.”

남을 이르듯 무감하고, 한편으로는 친근한 말투.

“아. 낮의 아수라께서 듣고 계십니까?”

“몸이 바뀌고 바로 잠드는 게 아니라서요. 이번에는 이 녀석이 조금 더 오래 버틴 것이기도 하고요.”

아수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숨이 아쉬울 텐데, 이렇게까지 깨어 있으려 용쓰다니, 어지간히 아끼는군요.”

소희에게 들리지 않을 진실은 그녀의 입안에서 바람과 함께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내일 낮에 뵈면 될 것이니 어서 주무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다정한 당부에 묻혀.

*

안온한 공기를 타고 아수라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간밤 꿀타래가 좀 생겼습니다.”

“꿀타래?”

단 것을 질색하는 아수라에게서 ‘꿀타래’같은 들큰한 단어가 나올 줄은 몰라 모두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럼, 내게 보내주지 않고선?”

오직 그 소리에 반색한 것은 풍천뿐이었다.

“좀 드셔보시라 가져왔습니다.”

“모양이 고운 것이 정성을 들인 것이라, 성의를 생각해 너도 들거라 아수라.”

염휘 역시 단 것을 즐기지는 않으나 아수라의 정성이라 마지못해 하나 집어 들었다.

웃는 얼굴로 꿀타래 집어 든 염휘의 한쪽 눈썹이 의외라는 듯 솟았다.

“!”

그리고 기껏 집어 들었던 꿀타래 내려놓고는 엄지와 검지를 가만히 비볐다.

손끝을 타고 스미는 청량한 기운이 몹시도 정순했다.

“이런.”

감탄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물렸다.

“어떻사옵니까?”

“깜찍한 분이 아니냐?”

“드셔보십시오.”

꿀타래에 듬뿍 올려진 것은 만월의 가루.

염휘는 그런 일을 하실 분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그러나 아수라는 염휘가 소희의 꿀타래라는 것을 은근히 알리고서도 재차 권했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던 염휘는 뒤늦게서야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자랑하려 꺼낸 것이더냐.”

그러고 보니 짐에겐 보내주지 않으셨구나.

“흐응.”

소희가 아수라에게 이런 꿀타래 보내준 것이야 의도가 빤히 보이는 것이라 질투 같은 것이 날 리 없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더러 섭섭한 마음이라니.

이분은 아무리 삼생을 공유한다긴 하나, 아수라가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고는 하나.

짐을 은애하신다고 속삭이던 것은 죄다 잊으신 겐가.

염휘는 저도 모르게 아수라의 손에 들린 꿀타래를, 소희의 정성을 질투하고 말았다.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짐은 아직도 마음 한켠이 내내 쑤석거리고, 늘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르는 것만 같건만.

“…….”

이 마음을 내드린 것이 죄인지라, 그것참 꼴 우습구나.

“어서 드십시오.”

염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아수라가 재차 권하는 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생긴 것만 고운 줄 알았더니, 그 맛 또한 제법이라 염휘는 상쾌한 단맛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셨다.

“음.”

아주 맛이 좋구나.

솟는 질투를 밀어 놓고 담담한 척 칭찬을 하려던 염휘가 움찔한 것도 잠시.

“영력을 담으시다니?”

놀란 표정 그대로 내뱉는 말은 다시 풍천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아, 역시. 단번에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아수라는 빙긋 웃으며, 앞에 놓인 꿀타래를 풍천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여 달라 벌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입.”

상냥한 손길과는 다르게, 말끝은 서늘했지만.

염휘의 말에 정신을 못 차리는 풍천을 쥘부채로 가볍게 쳐, 정신을 깨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음. 소희님께서. 어, ……그러셨단 말이지?”

누가 떠민 것도 아니건만, 허둥지둥 꿀타래 집어 먹는 품새에 익숙해진 아수라의 핀잔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풍천은 입안에 스미는 상쾌하고 시원한 단맛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 시원한 향취가…….”

“소희님의 영력이시지.”

“그렇지만 그분은 아직 사신의 문도 못 건넌 영 아닌가?”

“그러니, 감탄해야 할 일이지. 이렇게나 훌륭한 귀문의 별로 거듭나심을 말일세.”

아수라는 쥘부채 너머 으쓱거리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누가 보면 저가 별인 줄 알겠구먼.’

통박에 자랑이 이어지자 풍천이 은근히 심술이 돋아 입안으로 말을 굴렸다.

아무래도 아수라의 복수는 무서웠으니까.

“이것, 그분 것이 확실한 것이냐?”

염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수라에게 재차 물었다.

“이미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냉정히 판단하기 힘드니 말이다.”

“과한 염려이십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마.”

“어딜…….”

입안에 남은 단 것을 서둘러 삼키며 눈치 없이 묻던 풍천에게 신경질적인 부채 소리가 들렸다.

짜악-

“어딜!”

“아니 왜!”

풍천은 아수라의 부채가 빨갛게 자국을 남긴 손등을 쓸며 볼멘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도대체, 아수라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손이 매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미련한 작자 같으니. 하루라도 욕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야?”

“그게 욕이라는 걸 아니 다행이야.”

“욕하는 걸 안다니 그것 또한 다행이고.”

풍천은 요즘 잠잠하던 아수라가 또다시 자신을 구박하는 이유를 몰라 답답했다.

“이제, 살만해지신 건가?”

“그 방정맞은 입을 막아야 하니 마냥 쉴 수가 있겠나.”

“이……익!”

“소희님께 가시는 길이다 이 말이지. 설마 아-. 같은 소리를 해서 속을 긁을 셈이라면. 더 드시게.”

아수라는 남은 꿀타래를 벌어지는 풍천의 입에 답쑥 물렸다.

미간을 와락 구기면서도 아무 말 없이 우물거리는 것이, 아수라의 말에 뜨끔한 눈치였다.

아수라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 눈치 없다 싶었다.

“이대로 묻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고…….”

쪼르르르륵-.

조금 전까지 풍천을 날카롭게 몰아세우던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온유한 목소리가 따사롭게 울렸다.

“덕분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직인과 태자께 감사드리고 싶기도 하지.”

“……난 아니야.”

“그런가.”

“원래 저렇게 다정하실 분들이셨지.”

“그랬는가. 난 등 떠밀어 줘 고맙다 하고 싶었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아수라.”

한 번씩 이럴 때 보면, 영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말에도 풍천은 단단하게 굳힌 표정을 풀지 않고 아수라가 건넨 찻물을 마실 뿐이었다.

“재미없긴.”

“그럴 여유를 부릴 만한 상대들이 아니니까.”

“설마.”

“한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하겠는가. 혼례를 올리시기 전까진 방심해선 안 되지.”

풍천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수라의 미소를 쳐냈다.

언제나 싱글거리고, 눈치 없이 둔하게 구는 풍천이 날을 세우는 것은 그의 주인이 관련된 바로 그것뿐이었다.

귀왕의 안위.

하물며 안주인인 별이 사술에 빠져 상천을 다녀오신 참이니.

아수라의 풀어지는 마음은 풍천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아수라는 그의 우직한 고집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어 비어버린 찻잔에 다시 따끈한 찻물을 따라 주는 것으로 말을 더 이상 잇지 않았다.

쪼르르륵-.

“드시게. 자네 몫이야.”

“만월의 가루라 함이니, 종전의 부상 때문인데 염치없이 손댈 수는 없다.”

단호한 풍천의 말에도 아수라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염치없이 드신 참이니 더 드시지요.”

“…….”

희고 곧은 손가락이 다시 한번 꿀타래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

“새로 받을 것이니, 마음 놓고 드십시오.”

장난스러운 듯 유쾌한 목소리에 그제야 풍천이 앞에 놓인 것을 들어 즐겁게 맛보았다.

“또 보내주신다던가?”

하여간 다정하신 분이라니까.

중얼거리는 말끝에 숨기지 못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 성정에 한 번으로 그치겠는가. 아마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보내주실 것이라.”

“하긴.”

“그러니 뒤늦게 겸양하실 필요 없다는 것이지.”

“흥. 그 성미 한번 고약하군.”

풍천은 달큰한 혀끝을 찻물로 가시며 멋쩍음을 툴툴거리며 감췄다.

그가 짐작키에 짚이는 것이 있었으나.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수라에게서는 돌아올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며칠 전 심연의 물에 당한 것이 신경 쓰여 부러 권한 것 아닌가.’

‘착각도 유분수지. 분에 넘치는 것을 드시더니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눈에 훤히 잡히는 독설에 듣지 않아도 절로 진저리가 처진다.

하여간, 부끄럼만 많아선.

수북했던 만월의 가루를 탁탁 털어 깔끔하게 먹고 나자 접선을 팔랑거리던 아수라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가실 것인가?”

“수라전으로 갈 것이네.”

“그런가? 딱히 바쁜 일은 없으시고?”

“정양하거라 하명하시던 염휘의 말은 기억이 나질 않으시는 게군?”

“굳이 누워야 정양이 아니니……. 잠시 내 처소에 들르시겠는가?”

내가?

무엇하러?

의아해 하는 아수라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풍천은 꿋꿋하게 청했다.

“가시자니까.”

흑조가 물어 나르는 주머니를 받아 들고 오긴 했으나 아수라는 수라전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가만히 주머니를 쥐고 있기만 했다.

그날, 풍천이 흘러내리는 핏물 위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지.

맛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을 타고 흐르는 비참함, 절박함. 그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막막함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풍천이 거둔 복숭아꽃을 차마 손댈 수가 없었다.

‘가져가서 접선에도 홍월에도 잔뜩 먹이게.’

‘……천도화?’

‘흑조가 며칠을 물어 나르니 양이 적당해진 참이야.’

‘……미련하기가 주인을 꼭 닮은 모양이지?’

아공간을 빌린 주머니가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못해도 한 보따리일 것이다.

작은 복숭아꽃으로 한 보따리를 채우려면 흑조가 얼마나 열심히 물어 날랐을 것이냐.

아무 꽃송이나 딸 수 없으니, 서왕모께서 선인을 붙여주셨을 것이고.

선인이 따시오 하는 그것을 한 송이씩 따서 주머니에 담아 왔을 것이니

그 작은 것의 고단함이.

그렇게 해서라도 삿된 것을 방비하고 싶은 풍천의 마음이.

너무도 짙게 배어나 아수라는 처음으로 이 복숭아 향이 무겁다고 생각했다.

“심연의 물이란 거지.”

아수라는 소맷부리에서 꺼내든 오죽 접선을 가볍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심연의 물을 퍼올 자라면, 용왕의 삼남중 하나일 것이고.”

중얼거리는 말소리에 사나운 기색이 언뜻 물들고.

“용왕의 삼남은 대대로 태자를 보필하는 직무를 받게 됨이지.”

단정한 까만 눈동자에 진득한 살기가 맺혔다.

“상제로 즉위하시면, 그이들 삼관 대제가 아니라 상제의 아랫단에서 상천을 지휘하는…….”

킥-.

“이 얼마나 음험한 작자들이냐.”

아수라는 오죽 접선을 든 손을 날 오른 목소리와는 다르게 성의 없이 털었다.

그의 손목을 따라 손에 들린 부채가 낭창하게 늘어지고 살대가 하나로 합해지며 단단해졌다.

빛을 삼켜버린 어둠이 길고 길게 뻗어 나와 드디어 한 자루의 칼이 되는 순간.

아수라의 입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풍천이 그 지경이 되도록 그저 버티기만 했을 것이다.”

“날 부른 건 잘한 생각이다. 영력이 온전치 못한 너보다는 내가 나을 것이지.”

“그러게, 왜 요괴 따위에게 당해서는.”

“나라면 감싸지 않아, 던져 버리고 나도 같이 굴렀겠지. 어째서 살을 내주냔 말이다.”

곱지 않은 대화 속에 묻어나는 염려가 수라전을 메우고, 뒤따라 진한 복숭아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수라의 손에 들린 묵빛 검날이 꽃물을 머금고 향기롭게 날을 세웠다.

아공간에 넣어둔 천도화는 한 자루.

아수라는 검에 천도화의 기운을 싣고 또 실었다.

기분 탓인지 검에 무게가 실린 것도 같았다.

검을 쥔 손을 가볍게 돌리자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바람 소리가 일었다.

아수라의 검붉은 영력을 따라 상쾌한 천도화의 향이 가볍지 않게 뒤따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수라는 자리에 앉았다.

이미 그는 온 얼굴이 희게 질린 채였다.

검을 다시 접선으로 돌리고 나서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숨을 고르던 아수라가 부채를 소매 속으로 갈무리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오후의 끝 무렵이었다.

“신세 졌다.”

“……벌써 해가 지려는군, 쉴새 없이 또 홍월에 천도화를 먹여야 할 것 아니냐.”

“염려 말아. 정히 안 되면 소희님께 부탁드려 만월의 가루를 밥 대신 먹을 것이니.”

아수라의 혼잣말 같은 대화가 석양을 따라 부는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

소희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영 난처해져, 그만 손을 맞잡고선 그저 식은땀이 흥건한 손끝을 부빌 뿐이었다.

“섭섭하다 이 말입니다.”

환이 찾아와 대뜸 자신에게도 꿀타래를 내어달라, 섭섭했다 말을 할 줄 몰랐다.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간식거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것이, 그럼 하는 김에 단 것 좋아하시는 풍천께 드릴 꿀타래도 만들어 드리자.

그럼, 아수라께서 서운하실 테니, 그분께도 드리자.

자꾸자꾸 일이 번졌던 것이 문제였다.

분명, 시작은 아이들과 먹을 간식거리였다.

꿀타래를 만들다 보니, 요것 손에 밀가루 묻혀 늘이지 말고 달 가루를 바르는 게 어떻겠느냐.

그저 별생각 없이 물었던 말에 아이들이 반색을 했을 따름이었다.

만월의 가루를 올리는 꿀타래라니.

그런 것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고, 만들다 보니 편찮으신 아수라께서 드시면 좋겠다 싶어 아수라께 먼저 한상 가득 드린 것이었다.

말이 두 접시였다.

낮밤 구분 말고, 서로 생을 공유하시는 사이니 두 분 그저 많이 드시고 어서 좋아지시라고, 커다란 접시 한가득 높다랗게 쌓아 가져다드렸더랬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사정까지 다 말을 하자니 너무 길어지고,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자니 맞은편에 앉은 환의 표정이 여간 섭섭해하는 것이 아니라 소희는 계속 진땀만 나는 것이다.

“저……. 그것이.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 아니라.”

“그럴 땐, 잘된 것 골라드리려 했습니다. 하고 요령 있게 빠져나가는 겁니다.”

어눌하게 뗀 말에 환이 상냥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네?”

“네.”

기분 좋은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어째서……. 놀리신 겝니까?”

“놀리다니요. 정말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휘하의 장수를 어여삐 여겨 애쓰는 고운 마음이 좋아 짐이 이번은 그냥 넘기려고요.”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웃는 낯으로 잘도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오늘서는 이것저것 해서 가져다드리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손은 언제부터 그러십니까?”

환이 가리키는 것은 소희의 손이었으나,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손끝이었다.

“아아, 이것.”

소희 역시 환이 하는 말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몽글거리고 부끄럽던 분위기가 단번에 진지해졌다.

환은 맞잡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소희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큰 손바닥 위에 올려진 소희의 두 손은 참 작고, 무척 하얬다.

“사실은 세 번째 문을 지나고 나서…… 저도 안 지 얼마 안 돼서…….”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나쁜 것입니까?

소희는 어물거리는 말끝에 동그랗게 뜬 눈을 해서는 물었다.

“세 번째 문인데, 벌써 영력이 돌다니.”

“영력이라면 저도 뭔가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짐작하기에 아무래도 하계에서 문을 연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환은 소희의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옆자리에 앉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었다.

“본래 사신의 문이 인계에서 열리는 이유는 설명 드렸으니 아실 것이고. 번번이 그 궤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네.”

“어째서 그런 것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여기는 하계. 영력이 넘치는 곳입니다. 월력을 바로 쬐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래서인가 짐작합니다.”

아아…….

소희는 전부는 아니지만, 환이 이야기해주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달빛의 넘치는 힘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한번 그 맛을 본 고로 환이 이야기하는 ‘영력’이 넘친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지 않고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제가 여기 있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영특하시거든.

그 언젠가처럼, 환의 짓궂은 말이 귀를 맴돈 것은 그에게 익숙해져서일까?

“귀문의 별을 타고난 영인 제가 하계에 있어서.”

“아마 하계에서 명부를 받고 계시는 덕에 눈동자도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수라께서…….”

“…….”

“잘 어울린다 해주셔서. 곧 더 밝고 영롱해질 것이라 해주셔서…… 으흠.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희는 제 입으로 제 눈동자를 칭찬하긴 민망했지만, 머뭇거리려던 자신을 격려해 담아둔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다.

이미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터이다.

충분하니, 이제 스스로 그 발걸음 묶지 않을 것이었다.

“은발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잘 어울리실 것이니.”

그러자 그에게서 고대하던 것 이상의 화답이 돌아왔다.

“……바뀌려나요?”

“바뀌지 않는다면 짐이 내려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소희의 머리끝을 스치자 마치 물이 번지듯 머리를 타고 빛이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어 예쁘게도 흩날렸다.

“어울리지요?”

“……세상에…….”

“그러니,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침착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환의 그것과 똑같은 은발.

몹시도 바랐던 그것은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인 양해서 소희는 염휘가 빛을 거둬드렸을 때 아쉽고 아쉬워 저도 모르게 가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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