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바람을 머금은 향내 (6)
2018.04.13.
달빛이 한결 푸근해져 있었다.
달밤이면 머리채가 얼음장 같은 냉기를 머금기 일쑤였건만.
머리를 쓸어 넘긴 손끝에 남은 것은 부드러움뿐이었다.
이것은 온통 다디단 냄새를 풍기는 저 작은 여자가 한 일이었다.
“…….”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염휘를 보며 소희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염휘는 잔뜩 달큰해진 소희를 보며 빙긋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도 향기를 가득 머금고 달큰해진 지 오래였다.
슬쩍 영력을 돋운 시선 끝에, 그녀의 목에 묶인 속박의 인이 한층 그 기세가 사그라든 것이 보였다.
과연, 명부를 하계로 옮길수록 태자의 지배는 약해지는 모양이었다.
유순해진 월력, 옅어지는 속박의 인, 그리고 홍조를 돋우기 시작한 소희의 두 눈.
그 모두가 기꺼웠다.
염휘는 기쁘게 부푸는 가슴을 깊은 날숨으로 가만히 진정시켰다.
“그런데 소희님.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천도를 즐긴 후 따스한 차를 나누던 중 아수라가 툭 던진 말이었다.
“아. 네. 조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소희는 아수라의 말에 당황해 그대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빨긋한 귀 끝이 얼마나 귀여운지도 모르고.
“명부를 하계로 옮기시니, 아마도 하계의 색을 내림 받으시려나 봅니다.”
“그런가요?”
“은발에 홍안도 잘 어울리실 것이라 기대됩니다.”
아수라는 은근한 기대를 담뿍 담아 소희에게 말을 건넸다.
실로 아수라답지 않은 친근함이었다.
밤의 아수라가 언제 누구와 저렇게 살갑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아니, 공무도 아닌 것을 아수라가 나서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낯설다.
염휘는 나서서 소희에게 욕심을 드러내는 아수라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간밤, 해묵은 은원을 털어내서인 것인가.
아니면 삼생을 공유하는 자의 친근함의 표시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옅어진 태자의 영취에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인가.
가정은 숱하게 떠올랐으나 진실은 아수라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휘하의 장수들에게 사랑받는 달 마마란 그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영혼의 맹약으로 강요된 충성을 받는 것보다, 역시 이쪽이 보기에도 좋다.
“가리지 마십시오. 검붉은 색이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사신의 관문을 모두 건너고 나면 맑아질 것입니다.”
드물게 풍천까지 부끄러워하는 소희를 도닥였다.
하.
이것이.
염휘는 자꾸만 명치가 간질거려서 참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이십 년간 미뤄두었던 것은 이렇게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한때였다.
뒤늦은 후회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였다니, 충분히 가치 있다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놓아야만 하는 상태자가 딱했다.
소희가 사신의 문을 건너고 그들이 혼례를 올린 후, 상태자가 정식으로 혼자가 되었을 때.
염휘는 자신이라도 나서서 마고께 청을 올리리라 다짐했다.
인간들처럼 피가 섞인 것은 아니나, 그들은 형, 아우로 그 대를 이어왔다.
아우가 혼자가 될 참이니, 형 된 자로 나서서 구명을 요청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명이도 이날을 웃으며 떠올릴 수 있을 테지.
자신 역시 이 끝없는 분노를 애써 누르지 않아도 말태 고이 그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깊어진 시선 끝에 검붉은 눈을 깜빡이는 소희가 잡혔다.
아수라와 풍천에게 넋 놓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요것조것 묻는 것마저 귀엽다.
체통이니 품위니 하는 것을 지키라 언질을 주어야 맞건만, 뭐 어떠랴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자신도 참, 어지간했다.
염휘는 입술 사이로 숨겨뒀던 웃음 조각이 새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려서 부모를 잃는 박복한 인생.”
철커덕.
북을 쥔 손이 바디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검은 색실이 그녀의 손을 따라 베틀에 기괴한 문양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뿐이냐, 어렵사리 거두어준 이모도 그만 가슴 병에 먼저 저승길 떠나는구나.”
불운한 운명을 새기며 흥 오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은 직인이었다.
그 좋아하는 금편이 주르르륵 달린 비녀도 어디론가 내팽개치고 단출한 모습을 해서는 베틀에 앉아 쉴새 없이 베를 짜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짜여진 운명의 천이 셀 수 없이 그득하게 쌓여있었다.
“하아…… 가여워라. 내 신세만 하겠느냐만 서도, 가엽다.”
구르륵-
베틀 위 한켠에 자리 잡고 앉은 새가 작게 울었다.
“그래, 이 아이 불운의 실도 이제 끝이 나간다. 이모를 잃는 것으로, 그 업을 다 갚았으니 마음붙이 할 지아비 하나 내려주자꾸나.”
손에 쥐어진 붉은 실이 다시 빠르게 바디를 스치고 지나갔다.
“몸은 유약하여, 잔병이야 달고 산다지만 천성이 고운 사내다.”
흥얼흥얼,
직인은 벌써 며칠째인지도 모를 만큼 쉬지 않고 베를 짜는 중이었다.
운명의 베틀은 직인이 자리를 비워도 베짜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세세한 운명의 안배는 직인의 손을 거쳐야 했다.
특히나 이렇게 업을 짊어지고 태어난 아이는 하나하나 손을 봐줘야 했다.
“이번 생에서 업을 다 털자꾸나. 다음 생에서는 그저 좋은 날만 누려야지. 무너지지 말고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듬직한 지아비도, 돈이 많은 지아비도 아니었다.
늘 병치레해서 자리보전하고 겨우 글줄이나 읽는 서생으로, 살림은 온전히 그녀의 차지가 되어 사는 것은 고단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참으로 상냥하고 도타운지라, 힘들어도 큰 의지가 되는 것이다.
직인은 그녀의 지아비 자리를 성심껏 다독이며 실이 튀지 않게 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 아이의 운명에 큰 골자를 짜준 뒤에야 쓰러지듯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가쁜 숨에 들썩이는 가슴이 후련해 보였다.
“소청조야. 나의 작은 새야.”
직인은 숨을 몰아쉬며 베틀 위의 새를 불렀다.
“내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짜였기에 이렇게 엉망이더냐.”
나는 팍팍한 가운데, 다음 생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챙겨주었건만.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막막할 뿐이냐.
직인은 소희를 함정에 빠뜨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심연의 물을 먹이고, 태자에게 가는 길을 여는 단도를 쥐여주고, 염휘에게 부정한 마음을 품으라 귓가에 속살거렸다.
매일 아침 첫해를 맞으며 공을 들여 파 놓은 함정에 빠져들길 기다렸으면서 소희를 태자에게 보내고 나서야 물밀 듯 들이닥치는 자기혐오라니.
직인은 차가운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삼천외 선인의 자긍심을 버리고, 삼천에 관여를 한 것으로 부족해, 귀왕의 신부를 찬탈하는 데 일조했다.
이 세계가 생긴 이래 이런 더러운 짓을 한 직인은 자신뿐일 것이다.
“흐으으으윽.”
직인의 뒤늦은 후회가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할 수만 있다면 청천의 전,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천신 마고시여…….”
울음 끝에 어미를 찾듯 직인이 울음이 가득한 운명의 방으로 마고를 불렀다.
그리고 직인은 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한참을 울어야 했다.
*
“팔불출이 따로 없구나. 지관아.”
태자는 제 등 뒤에 서 있는 충복에게 혼잣말인양 중얼거렸다.
“그저 멍충이인 게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휘께서 소희를 다시 하계로 돌려보낸 것을 알게 되어 난리를 부리는 태자를 설득한 건 지관이었다.
하지만, 지관은 그날 이후로 부쩍 생기를 잃어버린 태자를 보며 과연 자신이 잘 한 것인지 회의를 느꼈다.
해를 닮아 찬란한 이분은 빛을 머금어 보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미 자취를 감춘 분, 매일을 하루같이 그리워 해봐야 돌아오는 것도 아니건만.
은밀히 알아본바, 하계로 넘어간 명부가 이미 칠 분지 삼.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초조하기 그지없는 소식이었다.
지관은 이 희박한 가능성에 목을 매고 시들어가는 주인을 어떻게 보필해야 할지 실로 막막했다.
나서서 해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손을 놓으라 할 수도 없었다.
저희들의 얕은수는 이미 바닥이 났다.
지관은 이럴 때, 그저 기도를 올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다.
“이 와중에도 말이다.”
어쩔 줄 모르고 한껏 처연해진 지관에게 태자의 음성이 닿았다.
“이 와중에도, 그새 더 고와지셨구나 곱씹고 있단다.”
“전하!”
참담함에 비명처럼 내질렀으나 산들바람보다 못한 속삭임이었다.
목이 메어 지관은 태자를 부르는 것조차 벅찼다.
전하.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그 마음을 어찌하여야 덜어드릴 수 있을까요.
지관은 따끈하게 열이 쏠리는 눈매를 숨기려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참으로 고운 분 아니시더냐.”
“……제겐 무정한 분입니다.”
“그러하냐.”
하핫.
말끝에 울리는 태자의 웃음소리마저 생기가 없다.
태자는 웃고 있어도 웃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상천으로 돌아온 첫날의 그것과 똑같았다.
열의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밖으로 돌린 시선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담고 싶은 것이 없으니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
태자가 담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이렇게 고약한 것인지.
“지관아, 염려 말고 돌아가거라.”
“아니옵니다.”
“내, 이삼일 지나면 추스를 것이다.”
“전하.”
“이 원망과 분심, 그리고 갈망까지 잘 가다듬어 볼 것이다.”
“…….”
태자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울 만큼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며, 힘든 기색을 드러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니라. 네 말대로 휘께선 무서우시겠지.”
“전하 제가 그만 불경한 소리를 입에 올렸습니다.”
“겨우 한 번이니 참아 보려 하는 것이다.”
다정한 듯하나 실로 차가운 말이었다.
“그 길 재촉하자니, 뒷일이 성가시고 두 번은 없을 것이니 참으련다.”
지관은 얼굴이 희게 질려버렸다.
태자는 휘께 한 줌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저 모습은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휘를 해하지 않으려함이었다.
심지어 휘를 끌어내리면 태자에게 쓰일 업 때문에 참는다는 참으로 무서운 말을 태연히 하고 계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
지관은 발밑이 꺼져드는 것 같았다.
겨우 이십여 년이었다.
꽉 채우지도 못한 이십 년.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사랑스럽던 태자가 이렇게 냉혹해질 수 있는 것인가.
청천의 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모두가 이런 고통에 시달린단 말인가.
지관은 상하계를 모두 뒤흔들었던 청천의 전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으레 치르던 전.
언제나와 같았던 전은 오히려 그 끝에 참변을 만들어냈다.
하계의 지존이신 귀왕께서 좌를 물리시고, 귀왕의 아랫단인 아수라 역시 대를 이었다.
상천의 선인이 오천이나 죽었으며, 돌아온 상제와 휘께서도 이상해져 있었다.
그리고 휘의 변화에 가장 크게 상처를 입은 건 어린 태자.
지관은 이 모든 것이 태자의 말처럼 ‘휘’가 아니라 청천의 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고약한 고리는 언제 끊기는 것인가.’
지관은 이유야 무엇이 됐건 태자께서 업을 짓지 않으련다는 말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심사가 상하여 그러시리라.
심사가 비틀리면 없는 말도 모질게 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휘께서도 너무 하셨지.’
지관은 태자를 이해하려 애쓰며 놀란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 언제든 부르십시오. 편히 계시게 물러가옵니다.”
“아랫것들도 물리거라.”
“그러겠사옵니다.”
“차니 끼니니 아무것도. 부르기 전에 들지 못하게 하라.”
태연한 말끝에 묻은 시퍼런 분노에 지관은 한층 더 깊게 허리를 굽혔다.
“얼씬도 못 하게 할 것입니다. 신경 쓰시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태자가 되어 어린것을 때려죽여서야 쓰겠느냐.”
지관에게 말을 이르는 태자의 맑은 눈동자는 얼음장같이 차게 빛났다.
“……쉬십시오.”
“……너도 부르기 전엔 오지 말거라.”
“네. 전하.”
지관은 뒷걸음으로 물러나와 소리도 없이 문을 닫았다.
회랑에 시립해있는 아이들 손에는 차와 다과부터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이 들려있었다.
“물리거라.”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아이에게 지관이 낮게 일렀다.
“하오나, 이러다 옥체 상하실까 두려워…….”
“물리거라.”
“지관께서 권하여 주시면 아니 됩니까?”
“요것, 맹랑하구나.”
지관은 제게 시선을 맞대오는 궁녀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넌 휘께서 보내신 아이로구나.”
굽혀지지 않는 무릎이며, 빳빳한 목을 보자니.
방자한 태도가 이것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되겠느냐.
지관은 노래를 하듯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유순하고 어질다 소문난 지관에게서 이런 날 선 말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인지, 당찬 아이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관은 아이가 휘의 휘하에 있는 것을 알고도 독한 말을 하길 멈추지 않았다.
“곧, 즉위하실 분이시란다.”
음색은 여전히 햇살을 머금은 듯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선인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시지.”
지관의 발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아이와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지고, 지관의 호흡이 들릴 거리가 되어서야 지관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사그라지는 빛이야 두말할 나위 있겠느냐.”
“그…… 그런!”
아이는 지관이 상천의 빛이라고 불리는 ‘휘’를 빗대어 말한 것을 금방 알아들었다.
설마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아이의 검푸른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어 잘게 떨렸다.
명백한 조롱.
위협적인 당부.
지관은 제 주인의 겪은 부당하고, 참혹한 일을 이렇게라도 되돌려 주려 했다.
별것 아닌 말장난이지만, 후련했다.
제주인은 가장 큰 위안을 받을 곳에서 처참하게 상처받고 마음이 넝마가 되었는데, 겨우 이런 어린 선인 하나 을러댄 것이 뭐 얼마나 대수라고.
마음 한구석에선 성에 차지 않는다고 속살거렸으나, 지관은 이쯤에서 멈췄다.
태자를 상처 낸 것은 이 아이가 아니었다.
적당히 멈춰야 했다.
하지만, 적당히 맛은 보여줄 것이었다.
“왜? 넌 무슨 발칙한 상상을 했기에 이리 놀래느냐?”
게다가 알아듣고 놀라는 아이를 향해, 오히려 정색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아이는 면전에서 휘를 욕되게 하는 말을 듣고도 시침 떼며 몰아세우는 지관 덕에 정신이 쏙 빠진 모양이었다.
알아들었다고 한들,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고.
이대로 참고 넘기기엔 모욕적이었다.
“왜? 기분이 좋지 못해 보이는구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에게 지관의 얄미운 목소리가 희롱하듯 울렸다.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린 즐거워 보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아이가 지관의 다정한 이야기에 수줍어하는 줄 알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지관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 정도에 이러느냐?”
“네?”
“내 주인께서는 이보다 더한 오욕도 웃는 낯으로 참아 오신 것을.”
“……!”
모른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관은 심술궂게 웃었다.
휘의 말씀이라며 태자를 욕보이고, 상처 내고 함부로 간섭하던 ‘새’들이었다.
진즉에 이럴 것을.
모욕감과 어쩔 줄 모르는 분노에 떠는 아이들을 보자니 지관은 속이 후련해졌다.
아…… 이건 태자께오서 느끼셔야 하는 것인데.
그리고 묘한 깨달음까지 얻었다.
마냥 참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란 걸.
자신이 진작 이렇게 한 번씩 아기새들을 잡아다 단속을 할 것을.
후회가 됐다.
지난 시간 그 모두를 참으시라 미련한 간언을 한 제가 원망스러웠다.
“더 하여주랴?”
“……휘께서……!”
“저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였구나. 아님 태자궁에 딸린 전각이 두어 채 날아간 것을 보지 못한 것이냐.”
“무슨…….”
“귀도 먹고, 눈도 먼 것 같으니, 그 입도 다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니라.”
미련한 것.
지관은 들으라 차갑게 일별하고는 실쭉 웃었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지관은 모든 것을 잃고 넝마가 된 주인의 모습에 자신이라도 분노를 터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희를 빼돌린 휘께서 ‘새’를 보내 태자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간섭하시는 것은 참으로 과한 처사셨다.
아무리 휘라도,
태자께 이럴 순 없으심이다.
그리고 태자가 망가지는 것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태자궁을 때려 부수다니.
두고두고 추문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 새들의 미련한 지저귐에 태자께서 손이라도 댔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말이 흐를 것이라.
지관은 이제라도 악역을 자처하기로 했다.
이미 태자께서 하루빨리 즉위하시라 백기전에 매일같이 기도드리는 천하의 몹쓸 놈 아니겠는가.
이런 어린 새들쯤이야.
지관은 한껏 냉랭해진 목소리로 일갈했다.
“썩 물러가거라. 다시 ‘휘’를 방패 삼아 건방지게 군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태자의 침전 앞 회랑을 모두 비운 지관은 수관과 천관을 청했다.
“수관, 형님. 태자께서 부르시기 전엔 이곳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네 형님.”
“그러마.”
수관과 천관의 지관의 말에 그대로 각각 손에서 기운을 끌어와 바닥에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관이 진을 완성하자 태자궁을 따라 사방 열 자의 물길이 열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물이 그 자리를 메웠다.
시커먼 물이 철썩거리며 사납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바닷물을 잡은 길에는 기문이 설치되어 물길을 건너도 같은 자리를 뱅뱅 돌게 만들어놓았다.
“태자께서 허락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수관의 진을 파훼해도 내가 내어놓은 길을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
“모두 고맙습니다.”
지관은 기문과 진으로 둘러싸인 태자궁을 바라보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 이대로 몸을 묻어 감시를 자처하려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언제든 오겠습니다. 형님.”
삼관대제는 이번 일이 어떻게 어그러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자궁을 폐쇄하다시피 해도, 아무 말 없이 움직인 것도 그래서였다.
‘얼른 추스르고 나오십시오.’
누구에게서랄 것도 없이 간절한 마음이 터져 나왔다.
“인간계에선요, 형님.”
그리고 태자궁 앞에서 앉아 땅속으로 스미는 지관을 향해 수관이 멋쩍은 목소리를 냈다.
“보쌈이라는 게 있다하더이다.”
“아아…… 아녀자 납치.”
“정 안되면 그러면 아니 되겠습니까?”
싱긋 웃는 수관은 진심이었다.
“안될 것 뭐 있겠느냐. 정안되면 태자께서 싸안고 오시면 되겠구나.”
천박한 소리를 한다며 핀잔 줄 것 같았던 천관에게서 의외의 소리가 나왔다.
“이거, 까딱하다가는 뺏기겠습니다.”
“저런, 말이 씨가 된다 했느니라.”
“그러니 여차하면 뫼셔오십시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에. 하다 하다 안 되면 말이다. 싸안고 오기엔 태자께서 너무 무뢰배 같아 보여 아주 내키진 않는다.”
“그것 따지다 이 꼴 난 것 아닙니까.”
볼멘 수관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시커먼 물속으로 수관이 스며들고, 천관 역시 공기에 녹아들 듯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는 태자궁 앞을 오직 삼관대제만이 지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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