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바람을 머금은 향내 (5)
2018.04.09.
고약한 장난질에 걸려든 것은 셋.
그러나 하나는 홀로 남겨질 예정이었다.
차라리 그것이 소희 자신이었다면, 하고 잠시 바라기도 했었지만 소희는 뺨을 짝 소리 나게 두 손으로 치며 상념을 끝냈다.
“정신 차려!”
상태자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에게 덜 미안해지도록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소희의 최고의 호의일 것이다.
소희는 손에 들린 주머니에 끈을 꿰며 흐트러지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수라가 돌아간 뒤 소희는 아이들을 불러 주머니 만들기에 골몰했다.
이십 년의 공백을 메우려면 하루 이틀 노력해서 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잠시간에 또다시 정신을 팔고선 있었다니.
소희는 손에 들린 주머니를 마무리하고는 옆에 놓아둔 바늘과 천을 집어 들었다.
오후해가 넘었는가 싶더니, 금세 저녁상이 올라왔고 벌써 달이 정수리를 비추고 있었다.
달이 야속하게도 구름 뒤에 숨으면 바느질하기가 쉽지 않아 작은 한숨을 쉬길 여러 번.
드디어 구름을 헤치고 나온 것인지 사방이 훤하다.
밤은 언제나와 같으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바느질하는 손이 쉴 새가 없구나.
소희는 무명옷 걸치고 전전긍긍하던 그때나, 온갖 호사를 누리는 지금에 차이가 없어 문득 웃음이 났다.
곁을 지켜주던 덕실이만 빠졌으니, 다른 것이라곤 그것인가.
잘 지내고 있을 것인가.
바느질이 불러낸 과거의 인연이 다정하게 소희를 불렀다.
나 없이 잘 지내고 있을 것인가.
자꾸만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돋아 마음이 참기 힘들 정도로 울렁였다.
“아이참.”
도대체 이 마음엔 바람이 든 것인가.
매일을 하루같이 잠잠할 때가 없나.
소희는 저도 모르게 그리움에 흠뻑 젖어 가라앉으려던 것을 떨치며 바느질에 골몰하려 애썼다.
‘아씨, 고개 너머 김 대감댁 아씨 저고릿감이 어쩜 이렇게 곱답니까?’
지금 내가 그것보다 더 고운 것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있지.
‘남는 것은 없겠지요?’
원한다면 몇 필이고 내어줄 수 있는데.
‘아씨.’
덕실아.
“소희야!”
다급한 환의 목소리가 소희의 상념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마치 엷은 막이 깨져 나가듯, 무언가 머리 위에서 별빛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아?”
머리 위로 빛가루가 떨어져 내리는 것은 무척이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빛가루를 받으려 했지만 두 손 가득 받쳐 든 고운 것은 이내 시원함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괜찮은 겁니까?”
“이게 무슨…….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
달밤 신기한 경험에 소희가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등 뒤의 환에게 몸을 돌렸을 때,
그에게서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감탄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그것은 ‘기쁨’ 인 것만은 확실했다.
“아. 제가 별이 되는 과정입니까?”
소희는 달 씨앗을 떠올리며 수줍게 웃었다.
그런 소희를 보는 환의 표정은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것이었다.
“그런 건가…….”
돌아오는 대답 역시, 그의 표정만큼이나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소희는 환이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반짝이는 그의 홍안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저…….”
“한번 보시렵니까?”
환은 입을 달싹이는 소희에게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금빛이 그녀의 앞에서 둥글게 뭉쳐 회오리치나 싶더니 이내 반짝거리고 매끄러운 것을 그려냈다.
‘면경?’
소희는 환이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이미 잘 채비를 마친 상태라 늘어뜨린 머리채도 가지런했고, 분을 지워낸 맨 얼굴도 깨끗……
“엇?”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소희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뾰족하게 돋았다.
“이거.”
다급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환의 귀에 생생히 잡혀들었다.
“어떠십니까?”
“아니 어째서 눈이 이렇게…….”
소희는 당황한 듯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여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
소희는 검붉어진 자신의 눈동자를 보며 말을 흐렸다.
평생을 새카만 눈을 한 채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런 모습이란 게 낯설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관문이 열리며 좀 더 선명해진 듯싶습니다.”
얼떨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소희와는 달리 환은 말소리 가득 웃음을 물고 있었다.
“세 번째 문이 열렸다구요?”
“두 번째 관문도 건너셨다지요?”
환은 단숨에 소희에게 다가와 아직도 빛가루가 흩어져 내리는 그곳에 발을 디뎠다.
“아수라께서 말씀드렸습니까?”
“그가 짐작하였습니다. 명부확인을 한 참입니다.”
“어째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관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각 관문마다 부여받는 시험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이번은…….”
“미련입니다.”
환은 싱긋 웃으며 소희의 정수리에 소복이 쌓인 빛가루를 가볍게 털어주었다.
“이런 건 묻히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힘이 들어있지 않은 가벼운 손짓에 빛가루가 힘없이 떨려나가며 서늘함을 남겼다.
“두어봐야 가슴만 아플 뿐이니 털어내세요.”
“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소희는 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보란 듯이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끝에 감기는 머리칼이 차갑고 묵직했다.
“그새 달라붙어 그렇습니다.”
“아……. 이것이…….”
소희는 손끝에서 뭉쳐진 빛덩어리를 보며 물었다.
차갑지만 싫지 않았고, 은근한 빛을 내는 덩어리를 보자니 아깝다 싶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는 소희를 말리듯 어르는 목소리가 그녀의 시선을 앗았다.
“버리기 아까워야 하는 것이니, 미련입니다.”
“!”
“세 번째 관문은 이래서 조금 어렵습니다. 관문을 넘었다 생각하지만 사실, 진짜는 이제부터거든요.”
환은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였다.
소희의 머리채에 올라앉은 빛가루들이 점점 무게를 가지고 들러붙어 점점 묵직해졌다.
조금 전까지 붉어진 눈동자에 정신을 팔던 것도 잠시, 소희는 아무 말 없이 제 몸에 달라붙은 빛가루를 마구 털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희의 ‘미련’. 염휘에게는 쌓이지도, 몰려들지도 않았다.
뭉쳐진 덩어리를 타고 ‘아씨’라고 부르며 웃던 덕실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휘젓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빛가루에서 유모가 지어준 장옷의 감촉이 느껴졌다.
절로 손이 미적거려졌다.
세차게 털어내야 하는 손끝에서 자꾸 힘이 빠졌다.
“……아는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전, 그저 이곳에서 불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직접 털어내야 털리는 것이니까요.
그저, 정신이 모두 잡히기 전, 이름을 불러드리는 정도밖엔 못 하지만 지켜봐드릴 것입니다.
환은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가루를 원수라도 진 양 마구 털어내는 소희를 안타깝게 보며 말을 이었다.
“곧, 끝내겠습니다.”
허공을 마구 내젓는 손에 다시 힘이 실렸다.
머리에 엉켜드는 것이 제일 고약하니 소희는 그사이 머리를 야무지게도 틀어서 올린 참이었다.
“아쉽지 않습니까?”
문득문득 환은 소희에게 말을 걸고, 소희는 끄덕이거나 도리질 치며 빛가루를 터는 데 집중했다.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손이 머리타래를 고정한 머리꽂이를 쳐서 짜르랑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흐응.”
환의 콧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아 소희는 더욱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살짝 돌린 고개 끝에 보이는 두 뺨이 그사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매일같이 찌르는 것이니, 다른 것은 손에 대보지도 않은지 한참이었다.
환이 준 홍매를 닮은 머리꽂이.
그녀의 머리타래에 꽂힌 장식의 끝에 달린 붉은 구슬이 짤랑거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필사적으로 ‘미련’을 털어낸 소희는 무척 지쳐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환이 건넨 것은 몹시 반가운 것이었다.
“함께 드시자 청하려 했는데, 이제 강권해야 하겠습니다.”
환이 싱긋 웃으며 꺼내 든 것은 서왕모의 ‘천도’.
커다란 남자의 손에 넘치게 쥐어진 커다란 복숭아는 그가 아공간에서 꺼내든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달콤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향기에 절로 심신이 맑아졌다.
“이것이 그 천도이지요?”
소희는 환이 꺼내든 탐스러운 복숭아를 보며 물었다.
과연 하늘의 복숭아라 불릴 만했다.
크기도 크기거니와 강렬하고도 상쾌한 향에, 단지 가까이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력이 솟는 기분이라니.
소희의 말에 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희를 다시 탁자 앞에 앉히고는 당연하게 복숭아를 까기 시작했다.
힘주지 않아도 말간 속살을 금세 내주는 복숭아를 소희에게 건네주는 그는 무척 다정한 표정이었다.
“드세요.”
“귀한 것이라 들었는데…….”
“그러니 드세요.”
환은 소희의 손을 집어다 손에 복숭아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 귀한 것을 저 혼자 먹기엔 염치가 없습니다.”
소희는 손에 들린 복숭아를 어쩌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아……. 짐에게 이런 허드렛일을 시키시다니.”
시큰둥한 목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환의 손이 허공을 성의 없이 죽 그어 내렸다.
허공이 갈라지며 검은 구멍이 생기는 모습에 소희의 어깨가 움칫 굳었다.
“염려 말아.”
마치 그녀가 왜 겁을 내는지 안다는 듯 다정한 환의 말이 울리고,
“염휘시여!”
“소장을 이렇게 부르시깁니까!”
아수라와 풍천이 왁자지껄하게 허공에서 쏟아져 내렸다.
아수라의 결 좋은 붉은 머리채가 나풀거리며 하얀 침의 뒤로 내려앉는 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고혹적이었다.
“……소장 옷차림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소희의 시선을 느낀 듯 아수라가 짧게 변명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수라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라?”
다급한 변명에 대번에 모두의 시선이 소희에게 쏠렸다.
복숭아를 든 채 단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차마 맨정신엔 하지 못할 말이라 생각했으나, 꺼내놓은 말이 있어 답을 해야 할 처지였다.
“하오면……?”
“……하셔서 ……러워…… 그런 것입니다.”
“네?”
“항시 무심한 듯 하시나 농염하시어.”
“네?”
사방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터졌다.
차마 큰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은 그 목숨이 귀해서였다.
염라의 불인 아수라에게 농염이라니.
부들거리는 것은 염휘보다 풍천이 더했다.
소희는 귀 끝까지 새빨개져 고개를 숙인 터라 아수라의 표정을 못 봤겠지만 부들거리던 두 사내는 순식간에 희게 질린 아수라를 보고 말았다.
위험했다.
그러나 ‘농염한’ 아수라가 ‘당황’한 것은 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진귀한 광경이라, 소희가 본의 아니게 다시 한번 아수라를 농락할 때까지 시선을 떨구지 못했다.
“언제나 대단하시다 생각하였습니다. 필시 혼인 후에도 사랑받으실 거예요.”
“혼……인…….”
‘인간’으로 살았던 소희는 여성형인 아수라가 ‘혼인’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름의 덕담이었다.
아니 사랑받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찬이었다.
놀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 아수라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두 사내는 불똥이 튈까봐 두려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크흠. 어찌 부르셨답니까?”
결국은 보다 못한 풍천이 이 묘한 분위기를 상쇄하듯 말을 꺼내고 나서야 어색한 기류가 정리되었다.
“아차. 짐이 잠시 정신을 놓았다.”
풍천의 말에 환은 소희의 손에 올려진 복숭아를 턱짓으로 가리키더니 빙긋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짐이 몰래 주려 했더니 이분께서 혼자는 못 드신다 하냥 이러시니.”
“예에?”
그제야 풍천도 아수라도 사방을 달큰한 향이 메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쩌겠느냐? 한 알씩 맛보거라.”
염휘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는 아수라를 향해 지그시 눈짓을 하며 눈을 휘어 뜨렷다.
“아무 말 말고, 어서 먹거라.”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뼈 있는 말이었다.
오늘 아수라는 지존들에게 여러 번 입이 막혔다.
겸양하기도 전 두 염라의 불들에게 복숭아가 하나씩 날아들고, 잊지 않고 염휘가 제 몫을 챙겼다.
“먹어두거라. 매년 맛볼 것이다 장담 못 한다.”
크고, 묵직한 것이 영력이 그득 담긴 상급의 것이었다.
아수라도 풍천도 이 대단한 것에 감히 입을 댈 생각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손이 차마 떨어지지 않느냐?”
그리고 그들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 염휘가 자상히 말을 덧붙였다.
“별을 지키다 눈을 잃을 뻔한 풍천, 먹거라. 네가 먹고 기운을 차려야 별이 조금 덜 무안하지 않겠느냐.”
“아…… 아니!”
“짐의 명을 받고 낮의 아수라를 잃을 뻔한 아수라. 먹거라. 그 고집쟁이 대신 많이 먹어주거라. 그래야 짐도 마음이 편치 않겠느냐.”
“……다정하신 분부 받듭니다.”
“많이, 많이 드세요. 아수라님.”
이렇게까지 죄과를 따져가며 먹으라고 하는 데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수라는 염휘가 권하는 대로 풍천과 함께 탁자에 둘러앉았다.
머뭇거리는 풍천을 대신해 먼저 나서 복숭아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과육이 벌어지며, 여태 것보다 더 깊고 진한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드십시오. 소장. 눈치 보지 않고 다 먹을 것입니다.”
아수라는 소매를 야무지게 걷고는 두 손으로 복숭아를 쥐고 달게도 먹었다.
이어 다른 이들도 달고도 영험한 것을 깨물어 맛보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상쾌할뿐더러 그 맛이 죽어서도 생각날 만큼 기가 막혔다.
“아아…… 정말 이런 복숭아는 처음입니다. 이래서 천도군요.”
소희는 볼이 불룩해질 정도로 깨물어 먹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풍천 역시 머뭇거리던 것은 언제인 양 보드라운 것을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이니 아쉽습니다.”
욕심이라곤 도통 부릴 줄 모르는 소희가 나서 아쉬워할 정도였으니 그 맛이 가히 대단하다 할 참이었다.
“어째서? 매년 서왕모께서 보내주시는 고로, 봄이면 맛보게 되실 것인데?”
염휘의 말끝에 더 이상의 주저함은 없었다.
소희를 곁에 두고, 그녀와 함께 평생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말에 아수라의 동공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런 것을 두고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빙빙 돌던 두 지존의 마음이 단번에 맞닿게 되었으니, 상태자를 벌해 달라 할 것이 아니라 상급을 주어야 할 것인가.
열없는 생각에 피식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하지만 아까서는 내년서는 없다고 풍천께 말씀하셨잖아요.”
“이것은 그럴지도 몰라.”
“네?”
“이것은 팔천 년에 한 번 그 열매를 맺는 것. 나무마다 열리는 해가 달라 매년 과실을 얻는다지만 이것은 나무도 적고, 그 기간이 너무 요원하다 이 말입니다.”
염휘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천 년이라니. 어림도 안 돼는 장대한 시간이었다.
“본디 이것은 각 천의 지존을 위해 내려지는 것인데, 그 수가 많아야 두엇.”
“예?”
이번에는 풍천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풍천은 너무 놀라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부릅뜬 채 염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귀한 것을 제가 날름 먹었다니.
기가 차긴 아수라도 마찬가지였다.
염휘께서 나서서 죄를 청하듯 말씀을 하시는 통에 먹어버리긴 하였으나, 평상시 보던 것보다 크고 그것의 향이 진해 이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귀한 것이다니.
모두가 놀란 가운데 염휘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
“올해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많이 열렸다 하시었지. 그래서 서왕모께서 두엇이 아니라 한 꾸러미를 보내주신 것이야.”
염휘는 잔뜩 얼어버린 이들을 향해 아공간을 열어 보자기에 싸인 천도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이천년에 한번 열리는 것도 한 꾸러미이니. 다들 너무 수선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짓궂은 미소를 띤 염휘는 나직이 덧붙였다.
“그런다고 해서 더 주진 않을 테니.”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더 탐을 내다니요.”
질색하는 풍천에게 염휘가 다정한 말을 덧붙였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것 모두 만월의 가루에 넣을 참이야. 어떤 바보가 용한 법을 찾아내서 잘 써먹어 보려고 해.”
그래, 몸은 어떠하냐. 아수라.
염휘의 이어지는 말에 아수라가 지체 없이 답을 했다.
“전대의 만월의 가루와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힘이 고르고, 정순하며 그 효과 또한 빨라 근골의 부상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완치라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염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바보는 대체 어떤 것에게 그렇게 당한 것이냐. 해묵은 놈의 독인가 보구나?”
“곧, 나락의 절벽으로 갈 것이었습니다.”
자랄 대로 자라 그 힘이 극에 달한 요괴였다.
손톱에서 나오는 독 또한 만만치 않았을 터, 만월의 가루를 뿌리고도 어째서 쉽게 자리를 털지 못하나 했더니.
염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출렁이는 머리카락이 달빛에 은근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염휘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은 것은 그가 머리채를 쓸어 넘긴 손을 매만지면서였다.
“차갑지가 않구나.”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는 그의 시선 끝에는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소희가 있었다.
달빛을 한가득 받고 있는 그녀에게서는 천도향만큼이나 보드라운 달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으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니 생긋 웃어주기까지 한다.
제가 지금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사나운 달빛을 받아 저토록 곱고 보드랍게 만들어 내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시는 마냥 곱기만 한 분.
염휘의 시선에 말갛게 웃는 소희가 가득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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