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바람을 머금은 향내 (2)
2018.03.30.
상천은 유례없는 난리에 모두가 황망해져 있었다.
태자궁의 전각 두 개가 통째로 날아가고, 후원의 절반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상제는 태자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물어볼 법하고, 괜찮으냐 걱정할 만 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스라진 전각 안에서 태자 걸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상천의 모두가 그 입을 다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본능이 침묵을 강요했다.
사방이 숨죽인 그때, 태자를 부른 건 오직 지관뿐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때 보이느냐.”
그의 말에 태자가 날 선 대꾸를 했다.
핏빛으로 물든 눈에선 금방이라도 불이 떨어질 것 같았다.
“너 보기에 어때 보이느냐.”
“전하.”
“비참하고 비루해보이지 않느냐? 궁상맞고 우습지 않느냐.”
“전하 진정하십시오.”
“진정. 진정. 넌덜머리가 나는구나!”
“하오나.”
“근 이십 년이었다. 겨우 마음붙이 찾아 그 세월 애태우며 곁을 지킨 것이.”
태자의 악에 받친 말에 지관이 옅은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하라지만, 진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런 태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제 무능함에 욕지기가 치밀어.
저렇듯 아름다운 주인이 슬픔에 찢기는 것을 그저 두고 보아야 하는 처지가 서글퍼.
절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그저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모두 내게 이렇듯 잔인하느냐!”
후웅-.
태자의 목소리 끝에 바람이 물렸다.
“전하!”
다급한 지관의 목소리에도 태자는 끓어오른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았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처럼 더욱 힘을 끌어 올렸다.
태자가 차를 즐기던 전실에 드리워진 휘장이 거칠게 떨리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찢겨버리고, 찻잔이 무서운 바람에 덜그럭거리며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이런다고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지관은 이성을 잃고 날뛰기 직전의 태자에게 목청을 돋웠다.
“그럼 그 잘난 도의를 따라 내게 남은 것은 무어냐.”
낮은 목소리에 깔린 잔인한 파괴 본능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태자를 잠식했다.
“그녀를 바라 기다린 내게 돌아온 것이 무엇 있었느냐?”
“전하!”
콰드득-
드디어 전실의 대들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한층 매서워진 바람을 끌어모은 태자는 차게 웃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직인 따위의 사술에 의지해야 했던 내 처지가 과연 마땅하느냐!”
“진정하십시오!”
“당장에라도 길을 내 데려올 수 있는 분을, 이 치욕을 견디며 모셔온 결과가 이것이냐!”
“전하의 부덕이 아니옵니다! 소희님의 잘못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관은 한층 거세어진 바람에 맞서 목청을 돋웠다.
그는 숫제 생고함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나의 부덕이 아니다? 그럼 어째서 이런 꼴을 견디라는 것이냐.”
지관이 목청을 돋운 것과는 반대로 태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내밀해졌다.
소름 끼치도록 낮아진 목소리에 담긴 잔악함이 무섭게 번득였다.
“휘가 내 운명을 휘저어 버린 것마저 참으란 말이냐. 다른 이도 아니고 나를 품어낸 휘께서 그러하신 것까지 참으란 말이냐.”
속삭이던 태자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찢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내게만 이토록 잔인하신 것이냐!”
모든 건 휘가 끼어들며 시작되었다.
지관은 태자가 불러드린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했다.
상제에 비견되는 태자의 영력이었다.
그가 일으킨 폭풍에 이 정도로 버텼으니 장하다 해야 할 참이었다.
“전하. 변화는 두려운 법입니다.”
지관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더 이상 서서 버틸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이 마치 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지는 태양의 설움을 태자전하께서 알아주시지 않으면 어찌하오리까.”
“설움?”
콧방귀를 끼는 듯 차갑기 그지없는 반문이었다.
그러나 지관은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가 믿을 건 자신의 세 치 혀뿐.
그나마도 태자가 들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음이라 그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죽음으로 그 좌가 물리는 것입니다.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육신에 겁이 나셨을 테고요.”
후우우우웅-.
여전히 바람은 거칠기 그지없었지만, 지관은 태자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단 것을 확신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는 육신에 놀라신 차에, 새로운 ‘휘’가 태자전하의 처소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쿨럭.
지관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삼키려 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몸은 몇 마디의 말에도 버거워했다.
“알고?”
“……배신감 느끼셨을 것입니다.”
“무어라? 배신감?”
이번에야말로 태자는 우스운 소리를 들은 이처럼 소리를 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도록.
그의 웃음소리를 머금은 바람소리가 차갑게 울었다.
후우우웅-
태자는 제게 머리를 조아린 지관을 보며 웃고 또 웃었다.
그의 백금발이 시린 빛을 머금고 바람에 함부로 나부꼈다.
“휘께서 내게 배신감을 느낄 만큼의 애정이 있으시단 말이냐.”
휘날리는 백금발 사이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에게 물었다.
“애정이 있어서?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을 아시고도! 기어이----!”
태자는 순식간에 비명처럼 목청을 돋웠다.
“기어이 빼앗아 버린 것이란 말이냐! 이 얼마나 간악하고 매정한 어미란 말이냐. 제 아들 눈에서 기어이, 피눈물을 내게 하시는 분이 과연 애정이 있으시긴 한 것이냐.”
지관은 태자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크흐흐흐흣. 애정이라니. 이토록 징그럽고 모진 것이 언제부터 애정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냐.”
“태자께서 잘되시길 바라며 엄히…….”
“잘되어라 빌어 안곁자리를 비우게 하심이냐? 진정 그리 믿는 것이냐!”
이것은 엄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악랄한 괴롭힘이 아니냔 말이다.
태자는 몹시 웃긴 듯 소리 지르던 그대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벌게진 눈꼬리가 웃음을 웃음처럼 보이게 두지 않았으나, 태자는 소리 내 웃고 또 웃었다.
태자께서 저렇듯 조소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늘 태자께 냉랭하신 분이셨다.
본래도 다정한 분은 아니었지만, 유독 태자에겐 더욱 심하셨다.
그것은 현 귀왕, 지금의 염라대제께서 태자셨을 때부터, 조금 더 정확히는 염휘께서 나신 이래로 시작된 일이었다.
사사건건 사소하다 못해, 티끌만한 것이라도 휘께서는 두 분 태자를 비교하기에 서슴지 않으셨다.
주로 꾸짖음 듣는 것은 상태자, 명이었다.
출생이 늦어 그 체격이 작은 것조차 모조리 태자의 잘못이었다.
휘의 관심을 바라 웃어주는 태자에게 채신머리없다 매섭게 쏘아붙이고, 그녀를 반겨 달려오는 태자를 물린 매정한 분이었다.
싸늘한 눈 끝으로 태자를 담아 독화살을 쏘듯 아픈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분.
‘청천의 전에 하태자께서 나서신답니다.’
‘참입니까? 형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쯧. 도대체 언제 철나실 겁니까?’
‘네?’
‘이 모자란 것을 위해 강보를 지었다니.’
그날 처참하던 태자의 속내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었겠나.
희게 굳어 잘게 떨리던 검푸른 눈동자.
그러나 태자는 끝내 울지 않았다.
매서운 말을 하는 휘께 공손히 허리 굽혀 단정하게 대답을 하기까지 했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실언하였나이다.’
‘노력한들 되겠습니까?’
태자의 숙여진 허리는 휘가 몸을 돌려 본궁으로 돌아가도록 펴지지 않았다.
태자의 신발 앞코가, 유난히 짙어져 도드라졌지만 그의 뒤에 시립했던 그 누구도 태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눈을 돌려, 벌게진 서로의 눈을 모르는 체 해주었듯.
그리고 그날 이후 태자는 더 이상 휘를 찾지 않았다.
덧그린 듯 말끔한 미소를 지으며, 두어 마디의 인사뿐. 예전처럼 모후의 다정한 관심을 바라던 어린 태자는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은 청천의 전 이후였다.
두 천의 지존이 모여 그들의 치세에 한 단번 경계에 모인 사특한 것들을 쓸어내는 ‘전(戰)’이었다.
본래 직접적으로 앞에 나서는 것은 전투가 가능한 하천의 사자들이라 상천의 선인들은 모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사상자가 없었건만.
그해의 청천의 전에는 상천의 선인 오천을 잃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 전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계의 지존이신 귀왕께서 청천의 전 중 그 좌를 태자께 물려주셨으며, 귀왕의 아랫단인 염라의 세 번째 불도 그 좌를 대물림했다는 기함할 소식이 더해지며 분위기는 침중해졌다.
그리고 청천의 전을 마치고, 상천으로 돌아온 상제와 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냉랭해져 계셨다.
“청천의 전이 아니라 두 분께서 전을 치르신 것인가?”
그들의 사이를 풀어주려는 서왕모의 농에도 두 분의 사이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변은 상하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찾아 들었다.
청천의 전.
매 치세에 치러지던 천의 전이 달리 이름을 갖게 된 연유였으며 두고두고 회자 되는 이유였다.
이십 년 전의 천의 경계에서 벌어진 전투.
거기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고 모두들 짐작했다.
휘의 사나운 말투에, 결국 태자가 궁을 나가는 것으로 평화가 찾아오나 했던 것도 잠시.
성장을 마친 태자의 모습에 상천은 술렁였다.
휘는 불안했을 것이다.
그 불안을 터트린 건, 소희님의 존재.
지관은 한층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상처 입은 제 주인을 달랬다.
“전하.”
“지관아. 애쓰지 말거라.”
“전하.”
“손으로 하늘을 어찌 가릴 것이며, 아무리 감싼들 아닌 것이 참이 되지 않는다.”
“울지 마십시오.”
실수였다.
차가워진 바람이, 매섭게 들이치는 한기가 지관에게는 태자의 눈물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
대노해 당장에라도 목을 칠 것이라 생각하고, 지관은 방정맞은 제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이 한목숨 내드리는 것이야 아깝지 않았지만, 저 가여운 분을 혼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태자는 말이 없었다.
하다못해 역정 내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태자는 오히려 불러일으킨 바람을 꺼뜨렸다.
미풍마저 잠든 고요 속에 태자의 처연한 음성이 울렸다.
“너도 아는 것을, 휘께서만…… 몰라주시는구나.”
“……저, 전하! 이 불충한 것의 목을 치고……!”
“되었다.”
소희도, 어마마마도.
가장 원하는 이만 몰라주는구나.
태자는 순식간에 말끔해진 얼굴을 해서는 웃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빛이 번지듯, 점차 밝아지는 것을 지관은 우연히 보게 되었다.
가을 하늘을 따온 것 같던 그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차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운 것이었다.
지관은 가늘게 손끝을 떠는 태자를 위해 말없이 묵례를 올리고 조용히 몸을 물렸다.
어마어마한 고통.
그것을 태자는 겪어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 좌의 무게가 얼마나 대단키에.
지관은 마음이 깨져나간 태자가 잠시도 추스를 새도 없이 들이닥치는 변화를 견뎌야 한다는 것에 입안이 썼다.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한 지관이 향하는 곳은 오늘도 백기전.
천인공노할 소원을 오늘도 간절히 빌 참이었다.
태자께오서, 얼른 태양의 좌에 오르시길.
저분께 간절히 바라는 한 분을 허락받을 자격을 갖추게 도와주십사.
“크흡.”
지관은 문득 눈물이 치밀었다.
가릴 새도 없이 후드득 떨어져 내려 그의 발밑을 짙게 물들였다.
일평생을 휘만 바란 가련한 사내.
모후를 바라던 어린 태자의 얼굴과, 소희를 바라던 청년이 된 태자의 얼굴이 아프게도 그의 가슴에 박혔다.
‘휘를 허락하십시오. 마고시여.’
천지를 만드신 위대한 천신 마고시여.
단 하나 휘를 바라는 태자께, 유일한 소망인 휘를 허락해 주십시오.
지관은 눈물을 제물 삼아 빌었다.
*
불꽃이 머무는 홍안에 뺨이 흠뻑 젖은 얼굴이 사랑스럽게 잡혔다.
서럽게 우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녹진하게 풀어내고, 소희가 우는 소리가 우습게도 그녀의 존재를 생생히 그려내는 것 같아 오히려 부재에 허덕이던 지난날의 보상이 되었다.
환은 펑펑 우는 소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귀여운 소리를 내는 그녀를 안고 있자니 이제야 정말로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중증이야.’
환은 저도 모르게 느긋한 평을 하며 입매를 느슨하게 늘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고집스럽게 ‘척’하는 것도 하기 싫어졌다.
놓다니.
원한다면 보내주다니.
거짓말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소희가 태자의 옆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불길이 가슴에 인다.
죗값을 치른다며, 자신을 바라는 저 까만 눈을 기만하며 밀어냈다.
보내주다니.
죗값을 치르다니.
애먼 염라의 불을 때려눕히고, 아닌 척 고고한 척.
실상은 늘 소희의 곁만 맴돌았던 주제에.
그녀의 말이 혹시나 빈말일까 마음 졸인 주제에.
엉큼하게 머리꽂이를 건넸던 손으로 그녀를 붙들길 얼마나 열망했던가.
환은 순식간에 검게 물드는 머리를 애써 털어내며 두 뺨을 흠뻑 적신 소희를 달랬다.
“거보라지.”
흐끅거리는 울음소리까지 사랑스럽다니.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다.
환은 키들거리는 웃음소리를 삼키며 소희의 작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 모르셨습니까.”
“……네?”
“……나가지 말란 말입니다.”
“네?”
은근한 그의 말을 소희가 알아주길 바라며, 환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숨을 가만히 눌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물기 머금은 눈동자가 한껏 커져 바르르 떨렸다.
알아들은 것인가.
환은 어쩔 줄 모르고 파들거리는 소희를 향해 입술을 내렸다.
동그랗고 착하게 생긴 이마에 꾸욱 입술을 눌러주었다.
제 것이다 낙인찍듯.
힘줘.
그리고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공들여 말했다.
“제 곁에 있어주세요.”
“저…… 정말…….”
“있어 달라 간청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 하시면, 짐의 곁에 남거라. 명령이라도 할 것입니다.”
환은 제 욕심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이 순간이 면구하다 생각했다.
말로만 죗값을 치른다 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눈꼬리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소희가 이런 자신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 한없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환은 그대로 소희의 머리를 지그시 눌러 꽉 껴안아 주었다.
도저히 얼굴을 보고 말 못 하겠다 싶었다.
“달 마마가 되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참입니까?”
“휘라니, 못 보냅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큼 대범하지 못하니…….”
“두 번이나…….”
작게 속삭이는 소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소희가 그에게 상처 준 것이 아니라 고약한 운명이 벌인 일이었다.
환은 소희가 이번 일에 얼마나 크게 상처받았는지 그제야 눈치챘다.
사술에 걸렸다는 말도 그녀에겐 면죄부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저 착한 이는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돌릴 것이었다.
환은 어깨를 떨며 울음을 삼키는 소희에게 말을 이었다.
“세 번을 가버리셔도, 백번을 등 돌려도. 내겐 그대뿐이니.”
“흐읍…….”
소희는 환의 맹세와도 같은 짙은 고백에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방울질 새도 없이 흐르는 눈물.
기어코 터지는 소희의 눈물에 환은 저도 코끝이 시큰하다 생각했다.
어째서 이렇게 아파하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했어야 했을까.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다.
더 이상 끌려다니는 것은 넌덜머리가 난다.
“가지 말아 그대.”
“…….”
“가지 말아. 못 보낸다 하였으니. 그저 그러마 대답해다오.”
환은 이제 거리낌 없이 답을 강요했다.
달 마마께 공대해드린다던 약속도 잊을 만큼 성마르게 굴었다.
소희가 이번 일로 겁먹고 물러나지 못하게 마구 몰아세웠다.
“어서.”
“네.”
“!”
“남을 것입니다. 내주지 않으셔도 제자리라 생각하며…… 여직 기다렸습니다.”
그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소희의 말소리에 이내 가슴이 따끈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배신하였지만.”
“그런 건!”
“살면서 두고두고 갚을 것입니다.”
“짐이…… 짐이…… 더 갚을 것이 많으니 평생을 갚아도 다 못 치를 죄를 지었으니.”
환은 문득 목이 메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했던 만큼, 못나게 굴었던 만큼 잘하여 드릴게.
전하지 못한 말을 알아 달라, 뜨겁게 힘을 다해 안아주었다.
울고 웃던 그들의 대화가 끊어진 것은 그 밤이 이슥해서였다.
똑똑-
“아직 침수 중이십니까?”
똑똑-
“뭐 이리 오래 주무십니까?”
능청스럽다 못해 당당한 밤의 아수라의 목소리가 그들의 달큰한 말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문 열어 달라 대놓고 난리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