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68화 (68/114)

68. 바람을 머금은 향내 (1)

2018.03.26.

느긋한 듯, 처참한 속내를 숨기고 염라의 불을 달래던 염휘가 소희를 맞으러 나선다는 말에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아수라와 풍천이 얼떨떨해하던 것도 잠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어느새 황금으로 은근히 물든 염휘의 홍안이 바르르 떨리며 어디론가 시선이 매였던 것이다.

“염휘시여.”

심상치 않은 모습에 초조해진 풍천이 염휘를 불렀으나, 이미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어디에론가를 향해 쏘아진 후였다.

“진정하십시오!”

깜짝 놀란 풍천이 그의 영력을 뒤쫓듯 몸을 일으켜 달려나갔고, 그 뒤를 아수라 역시 따랐다.

그러나 단번에 상천으로 날아가 버렸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염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희가 사라졌던 회랑 어디쯤에 영력을 개방한 채 서 있는 그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사방이 들끓는 영력이 불러온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치는 와중에,

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염휘의 홍안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을 뿌리고 있었는지,

지친 안색 뒤에 숨기고 있던 그의 미소가 얼마나 찬란한 것이었던지.

눈이 멀 듯 아찔한 염휘의 표정에 아수라와 풍천의 발이 묶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염휘시여.”

떨리는 목소리가 빛을 머금은 듯 환한 염휘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염휘는 대답을 하는 대신 하늘을 향해 느릿하게 두 팔을 내밀었다.

즐거운 기색 그대로, 반기는 듯한 그의 두 팔이 뻗어진 허공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풍천과 아수라의 의아함도 잠시.

염휘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계의 기운이 뒤틀리는 공간을 타고 울컥울컥 넘쳐들었다.

“이, 이 무슨!”

그리고 순식간에 일그러지던 공간이 찢어졌다 생각하는 것도 잠시.

끝없는 어둠을 타고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꺄아아아아아아!!”

“!”

숨을 다해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아니, 그보다 가슴이 먹먹했다.

“저 목소리는……!”

아수라의 다급한 말이 끝나기도 전 내밀어진 염휘의 두 팔 안에 소희가 떨어져 내렸다.

영력을 단단히 둘러 황금으로 물든 그의 팔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소희를 가뿐히 받아냈다.

“소희야!”

“소희님!”

“마마!”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한 반가운 경악에 찬 목소리들이 한껏 돋았다.

이 자리에서 실성한 것이 아니라면 염휘의 품에 떨어져 내린 것은 소희가 확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그리웠던 상냥한 목소리가 염휘를 불렀다.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된 이름으로.

“환……?”

“소희야.”

염휘의 두 팔에 안겨든 소희가 낮게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염휘가 한껏 기쁨을 머금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순간 소희의 작은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소희야!”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염휘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염휘의 팔 안에 떨어진 소희는 이미 기절한 채였다.

무시무시한 추락감에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이…… 이게…….”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아수라도 풍천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염휘가 조금 전 그들에게 소희님을 맞이하러 간다며, 몸을 살같이 쏘아 보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건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인연인겁니까.

맞으러 가신다는 말은 이것이었습니까.

그러나 상황에 당황한 것은 풍천뿐만이 아니었다.

염휘마저 영력을 거둬들이지 못할 만큼 놀란 채였다.

그를 불러들이는 거부하지 못할 기척이었다.

소희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그리운 기척.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어 달려왔다지만 정말로 소희를 받아들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돌려받게 될 줄은…….

상천에서 거두어간 것 아니었나.

직인을 시켜, 그녀를 충동질하고 앗아간 것이 아니었나.

염휘 역시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아 소희를 품에 안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아수라의 목소리가 그런 염휘를 향해 조심스럽게 울렸지만, 그 안에 짙게 배인 걱정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삼생을 공유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수라는 유독 소희의 일에 정성이었다.

풍천은 아수라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조금 흥분한 것 같은 기색을 느껴 슬쩍 돌아보았다.

“너……!”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는 아수라 동공은 이미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수라는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동공 안을 잠식한 붉은 기운.

아수라는 무섭도록 고갈되는 영력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깜짝 놀란 풍천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 아수라의 안색이 희게 질리며, 삽시간에 턱을 타고 땀이 떨어졌다.

“하아. 돌아오셨군요.”

밤의 아수라가 예고도 없이 올라와 말문을 뗐다.

낮의 아수라의 얼굴을 한 채, 목소리만 올려보낸 정도면 아수라의 사정이 딱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정말…….”

이젠 없다니까 정말.

풍천은 작게 투덜거리던 것도 잠시 서둘러 아수라의 손을 잡아 쥐었다.

푸르게 굳은 아수라의 손을 맞잡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영력이 빨려 들어갔다.

겪으면 겪을수록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크으…….”

이내 풍천의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안 좋은 사정을 밤의 아수라가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가 낮의 시간에 구태여 깨어나 몸을 잠식할 정도라면, 사정이 있을 것이다.

“소장이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낮의 아수라의 얼굴을 한 채, 여성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은 확실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신기한 것도 잠시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염휘께서도 삼천과 그 너머 땅까지 안력을 돋웠던 후라, 밤의 아수라를 붙잡아 주기엔 무리이니, 믿을 것이라곤 자신뿐.

아수라는 그런 자신의 손을 잠깐 강하게 잡았다 풀어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건네주고는 염휘에게 안긴 소희에게 바짝 다가갔다.

입술 사이로 쉴 새 없이 하얀 입김을 뿌리는 아수라는 상태가 안 좋아 보였지만 검붉은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흐으음.”

숫제 비를 얻어맞는 것처럼 푸르게 질린 얼굴에선 쉬지 않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수라는 새큰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느리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소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길게 돋은 송곳니를 숨기지도 않고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수라!”

염휘께서 내주실 손이 없으니 이 또한 풍천의 몫.

풍천은 잔뜩 마른 낙엽같이 생기 없는 아수라가 바닥에 닿기 전에 가까스로 잡아챌 수 있었다.

이미 의식은 끊기고 밤의 아수라 또한 다시 잠겨든 듯 쓰러진 채 미동이 없었다.

“아수라?”

풍천은 처음 보는 아수라의 모습에 놀라 살살 잡아 흔들었다.

그가 힘주는 대로 흔들리는 아수라의 모습에 왈칵 겁이 났다.

명치끝이 싸하고, 아린 것이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아수……!”

“두어라, 가서 쉬게 해.”

“염휘시여.”

“남은 영력이 하나도 없구나.”

“이…… 이 바보 같은 작자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풍천은 저도 모르게 아수라의 말투 그대로 중얼거리는 것도 모를 만큼 잔뜩 당황해 있었다.

“그 바보 같은 작자가…….”

염휘는 말을 이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밤의 아수라가 나와 소희를 살펴볼 만한 일이란 건.

“삼생을 공유한 자의 기억을 들여다봄이로군?”

“네?”

풍천은 금시초문이었다.

‘삼생을 공유하다니?’

소희님이 어떻게 아수라의 삼생을 공유한다는 것인가.

염휘는 풍천의 표정을 오해한 듯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풍천, 아수라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쯤은 알 테지. 부여받은 것이 삼생(三生)이라는 것도.”

“그야 당연히 알지요.”

“아수라의 세 번째 명은 원하는 이가 쓸 수 있다.”

“네, 압니다. 두 아수라 중 하나만이 부활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래, 그래서 아수라의 삼생은 기억을 공유한다.”

풍천은 염휘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아수라와 소희님이 무슨 상관이라고…….

속을 알 수 없는 이 녀석이나 좀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구만.

시큰둥하던 풍천의 얼굴이 굳은 건 쓰러진 아수라를 어깨에 들쳐 메고 일어나면서였다.

이해가 되지 않던 염휘의 모든 말이 중간 고리도 없이 완벽히 들어맞아 풍천을 강타했다.

“……목숨 자리가 하나 비었던데. 간밤 대단했나 보지?”

사신의 문을 세울 때, 소희님께 건네준 것인가?

염휘께서 명령하신 것인가.

풍천은 희게 질린 얼굴을 해서 흘러내리는 아수라를 추켰다.

새삼 그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그조차 깜빡하고 잊었던 것이다.

아수라에게 ‘부활’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의 세 번째 목숨을 소희가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럼, 그 말씀은 소희님께서 아수라의…….”

“그렇지.”

“어째서…….”

풍천은 저도 모르게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홍월로 별의 목숨을 구걸하던 아수라가 내놓은 것이다.”

“아수라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속박의 인에서 풍기는 상태자의 영력에 홍월이 아수라를 잠식했었다.”

“하아……. 홍월.”

“그도 아니면, 짐이 아수라의 목을 쳤어야 했더냐?”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명백한 인과였다.

풍천은 어금니를 깨물고 신음을 삼켜야 했다.

도대체, 상천과 무슨 악연이 닿아 있기에 자신은 매번 상천 것들에게 소중한 이의 목숨을 내주기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달 마마의 목숨을 바랐으니 아수라에 대한 처분치고는 다정하셨다.

풍천은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가까스로 비틀어 잇새로 반쯤은 진심인 투정을 흘렸다.

“홍월을 치셨어야죠.”

그 욕심꾸러기를요.

힘이 하나도 없이 늘어진 아수라를 다시 한번 추켜드는 그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 미련한 인사가 어지간히 소희님을 신경 쓰나 봅니다.”

“그런가 싶다.”

“이 몸을 해서도 기억을 들여다볼 정도면 말입니다.”

그러다 영력이 모조리 말라버려 죽으면 어쩌려고.

풍천은 이 서운하고 속상하고, 한편으로 슬픈 이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별일 없는 게지.”

“있었더라면 영력을 모두 말려버려서라도 말했을 것입니다.”

“가라. 가서 이 미련한 두 녀석을 정양하라 이르고, 당분간 본궁 출입도 금한다 하거라.”

“듣겠습니까.”

“듣지 않는다면 후원 전각에 묶어 두거라.”

“기분 좋으십니까.”

실쭉한 목소리가 제주인의 솟은 입꼬리에 괜히 타박을 붙여주었다.

민망하라 한 소리였건만.

“좋다마다. 넌 안 좋으냐? 짐은 좋아서 죽겠다는 말을 이제 알겠느니.”

한술 더 뜨니 풍천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소장 물러갈 것이니, 부디 좋아 죽는 염라의 불을 목도하게 하진 마옵소서.”

“저런, 진귀한 구경을 놓치는 것이다.”

“사양하겠습니다.”

질린 표정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풍천이 아수라를 들쳐 메고 나가는 등 뒤로, 염휘가 퉁겨준 붉은 구슬 둘이 따라붙었다.

소리도 없이 깨진 그것은 붉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그대로 스며들었다.

“어지간히 좋으신가 봅니다.”

염휘가 쏘아준 그의 환을 맞은 풍천이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좋다마다.”

숨김없이 드러나는 충실한 목소리에 풍천 역시 문을 닫기 직전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요.”

환은 내궁으로 걸음 하지 않았다.

풍천과 아수라에게 영력을 담은 환을 날려주기까지 하자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피로감을 호소해왔다.

쏟아지는 졸음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미 한번 바닥을 낸 영력이었다.

그 잠깐 사이 채워질 리 만무했건만, 길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소희를 받아내고, 남은 것을 뽑아 두 가신에게 붙여주니 이제는 환도 무리였다.

전신을 덮치는 견디기 힘든 피로감이 내딛는 한 발짝도 힘들다 호소했다.

염휘는 소희를 안아 들고 본궁의 자신의 침전으로 걸음 했다.

내궁의 아이들이 기가 죽어 눈물바람으로 지내는 것을 뻔히 알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를 웃게 만드는 건 소희를 안아 든 두 팔은 힘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깃털같이 가벼운 것도 아니건만.

“이러니 놓을 수 없단 말이지.”

환은 열없는 소리를 하며 웃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안겨있는 소희에게 가만히 뺨을 가져다 비볐다.

그녀의 앞머리가 뺨을 찌르고 간질였지만, 좋았다.

그의 뺨에 닿는 소희의 날숨에 드디어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소희가 없는 삼 일간, 그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

미치광이처럼 삼천을 찾아 헤맸다.

천을 관장하는 지존이라는 자리가 그를 옭아매고 책임감이라는 족쇄가 당장에라도 상천으로 올라가고 싶은 그를 붙들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견디기 힘든 상실감과, 억누르기 힘든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억지 같은 현실.

환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산 것 같았다.

이제야 숨이 쉬어졌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소희 덕에 멈추었던 시간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 흐르는 것 같았다.

못 보낸다.

설령 상태자의 곁에 휘로 서겠다 말해도 못 보낸다.

환은 맞댄 뺨을 통해 느껴지는 은근한 온기에 기대 서러운 숨을 토했다.

가지 말아라.

아수라가 소희의 기억을 엿보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를 잠식하던 주체하지 못할 두려움.

혹시라도 소희가 지난 삼 일간 그의 곁에서 너무도 행복했다면.

인세에서의 기억에, 그 기억의 끝에 있던 자신의 야차 같던 모습에 마음이 돌아선 거라면.

가정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격통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심장을 비틀어 짠다면 이런 기분일까.

탈진해 쓰러진 소희를 일으켜 세워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그만큼의 무게로 도망치고 싶은 두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주변을 물리거라.”

환은 침전 앞의 시비들을 모두 물렸다.

그 어떤 작은 소음이라도 소희의 단잠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곁을 지키던 아이들로 시작해 모두를 물리고 나서야 환은 품에 안고 있던 소희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그사이 푸석해진 얼굴에 마음이 쓰리다.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는가.

돌아와 줘서 기쁘고, 이렇게 험히 보내주어 괘씸하다.

마침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면, 혹은 소희가 본궁이 아닌 귀문 같은 곳에 떨어졌다면.

몇 가지 가정만으로도 환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분, 그는 함부로 마음을 바라지 못해 늘 곁을 빙빙 돌게 만드는 그녀를 이렇게나 마구잡이로 내려보내다니.

심지어 태자 역시 자격 있다 생각해, 소희에게 선택하라 말한 제 입을 찍어버리고 싶었다.

함부로 대하라 소희를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귀한 대접받고, 떠받듦 받으며 행복하라 밀어낸 것이었다.

제 죄의 빚갚음이었고, 자신의 애달픈 단심의 진심이었건만.

으드득-.

이가 갈리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불을 잡아당겨 목까지 덮어 주고 걸치고 있던 도포만 벗어두고는 그도 미끄러지듯 침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죽을 것같이 피곤했다.

그러나 곁에 누운 소희를 보자 그새 미소가 물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환은 작게 중얼거리며 베개 베고 얌전히 잠든 소희를 끌어다 팔베개를 해주고는 돌려 품에 넣었다.

옅은 숨소리가 생생해지고, 따끈한 날숨이 가슴을 파고드는 기분에 비로소 마지막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움직이는 소희를 따라 풍기는 태자 특유의 영취가 느껴져 속박의 인을 다시 한번 눌러주어야지 하는 것은 생각뿐이었다.

소희의 작은 머리를 끌어당겨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마자 환 역시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섞여드는 두 숨소리마저 다정했다.

“!”

소희는 눈을 끔뻑였다.

“세상에.”

바르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오자 환의 감겨 내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소희는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끝없는 추락감.

코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맛보던 절망감.

던져지기 직전, 자신을 향해있던 휘의 사나운 눈초리가 어둠 속에서 착실히 소희의 신경을 긁어먹었다.

견디기 힘든 감각은 소희를 계속 비명 지르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환의 품이라니.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그리던 얼굴인지, 누가 알아줄 것인가.

소희는 자신이 환을 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이 눈앞의 남자를 목숨처럼 원한다는 것을.

일평생을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상태자에게 들던 미안함과는 그 궤가 달랐다.

환에게는 미안하다는 심정보다 그립다는 마음이 더 컸다.

“세상에.”

꿈이라면 깨지 말거라.

추락 끝에 잘못된 것이라도 깨지 말아라.

소희는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가득 찬 눈물 덕에 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꺼풀이 눈물을 밀어내고 나자 소희는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어느샌가 자신을 바라보는 저 불꽃을 담은 홍안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잘 잤어. 그대?”

너무도 그리워 허덕였던 음성에.

“읏.”

참으려던 생각과는 달리 후드득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까칠해진 그의 얼굴이 제 탓인 것을 알아서.

그럼에도 마냥 다정하게 웃어주어서.

“보고 싶었단다.”

“흐윽.”

“다시는, 돌아와 주지 않을까봐…… 무서웠답니다.”

무언가를 삼키는 환의 말에 그리움만큼이나 미안함이 차올라 눈물로 떨궈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차라리 화를 내세요.

사술에 눈멀어 당신을 등지려 했던 나를 벌하세요.

소희는 울음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환의 가슴에 묻으며 크게 흐느꼈다.

그리고 나를 받아주세요.

당신밖에 없으니. 이제 그만 나를 밀어내고 받아주세요.

전 이미 갈림길에서 선택을 끝냈으니 그만 인정해요.

그날의 당신을, 이제 그만 용서하세요.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의 앞섶을 흠뻑 적시도록 울고 또 울며 귓가를 울리는 그의 음성에 귀를 세웠다.

“그럼, 미뤄뒀던 식사를 하렵니까? 짐은 몹시 허기지답니다.”

무안하고, 미안한 그녀의 심사를 알아 덮어주려는 듯 자상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울고 또 울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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