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갈라진 틈 사이 (15)
2018.03.23.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소희의 사정은 아무도 고려해주지 않았다.
마치 상태자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낯선 방문객이 양해도 없이 나타났다.
문간 밖에 서 있는 이는 소리도 없이 나타나, 인기척에 소희가 돌아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
소희는 반사적으로 입을 뗐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질문이 무의미했다.
벌꿀을 뒤집어쓴 것 같은 머리타래.
상태자와 똑 닮은 푸른 눈동자.
그저 다른 것은, 소희를 향해 찔러드는 것 같은 탐탁지 않은 시선뿐.
“……츳.”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소희를 바라보던 이의 하늘하늘한 소맷자락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공간이 찢어지며 소희를 이곳으로 보내주었던 ‘그것’이 검은 아가리를 벌렸다.
“가거라.”
지극한 목소리에 깔린 옅은 혐오.
“어째……서 입니까?”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고귀한 느낌을 가진 ‘노부인’에게 소희가 말문을 열었다.
“같잖게스리, 지금 나를 떠보려 함이냐?”
첫참부터 돌아오는 답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일말의 호의나, 기본적으로 가질법한 우호적인 감정은 노부인의 목소리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늘거리는 음색에 담긴 노기를 모르지 않지만, 소희는 고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휘’께서 오신 연유를 몰라 여쭈었사옵니다.”
“두 지존의 비로 낙점되었다 하니 거칠 것이 없느냐? 건방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노부인은 소희가 휘라 부르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꼿꼿이 치켜든 턱 끝에 그녀의 감출 수 없는 도도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감히 그녀의 앞에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는 소희를 못 견뎌 하는 오만함이 잔뜩 풍겨져 나왔다.
하지만 소희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복받치는 감정을 달래느라 잠긴 목소리가 말을 거듭할수록 또렷해졌다.
이미, 매끈하게 갈무리 된 표정 아래, 그 눈빛에 실린 힘이 무척이나 단단했다.
소희는 저를 함부로 대하는 휘에게 야무진 목소리를 냈다.
소매 아래 맞잡힌 손이 단정했다.
“제가 휘께 이리 함부로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어라?”
“전 귀문의 별이자 상천의 휘를 타고 났습니다. 그 어떤 자리에 올라서든 휘께서 저를 이리 함부로 대하실 수는 없음입니다.”
“이것보아라. 벌써부터 네가 이러니 건방지다 함이다.”
노부인은 자신의 성질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명부조차 못 옮긴 것이 벌써부터 제 앞의 광영에 눈멀어 떠드는 꼴이라니.”
노부인의 기세는 무척이나 흉흉해 그녀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으나, 어느 순간 소희에겐 그것이 수세에 몰린 짐승이 내보이는 이같이 딱하다 싶었다.
“……두려우십니까?”
“무어라?”
비명 같은 일갈을 던지며 ‘휘’는 한걸음 발을 뗐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딛고 있는 것은 문밖의 ‘회랑’.
분노로 떨리는 매서운 손끝이 당장에라도 소희를 잡아채 어떻게든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휘는 여전히 소희의 침전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가.
소희는 실상 휘와 맞서면서부터 진작부터 잔뜩 겁을 먹고 벌벌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이로부터 받는 노골적인 적의가 견디기 쉬울 리 없었다.
상처가 되고 억울했다.
자신은 이곳을 빠져나가지조차 못하는데 휘는 단번에 아공간을 그려내기까지 했다.
저보다 우월하고 고귀한 존재가 보여주는 힘의 차이에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소희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인계에서의 소희는 겁먹고 도망가도 됐겠지만, 이미 스스로를 달 어미라 생각하는 소희는 그럴 수 없었다.
제가 이렇게 얕잡혀 보이면 자신의 달 아이들 역시 그럴 것이었다.
자신을 두 지존의 점지된 반려라는 것을 알면서도 폭언을 내뱉는 ‘휘’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아마 ‘휘’가 켕기는 것쯤 될 것이었다.
소희는 확신처럼 굳어진 심증을 방패 삼아 자꾸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흘끗.
거친 숨을 내뱉는 휘의 발끝은 문틀 위.
그러나 마치 장벽에 막힌 것처럼 편평하게 구겨진 그녀의 비단신 코를 보며, 소희는 휘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이 건방진 것!”
“그럼 저는 휘께 무례하다 말씀 올리면 되겠는지요?”
천연덕스러운 소리에 휘의 주름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명이가 아무리 바란다 한들…… 이 모자란 것에게 휘의 광휘를 물려줄 수는 없지.”
까드득.
짓씹어지는 잇소리가 스산했다.
모자라다니.
다시 없을 폭언이었다.
하지만 휘는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감히 저런 것이 휘뿐만이 아니라 별까지 자청한단 말이냐. 별께서 얼마나 찬란하게 빛을 뿌리던 고아하신 분인 줄 알고.
마치 자신보다 한참 높은 분을 부르듯, 별을 향한 경애를 숨기지 않던 휘의 눈초리가 소희에게 닿자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눈을 지그시 감고 떨었다.
실상 더럽혀지기까지 한 것이니 더더욱 안될 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휘를 향한 소희의 시선이 점점 단호해졌다.
말이 도를 지나쳤고, 정상이 아닌 듯한 그녀의 모습에 주눅 드는 것도 말이 안 됐다.
확실히 휘는 정상이 아니다.
“실은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요?”
소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나서 아차 했다.
문밖의 휘는 한눈에도 분노한 것이 보일 만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건방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구나.”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담긴 것은 훼손당한 오만함.
정곡을 찔린 건가?
“진 뒤에 숨어 이 정도라면, 앞으로 그 꼴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을 다하면 명이의 진이라 한들. 찢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라.”
하지만 휘는 소희의 질문에 은근한 협박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내가 예서 멈추는 것은.”
가만히 서 있던 휘의 소매가 살랑거리며 부풀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치우기 위함이지, 네깟 것의 말 때문이 아니니라.”
이미 회랑 밖은 거대한 폭풍우 한가운데였다.
휘의 틀어 올린 머리는 미동도 없었지만, 그녀의 비녀에 달린 금편이 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소맷자락은 찢어질 듯 나부끼고, 그녀의 치마단 역시 푹신하게 부풀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소희는 휘가 무언가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거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상천으로 감히 기어오르지 말고.”
스산한 미소와 함께 휘의 손이 뻗친다 싶더니 소희의 멱살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단단히 붙들려 그대로 허공으로 들어졌다.
“으윽!”
“내 발아래, 너를 기다린다는 귀왕께 가거라!”
더러운 것을 내던지듯 사납게 휘둘러지는 휘의 손짓을 따라 허공에 들린 소희가 그대로 아공간의 입구로 곤두박질쳤다.
소희는 멱살을 쥐고 있던 무형의 힘이 사라지자마자 힘껏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전신을 집어삼키는 끝도 없는 추락감과 눈앞도 보이지 않는 극한의 어둠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대번에 소희를 집어 삼켰다.
“허락해 주십시오.”
풍천은 염휘 앞에 엎드렸다.
이마를 차가운 돌바닥에 가져다 대며,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굴욕적이고도 간절한 태도로 간청했다.
“불허한다.”
이미 두시진 째 이어진 지루한 싸움이었다.
염휘께서 영력을 회복하시고 집무를 다시 보신다는 말이 돌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든 참이었다.
방책을 생각할 겨를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질색하는 아수라를 우격다짐으로 끌고 오다시피 하여 염휘를 찾은 풍천은 막무가내였다.
“소장을 보내주십시오.”
“…….”
풍천은 홍월이 맡은 상태자의 영취를 이야기하며, 그를 상천으로 보내 달라 졸랐다.
어린것이 찾아와 떼를 써도 이보다 덜할 것이었다.
차마 보고 있기 민망해 아수라조차 쥘부채 뒤에 숨었다.
하지만, 그런 아수라조차 풍천을 말리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둘의 심사야 뻔한 것.
그러나 그보다 더할 염휘에게선 계속 불허가 떨어졌다.
풍천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보내만 달라 간청하는데도, 그것마저 막으면 소희님을 어찌 찾으시려 저런단 말인가.
답답하고, 울컥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가만 보면 지존이라는 것은 도통 할 만한 게 못되었다.
전대의 귀왕께서도 그러시더니, 그 강대하고 찬란한 영력을 가지고도 뻔하게 당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말이었다.
준마의 네 다리에 쇠공을 매달아 둔 꼴이니.
지존입네 하는 것도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었다.
“상천으로 소장을 보내주십시오.”
“아수라.”
두 시진을 이어지는 한결같은 풍천의 말에 염휘가 곁에 시립한 아수라를 불렀다.
“네.”
“네게 명령하느니 저것을 들어다 후원 정자에 묶어두고 오너라.”
“소장, 영력이 고갈되도록 힘을 쓴 고로, 잠시 귀가 먹어 잘 들리지 않나이다.”
쥘부채 뒤에 숨은 아수라에게서 즉각, 거부가 돌아왔다.
고얀 것들.
혼잣말인 게 분명한 염휘의 중얼거림이 진득하게 공기를 울렸다.
아수라와 풍천은 퍼렇게 질린 안색을 해서는 잘도 종알종알 떠들어 염휘의 속을 뒤집었다.
그라고 해서 풍천을 막고 싶을 리 없었다.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게 된 이상, 이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두 눈에 훤했다.
허옇게 질린 풍천에게 제 영력을 넘치도록 실어 상천에 가는 길을 단번에 내주어 올려보내고 싶었다.
가서 맘껏 휘젓고, 소희를 데리고 돌아오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염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귀왕,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귀왕의 비가 도망갔다는 비웃음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것을 소상히 파헤치면 나올 것은 상태자라는 사실에 염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운명의 실이 고약하게 묶였던, 끊어졌던 그것은 전부 태자의 변명이었다.
염라대제의 비를 탐한 상천의 애송이에게 내려질 것은 ‘죽음’.
천의 질서는 엄정했다.
그것을 어긴 태자에게 떨어질 상제의 판결이 눈에 뻔히 그려졌다.
그것 역시 상제의 개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려질 판결이었다.
게다가 상제는 곧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이제 와서 태자를 새로이 길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염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희를 찾아야 했고, 내줄 수도 없었다.
태자의 행태가 고약했고,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천의 대물림까지 어그러지게 할 수도 없는 것이 하계의 지존인 ‘귀왕’으로서의 그의 생각이었다.
‘비’의 자리가 이십 년간 비워진 탓에 하계가 얼마나 휘청였던가.
그런데 지존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참람한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하나의 천(天)의 지존이라는 것은 이토록 막대하고도 막중한 자리였다.
그 자리를 이어나가는 일이 결코 쉽게 치부되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염휘는 개인적인 원한을 우선은 뒤로 미뤄 놓기로 했다.
환은 가슴에서 이는 불에 눈멀어, 지금에라도 당장 태자를 잡아 조리돌림 하고 싶었지만 천(天)의 주인인 염휘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
입안이 쓰디썼다.
소희가 명부를 옮겨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 안에 은밀히 찾아내야 했다.
“귀는 염휘께서 먼 것 아니십니까! 소장 후원이 아니라 상천으로 보내 달라 이말입니다.”
눈앞에서 가슴을 텅텅 두드리는 풍천의 답답함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염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상천으로 가는 길을 내고 싶어 하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고 호흡을 골랐다.
손짓 한 번이면 되었다.
풍천이든 아수라든 올려보낸다면, 상천에 숨겨진 소희쯤이야 금세 찾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척이 문제였다.
염라의 불.
음극에 다다른 그들의 이질적인 영력을 상천의 이들이 모를 리 없다.
염휘의 쥐어진 주먹에 하얗게 뼈마디가 돋아 올랐다.
길을 내고 싶다.
하지만, 그 길은 상천이 아니라 소희에게로.
단 한 번.
눈 한번 깜빡일 순간에 이루어져야 했다. 상천에 길을 내어선 안 됐다.
그것이 ‘지금’ 염휘의 결정이었다.
“내어주마.”
감겼던 그의 눈이 뜨였다.
권능을 실은 그의 홍안은 은은한 황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옥좌에서 일어난 염휘는 그의 앞에 엎드려 읍소하는 풍천에게 다가갔다.
“상천에 길을 내어줄 것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저가 정해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풍천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에게 되물었다.
염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오냐, 내 언제 허언한 적 있더냐.”
“허면, 아수라와 같이 가도…….”
“아니. 가게 되면 짐이 단신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 무슨!”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소리보다 더한 것이었다.
“풍천.”
염휘는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풍천을 불렀다.
“네, 염휘시여.”
풍천은 기세를 실은 주인의 목소리에 공손히 답을 올렸다.
“네 충정은 기쁘게 가납할 것이다.”
“염휘시여!”
“쉬.”
벼락같이 터지는 풍천의 외침에 염휘는 검지를 들어 올려 입 앞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난 천의 지배자. 상천은 곧 좌의 대물림이 시작될 것이다.”
“하오나 염휘시여!”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라도 한 듯 아수라까지 언성을 높였다.
“태자의 기세가 나날이 솟는구나.”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풍천이 아니 된다 하시면 저를 보내주십시오. 들키지 않고 소희님을 뫼실 것입니다.”
“며칠이 남은 건지, 일 년이 남은 건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염휘는 나직이 목소리를 냈다.
고저 없이 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괴로운 듯 붉게 물든 보석안이 찬란하게 빛을 물고서 반짝였다.
“비의 부재로 이 하계가 어그러지던 것을 너희는 알 것이다.”
“…….”
“그래도!”
아수라는 염휘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들을 달래는지도.
확실히 이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를시 상태자에게 내릴 징벌은 그의 죽음밖엔 없었다.
“천의 주인은 비워져서는 안 된다.”
“…….”
그즈음 염휘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나 하나의 은원으로 움직이기에 천(天)에 물린 생명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그 무게를 모르는 상태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존인 내가…….”
“크흑…….”
“짐까지 상천의 어린것들을 외면해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짐은 상태자의 형님이니라.
조금 더 어른인 짐이 그래도 악수는 피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풍천은 염휘의 이어지는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소장은…… 소장은…….”
“풍천.”
“이미 주인을 한번 잃었사옵니다. 염휘시여. 이제 소장에게 달 마마까지 두 눈 뜨고 넘기라 이 말씀이십니까.”
서러움에 복받친 말이 악쓰듯 울렸다.
“전대의 귀왕께서도 그러시다 좌를 물려주셨습니다! 어째서 매번 사정을 봐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풍천은 벌게진 눈을 해서는 감히 염휘에게 시선을 맞대왔다.
억눌렸던 분노와 상실감에 그는 머리가 반쯤 날아간 것처럼 굴었다.
“풍천.”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소장을 보내주시란 말입니다! 소장이 이 목숨값으로 죄를 갚겠습니다. 감히 무단으로 상천에 발 디뎠다 하여 징벌하십시오. 그럼.”
“그런 식으로 상태자를 살려야 하는가 풍천?”
듣고 있던 아수라마저 풍천의 비감한 말투에 동조된 듯 검붉은 동공을 한 채 중얼거렸다.
“아랫좌의 장수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상태자를 감싸야만 합니까.”
“……이런.”
“죗값을 대신 무고한 이에게 떠안으라 말씀하실 것입니까. 저도 비 마마까지 잃는 것은 못 참습니다. 풍천 역시 못 보냅니다.”
잔뜩 흉흉해진 기세들에 염휘는 난처한 듯 쓰게 웃었다.
“그대들이 이러면, 짐의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는 짐은……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
염휘는 웃고 있었으나, 웃지 않는 것만 못했다.
느슨한 미소에 걸린 짙은 상실감에 그는 우는 것보다 못한 표정이었다.
“상천의 수만의 어린 선인 목숨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교아’를 내본 어버이의 마음이 차마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구나.”
“아아아…….”
비통한 탄식이 떨어졌다.
자신들에게도 소중한 아이였다.
상천의 어린 선인들 역시 소중한 목숨.
분노에 떨던 두 염라의 불의 기세가 단번에 꺼졌다.
“……뺏기지 않을 것이니라. 그저 말미를 가지려 함이다.”
“참입니까?”
“짐이 뺏길 성싶으냐? 하기사. 짐이 아니더라도 교아 때문에라도 돌아오실 것이다.”
“네?”
아수라의 물음에 염휘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능글맞게 웃었다.
“이미 아이까지 낳으신 분 아니냐.”
태자가 그걸 모르시는 모양이다.
“그사이 마음 변하셔서 아니 오시겠다 하시면, 교아 앞세워 찾아가련다.”
“그렇구나.”
그저 염휘가 저희를 달래주려 하는 실없는 소리에 진심인 듯 고개를 끄덕이는 풍천의 모습에 아수라의 입귀가 짜증스럽게 비틀렸다.
“지긋지긋하고 아둔한 인사.”
쫘아악-.
부채를 짜증스럽게 펼쳐 들고는 팔랑팔랑 부쳐내며 영문 모르는 풍천을 희게 노려보았다.
“아니 왜?”
“그럼 소희님이 상천의 태양전서 아이를 내주셨더라 하면 그렇구나 하고 물러날 것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 어! 어.”
아수라의 말에 그제야 깨달은 풍천이 염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왜 농담을 하고 그러십니까.”
“후원 전각에 묶어두고 오겠습니다.”
짜증스러운 아수라의 목소리에 염휘의 능청이 따라붙었다.
“저런, 아수라의 귀는 지나간 말도 주워듣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비감하던 분위기가 슬슬 풀리던 오후.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미소가 번지던 그때 갑자기 염휘의 표정이 울 듯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짐은, 짐이 비를 맞으러 가야겠구나.”
조금 전까지 염라의 불에게 천의 무게를 이야기하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당황한 것은 아수라뿐만이 아니었다. 풍천 역시 저가 상천으로 쳐들어가자 말하던 것도 죄다 잊은 듯 염휘의 말에 입을 떡 벌리고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염휘시여.”
“소희를…… 짐이 데리러 가야겠다.”
“진정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염휘의 태도에 아수라가 그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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