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66화 (66/114)

66. 갈라진 틈 사이 (14)

2018.03.19.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장지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드셔보시렵니까? 향이 일품이지요.”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드시질 않으면 버텨내질 못한답니다.”

소희는 태자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이 좋지 않으니 속이 치받쳐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었다.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속아서 왔던, 그렇지 않던.

이미 끝났다 믿었던 인연이 이제 와 제게 손 내미는 모습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고 부르기엔 억울했고,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엔 거리가 있었다.

그와의 지난 시간이 추억으로 남아 마음을 울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과거였다.

운명에 휘둘리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갈림길에서 그녀는 결정을 내렸고 그 끝이 어떻든 되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금만이라도.”

애타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을 휘저어 울컥거렸다.

“아…….”

소희는 황급히 입을 막으며 넘어오는 것을 다스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반나절이 지나버려 속은 헛헛하고 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삼켜지지 않았다.

목이 바짝바짝 타고 속이 새카맣게 탔다.

갈증이었다.

그러나 이 지독한 갈증은 서늘한 달빛을 닮은 남자를 바라는 허기였으니 이곳에서 채워질 리 없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갈증만큼이나 소희를 들볶는 것은 미안함이었다.

두 눈에 뻔히 보이는 넘치는 애정.

태자는 인세에 ‘표가공자’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마음이었다.

표가 공자일 때도 그의 혼약자로 살던 그때도, 늘 버겁던 마음이었다.

한낱 고아인 자신에게 어째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나 의아했었다.

부친들의 약속이었다지만, 이미 소희의 부친은 세상을 등진지 오래였다.

그저 모르는 체했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생각했지만, ‘약조’를 잊지 않는 그의 깊은 마음에 흔들렸다.

고결한 마음이라 믿었고, 그런 남자의 마음을 받는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 갑작스러운 혼약에도 뒤로 무르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인데.

“…….”

소희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크게 뜨인 까만 눈동자에 잡힌 것은 마냥 그녀를 바라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담긴 뜨끈하게 달궈진 애정.

그가 눈에 담고 있는 것은 소희였지만,

그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천의 휘.

소희는 한순간 모든 것이 명료하게 이해되었다.

첫 순간부터 퍼부어지던 애정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은 상태자의 애틋한 시선의 주인은 소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저 상천의 휘를 타고 나기만 했다면.

그는 누가 되었더라도, 귀왕에게 맞서 반려를 얻기 위해 지금처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목덜미에 속박의 인을 새기고, 매일같이 향물 먹인 종이에 빼곡하게 사랑의 밀어를 담아.

마음을 흔들고, 흔들어 그를 바라보게 했을 것이었다.

“아하…… 하.”

갑자기 어째서 웃음이 터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빠지듯 웃음이 잇새로 마구 새 나와버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소리가 제멋대로.

미안해했어야 했나.

소희는 갈증이 이는 가슴을 가만히 눌러 참으며 눈을 깜빡였다.

시시때때로 불을 지핀 것 같은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소희는 말없이 삼켰다.

갈증보다 더한 것을 목도한 참이었다.

기만.

상태자가 그녀를 바라 했던 그 모든 것이.

그 모두가 그녀를 기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소희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애당초 표가 어르신과 혼약을 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염휘와 혼약을 한 처지였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전해주지 못하고 세상을 떴으니까.

그리고 그 자리를 상태자가 과거의 약속을 들먹이며 자신을 가로채려 했던 것이다.

자신이 귀문의 별이자 상천의 휘라서.

저 넘치는 애정도 이 소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천의 휘에게 쏟아지는 것.

분명했다.

소희는 온통 헝클어져 끓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마음타래.

그리고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이 타는 갈증까지.

모두 지금 누르려고 애썼다.

“입이 타는 것입니까?”

저 점잖은 말에 소리를 질러 악다구니하기 전에.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를 내보내려 했다.

미안한 감정은 단번에 지워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까보다 조금 전보다 더한 갈증.

온몸의 수분이 일시에 말라버린 듯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목이 탔다.

빳빳하게 마른 혀로 버석거리는 입술을 쓸어본들 소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

“바쁘신 분 아닙니까. 자리를 이렇게 오래 비우시면 아랫것들이 고생을 한답니다.”

소희는 최대한 덤덤하게 그를 떠밀었다.

태자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있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더욱 여상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제가 불편하신 것입니까?”

태자의 삐죽 솟은 목소리에 담긴 언짢은 기색을 모르는 척.

“곤하여서 좀 누울까 한답니다.”

작은 한숨을 덧붙여 시선을 돌렸다.

정중하고도 완벽한 축객령이었다.

태자는 더 이상 소희의 침전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가야만 했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듯 한참을 입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짙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두고 갈 테니, 두고 목이라도 좀 축이세요.”

끝까지 다정한 당부를 잊지 않고 살뜰하게 소희를 챙겼다.

“살펴 가세요.”

그의 마음을 짐작한 뒤 소희는 조금 더 가뿐해졌다.

미안함을 덜어내니 그 자리에 단호함이 들어찼다.

휘를 바라신다지만, 그것은 즉위 이후의 문제.

자신은 이미 이십 년을 곁을 비워두고 그녀를 기다린 염휘의 곁에서 달 마마로 살 것이었다.

상태자의 처지야 딱하고, 다정한 태도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헤아리기에 소희는 너무 벅차다 생각했다.

‘교아야.’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뭉클해지는 이름이 이미 그녀에겐 생겼고.

‘소장 목숨을 걸어 지켜드리겠사옵니다.’

아수라와 풍천의 믿음을 받았다.

소희는 아수라의 맹세를 떠올렸다.

쥘부채를 팔랑이며 말하던 아수라의 목소린 가벼웠지만, 거기에 담긴 말은 한없이 무거운 것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도 없고 삼생의 명을 거는 아수라의 맹세라니.

자신은 발목이 잡혀도 단단히 잡혔다.

“푸흐.”

침중하던 마음이 어느샌가 스르르 풀려 소희는 혼자 웃고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들이 이미 소희 곁에는 넘쳤다.

돌아갈 곳도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어서.

기묘한 공간에 갇힌 것까진 알지만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무턱대로 나간들 상태자만 불러들이는 꼴이라 소희는 방안에서 서성거리며 골몰했다.

생각키에 이것은 진 같은 것을 쳐둔 것이 분명했다.

어느샌가 돌아보면 탁자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어느샌가 돌아보면 차가 놓여있었다.

시간을 맞춰 사람도 없이 음식이 날라졌고, 갈아입을 옷이 주어졌다.

태자는 소희의 경계를 이해하는 것인지 꼬박 하루를 들르지 않았다.

그편이 소희로써는 편했지만, 그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도움은 기대할 수 없고 그녀는 완벽히 고립되었다.

지금의 소희가 기대할 것은 오직 단도를 찾아내는 것뿐.

하지만 어디로 간 것인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푸욱-.

살갗을 찢고 섬뜩한 것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던 감각이 선연했다.

황급히 뽑아 들어 목을 잡아 누른 것은 기억이 났지만 뽑아든 단도를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공포에 질려있던 몸이 아마 뽑아서 어디론가 던져버린 모양이었다.

“나랑 같이 이곳에 떨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검에 꿰뚫린 목을 타고 흐르던 느낌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째서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일까.

두고두고 생각해도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사 단도로 이 공간을 타고 넘는 이상한 일을 지금 겪고 있으면서도, 목덜미의 상처를 이해하려고 하다니.

인간의 버릇인가.

소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태자가 없는 하루 동안 소희는 내도록 이 공간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맸다.

어딘가에 단 한 군데라도.

틈만 있다면.

그녀는 방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찾아낸 것이라고는 억눌렀던 절망뿐이었다.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돌아가겠다는 다짐은 날숨을 따라 점점 희박하게 흩어져 내렸다.

“단검만 있으면.”

어디에 있을까.

단 한 번만 그어 내릴 수 있다면.

소희는 따갑게 비쳐드는 햇살을 피해 그늘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제는 여기서 지내는 시간이 진짜이긴 한지조차 의심스럽다.

자신은 벌써 여러 날을 이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것이 과연 진짜 태양일까.

태자가 이렇게 오래도록 자신을 혼자 둘 리가 없을 텐데.

온갖 가정들이 소희를 좀먹었다.

그 와중에 가장 힘든 것은 ‘혼자’ 고립되어있다는 것이었다.

회랑은 아무리 걸어도 늘 제자리였다.

바람은 제멋대로 넘어 들어오는 이곳을 소희만이 갇혀 나가지 못했다.

소희는 발작적으로 침전을 뛰쳐나와 회랑을 마구 헤맸다.

1각이든 반시진이든 돌아다녀봐야 자신은 이 침전 문 앞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뛰고 또 뛰고.

이러다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심박이 엉망이 되어서야 소희는 멈췄다.

“허억.”

밭은 숨이 갈급하게 터져 나왔다.

이마를 진득이 덮은 땀방울이 소희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소희는 이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해 다시 침전으로 돌아왔을 땐 정수리를 달구던 해가 그 위세를 꺼뜨리기 시작할 때였다.

“도대체 얼마나 달리다가…….”

소희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달그락-

작은 소음과 함께 앞에 놓인 탁자에 없던 그릇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늘 간발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마치 보란 듯이 숟가락이 놓이고, 젓가락이 그 옆으로 자리하는 것까지 모조리 다 보였다.

“아아…….”

그리고 고슬고슬하게 지어 김이 나는 밥그릇이 놓일 때, 소희는 밥그릇을 쥐고 있는 손을 아주 잠깐이지만 봤다.

본 것 같았다.

아니 봤어야만 했다.

분명 여기는 비틀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누군가는 ‘밖’에서 물건을 넣을 수도 뺄 수도 있었다.

금제에 걸린 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뿐.

소희는 다시 손이 보이길 기다렸다.

밥과 국이 놓였으니 이제 찬기가 올라올 차례였다.

나물을 소담히 담은 작은 그릇이 허공에서 내밀어졌다.

소희가 노리던 순간이었다.

그릇이 탁자 위에 완전히 놓이기 전, 소희는 손을 뻗었다.

그릇 너머 쥐고 있다면 이쯤이겠다 싶은 지점까지 찔러 넣듯이 뻗어 움켜쥐었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것이 정말로 손끝에 잡혀 들자 소희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잡아끌었다.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작은 몸집의 여자가 바닥으로 나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꺄아악!”

기겁하는 목소리가 침전을 울렸지만 소희는 그 소리가 정말 반가웠다.

그녀 앞에 오랜만에 다른 이가 나타났다.

머리채를 양옆으로 조롱조롱 묶은 어린 선인이었다.

“누…… 누구세요.”

선인은 저를 내려다보는 소희를 보며 잔뜩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애썼다.

“도와줘요.”

소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어린 선인에게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네?”

“여기서 나가게 도와주세요.”

“여, 여기가 어디인데요?”

아방한 말투에 소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안하게 구르는 시선에는 거짓이 없었다.

어린선인은 정말로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여기는.”

소희가 막 허리를 굽혀 선인에게 뭐라고 입을 떼려고 할 때.

굉음이 울리며 침전의 문이 떨어져 나갔다.

“!”

“꺄아-.”

소희는 어린 선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다만 가만히 숨을 한번 참았다.

“나가거라.”

문을 때려 부수고 침전으로 걸어들어오는 이는 상태자였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감정의 한 조각이라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태, 태자 전하.”

“나가거라.”

태자는 빙긋 웃었다.

서늘한 안광을 흩뿌리며 입꼬리만 끌어올린 그의 표정은 아름다웠지만,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사나워 보였다.

“저…… 그, 그럼…….”

“어서!”

두 손을 맞잡고 이마에 가져다 대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 태자는 인사를 올리려는 선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작 놀란 선인이 구르듯 뛰어 그대로 침전을 빠져나가고, 침전 안은 소름 끼치는 적막감에 휩싸였다.

“깜찍한 일을 하시는군요.”

부셔진 문을 내려다보던 그가 성큼. 한걸음 내딛었다.

“아니면 영명하시다 기뻐해야 할까요?”

성큼.

긴 걸음에 그가 훌쩍 가까워졌다.

“그도 아니면. 제가…….”

걸음을 따라 나풀거리던 그의 백금발이 등 뒤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억눌린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짙게 가라앉은 차가운 시선이 소희에게 와 닿았다.

“…….”

소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태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봐 주었다.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시퍼런 분노를 터트리던 눈에서 단번에 노기가 걷혔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에는 다시 묘한 것이 맺혔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그것은,

서운함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 밑바닥에 깔린 것이 서운함이라니.

소희는 살짝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태자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저렇게 황급히 달려와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운하다니.

‘휘’만을 바라는 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설마 오해……였던 건가?’

소희가 제가 태자의 마음을 함부로 오해했던 건가 생각을 되짚어 보기도 전, 크게 한 걸음을 떼는 태자의 모습에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는 호흡이 섞일 정도의 거리까지 그가 다가왔다.

태자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가만히 고개를 미끄러뜨려 소희를 바라볼 뿐.

콧날이 스칠 것 같은 거리.

깜빡이는 속눈썹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감춘 것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 거리였다.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에서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 맺혀있어 소희는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아버렸다.

태자가 바라는 것은 상제가 된 그의 곁을 지킬 ‘휘’일 텐데.

상처받은 듯 서운한 듯 가늘게 떨리는 그의 시선은 마치 소희, 그녀를 바라는 것만 같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서 뺨을 스치는 그의 말에 돌려보내 달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러지 않겠다 약속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답 역시 들려줄 수 없었다.

소희는 눈을 감은 그대로 귀도 막아버렸다.

“상천에서 뵈어 놀라셨더라도…….”

무작정, 우리가 함께했던 그날을 부인하지 말아주세요.

당신 곁을 지키고자 했던 나의 그 날들을.

부정하지 말아주세요.

태자는 뒷말을 삼키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혼란에 빠진 듯 잘게 떨리던 소희의 눈동자에 어린 당혹감을 봐버린 탓에.

차마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 꺼내들 수가 없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혼자 쉬시고 싶어 하시니 그렇게 해드릴 것입니다.”

하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억눌린 감정이 무엇인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으며 태자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를 따라 달큰한 복숭아 향내가 멀어졌다.

멀어지는 향을 맡았지만 소희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본능이 경고했다.

“언제나, 한결같아 더더욱 마음이 아립니다.”

또 한걸음. 그가 멀어졌다.

밀어둔 미안함이 다시 솟기 전에 소희는 돌아가야 했다.

보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은 표정도, 다정한 미소도.

저만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도 그 어떤 것도 소희는 담지 않을 참이었다.

그녀는 이미 염휘를 차고 넘치도록 담은 후였다.

태자를 담아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참을 수 없는 통증은.

명치 어디껜 가에서 시작된 이 아릿함을 자신은 모르는 것이다.

그 언젠가 햇살 아래서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나게 웃던 태자를.

자신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지워버릴 것이었다.

자신을 보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백금발의 준미한 청년을 소희는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두 눈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소희야.”

부름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리고 소희는 문득 콧날이 무척 시큰하다 생각했다.

저이의 마음을 두 번이나 무참히 짓이겨 죄스럽다 생각했다.

그러나, 딱 그만큼.

절절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그녀를 밀어내려 하던 환이 떠올랐다.

상처받았으나 담담한 척.

오래도록 기다려왔으나, 그런 적 없다는 듯.

늘 오만하게 빛을 뿜는 그녀의 귀왕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도 상냥한 것이었는지.

한 번 더 뼛속깊이 새겨질 뿐이었다.

태자의 상처 따위, 그의 애틋함 따위, 더 이상 소희에게 담겨들 수 없는 것은.

저토록 필사적으로 제 마음을 숨기며 그녀의 행복을 바라주는 어떤 미련한 사내 때문이었다.

그녀마저 외면하면 정말로 혼자가 되어 버릴 그가 떠올라 소희는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태자를 보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

그리고 내내 억눌렀던 한마디가 못 견디게 새어나가 버렸다.

그가 보고 싶어.

눈물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마음이 뺨을 흠뻑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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