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65화 (65/114)

65. 갈라진 틈 사이 (13)

2018.03.16.

귀문의 별이 사라지고, 새날이 밝았다.

그러나 새아침의 햇살도 가라앉은 분위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염라궁 곳곳을 메우고 침중한 한숨이 쉬지 않고 울렸다.

모두가 침통한 가운데 오로지 염휘만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매끄럽고, 무감한 시선으로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짚이는 곳이 없으십니까?”

“직인도 자취를 감추고 실로 막막합니다.”

풍천과 아수라가 서로 앞 다퉈 고충을 토로했지만 염휘에게서는 차라리 안 들으니만 못한 답이 돌아왔다.

“짐이 무서워 가버리신 분의 종적을…… 내가 어찌 짐작하겠느냐.”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관두십시오!”

한번 덤벼들더니 이제 아예 군신의 예쯤은 깡그리 잊기로 한 것인지 풍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분의 본심도 아닌데 이렇게 맥 놓고 계시면 어쩝니까!”

“……본심이 아니라니.”

“심연의 물에 장난질까지 쳐놓았으니 누구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

“소장은 눈알이 타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약한 것에 지배를 당하고 계실 그분의 사정을 헤아리셔야지 휘둘리면 어찌합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아수라는 야무진 소리를 하는 풍천을 대견하게 바라봐주었다.

“찾아보십시오. 염라의 첫 번째 불 아니시옵니까. 안력을 돋우면 안 보이는 곳이 없지 않습니까.”

픽-.

“안 보인단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염휘가 웃음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예?”

“이 하계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 어디에도 안 계신다.”

“그…… 그게 그럼……!”

뜻밖의 말에 이번에는 풍천이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밤사이 궁 안을 빠짐없이 뒤졌으나 안 보이셨다.

그래서 하계의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계실 것이다 막연히 생각했건만.

이 하계에 안계시다고?

“아공간에 계신 듯하니 그것이 보일 리가 있겠느냐.”

“……소장이 직인을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수라 역시 염휘의 말이 의외였는지 이를 갈며 스산한 목소리를 냈다.

“삼천외의 땅에 모셔놨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염휘가 손을 게으르게 저었다. 귀찮은 듯한 손짓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 것이다.

“두어라.”

“아닙니다.”

그를 말리는 것 같은 염휘의 말에 아수라가 발끈하여 목청을 돋웠지만 이어지는 환의 말에는 입이 다물리고 말았다.

“이미 다 보았느니라. 안 계시는구나.”

“그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염휘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무감한 것이 아니라, 여유로운 것이 아니라.

영력이 바닥날 정도로 소희를 찾고 찾아 잔뜩 지친 그의 모습이 이제야 낱낱이 날것 그대로 보였다.

그의 왕은 설마 마음까지 지쳐버린 듯 처연해, 더욱 현실감 없는 미태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

이 삼천을 다 뒤져보고도 없으니 아공간이라고 한 것이었나.

아수라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소장이 인계로 내려가…….”

풍천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염휘에게 입을 뗐지만, 그 역시 염휘의 손짓에 막혔다.

슬슬 내젓는 손끝에는 힘이 하나도 없이 그저 흔들거렸다

“모두 보았다. 샅샅이 빼놓은 곳 없이.”

지친 것은 그의 음색만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지쳐버린 마음이 눈에 잡힐 듯 훤해 풍천은 염휘에게 소리 지르며 함부로 군것이 후회되었다.

염휘는 최선을 다해 쫒았으나 겁먹고 도망쳐버린 소희를 찾지 못했다.

“상천도 보신 겁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수라의 조심스러운 음색에 단답이 돌아왔다.

“모두 보았지. 그 어디에도 안 계시는구나.”

“설마……! 인연의 고리는 어떠합니까.”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수라가 다급히 염휘께 여쭈었다.

살아만 계신다면 인연의 고리는 유지된다.

“덕분에 이 죄인이 숨 쉬고 살아있는 것 아니겠느냐.”

소희가 무사하다는 말은 감사했지만, 염휘가 얼마나 끔찍이 상처받았는지 낱낱이 느껴지는 말에 무거운 적막이 깔렸다.

아무도 입을 뗄 수 없었다.

궁 안이나 뒤진 자신들이 바보 같이 느껴졌고, 홀로 삼천을 뒤진 염휘의 능력에 감탄했다.

무릎이라도 꿇어보련다 하던 그의 진심을 너무 업신여긴 것이 죄스러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아예 방법이 없습니까.”

“지금으로선.”

염휘는 나른히 깜빡이던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놀라 달아나던 소희의 표정이 뇌리에 각인돼 바닥난 영력을 알면서도 찾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계를 구석구석 헤집고, 그다음은 중천.

상천을 뒤지고, 삼천외의 땅.

이곳에 안계시다면. 이라는 가정 끝에 기다린 건 소희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아공간에 계신 분은 그라도 찾을 수가 없었다.

소희는 아공간을 낼 능력이 없으니 분명 휘둘렀던 단도가 낸 길을 타고 갔을 터인데 어렴풋하고, 멀기만 한 소희의 느낌만이 간신히 잡혀들 뿐이었다.

첩첩히 싸놓은 듯 그 기색이 너무 흐려 염휘로서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상에 문제는 없는 듯하다는 것.

염휘는 낮은 한숨을 토하며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리고 막막한 와중에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은 이 순간에도 느리지만 쌓여가는 인연의 고리.

인연의 고리마저 멈춰버렸다면 그는 이 절망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별로 서 주신다 하셨지.”

“네?”

“짐과 함께 달 아이도 내어주셨지.”

독백과도 같은 그의 혼잣말에 놀라 대꾸하던 풍천의 눈가가 이어지는 말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 어미가 되어 아이들을 보살피실 거라 웃어주셨지.”

“염휘시여.”

창백한 목소리로 아수라가 그를 불렀다.

“그러니 버텨낼 것이니라.”

“버텨내실 것입니다.”

“지치지 말아라.”

아직,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단다.

염휘는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묘한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풍천과 아수라는 온 힘을 다 쏟고 나서야 간신히 쉬는 염휘를 방해하지 않으려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기척을 죽인 발걸음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 했다.

그들의 입이 떨어진 것은 본궁 회랑에서였다.

“여기지.”

“흠…….”

다름 아닌 소희가 공간을 찢었다는 그곳이었다.

아공간을 열면 그 궤적이 꼬리표처럼 남기 마련이라 이미 몇 번을 오갔지만 아무것도 없이 말끔해 허탕이었다.

하지만 차마 떨쳐지지 않는 미련이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어째서 궤적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지?”

수천 번을 되뇐 의문이었다.

그야말로 말끔했다.

소희를 지워버린 듯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아 더욱 이상했다.

직인이 소희를 충동질한 것까지는 확실했지만 그녀가 간 곳까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히 상태자가 빼돌린 것이 아니냐, 확신에 찬 의심을 할 뿐.

“상천에도 아니 계시다니. 이상한 일이야.”

“작정하고 빼돌렸다면 찾기 어려울 테지.”

버릇처럼 쫘악 소리를 내며 부채를 펴든 아수라가 살랑거리며 바람을 부쳐냈다.

부채에서 이는 바람이 아수라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는 순간 갑자기 후원에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두 바람이 섞여들며 결 좋은 아수라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엉켰다.

“이런.”

시야를 가리며 헝클어진 머리에 아수라가 정신없어 했다.

눈을 가리고 목에 감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걷어내던 아수라가 눈에 보일 정도로 움칫한 건 그때였다.

“……목!”

“뭐?”

목에 감긴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어 풀어내던 아수라의 두 눈에 검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손 좀.”

아수라는 풍천에게 손을 내밀며 잡아 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무, 무슨!”

이 와중에 아수라를 보고 얼굴을 붉히다니 풍천은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검은 머리채를 흩날리며 옅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고 도저히 덤덤할 수가 없었다.

“왜. 무, 무슨…….”

더듬거리는 풍천을 향해 아수라가 김샌 표정으로 삐뚜름한 입술 곡선을 숨기지 않았다.

“이 한심한 작자, 영력을 나눠달라 이 말일세.”

“영력?”

붉게 물든 그의 뺨이 단번에 식고 떨떠름한 반문이 뒤따랐다.

“밤의 아수라를 불러낼 참이야. 어서 손을 잡아 달래도.”

이 아둔한 작자가 끝까지 성가시군.

들리도록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풍천은 마지못해 아수라의 손을 슬쩍 잡아주었다.

거친 그의 손과는 달리 매끈한 아수라의 피부가 기다렸다는 듯 착 달라붙어 왔다.

“흐음!”

서늘하고 매끄러운 아수라의 손에 풍천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 것도 잠시.

곧 무지막지하게 영력이 빨려나가기 시작했다.

“흐윽.”

심장까지 빨아낼 기세라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갈 정도였다.

풍천은 다급하게 영력을 피워 올렸다.

빨려나가는 것은 그대로였지만, 고르게 조금씩 빠져나가자 조금 전보다 훨씬 버티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그런 풍천을 바라보던 아수라의 입매가 느슨하게 벌어지더니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영력도 든든히 불렸으니 찾아보실까?”

“찾을 수 있긴 하고?”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에 발끈해 풍천이 한마디 한 것도 잠시. 그의 말에 대답을 돌리는 건 어느새 그녀였다.

밤의 아수라.

“그가 무턱대고 날 불러낸 건 아니니까 안심해.”

새빨간 홍안이 서늘한 빛을 뿌리며 풍천을 오만하게 쏘아봤다.

그리고는 풍천의 손을 맞잡은 그대로 다른 손으로 대번에 홍월을 검집에서 쳐올렸다.

가느다란 엄지손가락이 검격을 퉁기나 싶더니 검집을 빠져나온 홍월이 이내 가늘고 높은 귀곡성으로 회랑을 짜랑하게 울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에 풍천의 인상은 절로 찌푸려졌다.

“그 자식 참.”

“등줄기까지 오싹해지지?”

투덜거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수라는 이죽거리는 말투를 감추지 않았다.

“너……!”

“정말 달아오르게 하는군.”

아수라는 어느새 눈꼬리까지 붉게 열이 올라있었다.

짐승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과 어느새 입술을 비집고 나온 송곳니까지.

흥분을 감출 여력이 되지 않는 듯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간밤, 숨었던 거야. 염휘께서 피워낸 영력과 월력에 흐려져 몰랐어.”

아수라의 분노와 흥분으로 달뜬 목소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는 홍월에게 속삭였다.

“짜릿하느냐. 아주 달큰하구나. 하아.”

태양빛 아래서 하얀 입김을 흩뿌리며 웃는 아수라는 섬뜩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기묘한 아름다움.

마치 그녀의 주위로만 어둠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풍천은 식은땀이 흥건한 손으로 아수라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밤의 아수라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 알 것도 같았고, 모르고도 싶어 심박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뭐야 아수라.”

그 역시 아수라의 기세에 영향을 받아 흥분이 올라왔다.

말하는 입술 사이로 흑운무가 새어 나왔다.

목소리 끝이 끓어 절로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되었다.

아수라는 풍천을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새빨간 혀로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홍월을 들어 그대로 핥았다.

검날을 스치는 혓바닥을 타고 붉은 피가 터지는 것도 잠시, 그대로 홍월에게 스미는 모습은 무척 소름 끼치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수라식의 처방이었다.

내어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살점에서 피를 뽑아 잔뜩 달아오른 홍월을 진정시킴이었다.

“확언을 듣고 싶군, 풍천. 내 입으로 말이야. 홍월이 울부짖는 이유를 말해달라는 거지?”

밤의 아수라는 하얀 입김을 뿌리며 말했다.

“말해.”

어느새 동공이 지워진 풍천이 그르륵 거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상태자의 영취야. 코를 찌르는구나.”

달기도 하지.

밤의 아수라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키들거렸다.

그녀의 웃음에 물린 것은 잔뜩 달아오른 분노.

감히 달 마마를 이런 식으로 가로챌 줄이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그녀의 심사만큼이나 사납게 솟았다.

아수라는 홍월을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돋아 올라와 있었다.

홍월이 떠는 것인지 아수라의 손이 떨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잔뜩 흥분해있었다.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하얀 입김이 그녀가 얼마나 분노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동공이 지워진 눈을 한 풍천이 그런 아수라의 손을 힘줘 꾹 잡았다.

“걱정 마라, 풍천. 무작정 상천으로 홍월을 들고 뛰어들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 아직은.”

아수라는 하얀 입김을 뿌리는 주제에 잘도 키들거리며 대꾸했다.

“상태자의 죗값은 언제고 물을 수 있지. 소희님의 행방이 먼저다.”

“알아 알아. 우리 마마님을 어디에 감춰 뒀을까.”

아수라는 붉은 눈을 가늘어진 눈매에 숨기며 풍천의 말에 대꾸했다.

“나라면, 내궁에 진을 그려 가둬두겠어.”

“그렇지.”

“상태자의 즉위가 코앞이라는 소식을 들었지.”

“애가 닳았군?”

애송이 녀석.

이즈음해서 풍천은 사나운 말투를 가릴 생각도 없이 마구 내뱉었다.

“꽁꽁 숨겨두고는 즉위해서 바로 혼례를 올릴 생각인가?”

“나라면.”

“그렇지 나라도.”

빈정거리는 어조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희의 행방을 더듬어 보던 아수라의 신형이 갑자기 크게 물결쳤다.

“이런, 벌써 한계야?”

아수라는 울렁이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풍천에게 물었다.

막막하기만 하던 상황에 실마리를 찾아내서였을까.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조금 전까지 홍월을 치켜들고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던 염라의 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경쾌했다.

“이쪽은 죽을 것 같단 말이지.”

“겨우 이 정도에?”

“어이, 비쩍 마른 주제에 남의 영력을 얼마나 잡아먹은 줄이나 알아?”

“심장 바닥까지 긁어먹고 가려고 했는데.”

“내거 말고, 상천 녀석들 것으로 먹으라고.”

죽을 것 같다는 풍천의 말은 농이 아니었다.

기세를 피워 올려 살기등등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은 이미 쉴 새 없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킷-.”

아수라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풍천을 보며 낮게 웃다가 ‘간다.’라는 말을 끝으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흐억.

이번에도 풍천에게선 달갑지 않은 신음이 터졌다.

태연한척했지만 정말 영력이 바닥나다시피 했었다.

“쿨럭.”

제기랄.

풍천은 그대로 허리를 굽혀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수라의 손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허덕거리는 숨소리가 아니더라도, 이미 낮의 아수라의 영력도 바닥이 나도록 끌어다 쓴 참이었다.

어제까지 죽네 사네 하며 요괴의 독에 몸이 녹아내리던 녀석이었다.

이만큼 버틴 게 용하다 싶었다.

지금 손을 놔버리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풍천은 그래서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아수라의 손을 놓지 못했다.

“어지간하면 부르지 말자.”

풍천이 누구를 말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은 아수라가 창백한 얼굴을 해서는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하지?”

“어지간해. 두 번 부르면 죽겠어.”

“어련하시려고.”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해서는 키들거리는 두 염라의 불들의 등 뒤로 따가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풍천은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괜히 얄미워서 말이야.”

“아아.”

아수라는 풍천의 투덜거림 뒤에 숨은 귀여운 속내에 웃음을 터트렸다.

“조심하시게 이걸 듣는 건 태자가 아니라 상제일 테니. 치도곤이 날지도 모르지.”

“그럼 더 잘됐군, 이십 년 전의 빚이 남아서 언제든 갚아드리고 싶었지.”

“단단히 화가 나셨군?”

“밤의 아수라만 하려고?”

아수라의 농에 풍천이 보태서 과장스럽게 머리를 털었다.

턱을 타고 흐르던 남은 땀방울이 그대로 떨어지며 바닥에 짙은 자국을 새겼다.

“잘 붙들어 놓으시게.”

풍천은 아수라를 향해 당부를 남겼다. 마주 보는 시선이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미련하게 굴진 않을 것이니 염려 말게.”

“미련을 언제 정해놓고 떤다던가? 홍월을 핥아 올리는 건 근 이십 년 만이라 그런지 여적 소름이 끼치는 것을.”

“아아. 좋아. 그럼 밤의 아수라는 반드시 내가 붙들어 놓지.”

“그래.”

자신만만한 아수라의 대답에 그제야 안심한 듯 풍천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힘들다.”

안심되자 갑자기 온몸이 아파왔다.

영력이 고갈돼 온몸이 욱신거리는지라 툴툴거리는 풍천은 그래서 빙긋이 웃던 아수라가 중얼거리던 것을 놓치고 말았다.

“밤의 아수라가 나설 틈을 주지 않을 작정이야. 달 마마를 지켜드리기로 한 것은 바로 나. 낮의 아수라.”

미풍보다 더 은근하고, 태양빛보다 더 강렬한 다짐을.

“이제 그만 가세. 꼬리를 잡았으니 우리도 좀 쉬고 염휘께서 일어나시면 가서 의논을 해보세.”

“그러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수라의 얼굴에 담긴 결의를.

나지막이 중얼거린 아수라의 맹세를 놓치고 말았다.

“아수라의 맹세는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며 삼생의 명이 끊어질 때까지 유효한 것이지.”

그의 입안에서 언령이 되어 흩어진 것을.

풍천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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