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64화 (64/114)

64. 갈라진 틈 사이 (12)

2018.03.12.

미쳐버린 것은 태자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소희가 달아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던 염휘는 그야말로 미치광이가 된 기분이었다.

지옥불에서 굴러도 이보단 나으리라 싶었다.

쉴 새 없이 가슴을 지져내는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소희뿐이었으나, 그녀는 제 발로 멀리 달아나 버린 것이다.

염휘는 반요의 말을 듣자마자, 아이를 멀리 물렸다.

그리고는 그가 가진 모든 영력을 개방했다.

차근차근 풀어내야 할 영력이, 조급한 마음처럼 단번에 둑 터지듯 회랑을 가득 메웠다.

금홍의 운무가 본궁을 메우는 데는 단 2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어마어마한 영력은 그대로 그의 눈이 되어 본궁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찬란한 금안이 된 염휘의 두 눈은 모든 것을 꿰뚫을 시선을 사방 모든 곳으로 쏘아 보냈다.

회랑을 시작으로 본궁을 하나하나 차근히 훑었다.

작은 틈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집요하고 날 선 시선이 염라궁을 헤집었다.

단도 따위가 공간을 찢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공간을 찢고, 자리를 벌리는 것은 오직 상하천의 지존의 영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감히 누가 짐의…….”

상처 입은 왕의 금안이 사납게 일렁이며 본궁을 쏘아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 자리를 불을 떨어뜨릴 것 같은 안력이 자리 잡고선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사술일 것이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짐작키 어려우나, 소희는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가여운 이에게 무서운 푸른 그물을 걷어낸 것이 겨우 며칠 전의 일이건만.

가슴을 저미는 애틋함에 환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한층 더 영력을 거칠게 다루었다.

한시가 급했다.

공간을 찢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하늘에 길을 내, 잘못하면 떨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나, 그럴 리는 없지만 소희가 어딘가에 떨어져서 다쳐 신음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다 말라버리는 듯 견딜 수 없는 격통을 느끼게 했다.

본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염휘는 염라궁을 모두 그의 영력으로 감싸버리기라도 할 듯 힘을 최대치로 개방했다.

하지만 본궁뿐만이 아니라 본궁 화원까지 모조리 살펴도 그 어디에도 소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만 있다면, 어디를 가도 보일 인연의 고리가 그의 시선에 잡히질 않았다.

‘두근’

말릴 사이도 없이 그의 가슴이 아픈 소릴 내며 불안에 떨었다.

사술에 걸렸다.

단정 짓듯 하던 그의 생각에 아주 옅은 균열이 생겼다.

사술이어야 했다.

일전의 푸른 그물처럼 소희를 잠식한 무언가가 그날처럼, 그를 멀리하라 그녀를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듯 희게 질려버린 소희의 작은 얼굴과 두 눈동자 가득 빼곡하게 새겨지던 공포를.

그 모습에 가슴이 찢겨지는 것 같은 참혹함을 느낀 자신을 염휘는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사술임이 분명했다.

소희는 기묘한 주술에 걸려 움직인 것일 뿐, 달아난 것이 아니다.

분명했다.

저를 향해 말갛게 웃어주던 그녀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벼운 입맞춤에도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며 그에게 안겨들던 그녀에게서 들리던 심박을 그는 들었다.

부끄러움과 기대감에 기쁘게 울리던 심박마저 속일 수는 없는 법.

염휘는 자꾸만 어둡게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시선을 더 멀리 떨어뜨렸다.

염휘의 안력은 본궁 너머 염라궁으로 넓어졌다.

그리고 2시진 후 그는 하계의 모든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이 그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왔지만, 염휘는 회랑에 선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차게 식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밤기운을 전했으나, 만월이 그의 은발을 찬란하게 물들여도 염휘는 영력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이미 그는 인계를 모두 뒤지고 마지막으로 상천으로 시선을 옮긴 후였다.

“하아…….”

잔뜩 지친 목소리가 달밤을 스치듯 울리고는 사라졌다.

“염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염휘께오선 정오경에 나가셔서 아직 회궁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직?”

되묻는 아수라의 고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듯 비틀렸다.

그녀의 표정에 찔끔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본궁 시비들이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비비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수라는 그런 아이들의 사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그 후로도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붙들고 염휘의 행방을 찾았다.

평소라면 염휘의 기척을 쫓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본궁뿐만이 아니라 온 염라궁이 염휘의 영력으로 감싸여 도무지 그분께서 어디 계시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이럴 때면, 그저 다리품을 파는 것이 빨랐으니, 아수라의 선택은 어쩌면 현명하다 할 참이었다.

그녀 하나보다, 궁 곳곳을 다니는 수많은 시비 아이들이 보는 것이 월등히 많을 터였다.

하지만 본궁을 찾은 아수라가 염휘를 찾아 본궁시비들에게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그 많은 아이들 중 아무도 염휘를 본 적 없다 하니 절로 얼굴이 굳어지고 만다.

소희님께서 사라진 이 마당에 염휘마저 그 행방이 묘연하니 가슴 한구석이 은근한 불안감에 화드득 타올랐다.

본궁 회랑을 가보고 싶었으나, 염휘께서 그곳에서 모든 이를 물러라 명령을 하신 터라 그쪽으로는 가볼 수가 없었다.

“진을 펴두신 것인가.”

소희님께서 사라지신 것이 그쪽이니 무언가 조치를 해주셨을 터.

섣부른 걸음에 염휘의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아수라는 염휘의 행방을 가늠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눈앞에서 소희님께서 사라지셨다니, 아마 답답한 속을 달래러 바람을 쐬러 가신 건 아닐까.

자꾸만 치미는 염려를 그렇게 다독일 수밖에.

아수라는 본궁에서 나와 풍천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염휘가 누구이신가.

이 하계의 주인이시며, 염라의 첫 번째 불.

무위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고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을 걱정하기 전에, 아수라는 사라진 소희를 찾는 것이 먼저라고 결론 냈다.

그리고 그녀는 이일에 조금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직인을 추천한 것이 바로 아수라 자신이었던 탓에, 기실 누구보다 애가 탔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아수라의 품에서 익숙한 종잇조각이 나왔다.

식신이었다.

그녀는 낮의 아수라만큼은 아니었으나, 아수라들은 대대로 식신을 다루는 데 특히 능했다.

풍천을 찾기 전, 남는 미련을 식신에게 불어 넣어 염휘를 쫓으라 할 셈이었다.

“가거라.”

주인이 바라는 소식을 물어오렴.

아수라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밤공기를 갈랐다.

그러자 손끝을 타고 살처럼 쏘아진 식신이 본궁 구석구석으로 의지를 가지고 날아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풍천을 찾아야 할 때.

그를 찾아 마지막으로 소희를 만났던 직인의 행방을 추적하고, 소희가 어디로 갔을지를 짐작 해볼 참이었다.

그가 내궁에서 들은 소식대로라면, 이번 일은 직인의 흉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증언한 것은 오로지 내궁의 나인 하나의 말이니.

미리부터 직인을 죄인 취급 하지는 않을 테지만, 확신처럼 굳어지는 분노에는 아수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붉은 입술을 가르고 삐져나오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빛을 받아 차게 빛났다.

회랑을 가득 메운 금홍의 운무가 달빛 아래 빛을 더해 더없이 몽환적이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은 염휘.

달이 뿌려주는 빛을 한껏 머금은 그의 은발이 시리게 빛을 뿌리며 바람을 타고 일렁였다.

마치 물결치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것은 모든 것이 멈춘 이곳에서 오직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 같았다.

빡빡하게 돋은 속눈썹이 느리게 끔뻑였다.

짙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그것은 아직까지 황금빛 기운을 채 다 지우지 못한 홍안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수시로 끔뻑였다.

“…….”

염휘는 뭔가 말을 할 듯 입술을 뗐다가 다시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그의 눈은 이미 한계를 넘어 혹사를 당해 깜빡거리는 작은 행동조차 버거워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녹아버릴 것 같은 고통을 염휘는 가만히 참아냈다.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가슴을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어내는 이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았다.

소희는 없었다.

본궁 어딘가에 계시리라 생각했던 것은 그의 오만이었다.

하계 어딘가에 계시리라 생각했던 것은 오판이었고, 다급해진 그의 마음이 하계가 아닌 삼천으로 눈을 돌리라 했다.

그러나 온종일, 그리고 그의 모든 힘이 바닥이 날 때까지.

애쓴 염휘에게 돌아온 것은 오롯한 절망뿐이었다.

소희는 하계에도, 인계에도. 그리고 삼천의 그 어디에도 안 계셨다.

그의 사랑스러운 분은 정말로 도망친 것인지도 몰랐다.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벼락처럼 들이쳤다.

염휘는 불안하게 떨리는 심박이 굉음처럼 머릿속을 메우는 것을 느꼈다.

영력이 고갈된 몸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삼천외의 땅.

직인이 계시고, 이름 없는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서왕모께서 천도를 키워내는 곳이 있는 바로 그곳.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곳마저 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염휘는 이제 서 있는 것도 벅찼다.

그저 차갑게 식은 밤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

영력이라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 달빛이 남아 있다는 것.

달빛은 하계의 모든 이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것은 요괴를 자라게 할 뿐 아니라, 귀왕이신 염휘에게도 빠르게 영력을 채울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염휘는 그저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 곳에서 힘을 쓰지 않고 전신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월력을 빠르게 흡수했다.

텅 빈 가슴 속을 소희를 찾으려는 마지막 희망으로 채우듯, 빠르게 영력을 채웠다.

바람을 따라 그가 피워낸 금홍의 운무가 시시각각 흩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얼마나 아낌없이 힘을 풀어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와 힘을 아껴둘걸. 이라는 뒤늦은 아쉬움이 생긴 건 삼천외의 땅을 엿볼 힘이 너무 절실했던 탓이었다.

초조함에, 치미는 불안감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생 고함을 눌러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수시로 오르내렸다.

이미 그의 가슴을 까맣게 물들인 절망을 그는 외면했다.

소희는 눈앞에서 달아났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술이라 하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공간을 찢다니.

“……꼴불견이군.”

염휘는 찰나의 순간 삽시간에 들어차는 어두운 생각을 애써 털어내며, 자조어린 목소리를 냈다.

쉰 듯, 한없이 잠긴 목소리가 그의 마음 같았다.

이제 일각이었다.

전력으로 달빛을 흡수하는 덕에 그의 영력은 빠르게 차올랐다.

이제 일각만 더 버티면 삼천외의 땅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 조금 화가 나셔서 직인의 거처에 몸을 의탁하시고 계실 테지.

염휘는 전혀 가능성 없는 말을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소희가 갈 곳이란 건 굉장히 한정적일 텐데, 생각해보니 직인의 거처부터 살피지 않은 것이 실수일지도 몰랐다.

‘과연?’

가슴속에서 은근하게 피어나는 다른 목소리를 염휘는 외면했다.

그것은 소희가 눈앞에서 사라지던 그 순간부터 쉬지 않고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염휘가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것이었다.

‘달아났지. 겁에 질려.’

가슴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태연히 귓가를 울렸다.

그럴 리 없어.

염휘는 끊이지 않고 울리는 목소리를 향해, 화를 내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소희가 지난 일을 덮어주고,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려 한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염휘는 더더욱 소희의 결정이 신중해지길 바랐던 것이다.

자신에게 기우는 마음이 그저 운명이 휘둘린 딱한 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길.

순간의 착각이 아니길.

그를 바라는 그녀의 연심이길.

그것이 진심이길 바라, 번번이 하계에 달로 남겠다는 그녀의 말을 흘려버렸던 것이다.

사신의 문을 모두 넘어, 그녀가 어엿한 생의 좌를 받는 그 날까지.

스스로를 벌주듯 기다리게 하며 시간을 벌었던 것도, 이면엔 그런 마음이 있었던 탓이었다.

상냥한 그녀가 아니던가.

그를 얼마나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를 것인가.

그 눈빛에 담긴 것이 애정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달아났어.’

잠시 틈도 못 견디고 악의를 가득 담은 속살거림이 울렸으나 염휘는 고개를 털어 부정했다.

그럴 리 없어.

이 두 눈으로, 이 두 귀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니야.

염휘는 하늘 끝에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마지막 달빛까지 알뜰하게 모두 챙겨 받은 다음 다시 두 눈에 안력을 돋웠다.

차게 죽은 홍안에 다시 금빛 무리가 올라오며, 찬연한 빛을 머금었다.

“크흣.”

하지만 두 눈은 그의 마음처럼 빠르게 회복되지 못해 영력을 돋우자마자 송곳으로 파내는 것 같은 고통을 선사했다.

마치 골수까지 단번에 후벼내는 것 같은 고통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겨우 이 정도에 포기할 리가.

염휘는 자신이 버텨온 지난 이십 년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여태 버텨온 것처럼 이번에도 그는 이겨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겨드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고 염휘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시가 급하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애가 타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차가운 손을 들어 열 오른 눈두덩을 식힌 염휘가 개안한 건 첫 햇살이 터지고 나서였다.

찬란한 햇살아래, 황금으로 물든 눈으로 아득한 어딘가를 바라보던 젊은 왕의 얼굴이 절망으로 까맣게 죽어버린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살아있는 것 같던 아름다운 불꽃이 눈동자 안에서 지워지고,

날카롭던 콧날 아래 보기 좋은 입매가 말을 잃은 듯 굳게 다물려 당겨졌다.

단번에 생기가 사라진 그의 모습은 찬란 태양 아래 오로지 아름답기만 했다.

금빛 햇살을 흘려내는 그의 은발이 어지럽게 눈앞을 날리고, 탈진한 그의 몸이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삼천을 모두 뒤진 그의 노력과 삼천외의 땅까지 샅샅이 뒤진 그의 절박함을 놀리듯이 햇살이 그를 무정하게 비췄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까지 낱낱이 드러난 아침 햇살 아래 염휘가 드디어 그토록 외면하던 현실을 인정했다.

소희는 그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손에 들려있던 날 선 단도.

그녀가 찢어낸 아공간과 그를 피해 달아나던 다급했던 몸짓.

그리고 공포에 물들어있던 소희의 애처로운 표정까지.

외면하던 모든 것이 일시에 염휘에게 덮쳐들었다.

“아아…….”

분명히 해가 비쳐드는 환한 후원을 보고 있으나 염휘는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을 알고도 결국 그를 피해 달아난 분을 바라는 이 초라한 현실이.

그럼에도 꼭꼭 숨어버린 그녀를 되찾고 싶다는 가난한 열망에 살아 숨 쉬는 마음이.

그를 울게 했다.

산속, 겁에 질린 그녀를 함부로 한 것에 대한 죄를 치르는 것이 이토록.

“이토록…… 힘겨울 줄이야.”

이곳이.

소희가 사라진 이곳에 혼자 남겨진 이 현실이 지옥이구나.

염휘는 눈을 찌를 듯 달려드는 찬란한 태양빛에 눈을 감고 말았다.

주르륵.

한껏 고인 그의 눈물이 태양빛 아래 선명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희야.”

언제나 그가 바랐던 이의 이름을.

염휘가 바짝 마른 목소리로 소리 내 불렀다.

“소희야.”

돌아와달라고.

“제발…….”

태양빛 아래 무너지듯 쓰러진 젊은 왕에게서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간절한 바람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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