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왕의 신부-63화 (63/114)

63. 갈라진 틈 사이 (11)

2018.03.09.

희게 질린 소희의 표정에 남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설마.”

“이제 알아봐 주시는 겁니까?”

눈을 감고 듣는다면, 그가 맞았다.

목소리만 두고 본다면, 그가 확실했다.

그녀와 혼약을 했던 표가의 둘째 도련님.

“명이라고 불러주세요.”

종종 다정한 청을 넣어주시던 인세에서의 혼약자.

아니, 상태자라고 해야 하나.

“말도 안 돼.”

소희가 그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속삭이는 말에까지 그는 상냥히 대답해주었다.

“저도 믿기지 않는답니다.”

잔뜩 놀라고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어버린 소희를 배려함인지 그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서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상태자는 굳은 표정인 소희를 애정 어린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린 빛을 뿌리는 청명한 눈동자에 그녀를 새겨 넣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하나하나를 뜯어보다시피 했다.

잔뜩 벌어진 동공에 머물던 시선이 바르르 가늘게 떨리는 분홍 입술에 지그시 머무르다 가늘고 흰 목을 지나쳐 하늘하늘한 선이 고운 몸을 스치듯 가만히 더듬었다.

그사이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소희의 모습에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 시간 그리워했다.

실제로 떨어진 것은 며칠 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계에 떨어진 그녀를 무슨 수로 그가 데려올 것인가.

힘이 차오르면 차오를수록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더욱 버티기가 힘들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새 안력이 돋워져 손에 잡힐 듯 보이던 그녀였다.

눈앞에 아른거리니 그리움은 더해졌고, 충동은 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들이쳤다.

상태자는 지난 기억에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마음 당신께선 알아주실는지.’

들이켜는 숨 끝에 달큰한 소희의 체향이 그의 폐부를 채우자 단숨에 심박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희열에 소희의 체취까지 더해지자 가볍게 머리가 핑 도는 느낌마저 났다.

“킥.”

이래서야 원.

미친놈이 따로 없구나.

아니 그는 이미 소희에게 눈멀어 미쳐버린 지 오래였다.

점잖은 체하는 것조차 버겁기 짝이 없었다.

‘두근두근’

기쁘게 맥동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진심이었다.

지난날을 뭐라고 설명한다 해도 저보다 더한 말은 없었다.

보고 싶고, 그리웠다.

애태우며 마음을 졸였고 당장에라도 품 안에 넣고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고 싶었다.

태자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며 자꾸 뻗어 나가려는 손을 가만히 붙들었다.

소희는 변해버린 자신이 낯선 것인지. 얼굴을 굳힌 채 도통 말이 없었다.

“놀라셨습니까?”

미안함을 담은 음색이 청량했다.

태자는 기쁜 것과는 별개로 놀란 것 같은 소희를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그녀가 받았을 충격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져 왔다.

놀랐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 그리웠다 말한다면 그 누구라도 단번에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머리는 이해를 하지만, 그리움에 떨었던 단심은 섭섭해했다.

그는 소희의 모습이 얼마든지 바뀌어도 그녀를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소희는 바뀐 그의 용모에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반갑다는 말도, 잘 계셨냐는 말도 없이 예쁜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팔딱거리는 소희의 불안정한 심박이 그의 귀를 아프게 울렸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마음인 것 같아서 입맛이 썼다.

태자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소희에게 내밀어진 손바닥이 무엇을 바라는지 뻔했지만 소희는 미동도 없었다.

“…….”

“……잡아주지 않으시렵니까.”

웃는 듯 서글픈 태자의 말에 소희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공자…… 아니 태자께서 계시다는 말은 이곳은 상천이라는 뜻입니까.”

단정하면서도, 거리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소희는 뒤로 한걸음 몸을 물렸다.

발뒤꿈치에 침상이 닿아 작은 소음이 들렸지만, 멈칫거리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맞습니다.”

태자는 손을 거두며 다시 한걸음을 다가왔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게 굳어버린 채였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푸른 눈동자가 잔뜩 경계하는 소희를 느긋하게 훑어 내렸다.

삐뚜름하게 걸린 미소가 순간 몹시 위험하게 보였다.

“……네.”

소희는 태자가 주는 위압감에 지지 않으려고 소리 내 대답했다.

형편없이 작고, 심지어 떨리기까지 했지만 단지 짧은 대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 숨이 가빠졌다.

그런 소희를 바라보는 태자의 눈빛이 짙어졌다고 느낀 것도 순간.

조금 전까지 벌려둔 거리 따위는 우습게 뭉개버리고 그가 단숨에 다가왔다.

내뻗어진 팔이 단번에 소희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아채고,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 깜빡할 새에 소희를 자신의 품에 가둬버린 태자는 그녀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이 힘줘 안았다.

“흐읏…….”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작은 손이 바둥거리며 그를 두드려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깊게 묻어 소희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콧날을 가져다 대기까지 했다.

희박한 날숨을 내쉬는 소희를 안고서 태자는 만족스러운 긴 숨을 토해냈다.

“하아아. 좋군요.”

“이, 이거!”

바둥이는 그녀가 못마땅한 듯 살짝 눈썹을 구기는 태자는 그 와중에도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다.

“낯설어서 그런 것이지요?”

참았던 격정을 터트리는 태자는 자꾸만 바둥이는 소희가 서운해 죽을 지경이었다.

늘 그랬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이 흘러넘치는 마음을 오늘에서까지 모른 체하시는 이 분이 정말 서운했다.

“혼례를 올리고 나면 다정히 대하여 주시겠지요?”

간절한 소망이었다.

소희는 처음부터 이랬었다.

마음을 모조리 퍼부어주고, 안달을 내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보고 싶고, 그 목소리 듣고 싶어 이런저런 핑계로 찾아가본들 ‘법도’며 ‘이목’을 핑계로 들이밀며 자꾸만 밀어냈었다.

속박의 인을 새기며 차츰 나아졌다지만, 다시 만난 소희는 그가 좁혀 놓은 거리를 훨씬 떨어뜨려 놓은 채였다.

“혼례라니요?”

놀란 듯 바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는 것도 잊고 되묻는 소희의 말에 소리도 없이 가슴이 찢겼다.

“잊으셨습니까.”

그녀를 안고 있던 두 팔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태자야말로 잊으셨습니까? 저는 귀문의 별입니다.”

“상천의 휘이기도 하십니다.”

태자는 소희의 말에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틈에 소희가 재빠르게 몸을 빼내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자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맞습니다. 상천에는 이미 휘께서 계시지요.”

소희의 날 선 대꾸에 태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고, 그가 늘 애태우는 부분이었다.

이제 아주 조금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받으면 상제가 될 터인데 그 아픈 곳을 이렇게 보란 듯이 헤집는 것이 소희일 줄이야.

“그……!”

억눌린 화가 터져 나올 것 같아 태자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큰거리는 숨이 잔뜩 달궈져 뜨거웠다.

“오늘은 이만 쉬세요. 많이 당황하신 듯하니 기운 차리시면 다시 올 것입니다.”

태자는 가까스로 인사를 남길 수 있었다. 잇새로 씹어뱉듯 억눌린 분노를 삼키며.

그런 그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소희가 더없이 매정해 보였지만 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탁.

나무문이 적지 않은 소음을 내며 닫히자 비로소 소희에게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상천이라니.

여기가 상천이라니.

안전한 곳으로 보내준다는 것이 상천이란 말입니까.

“직인…….”

허탈한 목소리가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소희는 넋 놓고 있던 것도 잠시 버선발로 그녀의 방을 구석구석 바쁘게 돌아다녔다.

도움을 받아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스스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석에 세워진 장에서 가지런히 놓인 신을 찾아 신고, 고운 양산도 찾아냈다.

험한 짐승을 만나면 한번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공간을 찢을 때 쓴 단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게 제일 애석했다.

그것만 있었어도 손쉽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인데.

소희는 양산을 야무지게 쥐고는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잠기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소리도 없이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

문밖으로 빼꼼히 내밀어 확인해보지만 끝도 없는 회랑뿐 오가는 이라고는 없었다.

툭 터진 회랑 벽은 울창한 나무와 지저귀는 새들까지 바깥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새?’

직인이 항시 그녀를 찾아올 때면 소청조를 타고 오던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새를 잡아야 하나 고민도 잠시.

노랗고 붉고, 갖가지 색이 화려한 새들 중 눈에 익은 청조는 없었다.

괜스레 새를 잡아본다고 소란을 떨어 이목을 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 새나 천의 경계를 넘을 것 같지도 않았다.

소희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손에 쥔 양산을 다시 한번 고쳐 쥐고는 소리 없이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도 잠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걸음이 날듯이 빨라졌다.

한시라도, 한걸음이라도 더 멀리. 더 많이 멀어져야 했다.

결국엔 정신없이 뛰고 말았지만 소희는 자신이 뛰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다급했다.

상태자라니.

상천이라니.

이번에야말로 환이 오해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달아나 온 곳이 상천이라니.

그는 소희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과 진배없었다.

어서 돌아가야 해.

환이 알아채기 전에 반드시.

밭은 숨이 터지도록 달렸건만 회랑은 끝이 나지 않았다.

보기에 길지도 않은 회랑이었건만 소희는 어째서 제자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억…… 허억…….”

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부족한 숨을 마음껏 들이켜는 그녀에게 착잡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어디…… 가시려구요?”

“!”

상처받은 것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소희는 순간 소름이 쭉 돋아버렸다.

“그…… 그것이…….”

획 소리가 날 만큼 빨리 돌아본 뒤에는 쥘부채를 들고 서 있는 그가 시선에 잡혔다.

단 세 걸음.

그가 점잖게 벌린 거리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가 저 거리를 좁혀 오는 순간이 어떨지도 뼈저리게 알았다.

그래서 조금 전처럼 그에게 매섭게 쏴붙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소희는 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다…… 답답하여서.”

“답답하셨습니까?”

“바깥바람이라도 쐬려…….”

궁색한 변명이 자꾸만 잦아들었다.

누가 봐도 뻔하게 도망치려는 모습을 차마 뻔뻔하게 말할 배짱이 소희에게는 없었다.

“그러실 것 같아서 회랑 벽을 터놨답니다.”

시원하지 않으십니까?

느긋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에게 닿는 태자의 시선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도망치려 하다니.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그녀를 힐책하는 것 같아 소희는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만하셨으면 곤하실 테니 들어가시지요.”

“그럼 시비를 불러다 차라도.”

“제가 드리겠습니다.”

다른 나인이라도 불러 도움을 받아볼까 하던 소희의 말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소희는 깨달았다.

자신은 스스로 덫에 걸어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창살 없는 우리에 갇힌 기분이었다.

불과 지척에서 끝나는 회랑을 바라보며 소희는 한숨을 삼켰다.

자신은 저 끝으로 걸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진이라던가, 무슨 방비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자신을 위해 쳐놓은 거대한 덫.

소희는 문득 태자가 무섭다 느껴졌다.

“일어나세요.”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그의 하얀 손이 드리워졌다.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태자의 상냥한 음색이 재촉했다.

“어서요. 들어가세요.”

“……네.”

소희는 떠밀리듯 대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적이었다.

삽시간에 소희의 부재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아침부터 다른 사람처럼 군 그녀의 행적부터, 공간을 찢고 사라졌다는.

모두 믿지 못할 이야기들로 점철된 ‘사실’이 들불처럼 번졌다.

내궁의 아이들은 모두 근신을 자처했다.

제 주인을 잘 보살피지 못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꼴이라 잔뜩 풀 죽어 그저 둘러앉아 은쟁반을 닦을 뿐이었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이렇게 서럽긴 난생처음이었다.

그건 반요가 제일 심했다.

넋이 빠져 간신히 손을 내민 것이 최선이었다.

“머저리.”

훌쩍거리는 소리 사이로 낮은 욕설이 터졌다.

“난 멍청이야.”

소희님을 잡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담이 적으니 사신이 못된 것이지.

훌쩍거리면서도 은쟁반을 닦는 손은 쉬는 법이 없었다.

마른 면건으로 열기를 가득 머금은 쟁반을 닦고 또 닦았다.

쟁반 위에 떨어지는 달빛이 닿자마자 치르륵 소리를 내며 타버렸다.

쿨쩍.

코를 들이마시며 반요는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깨로 문질러버렸다.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울기라도 해야 했다.

“울지 말거라.”

정수리에 떨어지는 냉감 어린 지고한 목소리.

반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목소리 주인을 쫓았다.

“아수라님!”

새된 소리에 내궁 아이들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도 말거라.”

어두운 밤하늘에서 따온 것 같은 자태로 내뱉는 덤덤한 말이 어쩌면 이다지도 다정한지.

반요는 아수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깨가 들썩이고, 설움이 마구 솟았다.

“이…… 이 모자란 것이 놀라서 그만 붙잡지를 못했습니다.”

“저런, 저런. 염휘께서도 못 붙든 분을 네가 어찌 잡겠느냐.”

반요를 달래는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갑자기 단도를 꺼내 들어 공간을 찢는 소희를 염휘조차 붙들지 못했다.

모두가 당황하고 놀란 겨를이라 아무도 제정신일 수 없었다.

“어…… 어쩝니까. 소희님을 잃어버려서…….”

반요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아수라께 매달리듯 물었다.

아이의 막막함이야 모를 리 없건만 이번에는 아수라도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염휘께 들은 사정이란 참혹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우는 아이가 말한 것에 따르면 소희는 심연의 물을 마신 듯했다.

심연의 물.

깊고 깊은 바닷속에 잠든 심연의 물에는 잊혀진 과거를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쓰이기에 따라 효능이 천차만별이었지만 직인은 어두운 과거를 끌어내게 살짝 매만진듯했다.

잔뜩 두려움에 떨며 ‘도망’갔다고 하던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염휘의 표정이 얼마나 참혹하게 꺼져들었는지.

저 잔인한 굴레는 언제쯤에야 벗겨질 것인지.

아수라는 자꾸만 일을 꼬아대는 상황이 마뜩잖았다.

부러 청한 이였다.

마음은 나누되 사감이 없이, 치우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해 ‘직인’을 청한 것인데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직인은 운명을 짓는 자. 공평하고, 흔들림 없는 이였건만.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아수라는 차게 식어버린 홍안을 무감하게 깜빡거렸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 이름 없는 강을 건너 그 베틀이라도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었다.

감히.

염휘의 눈에서 빛을 꺼뜨린 그 고약한 것을 먼지도 안 남게 빠개버리고 싶었다.

마음은 벌써 그러고도 남았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삼천외의 존재.

아수라가 손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증좌가 없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내궁 후원을 샅샅이 뒤졌으나 이미 심연의 물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하아…….”

결국 숨기지 못한 아수라의 한숨이 달빛아래 하얗게 얼어버렸다.

어쩌면 좋을지 울고 싶은 것은 아수라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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