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갈라진 틈 사이 (10)
2018.03.05.
“두 번은 안 된다고?”
반요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염휘께서 달려오시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신이 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 예를 올려야 하는 것도 소희를 찾아야 하는 것도.
너무 놀랍고 기막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허공에 뻗은 빈손을 바람이 놀리듯 스치고 지나갔다.
“소……희님.”
뒤늦은 반요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이미 회랑에 그녀는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 자국만이 조금 전까지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금세 지척으로 달려온 염휘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반요는 허공에 뻗어있던 손을 거둬드렸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염휘를 감히 앉아서 마주할 상황이라 머리를 회랑 바닥에 가져다 댔다.
“염휘시여.”
“어떻게 된 것이야!”
잔뜩 초조해진 염휘의 목소리가 회랑을 무섭게 울렸다.
“그것이…….”
저도 모르겠습니다.
반요는 바닥에 닿은 이마를 통해 차가운 기운이 흘러들어옴을 느꼈다.
“품,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은쟁반을 닦으셨는데.”
초조해하는 주인의 목소리에 어서 고해야 했는데, 벌벌 떨리는 심장이 자꾸만 말을 끊어먹었다.
제정신이 아닌 입이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그때.
“단도? 그것이 어디서 난 것이냐.”
뒤통수에 떨어져 내리는 염휘의 차가운 말에 반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라고 보았을 리가 없다.
애초에 단도를 가지고 계신지도 몰랐다.
반요는 이날서 큰 사달이 났음을 깨달았다.
절로 흐른 눈물로 소리도 없이 돌바닥을 적시며, 반요는 제가 아는 것을 마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새벽, 곤하게 주무시는 분을 깨웠습니다. 직인께서 오시는 날이라.”
“안다. 알아. 직인께서 매일 무척 이르게 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느냐.”
“차를 맛보여주신다 하여 주변을 물리시고.”
“주변을 물려?”
“예.”
직인께선 오시면 항시 주변을 물리셨습니다.
반요는 의아해하는 염휘에게 재빨리 대답했다.
뭐가 됐건 제가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 멍청한 것이 놀라서 그만 허공에 몸을 던지는 소희를 붙들지 못했다.
소희를 붙들지 못한 팔이라도 내놓으라 하시면 달게 내놓을 참이었다.
달 마마께서 사라지셨다.
이십 년을 기다린 하계의 안주인을 눈뜨고 놓아버린 것이 바로 그녀라 반요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자도 못 되는 이 하잘것없는 목숨. 죽는 것보다 더 쓸모가 있다면 기쁘게 그 쓰임새를 할 것이다.
반요는 이날서 본 것을 염휘에게 소상히 고하기 시작했다.
발치에 엎드린 반요의 이야기는 이 각 가까이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 깨진 찻잔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새 찻잔을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어 이상하냐.”
“왜냐하면 직인의 몫으로 내드린 찻잔이 소희님 자리에 놓여있었고 소희님 것이 깨졌거든요.”
“직인께서 나눠주신 것일 테지.”
도움이 될까 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것을 들어주고 있었으나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찻잔이 깨진 것이 무어 중요하다고.
애타는 그의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쓸데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아이를 앞에 두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려니 자꾸만 신경이 예민하게 솟았다.
영력을 돋운 그의 시선이 회랑을 차분히 더듬었다.
어떤 사술인지는 모르나, 안력을 돋운 그의 시선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도 이상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삼천 외에 계시는 분이니 신묘한 것이 많으실 테지.”
염휘는 그즈음 반요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안력을 최대치로 돋워 회랑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인연의 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라전의 어린 나무 새잎까지 생생하게 보이는 그의 시야에 소희만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지.
“찻물이 바닥에 떨어져있는데 땅에 스미지도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지.
“실수로 고것을 밟았는데 물방울이 흐트러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모양새가 정말 기괴……!”
“무어라!”
염휘는 흘려듣는 아이의 말에서 무서운 소리가 흘러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소리를 터트렸다.
“뭐가 어찌 되었다고? 다시 말해보아라.”
황금으로 물든 홍안이 반요를 향했다.
초조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극에 달한 것은 회랑 끝에 서 있는 염휘를 보았을 때였다.
소희는 안일하던 자신을 탓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위협적이고도 무서운 것을 꼽으라면 지체 없이 꼽아야 할 것이 바로 ‘환’이었다.
무참히 목을 잡아 뜯어 죽인 야차 같은 이가 바로 그였다.
그 큰손으로 목을 잡아 들어 올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죽였다.
“흐윽…….”
지금도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파고들던 고통이 실재인 양 생생했다.
목을 타고 흐르던 기분 나쁜 뜨끈한 것.
입안을 가득 채운 비릿한 것.
한번 맛본 공포를 이렇게 쉽게 잊다니.
누구에게 이 불안감을 털어놓는다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견딜 수 없이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잡자 귓가를 스치는 상냥한 음색이 소희의 정신을 들게 했다.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해.’
소희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품을 더듬었다.
직인이 준 단도가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주는 위안이라니.
그러나 바로 이 작은 것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었다.
더 이상은 안 돼.
“안 돼 안 돼. 두 번은 안 돼.”
소희는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환을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저이가 다정하다니.
저이에게 사랑받고 싶다니.
빛을 머금은 보석안이 시야에 크게 잡혀들었다.
저 눈에서 쏟아지는 따스한 시선이 얼마나 좋았는지 떠올랐다.
놀란 듯 창백하게 질리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저 얼굴에 물리는 미소가 얼마나 근사한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위로 덧입혀지는 그 밤의 얼굴이 더욱 강력했다.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놓은 듯한 미장부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얼마나 무서웠던가.
그림 같은 사내가 아름다운 입귀를 비틀며 만들어 내던 비웃음과, 코웃음을 치며 마구잡이로 내뱉던 냉한 말들.
그리고 큰 키와 그만큼 다부진 체격에서 나오던 압도적인 힘의 차이.
키만큼이나 커다란 손끝에서 시작되던 폭력.
어두운 숲속, 달만이 지켜보던 그 밤.
자신은 살해당했다.
“도…… 도망가야 해.”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부드러운 속삭임이 애처로운 환의 얼굴에서 눈 돌리게 했다.
주문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소희의 등을 떠다밀었다.
망설이는 손에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찢듯이 그어 내렸다.
휘두르는 칼날에 닿는 것은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베어졌다는 느낌이 확실했다.
소희는 칼끝을 통해 느껴지는 묵직한 것을 느끼며 허공에 생겨난 ‘안전한’ 공간을 보며 입술을 질겅였다.
“안심되십니까?”
“늘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낮은 속삭임과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웃음소리가 달아나려는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남자의 날카로운 콧날이 그녀의 뺨을 스칠 때, 뒤따라 올 열락에 기대를 하던 기억이 칼을 쥔 그녀의 두 손을 묶었다.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는 다정한 기억에 불안감이 다독여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득 메우던 붉은 소음.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단단히 받쳐주던 환의 커다란 손이 주던 안정감.
목덜미를 따라 흩뿌려지던 달큰한 입맞춤.
무섭게 치솟던 맥박이 가라앉고 멀리서 다가오는 환의 표정이 또렷하게 잡혀들었다.
‘환? 놀랐어. 왜?’
소희는 환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갸우뚱하던 것도 잠시.
황금빛이 일렁이는 그의 홍안을 마주 보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상냥한 음색과,
“요괴들도 지키는 영혼의 맹약을 저버렸단 말인가!”
분노에 떨리던 남자의 포효가 뒤섞여 들었다.
오싹.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소름이 돋았다.
“어서어서.”
도망가야 해.
울음을 담뿍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소희님.”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소희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눈앞에서 그녀를 부르는 저 남자는 몹시 위험했다.
죽음은 한번으로 족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안 돼.”
발목을 붙들던 기억도, 두 손을 묶었던 짜릿함도 단번에 떨쳐냈다.
소희는 욱신거리기 시작한 목을 마저 쥐고는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귀를 울리는 것은 그녀를 부르는 환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푸욱-.
질척하고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음.
허공으로 나르는 몸이 고꾸라지며 손에 든 단도가 목을 찔렀다.
“!”
다급하게 목을 찌른 단검을 뽑았지만 꿀럭거리고 무언가가 타고 내리는 것이 선연했다.
이건…… 뭐지.
제 목에서 흘러내리고 있지만, 피가 아님이 분명했다.
아마도 목덜미에 머물며 시시때때로 소희의 숨을 앗아가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릿한 냄새를 피우며 흘러나가는 것이 이토록 상쾌하게 느껴지진 않을 테니까.
뜨끈한 것이 목덜미에서 새어 나올 때마다 점점 더 몸은 가볍고 정신은 맑아졌다.
“흣.”
하지만 소희는 그 와중에 웃음이 났다.
목이 잡아 뜯길까봐 무서워 달아나다 제목을 찌르는 꼴이라니.
소희의 조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 빠져나가는 시원함 뒤에 뒤늦게 화끈함이 스몄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불을 지피는 것 같은 고통이 가슴을 후벼팠다.
어둠 속에서 크게 홉 뜨인 두 눈 끝에 잡혀든 것은 빛무리를 닮은 하얀 너울.
겹겹이 흩날리는 잠자리 날개 같은 그것이 눈부셔 소희는 눈을 감고 말았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헉!”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으며 터트린 소리에 소희는 한 번 더 놀랐다.
“이…… 이건.”
살아있어……?
단검이 목에 박혀 어두워진 시야를 느끼며 눈감을 때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있다.
당황스러운 감상도 잠시.
가슴까지 올라온 보드랍고 고급스러운 이불.
솜씨 좋은 이가 놨을 게 분명한 자수가 놓인 침상 휘장.
들창을 통해 들어오는 상쾌하고 향긋한 바람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건만 여긴 어디지.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이 와중에도 직인이 속삭여준 말이 떠오르다니.
실소를 하던 것도 잠시, 낯선 공간이 주는 초조함에 소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가…….”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거슬렸다.
안전한 곳이라는 건가.
어디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소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새소리가 유독 많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숲과 가까운 곳인가.
소희는 목을 감싸 쥐고는 침상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크게 상처가 났으리라 생각한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러나 목을 감싸 쥔 손끝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매끈한 피부.
심지어 긁힌 흔적도 없었다.
“…….”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마치 뱀이 온몸을 감고 도는 듯한 기분 나쁜 선뜩함.
“어떻게…… 이럴 수가.”
그리고 반사적으로 상냥한 표정으로 단도를 쥐여주며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던 그녀가 떠올랐다.
직인, 내게 뭘 쥐여준 거예요?
소희는 목을 더듬던 그대로 몸을 굳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자신이 벌여놓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난 소희는 무척 몸은 가뿐하고 정신도 또렷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죄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반쯤은 뭉개진 기억과 반쯤은 떠오르는 이해 할 수 없는 자신의 행적에 소희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세상에.”
벌벌 떨리는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한껏 벌어진 입을 가리는 두 손 역시 볼썽사납게 떨렸다.
미치광이였다.
미치광이.
제정신이고서야 그럴 수 없었다.
까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은쟁반을 닦아내던 자신의 모습.
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해 환을 원망하던 모습.
그리고.
그를 피해 죽기 살기로 도망쳐버린 지금.
“세상에.”
눈앞에 환이 있는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크게 뜨인 보석안.
애처롭게 흔들리던 동공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마냥 또렷하게 그려져, 소희의 마음을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손을 들어 올리며,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려 떨어지던 두 입술.
모든 것이 마치 그림인 양 하나하나 너무도 자세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직인.”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소희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는 허덕거렸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밭은 숨을 내쉬는 사이로 섬광처럼 지나가는 ‘기억’이 하나둘 늘어갔다.
“일어나.”
자신을 보며 무감한 목소리를 내던 직인과 그녀의 싸늘했던 시선.
직인이 권태롭게 깜빡이던 길고 풍성하던 속눈썹까지 모조리.
그리고 그 순간 잊혀졌던 것들이 전부 둑이 터지듯 단번에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
답답한 것이 모자란 숨인지, 아니면 꽉 막혀버린 가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들어차는 기억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지만, 소희는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 부단하게 노력해야 했다.
하나하나.
짜 맞춰지는 어그러진 과거의 모습에는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눈을 잃을 뻔한 풍천과 그가 토해낸 푸른 물.
오늘 자신이 쓰러지면서 쏟아진 푸른 찻물.
살아있는 듯. 살아있는 것이 아닌 기괴한 그것을 먹인 것이 직인이었단 말인가.
직인에 대한 배신감과 의아함.
환에 대한 미안함에 소희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직인을 만나야 해.’
직인이 준 차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녀가 쥐여준 단검이 무엇인지, 이것이 어디로 자신을 끌고 온 것인지 모두 하나하나 따져 물어야 했다.
벗을 바라 마음을 내준 자신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소희는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내리고 울분을 터트리듯 소리 질렀다.
“직인-!”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는 그녀의 심정처럼 마음껏 터져 나오진 못했지만 충분히 길고 높았다.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날갯짓 소리가 잦아들 무렵까지 소희는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떨구었다.
곧 가슴이 펑 소리를 내며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쌕쌕거리는 숨 끝에 달린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며 바닥에 짙은 자국을 냈다.
터지지 못한 분노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받아야 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유를 모르고 상처를 받았던 건 소희뿐만이 아니었다.
하계의 지존이신 귀왕.
그 역시 잔혹한 운명에 휩쓸린 가여운 이였다.
그녀의 운명을 그라서 미리 알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별을 타고난 그녀에게 인계의 법도에 맞춰 아버지에게 혼담을 넣었고.
그들의 혼사는 예정된 것이었다.
다른 것이야 어쨌건, 선친을 통해 혼약을 한 그야말로 진짜 ‘혼약자’.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 자신만이 그 이야기를 몰랐던 것인지 몰라도 그 역시 억울했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을 배신으로 갚는 소희의 모습에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달 마마 없이 이십 년을 맨몸으로 버텼던 사신들과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기다리던 하계의 이들.
다스려지지 못한 만월의 기세에 잡초처럼 돋아난 요괴.
죽어가는 사자를 바라봐야만 했을 왕의 심정.
비어버린 비의 자리를 묵묵히 견딘 혼약자의 오랜 기다림.
그 모든 것을 감수했던 것이 바로 환이었다.
왕으로써도, 혼약자로서도의 그는 너무도 힘든 시간을 홀로 버텨왔건만,
소희와 마주한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사정을.
그녀의 사정을.
그들은 너무 늦게 알아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을 상처를 내고 말았다.
운명이란 이름 아래 너무 참혹히 유린된 건, 바로 그들 모두였다.
그러나 이 얽히고설킨 운명에 끝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가혹했다.
돌고 돌아 이제야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으려 하는 찰나였다.
‘그런데 그것을 휘저어 감히!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시큰거리는 숨 끝에 맺힌 온갖 감정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소희는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미 몸도 마음도 몹시 가뿐했지만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낯선 곳을 다니는 것은 좋지 못했다.
이곳이 어디이든 간에 사람이든 선인이든 그 누구라도 만난다면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빨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환의 곁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늘 내도록 미치광이처럼 굴고 도망쳐 버린 꼴이니 내궁 아이들 역시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소희는 아이들 생각에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환을 만나게 되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사실 막막했다.
직인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환이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그녀가 어째서 그런 것인지.
감싸야 하는 것인지.
순식간에 수많은 의문과 망설임이 돋아났다 사라졌다.
“휴우.”
앉아서 고민해본들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소희는 가만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머리를 쓸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끝에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것이 걸렸다.
짤랑거리는 귀여운 소리.
환이 선물로 건네준 머리꽂이였다.
그 단순한 것에 마음이 왈칵 넘쳤다.
손끝에 걸리는 매끄럽고 시원한 감촉이, 마치 그인 것 같아서 소희는 반갑고 미안했다.
‘어서, 돌아가야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이 야물게 쥐어지고 펑펑 울어 붉어진 눈이 반짝였다.
우선은 이곳에서 그녀를 도울 이를 찾는 것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침상 밖으로 발을 빼자마자 소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찢고 온 상태 그대로인 줄 알았건만 밖으로 내밀어진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자그마한 발을 감싼 건 오직 하얀 버선뿐.
누가 벗긴 것일까.
“…….”
소희가 하얀 발끝을 내려다보는 사이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똑똑-.
“!”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왔다.
반갑고 두려운 마음이 솟아났지만 소희는 문을 두드리는 이를 기다리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잔뜩 쉬어 잠겼지만 그래도 또렷한 목청으로 객을 반겼다.
“일어나셨군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냐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방의 주인일지도 모르고, 자신을 도와줄 귀한 분일지도 모른다.
소희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대답을 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도 없이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태양으로 빚은 듯 찬란한 백금발에 하늘을 닮은 청명한 눈동자.
그를 따라 풍기는 향긋한 복숭아 향까지.
준미한 생김이 아니더라도 단번에 시선을 앗아갈 만한 대단한 미청년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반가움과 그보다 더 짙은 감정이 묻은 목소리가 여과 없이 울렸다.
“네?”
소희는 눈앞의 대단한 미청년을 보고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그의 묘한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치, 그녀를 아는 듯한 말투에 이상함을 느꼈다.
“오랜만이라니요.”
경계하는 목소리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남자는 그 말에 한 걸음 더 다가와 웃었다.
하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달콤한 표정이었다.
“이런, 목소리마저 잊으셨습니까?”
“공자의 목소리를 제가…….”
애초에 이런 색목인을 알 리가…….
수작을 거는 듯한 청년의 말에 소희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오른 것은.
소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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